3. 백제의 석탑(石塔)
백제는 600년경에 익산 미륵사에 목탑을 본떠서 석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에 오층 백제탑이 서 있다. 목탑을 석탑으로 본떠서 만드는 아이디어를 창출한 것은 백제인이다.
고구려는 석탑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신라는 634년에 전탑(塼塔)을 모방하여 석탑을 만든 것이 분황사(芬皇寺)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백제인의 건축기술은 삼국 중에 가장 뛰어났던 것이니 탑을 석재로 영구하게 만들고자 시도할 만한 기술적 축적이 있었다. 적절한 층계의 체감비례와 옥개석과 탑신의 황금비례며 날씬하고 세련된 추녀선이며 두공(枓拱)의 간결한 표현 등 경쾌하고 기교 넘치는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잘 발휘하였다.
▣석탑▣
사비시대에는 특히 불교미술 분야에 해당하는 여러 조형물이 축조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 화강암이라는 돌을 채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비시대 백제는 불교미술을 극치로 이끄는 가운데 걸작의 석탑과 석등을 후세에 남겼다. 그 대표적 유물이 전북 익산 미륵사터와 충남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武王 재위연간(AD600-64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미륵사에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의 잔영은 불가사의한 존재이거니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 저술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有石塔高數丈 東方石塔之最'라고 적어 그 규모와 높이가 대단했음을 일러준다. 특히 화강암이라는 강한 재질의 석재를 목탑건립 형식에 꿰맞추었다는 사실은 백제인들의 건축기술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시기에서 첫 작품을 9층이라는 높은 규모로 설계한 지혜가 놀랍다. 그 높은 건축물을 석재를 써서 재현한 백제인들의 기술이나 수학적 능력, 예술적 조형감각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형감각 놀라워▣
정림사 오층석탑은 미륵사터 석탑이 보여준 거대한 규모에서 우선 탈피하고 있다. 그래서 안정감을 안겨준다. 단아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운 자태는 백제석탑의 양식적 완성을 이룬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마치 신라가 분황사(芬皇寺)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感恩寺)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佛國寺)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이 비로소 정착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나라 석탑양식을 보면 비교되는 측면을 지닌다. 시원적 형식의 미륵사터 석탑에 이어 정림사터 오층석탑에서 양식적 완성을 이룬 백제 석탑과 신라 석탑은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신라는 몇 단계의 실험을 거친 후에 가서야 석탑의 정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신라보다 한수가 높은 문화창조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황룡사(皇龍寺)9층목탑을 건립하는데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다는 사실도 결국 백제의 우수한 조탑술(造塔術)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이같은 백제의 석탑은 국운이 다하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미륵사터 석탑과 정림사터 석탑 양식에 근원을 둔 백제계 석탑이 백제의 옛 영토 전역에 건립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백제문화 부흥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석탑양식의 계승은 불과 2기밖에 남지 않은 백제석탑이 우리 석탑발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동탑(東塔)복원▣
백제문화의 불가사의는 석조 미술에서 발견된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석탑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돌을 다듬고 맞추어 쌓기를 목수가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듯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사고로는 경이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미륵사 석탑은 백제 멸망의 비극처럼 허물어진 가운데 西塔 1기만이 잔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6층의 일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 서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학술조사 결과 밝혀졌다. 서탑 옆에는 동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동탑의 기단부와 함께 부재들을 찾아낸 문화재 관리국은 이를 근거로 지난 93년 초 본래의 자리에 동탑을 복원한 바 있다.
동탑을 새로 복원하면서 미륵사 석탑에 대한 신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4. 능산리 사리감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 27대 '昌王' 명문의 사리감은 서기 567년 丁亥年 昌王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절터의 탑지 중앙에서 발굴된 사리감(舍利龕)은 가로 세로 각 50cm, 높이 74cm 크기의 화강석이며, 감실이 있는 앞면의 양쪽에는 공주 무령왕릉 지석과 비슷한 남북조시대의 서체로 2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 사리감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형태일 뿐 아니라 명문을 통해 백제시대 최초로 절의 건축연대가 밝혀진 점,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왕 이름이 확인된 점 등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사리감에 새겨진 명문은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公主供養舍利'(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동생인 공주 (口+元)가 사리를 공양한다)라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口+元)자가 兄이나 元, 수자의 古字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리감이 발견된 땅속 1m 14cm깊이의 목탑 심초석 주변에서는 이밖에 흙으로 빚어 구운 불상과 불두(佛頭), 금동 및 은제고리, 금동 방울, 철제 못 등 5백95점이 함께 발굴됐다, '昌王'명문의 사리감이 발굴됨으로써 93년 발굴돼 백제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 용봉향로도 6세기 후반으로 제작연대가 분명해졌다.
사리감(舍利龕)이란 부처에 대한 공양 형태의 하나로 부처 진신 사리를 안에 담아 탑의 내부나 초석에 설치하는 형식을 일컫는 것. 이번에 발견된 사리감은 화강암으로만 돼 있을 뿐 아니라, 윗부분이 아치 모양을 하고 있어 형태면에서도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보는 획기적인 유물이다. 이 사리감은 절터의 목탑지 중앙에 있는 심초석(동서 1백8cm 남북 1백33cm크기 장방형)의 남쪽 부분 지하 1백14cm깊이에서 비스듬히 놓인 채 발견됐으며, 이 감과 함께 발견된 신주는 도끼로 찍어 심하게 교란된 상태였다. 사리를 보관하는 감실(舍利孔)은 텅 빈 상태였다.
사리감의 표면에 음각된 명문의 내용을 판독한 박물관 관계자들은 '昌王의 동생인 (口+元)공주가 절을 창건하고 비를 세우며, 부처의 은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함을 만든 것 같다'며 '바로 인근에 있는 능산리 고분이 왕릉들인 것으로 미루어 이 절은 단순한 불교사원이 아니라 이 왕릉들의 본원사찰, 또는 陵寺일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명문에 나와있는 '昌王'은 백제 27대 威德王의 원이름이며, 재위 기간이 서기 554년에서 598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학계에서는 그러나 그가 '비운의 왕'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아버지 聖王은 백제의 수도를 웅진(현 공주)으로부터 사비(현 부여)로 옮기는 의욕적인 천도를 단행했지만 신라와 관산성(현 충북 옥천 부근)싸움에서 대패, 유해조차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번에 사리감이 발견된 능산리의 사찰은 창왕과 그의 동생 (口+元)공주가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을 것이란 추측도 그래서 가능하다.
▣사리감 출토 의의▣
'百濟 昌王'.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화강암 석제 사리감'은 '이름표를 달고 나온 백제왕 관련유물'로 세기적인 발굴이다. 지난 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각자석판(刻字石板)誌石(지석)과 함께 두번째로 발견된 '명패를 달은 귀중 문화재'이다. 무령왕릉의 발굴 때도 유네스코 등 세계 학계가 큰 관심을 보였다.
백제 창왕,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우리 기록과 일본서기 등 해외역사에도 나오는 백제 27대 威德王(위덕왕. 재위 554-598년)이다. 위덕왕은 무령왕(501-523)의 손자요, 성왕(재위 523-554)의 아들이다.
1천4백여년 만에 출토된 '王名 사리감'은 동아시아 최초의 화강암 사리감이라는 문화재적 가치는 물론 당시 백제의 중국-왜의 관계도 밝혀줄 의외의 성과도 기대된다.
백제는 의문 투성이의 나라다. 나-당 연합군과 대결하다가 멸망한 백제는 오늘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흥전쟁을 전개한다. 이 부흥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당시의 倭다.
화강암 銘文으로 다시 재생한 위덕왕은 이런 의문, 백제와 왜의 감추어진 관계를 밝혀줄 왕계의 인물이다. 그의 할아버지 무령왕은 이름이 斯摩(사마)로 출생지는 당시 倭九州의 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무령왕의 지석 역시 의문이다. 왕이 자신이 묻힐 묘지를 샀다는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위덕왕의 아버지 聖王은 웅진에서 538년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고 나라이름도 남부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이번에 발굴한 사리감에 나온 왕자 昌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그래서 창이 왕위를 계승한다.
위덕왕 昌의 활동은 우리 기록보다도 일본서기에 보다 자세히 나온다. '昌의 부왕(성왕)을 위해 출가 修道하려 했다(欽明紀 16年)'든가 '성왕전사 후 3년 뒤 즉위(欽明紀18年)했다'고 성왕 사후 관계를 연도까지 밝힌 것, '위덕왕의 동생인 여혜가 성왕의 죽음을 통고하려 왜에 갔고 蘇我를 만나 神宮을 수리, 建邦之神(건방지신=건국신)을 잘 봉제(奉祭)할 것을 권유받고 귀국했다(欽明紀)'는 기록까지 있다. 44년 동안 재위했던 백제 왕 昌은 당시 출중한 국제적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중국인 남-북조와도 외교관계를 폈고 북제로부터 百濟王(570년), 東淸州刺史(571년)로 책봉된 외교기록을 남기고 있다.
倭를 일본으로 발전시키는 聖德太子의 스승인 阿佐太子는 바로 창왕의 아들로 597년 倭로 간다(推古紀5年). 백제 창왕의 명문유물은 이같이 국내의 문화재발굴 차원을 넘어 백제의 對남북조, 對倭관계를 다시 바르게 읽게 하는 국제적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찰(寺刹)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는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불전이 배치된 양식으로 탑은 방형으로 되었다. 군수리 사지의 창건을 백제의 사비천도(泗 遷都)로 보면 538년경에 해당된다.
선덕여왕이 645년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皇龍寺)의 225척의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신라의 기술로는 이 탑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백제의 공장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건립하였다.
백제는 사비(泗 )시대에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에서 보듯이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회랑으로 둘러쌓은 사찰배치를 확립하였다.
여기서 보면, 백제는 고구려의 팔각탑(八角塔)을 방형탑(方形塔)으로 변형시키고 신라사찰 건립의 선구자적 입장에서 섰다.
▣궁원(宮苑)▣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조원(造苑)의 기술이 뛰어났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辰斯王)때 궁실을 장엄하게 중수하고 궁내에 원지(苑池)를 파고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기이한 새와 진귀한 꽃들을 길렀고, 개로왕(盖鹵王)때(475) 궁을 장려하게 짓고 누각사대(樓閣 臺 : 정원 속에 세운 정자)등을 지었으며, 웅진(熊津)시대 동성왕은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건립(500)하고 원지를 파고 기이한 새를 길렀다.
백제 무왕은 35년(634)에 泗 城 남쪽에 원지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속에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조성하고 못가에는 버들숲을 만들었다.
무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왕흥사도 화려하게 조성하고 泗 城의 북쪽 북포(北浦)도 괴석을 치석(置石)하고 꽃을 심어 그림같이 만들었다. 이를 보면 백제는 모든 도성에 큰 원림과 원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612)의 기록에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황궁 남정에 정원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수미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일본 정원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이 수미산은 발굴되어서 동경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부여 동남리 사지에서 보듯이 금당 앞에 수조(水槽)를 만들여 연화를 심기도 했으며, 대통사지(大通寺址)석조나 부여 궁지에서 옮겨 온 부여 석조등은 정원의 뜰에 놓고 연꽃을 심었던 원기(苑器)들이다. 이것이 통일신라에 전하여져서 많은 석연지(石蓮池)가 만들어졌다.
이상과 같이 백제문화는 재주가 뛰어나고 명석하였으며 진취적으로 외래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여 잘 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직선보다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터득하여 자유로운 구상으로 낭만적이고 조화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넘치는 문화의 힘이 해외로 뻗쳐 일본 飛鳥文化의 선사국이 되기도 하였다.
3) 백제의 조각
1. 불상(佛像)
고구려는 북조의 영향을 받고 백제는 남조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불상이 날카롭고 강건한 감각을 주는데 백제 불상은 온화하고 인간적 감각을 준다. 특히 백제 불상의 자비로운 미소는 특출한 것이었다.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반가상의 가냘프고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과 고요한 명상의 자비로운 미소는 백제인이 아니고서는 만들 수가 없는 불상이다. 일본 법륭사(法隆寺)의 백제 관음과 광륭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木造半跏思惟像) 및 중궁사(中宮寺)의 반가사유상은 백제인의 손으로 조성된 불상들이다.
백제는 서산 마애불, 태안 마애불(磨崖佛) 같은 자연의 바위 벼랑에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고구려는 아직 마애불을 조각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백제인의 자연주의적 사고가 자연의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게 한 것이며 이것이 신라의 저 많은 마애불을 조성케 한 선구자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시대 석조미륵반가상을 많이 조성하였으나 모두 상체가 없어 그 표정을 알 길이 없으며, 또한 신라 미륵신앙의 발원지가 백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의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郞)진자사조(眞慈師條)의 백제 공주 수원사(百濟 公州 水原寺)의 기록이 이를 짐작케 한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백제의 불상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百濟는 비록 영토는 크지 않았지만 일찍이 그 문물은 동아시아에서 작으면서 빛을 발하는 금강석 같은 존재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거의 같은 시기의 서기 384년에 불교를 중국의 東晋으로부터 전해 받았으나 佛像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150여년이 지난 6세기초부터였다. 漢城時代(4세기초-475년)나 熊津時代(475-538년)에도 불교사찰들이 건립되었으나 아직까지 이 두 도읍지에서 백제불상이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런데 熊津時代에는 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梁의 年號를 따라서 大通寺가 건립되는 등 유적에서 웅진시대의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또 최근 발굴된 武寧王陵에서는 묘실내부 전체를 連華紋搏으로 장식하고 왕과 왕비의 頭枕과 足枕에 連華化生을 표현하는 등 極樂往生의 염원을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이 金銅思惟像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가운데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 할만하며 더 나아가 동양의 그 당시 고대불상에서 이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 소년의 앳된 얼굴엔 잔잔한 자비의 미소가 흐르고 검지와 중지(中指)를 살짝 뺨에 댄 오른손가락과 왼쪽 무릎에 올린 오른 다리의 발목에 내린 왼손가락은 마디 마디가 생동감에 차있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대좌에 늘어뜨려진 보살의 옷자락은 자유분방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가 미풍에 약간 휘날리듯 표현되어 있어서 역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사유상은 이와같이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으로 생동력을 살리고 있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영원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흔히 이 思惟像은 일본의 京都廣隆寺木造思惟像과 비교되고 있다.
두 불상은 비슷한 점들이 많아 廣隆寺像이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라 하나 다른 점들도 많아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어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한편 7세기에는 花崗巖이란 새로운 재료를 써서 불상을 조각하였다. 화강암 역시 그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각재료로서 채택하지 않던 소재인 것이다. 화강암은 硬度가 강하고 입자가 굳어서 표면처리를 매끄럽게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조각하기에 부적당하였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우리나라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石塔을 건립하고 大形佛像을 조성하였으니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 백제가 처음으로 착상한 것이다. 불상의 경우 전북 정읍 천리 石造如來立像이 圖刻像으로 조각되었을 뿐 대체로 암벽에 불상을 새긴 磨崖佛이 조성되었다. 말하자면 처음에 蠟石을 재료로 썼으나 부서지기 쉬운 석질이므로 화강암이란 재료를 선호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반가사유상▣
불교가 삼국의 대중적 신앙으로 발돋움한 7세기에는 중국의 유행과 관련이 없는 독자적인 불상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불상이 있다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거의 소멸해버린 서기 600년을 전후해 삼국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불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반가사유상은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싯다르타태자의 모습이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의 자세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싯다르타태자는 이같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됐다. 그러나 사유상은 인간을 구원하는 절대자는 아직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예배의 대상이었다. 한국인은 '깊은 사색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되기 이전 사색의 단지 않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대 사유상에 대한 숭앙은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조각품들을 남겼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78호 '金銅日月飾半跏思惟像'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보 83호 '金銅蓮華冠半跏思惟像'이다.
4) 공예(工藝)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출토의 금관관식(金冠冠飾)과 신라의 금관을 비교하여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관관식은 초화문관식(草花紋冠飾)인데 자유로운 구도 위에 비대칭적인 절묘한 공간구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금관은 같은 기본형으로 녹각형(鹿角形)과 수지형(樹枝形)의 입식이 기하학적으로 대칭되며 단순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는 조익형(鳥翼形)관식이나 금제관모 등에서도 그러하다. 목걸이나 팔찌도 실은 자세히 보면 단순한 대칭이나 기본형을 고수하고 있는데, 무령왕릉 출토의 목걸이나 팔찌는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자유로운 구상에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창조적 태도가 왕비의 팔찌에 작가의 이름을 새길만큼 확립된 것이었다.
1. 도기 제조술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년대에 접어들어 발견되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登窯)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화도(高火度)를 효율적으로 유지, 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 등요로 밝혀졌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平窯)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정 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陶邑) 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 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 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 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 시대의 가마다. 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 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인의 陶器文化▣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綠釉器)다. 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器臺)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 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선진적이었다.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 녹갈색의 산화납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 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것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 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登窯)가 그 시기의 가마다.
2. 백제의 기와
사비시대 백제의 도기와 도제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와류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최근 발굴조사한 부여 정암리 기와가마터(瓦窯地)가 기와류를 만들어 낸 대표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 남쪽 백마강 언덕의 석비레층을 파고들어가 터널식으로 구축한 굴가마들이다. 길이 4.5-6.5m크기의 평요(平窯)2기와 등요(登窯)2기 이외에 작업장까지 발견되었다.
이들 가마군에서는 주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망새편, 암수키와 등의 기와류가 주로 나왔다. 그리고 상자형 전돌과 자배기, 벼루 등도 출토되어 도와전류(陶瓦塼類)는 물론 도기류(陶器類)까지 생산한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대할 수 있는 도제유물(陶製遺物)의 얼마쯤은 정암리 가마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비시대가 백제문화의 황금기라면 도기나 도제품의 수요가 왕성했을 것이다. 이는 백제의 도기제조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흔히 호자(虎子)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도기인 소변기로부터 뼈항아리 골호(骨壺)에 이르기까지, 또 일상용기와 종교적 성물(聖物)인 불상(佛像)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궁궐과 사찰 건축에 따른 거대한 망새( 尾)나 기와류, 산경산수문전(山景山水紋塼)처럼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 때로는 도기와 도제품은 껴묻거리(副葬品)로 수요되기도 했다.
▣기와무늬▣
백제의 기와 무늬는 숫막새의 공간 속에 가득찬 만발한 꽃송이로 알맞게 살이 쪄서 꽃잎 끝이 버선 코처럼 살짝 들고 있어 입체감과 아울러 온화하고 조화적인 조형미를 주었다. 모두 굴곡의 곡선미를 최고로 발휘하여 색깔도 회백색의 부드럽고 우아한 질감이다. 이러한 백제 연꽃의 아름다움은 미륵사지 석등의 대석이나 여러 불상의 연화좌(蓮花座) 및 광배(光背) 등에서도 같은 감각으로 조형되었다.
신라는 형편에 따라 때로는 고구려식 와당(瓦當)을 제작하고 때로는 백제식 와당을 제작하여 썼던 것이니 신라적 개성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백제와당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신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개성을 융합시킨 와당을 삼국말기에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영향이 우세한것이었다.
신라의 황용사지 출토전을 보면 통일신라 이전 것은 무문전(無紋塼)이다.
백제는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산경문(山景紋), 봉황문(鳳凰紋), 연화문(蓮花紋), 귀면문(鬼面紋), 반용문(蟠龍紋), 와운문(渦雲紋) 등의 문양전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힘과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서로 어울려 과히 신공(神工)의 재주를 다하였다.
우리는 백제 산수화의 높은 경지를 이 산경문전에서 볼 수 있으며 백제인의 해학적 여유를 귀면문에서 볼 수 있다. 비운문(飛雲紋)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구름의 요동이며 그 한정된 원의 공간 속에서 무한히 창공을 나르는 것 같은 생동하는 봉황문의 구도는 백제인의 높은 회화적 구상을 엿보게 한다. 신라는 통일신라 이후에 문양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보상화문이 기본형이며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이어서 백제의 저 자유로운 구상을 따르지 못하였다.
▣瓦塼士 존재한듯▣
백제 도기항아리는 어깨가 넓어 광견호(廣肩壺)라는 이름의 항아리, 발이 셋 달린 삼발이 항아리,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여러 기형이 있다. 목이 긴 병을 비롯해 자라병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모양의 도기, 동잔, 잔, 삼발이잔, 주전자, 동물모양의 그릇 등 백제도기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납작한 원형판에 마치 동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다리가 다닥다닥 이어진 사비시대의 도제품 벼루는 뒷날 통일신라와 일본에 전파된다.
이들 명품은 고대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기술집단의 하나인 와박사(瓦博士)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백제의 기술집단은 사비시대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많은 문물을 창출함으로써 백제는 동아시아의 문화대국(文化大國)으로 우뚝 세웠다. 특히 당시 도기 제조술이 이룩해 낸 백제 최초의 녹유기(綠釉器)가 나온 능산(能山)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3. 무령왕릉 발굴
지난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동방의 투탕카멘왕 무덤이랄 수 있는 유적이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뛰어난 금속제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왕의 위엄을 보이는 금동용봉손잡이 큰칼, 왕권의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사람과 동물이 조각된 사신경(청동거울), 3가지 금속으로 구성 제작된 동탁은잔이 있다.
▣과학적 이론 바탕▣
동탁은잔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받침은 구리 할금이며,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고 손잡이는 연봉모양이지만 꽃받침은 금이다. 그리고 표면은 받침에서 뚜껑까지 역동하는 용과 겹겹이 핀 연꽃, 봉래산과 그 위를 나는 봉황새등 무늬들을 새겼다. 향로와 미술적 모티브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백제의 높은 금속기술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아연 - 청동기' 특징▣
청동기는 대체로 쌍합법으로 주조가 가능하나 팔주령같이 구조가 복잡하거나 기하학적 무늬를 현미경적 작업으로 새긴 다뉴세문경은 소위 실납법이라는 주물기술로만 가능하다. 특히 제조기법이 신비의 수수께끼로 알려진 이 세문경은 지금도 많은 전문과학자들이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다.
5) 회화
백제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공주 송산리 전축분(塼築墳)과 부여 능산리 석실분 속의 사신도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베개면에 그려진 비천서조(飛天瑞鳥), 연화(蓮花), 인동(忍冬), 어룡(魚龍)의 그림이다.
이들 그림은 내달리는 힘이나 생동하는 패기는 없으나 역시 온화하고 단아한 감을 준다. 고구려 우현리 대묘 속의 사신도(四神圖)는 너무 힘차서 고분의 문만 열면 튀어나올 기상인데 백제것은 고분 속에서만 율동하는 사신도로 그렸다. 또 일본 법륭사의 벽화와 옥충주자(玉 廚子)의 칠화(漆畵)를 백제인이 그렸다 전하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초상을 그려 주었으며, 백제의 화가 백가(百加)와 하성(河成) 등이 일본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 격조 높은 백제 회화
▣능산리 고분▣
능산리 고분의 그림을 먼저 살펴보면 한마디로 격조 높은 백제적 회화다. 캔버스로 보아도 무리가 없는 이 고분의 벽면은 물갈음한 화강암(천정과 서벽)과 편마암(동벽과 북벽)으로 되어있다. 물론 거대한 널돌(板石)인데, 벽면에 직접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그리고 천정에는 연화문(蓮花紋)과 비운문(飛雲紋)을 형상화했다.
동벽 중앙의 청룡(靑龍)은 살아서 꿈틀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S자형으로 용트림을 한 몸통과 딱벌린 입에서는 혀가 길게 나와 사뭇 역동적이다. 그리고 한껏 벌린 다리가 위로 치켜든 꼬리와 함께 생동감을 안겨준다.
서벽에 그린 백호(白虎)는 머리를 위로 쳐든 채 꼬리는 한껏 굽혀서 역시 위로 뻗치고 있다. 눈에다 가는 붉은 칠을 해서 튕겨 나올듯 부릅떴다. 그리고 입 언저리로 길게 내민 혀, 가슴에 돋친 비운문이 어울려 백호의 위엄은 대단하다. 널방에 침범할 수도 있는 사기(邪氣)를 얼씬도 못하게 미리 쫓아버리려는 형상이다. 그러나 널방에 스며든 습기로 인해 백호의 몸통 아래쪽이 빛 바래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백호 허리 윗부분 공벽에는 원을 그려넣고 10개의 작은 반원을 같은 간격으로 돌려놓았다. 원 내부에는 두꺼비를 배치, 월상(月像)을 표현했다. 또 백호를 그릴 때 남겨둔 머리와 꼬리부분의 공벽은 비운문(飛雲紋)으로 채워 백호의 동작이 더욱 날쌔보인다. 특히 백호도의 월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형상이기도 한 것이다.
남벽의 주작도(朱雀圖)는 널방 입구, 다시 말하면 널방문 위에 그렸다. 주작 주위에는 인동문을 배치했다. 벽을 살피다가 북벽을 향해 돌아서면 이를 어쩌나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든다. 그 이유는 북벽에 남아 있어야 할 현무도(玄武圖)가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그만큼이나 흘렀는데 흔적이 뚜렷하길 바라는 마음이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한 심사를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천정화가 비교적 잘 남아 한숨을 돌리게 된다. 연화문을 그리고 사이사이와 주변에 하늘을 표상하는 비운문(飛雲紋)을 박았다. 연화문은 꽃술 가운데 주문(珠紋)을 장식했는데, 연꽃술은 8잎으로 되어있다. 연화문은 모두 7개로, 이 가운데 3개는 남북을 잇는 1줄에 가지런히 배치한데 이어 4개는 좌우에 각각 2개씩 그려 넣었다. 연꽃을 그리는데 사용한 색깔은 분홍색, 갈색, 황색, 검은색이다.
▣송산리 6호분▣
공주 송산리 6호분은 그림을 그려넣은 벽면부터가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다르다. 능산리 벽화고분의 벽이 물갈음한 넓은 널돌인데 비해 송산리 6호분은 널방의 4면벽을 문양벽돌로 쌓은 뒤 그림을 그릴 부분만 진흙을 발랐다. 그리고 나서 호분(湖粉 : 조개껍데기를 구워서 만든 안료의 일종인 백색분)으로 벽화를 그렸다. 뒷날 사비시대 고분벽화처럼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널방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 이북 위쪽 벽에는 주작과 일월상을 그리는 형식을 취했다. 청룡도는 머리에 뿔 2개가 달린 쌍각청룡(雙角靑龍)이다. 허공을 뛰어 달리는 용의 자세로 짐작된다. 백호도는 백묘기법(白描技法)을 써서 그렸음에도 패기찬 자태가 잘 표출되고 있다. 왼쪽 앞다리는 올리고 뒷다리를 전후로 벌려 달리는 모습을 했다.
이러한 백호도(白虎圖)는 회화기법은 다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온다. 고구려 벽화의 백호는 몸체가 가늘고 긴데 비해 백제의 것은 비교적 굵은 편이다. 현무도는 퇴색되어 뱀과 거북이 얽힌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작은 형태를 알아볼 만큼은 남아있다. 두 날개를 위로 힘껏 펼친 주작이 꼬리털을 날리면서 막 비상하려는 자태를 하고 있다. 그 주작의 양쪽에는 흰색으로 그린 동심원이 배치되었다.
▣무령왕릉▣
백제의 회화에서 고분벽화는 분명한 대작이다. 그렇다면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副葬品)의 장식화들은 소품에 해당하는 백제의 회화일 것이다. 사비시대에 축조된 도성 이웃의 지배자무덤들은 일찍 모두 내부가 파괴되어 장식화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웅진시대 무덤의 사정은 다르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나무베개(木製頭枕), 장식화와 나무발걸이(木製足座) 장식문양은 걸작이다. 나무베개 장식화는 베개의 나무표면에 주칠(朱漆)을 하고, 우선 금박으로 거북등문양(龜甲紋)을 넣었다. 그 거북등문양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 금니 등으로 세필의 비천상(飛天像), 주작(朱雀), 어룡(魚龍), 연화문(蓮花紋)을 그렸다. 특히 비천상의 경우 천의를 날리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했고 주작은 두 날개를 부채꼴로 펼치면서 긴 꼬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룡은 묵선과 금니를 함께 사용해 그렸다. 가는 묵선으로 윤곽을 긋고 몸뚱이와 꼬리는 금니로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V자형을 이룬 이 나무베개의 어룡은 바다속에서 헤엄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제회화 유물이 아주 극소수인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 무령왕릉 출토 나무베개의 그림들은 귀중한 회화자료가 될 것이다.
무령왕릉의 나무발걸이에 나타난 장식문에서는 비운문(飛雲紋)이 단연 으뜸이다. 역시 주칠(朱漆)을 한 발걸이 표면에는 금박띠를 돌리고 그 안에다 좌우대칭의 묵선 비운문을 그렸다. 비운문은 바람을 타고 하늘에 두둥실 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디자인에 가까운 장식문양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독특한 회화성을 지녔다.
2. 고분벽화(古墳壁畵)
▣사신도(四神圖)▣
고분속의 벽화 사신도(四神圖)는 널방(玄室)의 4방 벽면에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이 사신도는 방위신(方位神)을 표현한 것이다. 방위신에는 본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이외에 황룡을 포함해서 오신수(五神獸)가 있는데 벽화에서는 황룡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신격의 짐승(神獸)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및 28숙법(二十八宿法)과 관련되었다. 28개 별자리를 중앙, 동, 서, 남, 북의 다섯방향에 따라 나누고, 그 별자리의 모양을 따서 환상적인 신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수를 숭배했다. 방위신은 방위에 따라 빛깔과 형태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중앙에는 황룡,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뱀과 거북이 뒤엉킨 현무를 배치했다. 또 천정에는 상서로운 동물들과 해, 달, 별, 꽃 등을 그려넣었다.
일부 고분의 벽화에는 사신도를 각 벽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나머지 공백은 산수화, 구름무늬, 연꽃무늬, 당초무늬와 인동무늬, 불꽃무늬로 채웠다. 그래서 마치 사신도가 여러 장식무늬 바탕 위에 그린 것처럼 착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신도는 어디까지나 사신(四神)이 주제가 된 것이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중앙에 사신만을 그려 대체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상시킨다. 부여 능산리 고분은 4방벽에 사신도, 천정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그렸다.
벽화는 널돌(板石)로 널방벽을 축조할 경우 직접 돌벽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회를 바른 다음 벽면에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묵선으로 밑그림을 먼저 쳤다. 더러는 밑그림이 없이 곧바로 색깔을 써서 그리는 백묘법(白描法)을 사용하기도 했다.
6) 사택지적비문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주로 받아들였는데 그 남조불교는 도교사상을 받아들여 융합시킨 것이었다. 백제 후기의 귀족층에서는 그러한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문화분위기에 젖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654년에 작성된 사택지적 비문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은 당시 귀족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택지적비문이 그러한 세계관을 글로 나타낸 것이라면 금동향로는 조형으로 표현했다는 차이 뿐이었고 그 주제는 전면 일치하는 것이었다.
7) 백제의 복식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가 북방문화, 즉 스키타이계인 만큼 복식의 경우에도 스키타이계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인들은 머리에 삼각형 모자(弁形帽)와 새깃털로 장식한 관(鳥羽冠)을 썼고, 좁은 소매에 둔부선까지 오는 왼쪽 여밈의 저고리와 말을 탈 때의 편리성을 감안하여 좁은 바리를 입었다.
상의 위에는 의례용으로 긴 저고리를 입기도 했다. 허리에는 가죽이나 헝겊으로 된 띠를 맸고 장화를 신었다. 또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다.
▣중국 고서화에 전해▣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삼국이 이러한 기본 복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은 4세기 중국 梁나라의 '직공도(職貢圖)'에서 잘 나타난다. 4-6세기에 그려진 고구려의 고분벽화도 이를 확인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제 왕의 옷매무새는 소매가 넓은 자색 두루마기(大袖紫袍)에 청색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가죽띠(素皮帶)를 맸다는 것이다. 또 흑색 가죽신(烏革履)을 신고 금화가 장식된 검은 비단관(烏履冠)을 썼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한 왕의 옷매무새에다 무령왕릉 출토품으로 장식을 곁들여 보면 아주 찬란하다. 자색옷에 꿰매어 붙인 사각형 혹은 오각형의 얇은 금판이 더욱 빛나고 허리에 두른 은제 과대는 위엄을 더했을 것이다. 왕비는 물론 왕도 귀고리를 달았고 금동제 신발(金銅履)을 신었다. 과대는 숫돌 물고기, 청동 등의 장식품을 길게 늘여뜨린 아주 화려한 허리띠다. 과대는 고구려나 신라의 귀족들도 6세기까지 금, 은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백제 귀족들도 금과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금동신발은 제사 등 특별한 경우의 의례용만 아니고 평상 집무복에도 갖춘 신발인지도 모른다. 금동신발은 보기와는 달리 딱딱한 신의 안쪽에 헝겊을 대면 충분히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밑바닥에는 뾰족한 스파이크 같은 것이 있어 신기에 불편하지 않다. 현재도 일본 신사의 신관(神官)들이 금동신발과 같은 모양의 신을 나무로 만들어 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에는 5인의 악사가 생생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들은 관을 쓰지 않고 머리를 길게 땋아서 조선시대 내인의 새앙내리 접듯이 몇번 접은 뒤 댕기로 묶어서 오른편 귀쪽에 붙였다. 이 모습은 마치 일본의 아좌태자 양쪽에 서 있는 왕자들의 미즈라를 연상시킨다.
이같은 악사의 모습은 소매 넓은 자색유와 치마(裙)를 입고 장보관(章補冠)을 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 신선으로 보이는 11개의 인물상도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