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최노인은 소나 자신이나 너무 많은 세월을 뒤로 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나 소나 태어났다면 언젠가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 이 늘고 병든 소를 보며 노부부는 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않았음을 다시 생각한다. 소는 소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이 삶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않고 묵묵히 그 소임을 다 하고 마지막 겨울 뗄감을 힘겹게 다 해놓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을 앞둔 소와 마주한 최노인...
쇠코뚜레를 풀며 “좋은데 가그래이” 말하고는 돌아선다. 그러나 결코 다시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최노인을 끝없이 바라보는 늙은 소의 커다란 눈망울... 그것이 이 늙은 소의 마지막 모습이다.
워낭소리가 1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가? 엄청난 대작들이 뿌려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이 늙은 소와 한 시골노인의 사랑이야기를 능가할 수없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작은 독립영화 한편에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것이다. 이 작은 영화에 그것을 넣을 수있는 사람 ,그것은 오로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열정뿐이리라.
어릴적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하여 발을 밀치며 잠들던 그 모습과 지천에 널린 그 흔한 흙으로 바르고 만든 흙집, 양창자처럼 구불구불한 논두렁의 모습과 눈이 부셔 쳐다보기도 힘든 백설의 산과들 이 모든 것들이 정서가 메말라있던 우리들을 즉시 평안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채 느껴보지도 못한 세대들조차 그 평안을 느끼며 열광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영화에서 그들이 갖고 싶었던 과거와 미래를 느끼고 볼 수있기 때문이리라 먹고 산다는구실로 두꺼운 얼굴뒤에 꼭꼭 눌어 두었던 사랑과 감동의 눈물을 소리없이 흐르게 하는 그런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다.
/나의 생각
008년 제 13회 부산국제영화제 Piff 메세나상 수상작. 2009년 제 25회 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출품작. 한국최초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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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마르크스는 기계에 '일반지성'이란 말을 붙였다. 생산 공정을 다 알아서 하는 기계가 사실상 생각하는 존재이고, 다만 옆에서 기계를 조작하고 관리할 뿐인 사람은 오히려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랄한 폭언이었다. 이른바 기계에 종속된 노동이다. 그런데 한없이 비실용적인 할아버지의 노동은 최소한 자유롭다. 이런 자유로운 노동 또한 사람을 '인적 자원'로 취급하는 세상에서는 하찮은 것이 되었음은 물론이라 하겠다. 할아버지가 트랙터를 쓰기 싫어하는 이유가 또 있다. 트랙터로 수확하면 낱알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물론 낱알이 많이 떨어져 봤자 트랙터 써서 씨를 더 많이 뿌리고 벼를 더 많이 거두면 그만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화를 낸다. 경제 수익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낱알이 돈과 바꾸는 교환가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낱알은 고귀한 노동의 결실이며 자연이 베푸는 은혜다.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낭비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결코 과도하게 다가가는 법이 없다. 그냥 노인 둘과 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가는 오만가지 것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돈벌이를 위해 요람부터 무덤까지 싸우는 경제주의 세상에서 이는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사실을 돌이켜보길 바라는데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다. 그것도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시켜 찍은 현실의 이야기다. 똑똑히 살아있는 현실의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되게 보이냐는 것이, 때로는 역으로 우리네 삶이 얼마나 허황되냐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애끓다 죽어가고 세상의 온기는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당장 일상에서 느껴야 할 따스한 온기를 애써 극장을 찾아가 느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희극이며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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