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어사 암자순례길로 초대합니다
▲일시(집결지): 2025. 1. 25. 오전 9시 도시철도 범어사역 5번 출구
▲코스: 범어사역~범어사 옛길~지장암~계명암~청련암~내원암~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금샘~미륵사~원효암~대성암~안양암~금강암~사자암~만성암 (약 12㎞, 4~5시간 소요)
▲준비물: 각자물, 개인 간식, 방한복, 장갑, 마스크 등
▲회비 : 10,000 (김밥1줄, 강사료포함)
▲지도 및 자료 별첨
▲주최: (사)부산걷는길연합
▲참석확인:박경애(010-3564-0376)
범어사는 1,300여 년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승 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이다. 의상 대사, 원효 대사, 표훈 대덕, 낭백 선사, 명학 스님 등 그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스님들이 범어사를 거쳐 갔다. 뿌리가 깊으니 가지도 무성한 법. 근대에 와서도 경허 선사, 용성 선사, 성월 선사, 만해 선사, 동산 대종사, 성철 스님 등이 범어사에서 수행했거나 주석했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성월(性月, 1871~1943) 스님이 원력을 이루고부터다. 오늘날 범어사 산내 암자는 대부분 그가 세웠다고 한다. 성월 스님은 경남 양산 출생으로 15세에 출가, 20세까지 여러 경전을 공부한 후 범어사 계명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이후 주지를 맡아 1910년까지 산내에 여러 선원을 개설했다. 1899년 10월 금강암 선원을 열었고, 1900년 10월 안양암, 1902년 4월 계명암, 1906년 6월 원효암, 1909년 1월 안심료와 승당, 그리고 1910년 10월 대성암에 선원과 선회(禪會)를 창설하여 범어사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범어사 옛길’과 지장암
범어사 옛길 금어동천 인근에는 송림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참새미가 있고, 그 아래쪽에 지장암(地藏菴)이 자리한다. 첫 번째 암자다. 지장암에는 석조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지장암은 1900년에 창건되었고 원래는 금포암이란 작은 수행 암자였다. 범어사 농막 겸 수행처로 활용되다가, 1982년 범어사 주지 지효 스님이 중창하였고, 그뒤 종인 스님이 생활불교를 주창하며 일반 대중에게 개방했다.
지장암에서 돌아나와 범어사 옛길을 따라 5분쯤 더 가면 비석골이다. 길가의 석단에 다섯 기의 비석이 마치 나무숲처럼 나란히 서 있어 일명 ‘범어사 비림(碑林)’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른쪽부터 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현교, 장호진을 기리는 공덕비들이다. 역대 동래 부사들이다. 비석들은 동래부와 범어사의 각별한 관계를 말해준다.
#계명암
계명암은 통일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세운 암자. 계명암의 창건 기록과 중창, 중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조성된 보살 좌상과 조왕도, 계명암 편액 등으로 볼 때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건되었을 것으로 본다. 불자들 사이에선 계명암의 기도발이 세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계명암의 상징은 보덕굴(普德窟)이다.
#불무도의 본산, 청련암
계명암을 돌아 내려오면 청련암(靑蓮庵)이다. 들머리에 다리 이름이 아축교(阿閦橋)다. ‘축(閦)’은 ‘무리’를 뜻하는데 좀처럼 쓰지 않는 한자다. 아축은 동방에 선쾌정토(善快淨土)를 세워서 설법하는 부처을 말한다.
청련암은 불문에서 전해지는 금강영관(金剛靈觀)의 산실이자 본산이다. 금강영관은 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를 이루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가의 수행 방법. 양익 스님이 청련암 주지로 주석하면서 수련 및 수행 방법을 정립했고, 적운 스님(경주 골굴사 주지), 안도 스님(장산 원적사 주지) 등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내원암과 능가 스님
청련암에서 위로 10분쯤 떨어진 내원암은 고즈넉한 수행 도량이다. 등산로에서 떨어져 있어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 1693년(숙종 19)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주석하는 능가 스님은 1960~70년대 조계사 주지, 범어사 주지, 한국종교인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인류미래재단’을 만들어 세계 종교평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내원암 중창 이후 줄곧 내원암과 인연을 맺어 왔으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인 수복(修福)불교 실천에 힘써 왔다.
내원암은 우리 시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불린 성철 스님의 체취가 머문 곳. 성철은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득도 후 스승인 동산 스님을 따라 범어사에 와서 그 해 하안거를 금어선원에서, 동안거를 원효암에서 보냈다. 1937년 3월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성철은 그 해 다시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이듬해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성철 스님이 내원암에서 정진할 때 백용성 스님(1864~1940)이 계셨다. 용성 스님은 동산 스님의 은사다. 성철 스님이 용성 스님에게는 손상좌인 셈이다. 이로써 용성-동산-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선맥이 범어사 인연을 고리로 출현한다.
동산 스님은 환성-경허-용성 스님의 맥과 계를 계승한 선지식이다.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은 구한말 쇠퇴한 수행 가풍을 진작시키고, 간화선의 전통을 되살린 한국불교의 중흥조였다. 동산 스님의 ‘오도송’.
畵來畵去幾多年(화래화거기다년) 그림을 그리고 그린 것이 몇 해던가
筆頭落處活猫兒(필두낙처활묘아)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盡日窓前滿面睡(진일창전만면수)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夜來依舊捉老鼠(야래의구착노서)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네.
#천년의 미소, 가산리 미륵불
양산 가산리 미륵불은 통일신라시대 말에서 고려시대 초에 제작된 높이 12m, 폭 2.5m의 거대한 마애불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이다. 형태가 토속적이고 유머러스하다. 얼굴은 약간 각이 졌고, 머리에는 육계(肉髻·살상투)가 높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졌다. 육계는 보통 부처의 머리 위에 혹과 같이 살이 올라온 것을 말하며 지혜를 상징한다. 화강암 재질의 거대한 암벽 주변에 축대와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예전에 근처에 사찰이 있었던 것 같다.
#금샘과 미륵사를 돌아
고당봉으로 향한다. 금샘(金井)가는 오솔길은 운치가 그득하다. 밧줄을 타고 암릉을 오르면 금샘의 장엄한 풍광을 만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금정산 산마루 바위 위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황금빛 연못(금샘)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사(彌勒寺)는 고당봉 아래의 기암절벽에 터를 잡은 암자다. 행정구역은 금정구 금성동, 해발 700m 고지다. 대웅전 격인 염화전(拈華殿) 법당 뒤엔 산더미같은 기암괴석들이 뒤엉켜 병풍을 쳐놓은 듯하다.
미륵사는 법당인 염화전을 비롯하여 미륵전, 오백전, 칠성각, 종각, 도솔선원, 독성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효가 미륵사에서 호리병 5개를 구하여 왜구의 배 5만 척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미륵사 전설 중 압권이다.
#원효·의상과 함께 걷는 길
범어사 11 암자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이란 이름을 마주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고승은 이 땅의 수많은 사찰과 도량에 자취를 남겨놓고 있지만, 금정산에서 만나는 흔적은 그 폭과 깊이가 다르다.
원효와 의상은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어갔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달랐으나, 가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다. 원효는 직관(直觀)을, 의상은 통철(洞徹)을 중시한 길을 걸었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범어사 쪽으로 600m쯤 내려가면 원효암 가는 갈림길이 있다. 들머리의 쉼터에서 남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의상대(義湘臺)’가 나온다. 의상대 인근에는 신비의 원효석대(元曉石臺)가 있다.
#원효암과 지유 방장
원효암 현판 왼쪽에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오른쪽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란다.
이름은 원효암이지만 원효 대사가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은 없다. 전설과 지명(원효봉, 원효석대)이 그럴듯할 뿐이다. 심증이 가는 유물은 있다. 약 1,0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원효암의 동편 삼층석탑과 서편 삼층석탑이다. 둘 다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다.
#대성암, 안양암, 금강암
범어계곡 암괴지대에서 한숨 돌린 뒤 대성암(大聖庵)으로 간다. 대성암은 비구니 선원이다. 취규 대사가 1803년(순조 3) 금강암을 세울 때 대성암도 같이 중창했다고 한다. 그 후 1910년 성월 스님이 대성암에 각해선림(覺海禪林)이란 편액을 내건 후 50여 명의 여승들이 머무는 수행처로 자리잡았다.
각 선방의 이름이 인상적이다.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知慧). 보살이 행해야 할 여섯 가지 행위, 즉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선방에 붙여 수행의 모토로 삼고 있다.
안양암(安養庵)은 대성암 바로 위에 자리한다. 1712년(숙종 38) 선식 대사에 의해 중창이 이루어져 명맥이 이어졌고, 이후 1899년 성월 스님이 금강암을 열고, 이듬해 안양암를 개설했다고 한다.
금강암(金剛庵)은 대성암에서 위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다. 금강암은 모든 전각의 현판과 주련이 한글이다.
#등운곡을 지나 사자암, 만성암으로
범어사 일주문으로 내려가 등운곡을 지난다. 등운곡(藤雲谷)! 등나무 군락지인 이곳에 5~6월쯤 보랏빛 등꽃이 구름송이를 연출한다. ‘갈등(葛藤)’을 말하는 자리.
사자암(獅子庵)은 상마마을 안쪽 금정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사자암은 이곳 지세가 웅크린 사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만성암(萬成菴)은 상마마을 끝단 금정산 숲속 둘레길 제1코스 입구에 있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 도량. 입구에 포대화상을 비롯,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동자상 등 다양한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만성암 바로 위쪽에는 고려시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범어사 토지 경계 석표가 있다. 지금까지 범어사 석표는 10개가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경계를 설정해보면 동쪽은 계명봉, 서쪽은 원효봉, 북쪽은 고당봉, 남쪽은 만성암이 된다.
범어사 11암자길 전체 거리는 약 12㎞. 길은 있지만 체계적인 안내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