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군정서는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무장 독립운동단체이다. 북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이 조직한 중광단을 모체로,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된 정의단이 명칭을 북로군정서로 개칭하면서 성립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사관 훈련소를 설립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일제가 만주 지방에 군대를 투입하자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북로군정서의 기원은 1911년 3월 서일(徐一) 등 대종교(大倧敎) 신도들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로서 창시된 대종교 신도들은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만주로 총본부를 이전할 것을 모색하여 북간도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서일 등 애국적인 대종교 신도들이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설립하고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했던 것이다. 중광단은 1919년 3·1 운동으로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된 데 영향을 받아 다른 세력과 합작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5월경 대종교도들과 공교회(孔敎會) 등 다른 종교 신도의 연합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대한정의단은 독립 쟁취를 위한 비밀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였으며, 단장은 서일이었다. 대한정의단에서는 순한글의 기관지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을 발간하여 항일독립투쟁의 필요성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은 그 산하에 독립투쟁을 위한 무장단체로 군정회(軍政會)를 조직하고 항일독립투쟁을 위하여 국내 동포의 일치분발을 촉구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배포했다. 애당초 독립운동가들은 3·1 독립선언 이후 1919년 6월말에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문제가 상정될 것을 기대한 바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자, 외교 노선보다 무장 노선을 중시하는 항일무장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한정의단이 무장투쟁을 위한 군정회를 조직한 것이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에서 조직한 무장단체인 군정회는 북로군정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존 대한정의단의 지도자들은 군사문제에는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무장단체의 지도를 위해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무관인 김좌진(金佐鎭) 등을 초빙하여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성을 맡겼다. 그런데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군정회를 맡게 된 것은 공교회 계통의 단원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민회 계열은 공화주의자들이었던 반면, 공교회 계열은 군주정을 지지하며 구 조선왕조에 충성을 다하려는 복벽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 끝에 공교회 계통의 단원들은 대한정의단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군정회는 조직을 합쳐 전체를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라는 이름으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이어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새로 대한군정부의 성립을 보고하고 임시 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서 공인을 신청하였는데,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한군정부’라는 이름을 ‘대한 군정서’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다. 군정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군사 정부이기 때문에, 한 동포 사회에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는 임시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 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 뜻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여 공식적으로 대한 군정서가 성립되었다. 당시 서간도 지역에 성립된 서로군정서 또한 원래 이름을 ‘군정부’로 하였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였기에, 북간도 지역의 대한 군정서는 서로군정서에 대비하여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는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가 동일한 취지의 군사기관임을 확인하고 군사적인 안건에 있어서 서로 협조할 것을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서로군정서측의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이 북로군정서의 군사교육을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즉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신민회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의 합작으로 성립된 무장독립단체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독립군 단체로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편제되어 임시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북로군정서의 조직은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누어졌으며, 중앙조직은 다시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어졌다. 서일을 총재로 한 총재부는 북로군정서 관내의 전반적인 일들을 지휘하고 군사활동을 후원하였으며, 그 본부는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춘명향(春明鄕) 덕원리(德源里)에 있었다. 한편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한 사령부는 군사활동을 준비하기에 적합한 삼림지대인 왕청현 춘명향 서대파(西大坡)에 본영을 두었다. 북로군정서의 사령부 본영지는 깊은 숲 속의 요충지에 지어졌으며, 병영과 연병장을 갖춘 근거지로서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훈련장소였다.
북로군정서는 무장투쟁단체로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비하며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활동을 전개했다. 북로군정서의 군자금 모집은 우선 세력이 미치는 관할 구역의 주민들로부터의 모금으로 이루어졌다. 군자금 모집은 국내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국내로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형식으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모아진 군자금은 무기 구입에 쓰였다. 북로군정서는 무기를 러시아 영토에서 구입했는데,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체코 군의 무기를 구입하거나, 러시아인과 러시아 귀화 한국인들을 통해 다량의 무기를 입수할 수 있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직접 러시아 영토에 출장하여 무기 구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구입한 무기를 옮기기 위해 운반대가 조직되어, 여러 경로를 통해 서대파의 북로군정서 본영지로 운반되었다. 이렇게 입수한 무기를 바탕으로, 1920년 7월 북로군정서는 장정 약 1천 명, 군총 약 1,800정, 탄약은 군총 1정에 800발 내외,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수류탄 다수를 보유한 만주지역 최대의 독립운동단체가 되었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은 장정을 모집해 독립군을 편성하면서 독립군을 지휘할 간부의 양성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사령부 본영에 간부를 교육, 양성하기 위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1920년 2월초에 설립했다. 사령관인 김좌진이 연성소의 교장을 맡았으며, 서간도 지역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奭)을 비롯한 여러 훈련장교를 초빙하고 교재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모집한 장정 중 신체 건강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우수한 청년 300여 명을 선발하여 사관교육을 실시했다. 사관교육은 당시의 긴급한 필요에 따라 6개월간 속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정신교육·역사·군사학·술과(術科 : 병기와 부대지휘 운용)·체조 및 규령법(叫令法) 등이었다. 특히 역사교육은 세계 각국의 독립에 관한 역사와 일본의 조선침략사를 주로 하여 민족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했다. 군사교육은 구 대한제국의 군대식 방법을 기본으로 실시되었는데, 본영 내 두 개의 연병장에서 철저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의 모형을 향한 실탄 사격연습이 이루어졌으며, 중국군이나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1920년 9월 9일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어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그중 80명은 소위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200여 명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 혹은 연성대硏成隊)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는 최정예 부대로서 이후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즉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철저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별도로 기관총 중대를 창설해서 운영하는 등 이 시기 여러 독립군 부대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철저하게 훈련받은 부대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세력권 내부에 치밀한 체계로서 경신조직(警信組織)을 두어, 세력권 내 분국을 두고 각 호마다 조직을 편성해 민정을 시찰하고 자치를 실시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즉각 보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수십 개의 무장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나자, 일제는 만주의 항일독립군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점차 활발해지는 독립군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규군을 만주로 투입하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토계획’을 수립했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영토인 만주에 출병하기 위한 구실로 중국 마적을 매수해 혼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조작한 혼춘 사변을 일으켰다. 이어서 재만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 주둔군 제19·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13·14사단, 만주파견군과 관동군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다. 이 때 독립군들은 이미 산간 안전지대로 근거지를 옮긴 상태였다. 북로군정서 또한 1920년 9월에 중국군 연길 부대장인 맹부덕의 종용으로 서대파의 근거지를 떠나서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자마자 근거지 이동을 실시한 것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 또한 10월 12일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본군 또한 독립군을 추적하여, 5,000여 명의 이즈마(東) 지대(支隊)가 삼도구 청산리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연합부대를 포위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전을 감행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청산리 대첩이 전개되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에는 10여 개의 전투들이 포함되는데, 이 중 백운평(白雲坪) 전투, 천수평(泉水坪)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萬麒溝) 전투 등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단독으로 수행하여 승리한 전투였으며, 어랑촌(漁郞村) 전투, 천보산(天寶山) 전투 등은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 연합부대가 공동으로 수행한 전투였다.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 섬멸하여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의 사상자 수는 미미하였다.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 승리는 북로군정서의 정예 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청산리 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하에 만주 지방의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학살로 적어도 3천여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살해당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후 안도현(安圖縣) 황구령촌(黃口嶺村)으로 향했는데, 일본군의 학살과 토벌 계획에 대응하고자 다른 독립군부대들과 대동단결하여 통합부대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북방으로 향하여 1920년 12월 말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여러 단체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군 단체의 결성을 실현하였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부대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통합된 독립군 단체는 일본군의 작전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은 1921년 6월에 발생한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으로 좌절되었다. 이는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 것으로, 독립군의 통수권을 두고 내부의 노선 차이에서 빚어진 뜻하지 않은 분쟁이었다. 흑하사변으로 독립군단은 무장 해제를 당하였으며 큰 타격을 입고 다수가 살상되었으며 부대를 이탈하였다. 서일·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간부들은 탈출해서 북만주로 돌아와 1922년 8월 다시 통합 독립군 부대를 재조직했지만, 전에 조직되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독립군단은 다시 편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었던 김좌진은 1924년 3월 다시 독립된 부대로서 대한 군정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재건된 대한군정서는 1925년 3월 북만주 지역의 통일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신민부(新民府)로 이어졌다. 즉 만주 최강의 정예부대로서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의 유산은 대한독립군단을 거쳐 신민부로 이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