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10)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처절했던 2010년 레드셔츠 유혈항쟁
2009년 말, "세댕"(Seh Daeng: 붉은 장군)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독불장군' [현역] 장성 캇띠야 사왓디폰(Sawasdipol: 1951~2010) 육군 소장이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의 주변 세력 중 영향력 있는 인사로 등장했다. 그는 '레드셔츠 운동'(UDD) 시위대를 보호할 목적으로 약 1천명의 특공요원들로 구성된 병력을 모집했고, 그들은 12월10일에 열린 '레드셔츠 운동'의 한 집회장에 모습을 나타낼 예정이었다. 미국 대사관의 12월3일자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3067호)은 탁신의 변호사 중 한명인 마니다 '미키' 짐머만(Manida “Mickey” Zimmerman)이 탁신의 무장 조직 구성을 분명하게 인정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레드셔츠 진영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세댕(=캇띠야)이 공개적인 응원단장으로서 다시 출현한 일은, 탁신 지지자들과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 총리의] 현 정부 사이에 진행 중인 싸움에서, 상황이 불길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 "미키" 변호사는 캇띠야 소장을 "군벌"(warlord)이라 불렀고, 혼돈을 조성하면서 상황을 지저분하게 전개시키는 시나리오에 따라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음. 세댕은 최근 몇주 사이 캄보디아 및 두바이를 방문해 탁신과 만났고, 탁신이 캄보디아의 시엠립(Siem Reap)을 방문 하여 훈센(Hun Sen) 총리를 만났을 때 촬영된 사진에도 등장했고, UDD 지도부가 두바이에서 개최한 전략회의 사진에도 그의 모습이 들어 있었음. 7달 동안 잠잠하던 세댕이 붉은색 조명을 받으며 복귀한 것은 탁신의 승인 없인 불가능한 일일 것임. 캇띠야의 골치아픈 과거 기록들을 살펴보면, 폭력적인 행위들을 정확하게 예고했고, 그에 관해서라면 척하면 알만한 신뢰도가 암암리에 부여되곤 했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 대사관은 현재 지속되고 있는 시위 정국의 다음 국면이 아마도 신년(2010) 1월 쯤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상황 전개가 추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어서 우려하고 있음. |
그리고 미 대사관은 나중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3115호)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색대원들이 12월10일 집회장에 나타났다는 것도 보고했다.
'세댕'이라 불리기도 하는 레드셔츠 선동가 캇띠야 사왓디폰 소장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검은 옷을 입은 수십명의 사수대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했음. 그는 그들이 '타한 프란'(Thahan Phran: 공수 수색대) 소속 요원들이라고 소개했음.
[역주] '타한 프란'이란 '사냥꾼 군인'이란 의미로, 국경지대에서 순찰 및 산림감시 업무를 담당하는 특수전 부대이다. 이들의 주요 활동지는 특히 태국 북동부의 캄보디아 국경지대이며, 공수 및 강습 훈련 등 특수부대에 준한 훈련을 받긴 하지만, 처우 및 직업적 특성 면에서는 민병대와 정규군의 중간 정도의 성격을 갖고 있다. |
2010년 1월 21일, 태국의 언론 매체들은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1949년생) 육군사령관의 집무실 및 '국방부' 청사에 일주일 전 M-79 유탄발사기에 의한 수류탄 공격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상자는 없었다. 세댕은 자신의 개입설을 부인하면서, 만일 자신이 그 공격사건의 배후였다면 "아누퐁은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법원'은 20억 달러(약 2조원)에 달하는 탁신의 동결자산을 국가가 몰수할 것인지 여부를 2월26일에 판결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탁신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최후의 싸움"이라고 명명한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드셔츠 지도부 사이에 점차 이견이 증가했다. 특히 2가지 사안을 놓고 더욱 그러했다.
첫째, UDD의 전략을 수립할 때 탁신 개인의 협소한 관심에 지나치게 큰 중요성이 부여되는 것과 관련하여, 레드셔츠 운동의 고위급 지도자 중 일부가 실망하고 있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10BANGKOK380호)은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다가올 시위의 시점 및 그 본성은 탁신의 지령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대법원이 2월26일 탁신의 동결된 재산에 관한 판결을 내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
둘째, UDD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폭력이란 수단을 어느 정도 범위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징후는 판롭 삔마니(Panlop Pinmanee 혹은 Pallop Pinmanee: 1936년생) 예비역 대장이 2월 초 두바이를 방문해 탁신을 만날 때 나타났다. 판롭은 사악한 분위기의 군 출신 인사인데, 그의 두바이 방문길에는 레드셔츠 운동 내 강경파 지도자 3인이 동행했다. 여기에는 세댕을 비롯하여, [유명 대중가수 출신인] 아리스만 퐁르엉렁(Arisman Pongruangrong: 1964년생), 그리고 "람보 이싼"(Rambo Isaan: 이싼지방의 람보)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수폰 앗타웡(Suphon Attawong 혹은 Suporn Attawong: 1964년생)이었다.
판롭과 세댕은 귀국길에 친탁신 '국민 군'(people’s army)을 결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들은 이 조직의 수장으로 거물급 정치인이자 과거 국방 총사령관(=합참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1932년생) 전 총리를 추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차왈릿은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의 후배로서, 과대망상적 성향과 더불어 흥미로울만치 뒤죽박죽된 정치적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2009년 차왈릿은 탁신의 새로운 정당인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 총재 직을 수락했다 쁘렘과 긴장 관계를 이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필시 쁘렘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왈릿은 자신이 '국민 군'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면서 다시 한번 신속히 발을 뺐다.
UDD의 핵심 지도자 짜뚜폰 프롬판(Jatuporn Prompan: 1965년생)은 레드셔츠 운동이 무장조직 결성을 승인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판롭은 레드셔츠 운동을 포기할 것이라면서, 자신은 더 이상 레드셔츠 운동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대사관은 비밀 외교전문(제10BANGKOK340호)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동결된 탁신의 자산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2월26일로 다가옴에 따라, 사법부가 탁신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경우에 대비하여 골치아픈 상황을 일으킬 토대가 일제히 마련되는 가운데, 레드셔츠 진영이 위협 전술을 통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징후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 본 대사관은 레드셔츠 지도자들에게 캇띠야의 공개적인 행동이나 발언과는 거리를 둘 것을 오랫 동안 촉구해왔음.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탁신이 감독 역할을 하면서, UDD 내 다양한 지도자들에게 캇띠야나 판롭과 관련된 모임에 참석하라는 종용이 계속되는 실정임. 차왈릿 및 UDD 내부의 짜뚜폰 같은 핵심 지도자들은 세댕 및 판롭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이들이 옹호하는 폭력적 수단이 [당장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논점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음. 탁신이 폭력도 불사하는 그런 인물들과 기꺼이 사진 촬영에 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그런 이들의 방식까지도 기꺼이 용인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 |
2010년 2월 4일, 에릭 존(Eric G. John) 미국 대사는 정계의 베테랑 대부 중 한명인 반한 실빠아차(Banharn Silpa-archa: 1932년생)를 만났다. 반한은 원칙도 없고 뇌물도 대단히 좋아하여 "미꾸라지"(the slippery eel)나 "미스터 에이티엠"(Mr. ATM) 같은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반한은 정치 위기가 해결될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반한은 본 대사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탁신 전 총리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탁신을 극도로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본다고 밝힘. 반한은 탁신과 오랫 동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음. 반한은 현 정부가 "탁신을 더욱 코너로 몰아넣고 있다"면서, 탁신이 심지어 과거보다도 더욱 예측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음. 이런 상황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현 상황이 잠재적으로는 탁신을 위험한 인물로 만들 것이라는 것임. 반한은 아피싯 총리 정부가 탁신과 직접 대면을 하면서 보다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길 바랬음. 현 정부가 법률적 원칙만 고수하면서 탁신을 대할 때 지나치게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서, 어떠한 화해 가능성도 제거하고 있다는 것임. 따라서 양측 모두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서" 버렸다는 것임.
본 대사는 반한에게 문제를 풀 수 있는 처방전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음. 반한은 양측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중재할만큼 중립성을 지닌 명망과 자격을 갖춘 인사가 존재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음. 탁신의 징역형 복역기간 문제에 관해, 탁신 본인과 현 정부 모두 모래 위에 선을 그어두었다는 것임. 반한은 성공적인 타협이 이뤄지기 위해선 그 문제를 옆으로 밀쳐두는 것으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함. 어찌됐든 반한은 탁신이 주기적으로 언론에 등장해, 좋은 일을 위해 자신이 정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강조했음. 탁신은 정치적 동물이며, 항시 게임장으로 복귀할 길을 찾고 있다는 것임. 현 정부가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함. |
2월26일,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관들은 편파적이거나 '옐로셔츠 운동'(PAD) 지지 성향의 인물들이 압도적 다수였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이 판결이 긴장을 완화시키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법원은 탁신의 동결된 자산 가운데 14억 달러는 국가의 몰수를 판결했고, 9억 달러는 총리에 취임하기 이전에 형성된 재산이므로 몰수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판결이 만일 탁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실패한 판결이었다. 탁신은 격분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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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0년 2월 26일, 대법원이 자신의 동결자산 중 상당 부분에 대해 몰수 판결을 내린 직후, 탁신 친나왓은 화상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
탁신의 전략은 태국의 정치적 갈등에서 전통처럼 되어버린 방법과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서, 가두에서 유혈사태를 촉발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부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면서 보안군 병력으로 하여금 과잉반응과 살인행위를 저지르도록 유도해, 레드셔츠 시위대가 아피싯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탁신은 이러한 일을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로 시도하려 했다. 또한 군대가 미끼를 물도록 만들기 위해, 시위대 속에 비밀 무장요원을 잠입시켜 군 병력을 괴롭히며 공격하는 도시 게릴라전 전술도 사용할 생각이었다.
탁신파 무장조직의 공식적인 얼굴은 세댕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세댕과 그의 부하들은 주로 방어적 역할만 부여받았고, 레드셔츠 시위대의 집회장을 경비하면서 외곽을 사수하거나 행진대열을 경호하는 임무만 담당했다. 세댕의 그룹은 "레드셔츠 사수대"(Red Shirt Guards)로 불렸지만, 특수부대 군복 스타일의 검은색 유니폼을 입었고 붉은색 스카프를 착용했다. '레드셔츠 사수대'는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채로 있었다. 세댕은 한편으론 군벌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릿광대 같은 느낌을 주는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정식 전투복 차림으로 공개적인 활보를 했고, 항상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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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세댕 장군은 다혈질적인 맹장이었지만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특수전사령관을 역임한 그는 베트남 전쟁기에 CIA와 함께 라오스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출판하여 유명세를 탔다. 또한 TV 정치 토크쇼에도 패널로 참가해 입담을 과시했고, 빈곤층에 대한 연민 역시 진성성을 갖고 있어, 레드셔츠 진영에서는 연예인에 맞먹는 인기를 구가했다. 2010년 레드셔츠 시위 당시 그는 자신의 해임 문제와 관련된 군사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군법회의에 출두한 다음날인 5월8일에도, 그는 레드셔츠 집회장에 나타나 팬들의 요청에 따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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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프랑스24'(FRANCE 24) 특별취재반이 2010년 5월 초, 세댕 장군을 따라다니며 취재해 보도한 내용. 기자가 소감을 묻자 "군의 저격수들(=스나이퍼들)이 집회장 주변에 배치되어 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 세댕은 평소 자신에 대한 암살 위협을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시위대와 함께 하겠다"며 방탄조끼 착용을 거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5월13일 저녁, 세댕은 룸피니공원 사거리에서 '뉴욕타임스'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도중, 저격수가 발사한 총탄을 이마에 맞고 사망했다. 그의 암살은 이후 일주일간에 걸친 처절한 유혈항쟁의 시작이었다. [크세] |
반면, 도발적 임무를 가진 제2의 무장조직은 은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대부분 공수부대나 해군 특수전 사령부(NSWC: 네이비실&UDT) 소속이었고, 탁신의 비밀 타격대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가연성의 혼합물에 다시 2가지 요소가 추가돼야만 한다.
첫째, 태국 군부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레드와 옐로로 갈라진 태국 사회 전반과 마찬가지로 군대 역시 간극이 존재했다. 군 수뇌부 대부분은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에게 굳건한 지조의 충성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장교들이나 사병들의 경우, 레드셔츠 진영에 동조하는 이들도 상당한 규모였다. 이러한 군인들은 "수박군인"(타한 땡모)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겉에는 푸른 군복을 입었지만, 마음만은 레드셔츠란 의미에서 붙여진 말이다.
그러나 군부 내의 분열 현상은 단순한 레드 대 옐로의 대립구도를 넘어섰다. '왕후 근위대'(Queen’s Guard: 육군 제21연대) 파벌은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의 조력을 받아, 21세기에 '왕립 태국육군'(RTA) 내에서 가장 중요한 보직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군부에서 가장 주류적인 세력이 됐다. '왕후근위대' 파벌은 쁘라찐부리(Prachin Buri 혹은 Prachinburi)에 주둔하면서 일명 "부라파 파약"(Burapha Payak: 동쪽의 호랑이)으로도 불리는 '보병 제2사단' 예하 '제21연대' 출신 장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태국 군의 전통적 주류 파벌이었던 "천사 문중"(Clan of Angels)에겐 대단한 쓴맛이 되었다. '천사 문중'은 방콕(Bangkok)에 주둔하며 "국왕 근위대"(King’s Guard)라고도 불리는 '보병 제1사단' 출신 장교들을 말한다. 이들 양 계파의 경쟁관계와 상호 적대감은 시리낏 왕후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 사이의 관계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이다.
둘째, 불확실한 충성심과 어두운 음모적 술수에 능수능란한 몇몇 독립형 행위자들 역시 21세기 태국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부리람(Buri Ram) 도를 지역 기반으로 하는 조폭형 정치인] 네윈 칫촙(Newin Chidchob: 1958년생) 및 그의 '블루셔츠' 분파, 그리고 판롭 삔마니 같은 이들이 포함된다. 이런 상황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혼란 상황을 촉발시키거나 아수라장 상황을 조작하려는 '제3의 손'이 출현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었다.
시위의 시작
2010년 3월 중순, 10만명 이상의 레드셔츠 지지자들이 북부지방 및 북동부지방(=이싼지방)에서 방콕으로 모여들었다. 태국 보수진영 신문들은 발작적인 반응의 보도를 통해, 레드셔츠 시위대를 분노에 찬 들짐승 떼처럼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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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0년 3월 13일자 <방콕포스트>(The Bangkok Post) 1면. 레드셔츠 시위대는 3월15일(월)을 'D-데이'로 설정했기 때문에, 3월12일(금)부터 방콕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각종 보도들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레드셔츠들이 방콕을 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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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0년 3월 20일, 레드셔츠 시위대 중 오토바이 군단은 방콕 시내 가두행진에 나서며 세력을 과시했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이후 주기적으로 대규모 가두행진에 나서게 된다. |
레드셔츠 시위대는 '판파 다리'(Phan Fa Bridge)에 모여 집회장을 설치했다. 이곳은 국회의사당 인근의 '라차담는 가'(Rachadamnoen Avenue) 주변의 역사적 구역에 위치한 장소이다. '판파다리'는 과거에도 여러 주요한 정치적 투쟁들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3월 동안, 레드셔츠 집회장에는 온화하고 축제장 같은 분위기가 넘쳐흘렀고, [주로 서민층 및 진보적 성향의] 수많은 방콕 시민들도 이곳에 와서 시위대를 응원했다. 하지만 3월 말로 가면서 몇몇 정부 부처 청사들과 군 관련 건물들에 M-79 유탄발사기를 이용한 공격사건들이 발생했다.
3월 28일과 29일,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와 '레드셔츠 운동'(UDD) 지도부 사이에 TV 생중계 협상이 진행됐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환영을 받았지만, 이어진 비극으로 인해 곧 빛이 바랬다. 이 협상은 태국 정치에 꼭 필요했던 투명성이 발휘됐던 짧은 순간이었다.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국가의 운명을 밀실 협상을 통해 결정하곤 했다. 하지만 이때의 협상은 전 국민이 지켜봤고, 그들 스스로 이성과 진지함을 갖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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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0년 3월 28일의 TV 생중계 협상. 정부측과 레드셔츠 반정부 시위대에서 각각 3인씩의 대표가 참석했다. 정부측 대표는 아피싯 웻차치와 당시 총리였다. 2014년 5월 현재, 아피싯은 현재 제1야당인 민주당 총재를 맡고 있고, 시위대 대표로 참가했던 짜뚜폰 프롬판은 3월15일 레드셔츠 운동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대치국면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이 되고 있다. [크세] |
하지만 탁신은 모두가 좋게 볼만큼의 젊잖은 협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며칠 후 레드셔츠 운동 내에서 강경파에 속하는 짜뚜폰 프롬판이 협상을 깨면서, 특히 위라 무시까퐁(Vira Musikapong 혹은 Veera Musikapong, วีระกานต์ มุสิกพงศ์: 1948년생) 같은 온건파 지도자들을 경악시켰다. 이 명령은 탁신이 내린 것이었다. 탁신은 충돌을 바라고 있었다.
4월3일, 레드셔츠 시위대는 '라차쁘라송'(Ratchaprasong) 사거리를 점거했다. 이곳은 왕궁지역에서 3~4 km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곳으로서, 정신없이 복잡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라차담는'이 방콕 구시가지의 심장이라면, '라차쁘라송'은 현대적 수도의 상징적 중심지이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년생)은 자신의 논문 <철수의 징후: 10월9일 쿠테타의 사회 문화적 측면>(Withdrawal Symptoms: Social and Cultural Aspects of the October 6 Coup)[1977년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까지만 해도, 방콕은 여전히 "동방의 베니스"라고 묘사됐다. 그곳은 운하들과 사원들, 그리고 궁전들이 위치한 낡은 스타일의 왕국에 위치한 나른한 느낌의 항구도시였다. 하지만 15년이 지나자, 많은 운하들이 도로로 바뀌었고, 많은 사찰들이 퇴락했다. 이 도시의 무게중심은 짜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주변에 위치한 왕궁 건물군과 화교들 의 밀집지역을 벗어나, 보다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시각적 측면에서나 정치적 측면에서나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구역이었고, 거대한 사무용 빌딩들과 은행들, 호텔들과 쇼핑몰들이 들어찬 지역이었다. |
레드셔츠 시위대는 '라차쁘라송'을 제멋대로 형성된 도심 속의 시골마을처럼 바꾸어놓았다. 거리에는 첨탑 모양의 천막들이 들어서 식당과 휴게소들, 노점들과 진료소가 설치됐다. 그리고 집회 구역 외곽은 타이어와 날카로운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리케이드를 둘러쳤다.
가난한 북동부 이싼지방에서 온 대규모의 라오족(Lao)(역주) 인구들이 갑작스레 방콕의 중심부에 넘쳐났다. 그들은 태국의 사회구조에서 하층민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방콕 근교의 공장이나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버스, 툭툭, 오토바이 택시(=머떠), 택시 등의 운전수들도 모였다. 그리고 기업과 부유층 가정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이들, 산업화된 방콕 매춘산업의 근거지인 마사지샵이나 섹스 바들에서 수많은 고객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던 여성들도 있었다.
(역주) 태국의 주류민족인 '타이족'(Thais)과 라오스의 주류민족인 '라오족'은 모두 '따이족'(Tais)이라는 보다 넓은 범주의 민족군에 속한다. 타이족과 라오족은 혈연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큰 차이를 갖고 있진 않지만(한국어 방언 정도의 차이), 나름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태국 북동부지방(=이싼지방)은 라오어 사용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라오스의 라오족과 구분하여 '콘 이싼'(Khon Isan: 이싼 사람)이나 '타이 이싼'(Thai Isan: 이싼 태국인)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이들을 '이싼 라오족'(Lao Isan)이나 '라오족 태국인'(Thai Lao)이라고 부르고 있다. |
보다 부유한 방콕 시민들은 일상적으로 그들의 서비스를 받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 현대적 도시의 한복판을 갑작스레 점거한 채 최고가 부동산 지역을 가로×세로 각각 2 km 규모로 통제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방콕의 오래된 기득권층 및 점차 번영하면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던 중산층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적인 위계질서의 역전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우주 전체를 유지하던 근본적 규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라차쁘라송은 이제 위험한 무질서 구역이 됐다. 마치 1976년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 마당에 학생들이 대규모로 모였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전통적인 지배력에 대한 매우 공개적인 도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특권적 지위를 규정한 [태국식] 카스트 제도에 반기를 든 것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고상한 위치를 점유했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이러한 위협은 대단한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들은 이 같은 위협이 질서와 조화의 토대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일로 간주했다.
4월7일, 레드셔츠 강경파 지도자 중 한명인 아리스만 퐁르엉렁은 시위대 중 일부에게 [안보담당 부총리이자 '비상사태 대책본부'(CRES) 본부장인]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을 붙잡으러 국회로 가자고 선동했다. 국회로 들이닥친 시위대는 수텝의 경호를 맡고 있던 헌병 경호팀을 붙잡아 무장을 해제시켰다. 수텝과 여타 국무위원들은 사다리를 타고 이웃한 건물로 피신한 후, 헬기를 이용해 대피했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역주]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군 병력이 치안유지에 동원될 수 있음.) 다음날(4.8)부터 강제진압이 시작됐다. 군대는 레드셔츠 운동의 위성TV 채널을 차단시켰다. 4월9일(금) 레드셔츠 시위대는 방콕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빠툼타니(Pathum Thani)에 위치한 '타이콤'(Thaicom) 위성기지국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기지국 주변에서는 군대와 시위대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 제1차 유혈사태 (4.10 토)
4월10일, 수텝의 명령에 따라 군대가 시위대 해산작전에 돌입했다. 군 병력은 레드셔츠 시위대 약 5천명 정도가 머물고 있던 '판파다리' 집회장 및 메인 집회장인 '라차쁘라송'에서 행동에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판파다리'를 향해 전진하던 진압군 병력은 '레드셔츠 사수대' 및 일반 시위참가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마카완 다리'(Makkawan Bridge, สะพานมัฆวาน)에서 정지했다. 군인들은 최루탄과 고무탄, 그리고 물대포를 발사했다. 시위대는 쇠파이프와 골프채, 그리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육군의 헬기는 공중에서 최루가스를 뿌려댔는데, 시위 군중 속에 있던 신원미상의 총잡이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다.
오후 4시경, '마카완 다리'의 군인들이 시위대 방향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군대는 '마카완 다리'의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했고, 레드셔츠 시위대가 자신들의 위치를 그대로 확보한 채 싸움이 멈췄다. '라차쁘라송'에서도 보안군 병력은 시위대를 물아내는 데 실패했다.
어둠이 내린지 몇시간 후, '딘소 로드'(Dinso Road)에서 다시금 폭력사태가 분출됐다. 현장 지휘관은 '제21연대'(=왕후근위대) 연대장 롬끌라오 투와탐(Romklao Thuwatham) 대령이었다. 롬끌라오 대령은 시리낏 왕후의 측근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장교 중 한명이었고, 한해 전 발생했던 레드셔츠들의 2009년 송끄란 시위 를 무력 진압하는 데도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21연대 부연대장 끄리양삭 난타포티쩻(Kriengsak Nanda-photidej) 중령은 시리낏 왕후의 과거 애인이었던 나롱뎃 난타포띠쩻(Narongdej Nanda-photidej) 대령의 이복 동생이었다.
밤 8시45분경, '딘소 로드'의 분위기는 대치 국면이긴 했지만, 비교적 쾌활한 분위기였다. 군대의 "심리전" 트럭에서는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피아노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군대가 틀어주는 음악 소리를 지워버리기 위해 자신들의 방송차량을 전방으로 배치한 후, [그 음악소리에 맞춰] 웃고 떠들며 춤을 추는 상황이었다.
밤 8시46분, 군대의 장갑차가 최루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 때문에 최루가스는 발사되자마자 군대의 대오를 향해 되돌아왔고, 가스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던 군인들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최전방 근처에서 총성이 들렸고, 분위기는 갑작스레 암울하게 변했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장갑차 위에 있던 군인들에게 생수병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상황은 통제불능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수병들 사이로 몇몇 유리병이 섞여서 날아오자, 군인들은 시위대에게 유리병들을 좀 보라며 손짓을 해보이기도 했다. 군대와 시위대의 충돌은 연극 같은 느낌이었고, 서로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었으며, 진짜 위협이 될만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때 군인들이 앞으로 전진하며 허공에 경고사격을 했지만, 군인들은 웃고 있었다. 군대가 발포한 일부 실탄은 '민주기념탑'(Democracy Monument)의 첨탑 4곳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밤 8시52분, 21연대장 로끌라오 투와탐 대령은 '민주기녑탐' 사거리를 대면하고 있는 '딘소 로드' 남쪽 끝 부근에 장갑차들을 배치하고, 그 차량들 사이에 임시 지휘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때 암살을 목적으로 한 수류탄 1발이 정확하게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롬끌라오 대령은 주변에 있던 군인 3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또한 그 밖의 군인 여러 명이 수류탄 파편에 다리 부상을 입었다. 대부분 매체들은 이 공격에 관해, 일정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M-79 유탄발사기를 이용한 공격이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수류탄은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던져넣었거나 굴려넣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로이터 통신'(Reuters)의 일본인 카메라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Hiroyuki Muramoto, 村本博之: 당시 43세)는 이 수류탄이 폭발하는 광경 및 놀란 군인들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용 심리전 트럭에서 틀어주던 피아노 음악은 아직도 배경음악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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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일본인 카메라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히로 무라모토) 기자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촬영했던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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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딘소 로드'의 수류탄 공격 발생 직후, 군병력은 장갑차들을 그대로 세워둔 채 후퇴했고, 이어 레드셔츠 시위대가 지휘소가 있던 위치까지 금새 전진해 들어왔다. 롬끌라오 대령 등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군인들을 레드셔츠 시위대 소속 의사와 군인들이 함께 달라붙어 응급처치를 시도하고 있다. |
잠시 후, 21연대 부연대장 끄리양삭 난타포티쩻 중령을 목표로 한 2번째 수류탄이 날아들었고, 끄리양삭 중령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며칠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딘소 로드'에 있던 200여명의 군인들은 불과 30초라는 눈깜빡할 사이에 자신들의 지휘관 2명을 모두 잃었다.
'민주기념탑' 주변으로 배치된 군 병력들은 금새 혼란에 빠졌고, 레드셔츠 시위대가 '딘소 로드'로 몰려들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죽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의 헬멧과 무기들을 빼앗기도 했다. 군 병력은 부상당한 동료들을 후송하기 위해 시위대와 협상을 시도했고, 대치 국면이었던 분위기도 혼돈과 혼동의 느낌으로 변했다.
레드셔츠 시위대 중 한명인 와산 푸통(Wasan Puthong)은 '사뜨리 위타야 중고교'(Sattriwittaya school, โรงเรียนสตรีวิทยา) 앞 횡단보도에서 태국 국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때 1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그의 두개골이 부서져나갔고, 그의 뇌가 길바닥에 쏟아져내렸다. 무라모토 히로유키 기자도 와산의 시신을 촬영하기 위해 그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때, '딘소 로드'에 있던 최소 1명 이상의 군인들이 이 횡단보도 주변에 있던 레드셔츠 시위대와 기자들을 향해 '나토'(NATO: 북대서양 조역기구) 진영 정규군의 표준 실탄인 5.56mm 고강력 탄환을 일제히 사격했다. 무라모토 히로유키 기자를 비롯한 여러 명이 이곳에서 사살당했다.
4월10일 밤 '딘소 로드' 및 그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을 레드셔츠 시위대와 군 병력의 대결이란 관점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윤리적으로 적절한 구분을 짓는다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려 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구분이 될 것이다. 그날 밤 레드셔츠 시위대든 군인들이든 양측의 절대 다수는 타인을 죽이려는 의사가 없었다. 이날 밤 사망자는 총 25명이었다. 그 중 20명은 민간인이었고 군인은 5명이었다.
심지어 탁신과 가까운 짜뚜폰 프롬판 같은 강경파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레드셔츠 지도부는 '딘소 로드'에서 발생한 사태에 경악했다. 그들은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탁신 전 총리가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1연대 지휘부에 던져진 수류탄들은 '레드셔츠 사수대'가 던진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탁신이 비밀리에 운영했던 제2의 무장조직 소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군-군 사이의 공격사건이었다. 필시 '딘소 로드'의 제21연대 병력처럼 위장한 '제1사단'(=국왕근위대) 관련 정복 군인의 소행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일은 시리낏 왕후 및 군 수뇌부의 왕후 측근들에게 잔혹한 방식으로 경고를 보내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일이었다. 그것은 군부가 위험할만치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후였다.(역주)
이 사건은 특히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에게 깊은 근심을 안겨줬다. 아누퐁의 충성심은 분열되어 있었다. 그는 시리낏 왕후의 최측근이기도 했지만, 탁신과는 '군사예비사관학교'(AFAPS: [역주] 고교과정의 통합사관학교) 10기 동기생이기도 했다. 아누퐁은 군 병력이 레드셔츠 시위대를 계속해서 강제진압할 경우 군부가 분열하여 내전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역주) 군대의 강제진압이 있기 직전, 시위현장 말고도 다른 곳의 군 부대에서 레이저 조준경까지 장착한 특공대가 쁘라윳 짠오차 장군의 심복 지휘관을 기습해 암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공격으로 '보병 제2사단'(=왕후근위사단) 사단장인 왈릿 로짜나빡(Walit Rojanapakdi) 소장이 중상을 입었다. |
* 지속되는 시위 정국
4월10일의 폭력사태 이후, 레드셔츠 운동은 싸움으로 상처투성이 된 '라차담는 가' 지역을 포기했다. 대신 '라차쁘라송' 사거리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레드셔츠 운동 지도부의 인정과 허가 하에, 세댕의 '레드셔츠 사수대'가 집회구역 외곽을 방어하고 요새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편, 탁신의 비밀 무장조직인 '블랙 셔츠'(Black Shirt) 도발자들은 '룸피니 파크'(Lumphini Park)에 진을 쳤다. 그들은 매일 밤 해가 진 후 밖으로 나와, 군인과 경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11년 발표한 조사보고서 <혼돈으로의 휘말림>(Descent Into Chaos)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HRW의 조사는 그 공격사건들이 [세댕의] '레드셔츠 사수대'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레드셔츠 운동(UDD) 내의 비밀 무장조직 분파가 저지른 것이란 점을 발겼했다. 그들은 바로 시위대와 언론에서 '블랙 셔츠'나 '맨 인 블랙'(Men in Black)으로 부르는 이들이지만, 반드시 검은 옷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이 무장조직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군사용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모습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포착됐다. 이들은 AK-47 및 M-16 자동소총, M-79 유탄발사기 등을 소지한 채 정부군과 충돌했다. |
'블랙셔츠' 무장세력은 교묘한 도시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고, 평화적인 민간인 시위대 사이에 숨어있다가 '히트 앤 런' 방식의 공격을 감행한 후 사라졌다. 조직원 대부분은 군복 스타일의 복장이나 민간인 시위대 같은 복장을 착용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두워진 후에 공격했고 매우 노련했다. 이 방법은 정규군 병사들에게 참다운 공포와 혼돈을 불러일으켰다. 공격받은 군 병력 대부분은 심지어 공격을 당할 때조차 '맨 인 블랙' 조직원들을 목격하지 못했다.
한편, 왕족들에 관한 더 많은 비밀들이 공적 영역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2010년 4월, 호주 국영 ABC 방송은 태국의 왕위계승 과정에 관한 우려와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의 몹쓸 악명에 관한 내용을 공공연히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ABC 방송은 태국 당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방콕 지국을 일시적으로 폐쇄 했고, 자사의 태국인 직원들은 이 다큐멘터리 내용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이 프로그램의 하일라이트는 [태국 극우 보수 영자지 <더 네이션>(The Nation)의 편집국장] 타농 칸텅(Thanong Khanthong)이 자사의 보도가 왕세자의 괴상한 행동을 다루지 않는 것을 변명하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인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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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호주 ABC가 2010년 4월 태국 왕위계승 및 정치위기에 관해 심층 보도한 다큐멘터리. |
4월19일, [왕실 종친이기도 한] 수쿰판 버리팟(Sukhumbhand Paribatra: 1952년생)이 정부측 대표로서 탁신과 대면 협상을 하기 위해 브루나이로 날아갔다. 하지만 협상은 별 진전이 없었다. 수쿰판은 귀국하자마자 '레드셔츠 운동' 지도부와의 협상도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아피싯 총리의 마음은 바뀐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중단토록 명령했다.
4월22일, 탁신의 비밀 무장조직이 '룸피니 공원'에서 M-79 유탄발사기를 박격포처럼 사용해 발사한 수류탄들이 '살라댕 지상철 역'(Sala Daeng skytrain station) 및 친정부 단체가 집회를 벌이던 '실롬 로드'(Silom Road)에 떨어져, 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4월28일, 방콕 북쪽의 고속도로에서 혼돈에 가까운 충돌이 발생했다. 군 병력이 실탄을 발사했는데, 군대의 오발 사고로 군인 1명이 사망했다.
기득권층 가운데 시리낏 왕후의 측근 그룹과 가까운 강경파들은 아누퐁 육군사령관과 아피싯 총리에게 레드셔츠 시위대를 보다 강경하게 진압하라며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망설였다. 자국민 동포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받았을 때 군대가 과연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관해, 아누퐁 육군사령관은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아피싯 총리는 아누퐁 사령관을 믿어도 좋을지에 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태국 기득권층 강경파에 비하면 두 사람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에 속했다. 그리하여 아피싯은 5월3일 TV 연설을 통해 <국가화합 및 정국위기 해소를 위한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2010년 11월 14일 조기총선 실시 및 시위를 중단할 경우 사회적 불공정에 대처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 등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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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의 2010년 5월 3일 TV 연설. |
(사진: AP) 5월 4일 밤, 아피싯 총리의 제안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레드셔츠 시위대 지도부. 좌로부터 짜뚜폰 프롬판 당시 의원, 위라 무시까퐁 의장, 나타웃 사이끄어. |
(사진: AP) 5월 4일 밤, 아피싯 총리의 제안에 대해 기본적 동의 입장을 표명한 지도부의 발표를 들은 후, 환호하고 있는 레드셔츠 시위대. |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이피싯의 이러한 입장 발표는 '라차쁘라송'의 레드셔츠 시위대에게는 대단한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측의 강경파들은 이러한 결과를 수용할 수 없었다. 탁신이나 시리낏 왕후의 측근들은 자신들의 양보가 필요한 평화적 해법을 바라지 않았다. 시리낏 왕후 및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과 가까운 군부의 매파 장성들은 아피싯의 "비겁함"을 역겨워했고, '옐로셔츠 운동'(PAD)이나 타농 깐텅 같은 보수 언론인들도 아피싯의 나약함을 맹비난했다.
한편, 레드셔츠 운동 지도부는 아피싯이 자신의 제안 중 몇 가지 사항들을 설명한 후 일시적으로 그 제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탁신이 짜뚜폰 프롬판과 세댕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개입한 후, 레드셔츠 지도부는 [안보담당 부총리인] 수텝 트억수반의 체포 요구 등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이 같은 추가 제안은 아피싯을 고립시키고 옐로셔츠 진영의 매파들을 분노하도록 만들어 휴전 성립을 가로막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한 전략은 먹혀들었다.
5월8일, '실롬 가'에서 오토바이를 탄 괴한들이 거리를 달리면서 가한 총격으로 경찰 2명이 살해됐다. 5월12일, 아피싯 총리는 시위대가 평화적 해법의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 아누퐁 육군사령관은 옆으로 배재됐고, 시리낏 왕후가 가장 선호하는 매파 장성이자 육군본부 참모장인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이 레드셔츠 시위의 최종적인 강제진압 책임을 맡았다. [쇼핑센터들이 밀집한] 레드셔츠 집회구역에 대한 단전 단수 조치도 이뤄졌다.
한편, 탁신이 평화적 해법을 방해하자, 레드셔츠 지도부에도 분열이 생겼다. 세댕은 위라 무시까퐁과 나타웃 사이끄어(Nattawut Saikuar: 1975년생)를 맹비난했다. 위라는 집회장에서 이탈했다. 양대 진영 모두에서 온건파들이 강경파들에 패하고 있었다.
* 세댕의 암살과 최후의 항쟁
5월13일, 군 병력은 ['룸피니 공원' 앞의] '라마 6세 로드'(Rama IV Road)와 '본까이'(Bon Kai)에서 구경꾼들과 시위대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여러 차례 가했다. 이날 밤, 세댕이 집회구역 외곽 경계선 주변에서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기자와 인터뷰를 갖던 중 저격수의 총탄에 이마를 피격당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며칠 후 사망했다. 5월14일부터 폭력사태가 고조됐고, ['실탄사용 허가구역'이 설치된 상태에서] 군대가 집회구역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방콕 시내 곳곳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빈발했고, 불타는 바리케이드에서 발생한 연기 구름으로 인해 하늘은 검게 변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11년 발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5월14일부터, 군 병력은 보다 잘 조직화되고 보다 신속하게 폭력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시위대와 대면하게 됐다.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 그룹은 이제 바리케이드 주변에서 더욱 공개적으로 군 병력을 공격했다. 특히 '본까이' 지역 및 '딘댕' 지역에서는 불타는 타이어와 화염병, 새총으로 발사한 쇠구슬, 사제 폭발물 및 여타 무기류가 사용됐다. 바리케이드 지역의 싸움에 참가한 젊은이 대부분은 집회장에 있던 레드셔츠 시위대와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블랙셔츠' 무장조직도 바리케이드 주변의 싸움에 수없이 합류했다. 그들은 공격용 무기들을 발사했고, M-79 유탄발사기도 사용했다. |
한편, 군대는 진압군 병사들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테러리스트" 용의자로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발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11년 발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HRW의 조사는 빌딩 위에서 시위 장소를 조망하고 있는 군 저격수(=스나이퍼) 뿐만 아니라, 지상에 방호용 참호를 설치한 군인들 역시 시위대를 향해 자주 총격을 가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공격받은 시위대는 비무장 상태거나, 혹은 군 병력이나 타인들에게 사망이나 중상을 입힐만한 즉각적 위협을 가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군인들이 사격의 목표로 삼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에는, 레드셔츠 시위대의 바리케이드와 군 병력의 대오 사이에 있는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갔던 모든 이들이 포함됐음은 명백하다. 또한 군대의 대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하는 거리에서 돌이나 화염병, 그리고 불붙은 타이어를 굴려보낸 이들도 포함됐다.
한편 태국 정부는 5월 14~18일 사이에 살해당한 이들이 어떤 상처를 입었던 것이지, 그에 관한 상세한 검시 결과를 포괄적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HRW가 검토한 사건들은 비무장 시위대가 단 1발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했다는 것을 보여주어, 저격수들과 고성능 망원경이 사용됐음을 시사해주었다. 또한 동영상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은 군대가 비무장 시위 군중에 빈번한 총격을 가해 부상이나 사망에 이르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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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euters) 2010년 레드셔츠 시위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진행된 '인간사냥'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은 평범한 농민이나 노동자들이었다. 사진 속의 희생자 역시 이후 생사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
* 최종 강제진압 (5월19일)
5월19일 여명, [장갑차를 앞세운] 군 병력이 집회장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미국의 안보정보 제공 기업 IHS가 발행하는] <제인스 인텔리전스 리뷰>(Jane's Intelligence Review) 소속 애널리스트 앤소니 데이비스(Anthony Davis)는 '휴먼라이츠워치'(HRW)에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반적인 진압작전은 무능함 때문에 휘청거렸다. 젊은 징집병 병사들은 '룸피니 공원'에서 어떠한 사격 통제도 없이 천막들이 마구 총격을 가해 겁을 주었다. 이런 류의 작전에서 기대되는 지휘나 통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작전은 2가지로 진행됐다. 하나는 ['라차담리 로드'(Ratchadamri Road) 및 '와이어리스 로드'(Ratchadamri Road) 등에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진행하는 작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룸피니 파크' 경내를 정지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작전들은 전혀 공조가 되지 못했다. 내가 군 병력과 함께 공원 담장을 따라가고 있을 때, 그들은 공원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한 사격 대상들 중에는 공원 내에서 작전 중이던 다른 부대도 포함됐다. "아군끼리의 사격" 사고 발생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룸피니 공원'은 원래 '실탄사용 허가구역'이었고, 군인들은 '와이어리스 로드'와 '라마 6세 로드'를 따라가며 사격을 했다. |
레드셔츠 지도부는 대부분 경찰에 자수했다. 몇시간 동안 혼돈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센탄 원'(Central World: 센트럴 월드) 쇼핑몰을 비롯한 수십 동의 빌딩들이 폭도들의 방화 공격으로 불타서 파괴됐다. 또한 이러한 건물 방화사건들 외에, '왓 빠툼 와나람'(Wat Pathum Wanaram) 사원 경내에서도 6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왓 빠툼 와나람'은 원래 피난용 성소로 지정됐던 사찰로서, 당시 이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피신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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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0년 5월 19일 CNN이 촬영한 불타는 '센탄 원' 쇼핑몰의 모습. 시위의 마지막에 발생한 이 폭동은 레드셔츠 시위대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불량배들이나 마약중독자 등이 가세한 광적인 폭도들의 소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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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0년 5월 19일 '왓 빠툼 와나람' 사찰 내의 분위기를 기록한 동영상. 이곳에선 간호사 1명을 포함하여 무고한 사람들 6명이 저격수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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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5월19일의 진압작전에서 희생된 한 사망자의 주검이 붉은 천에 둘러싸여 있다. |
많은 목격자들의 풍부한 증언들과 현장 사진들, 그리고 동영상 자료들을 보면, '왓 빠툼 와나람' 사원에서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가 롭부리(Lopburi) 도에 주둔하는 '제3 특수전 연대'(3rd Special Warfare regiment) 소속 병력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 이 부대는 사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상철 철로 위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사찰 경내를 향해 사격을 가해 6명을 살해했다. 지상철 철로 위 병력의 지휘관은 '제3 특수전 연대' 예하 '제1대대' 대대장 니밋 위라웡(Nimit Weerawong) 소령이었고, 니밋 소령의 지휘에 따라 치명적 총격을 가한 것은 솜욧 루웜참파(Somyot Ruamchampa) 상사였다.
증언에 나선 수십명의 목격자들 중에는 이 사찰에 피신해 있던 레드셔츠 시위대와 부상자를 응급처치하던 의료진 외에도, 현장에 있던 외신기자도 최소 3인이 포함됐다. 여기에는 <인디펜던트>(Independent) 지 소속 기자 앤드류 분컴베(Andrew Buncombe), 캐나다의 <글로브 앤 메일>(Globe and Mail) 소속 기자 마크 맥킨논(Mark McKinnon), 호주의 포토 저널리스트 스티브 티크너(Steve Tickner)가 포함된다. 이들은 고가철로에 나타난 위장복 착용 남성들이 사격을 가하자 사찰 경내에 있던 민간인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던 일을 묘사했다. 2010년 12월에 폭로된 태국 '특수 수사국'(DSI)의 수사결과는 사망자 중 최소 3명은 지상철 철로 위에 있던 특수부대원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으며, 6명 모두 군인들에게 살해됐다는 사실에 관해 풍부한 증거들도 확보하고 있다. 희생자들은 모두 고강력 탄환 및 탄두가 초록색으로 독특한 M855 실탄에 희생됐다. 6명의 희생자 전원이 고강력 탄환에 맞았고, 그 중 4명의 시신에서 M855 실탄 파편이 발견됐는데, 이 특별한 실탄은 특수부대 군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 수사결과 보고서에는 익명의 특수부대원 몇명도 기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민간인을 목표로 했다는 것은 부인했지만, 자신들이 지상철 철로 위에서 사격을 했었다는 사실만큼은 자백했다.
'왓 빠툼 와나람' 사찰의 살인사건은 너무 충격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어서, 군인들이 고의적 도발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군인들은 자신들이 이 사찰 담장 앞에 있던 무장한 도발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군인들은 탈진한 상태에서 패닉 상태에 빠진 채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오고 있었다. '왓 빠툼 와나람' 사찰의 살인사건에 관한 가장 신뢰할만한 설명은, 당시 군인들이 사찰 앞에 있던 '블랙셔츠' 공격자들, 혹은 그렇게 여겨진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서 사격할 때 발생하는 현상에 따라, 발사된 탄환들이 경로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지상철 철로 위에 있던 군인들은 사찰 담장과 경내에 많은 양의 실탄을 퍼부은 후 사격을 중지했다. 아마도 이 사건은 무능함이 초래한 비극일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레드셔츠 시위 과정에서 최종 집계된 희생자 수는 사망자 91명과 부상자 1,800명이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승자는 없었다. 수많은 레드셔츠 시위대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고 그들이 주장한 요구들과 불만사항도 의문의 여지없이 적법한 것이었지만, 탁신의 비밀 무장조직이 도발적 충돌을 벌이면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말았다. 로버트 암스테르담(Robert Amsterdam)이 이끄는 탁신의 국제 법무팀을 필두로, 탁신 진영은 '블랙셔츠' 무장조직이 이번 폭력사태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전적으로 부인했고, 심지어는 그런 세력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신뢰할 수 없는 발언 수준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서 나오는 거짓말들은 더욱 커다란 분노를 유발시킬만한 내용이었다. 총리인 아피싯 웻차치와, 안보담당 부총리 수텝 트억수반, 쁘라윳 짠오차 대장, 그리고 육군본부 대변인 산선 깨우깜넛(Sansern “Kai Oo” Kaewkamnerd: 1963년생) 대령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압에 나선 정부군은 저격용 탄환 2,500발을 포함하여 총 11만7,923발의 실탄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군대가 "단 1명도 부상시키거나 죽인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태국 군부는 사망자나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모두 "맨 인 블랙" 괴한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육본 대변인 산선 대령은 "일본인 기자를 포함하여 군대가 레드셔츠 시위대를 죽이거나 부상시켰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부인 가능하다. 그런 사람들을 죽여봤자 우리 군대에는 어떠한 이익도 없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수텝 트억수반은 사망자 중 일부가 "우연히 실탄들을 만났다"고 주장하여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기도 했다.
기득권층은 민간인 희생자 수를 최소화시키고 5월19일에 발생한 폭동 피해를 과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마지막 날의 공격사건은 일반적인 레드셔츠 시위대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6월이 되자, 아피싯 정부와 외무부는 <자주 받는 질문들>(Frequently Asked Questions)이란 제목의 편향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지닌 문서를 언론인들과 외교관들에게 배포했다. 이 문건에 들어 있는 대단히 이례적인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 태국의 군주는 정치를 초월합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입헌군주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나 갈등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 하지만 최근 몇년 간 각기 다른 정치 세력들이 국왕 폐하를 정치에 끌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국왕 폐하께 개입을 요청하는 일 역시 정치적 동기를 가진 것으로서, 군주를 정치적 싸움에 끌어들이려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다면 중단돼야 할 일일 것입니다.
- 왕위계승에 관한 문제는 명백합니다. 왕위 계승권자에 관한 내용 및 왕위계승 절차에 관한 2가지 사항입니다. 그와 관련된 규정들은 현행 헌법(=2007년 제정 헌법)이 [그와 관련된] 추밀원, 국회, 내각의 역할을 각각 규정하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국왕 폐하께서 지난 6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태국 국민들의 안녕을 위해 일해오셨기 때문에, 왕위계승이란 주제는 태국인들이 논의하기엔 확실히 어려운 주제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태국 국민들이 이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습니다.
- 군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금기사항이 아닙니다. 태국에서 <왕실모독 처벌법>이라고 알려진 규정은 군주제에 관한 토론, 특히 학술적인 토론에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지난 700년간 태국 왕국에 존재했던 군주제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같은 내용이 포함됩니다.
- 현 정부는 법률에는 오직 한가지 표준만이 있다고 생각하며, 법 앞에선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옐로셔츠 운동'(PAD)과 관련된 사건들이 진행되는 속도에 일부 국민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태국 사법부는 독립성을 갖고 있고, 행정부와는 별개의 기관이란 점도 사실입니다. 정부가 사법부의 일에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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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TV3) '레드셔츠 운동'의 시위 정국에서 선포됐던 '국가비상사태'는 5월19일 최종적인 강제진압에도 불구하고 그 해제 일시는 7월7일이었다. 아피싯 정권은 유혈 시위진압 후 정국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국가비상사태' 해제를 앞둔 7월1일부터 사태의 여파 극복을 위한 전국적인 국민화합 캠페인을 전개했다.
7월 1일부터 시작된 이 캠페인은 특히 <'6일간 6300만의 생각들' 프로젝트>(โครงการ "6 วัน 63 ล้านความคิด")란 이벤트를 그 중심에 두었다. 이 행사는 태국 국민 6300만명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원하는 국민들이 정부가 설치한 의견수렴장으로 전화(02-304-9999번 등)를 걸어 의견을 개진하도록 한 것으로서,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일 12시간 씩 꼬박 6일간 진행 진행됐다. 하지만 이러한 캠페인 진행에도 불구하고, 아피싯 정권은 결국 7월6일에 또 다시 3개월 기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공안정국을 이어갔고, 국민들의 여론은 홈페이지를 이용해 수렴해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6일간 6300만의 생각들"이 시작된 7월1일부터 일주일 간, 태국 방송들의 톱뉴스는 이 행사에 집중됐고, 그 방송시간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보도 프로그램에서만 다뤄진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내보내는 공익광고 방송도 수시로 전파를 탔다. 이 공익광고에 무료(?) 모델로 출연한 사람은 다름아닌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였다.
이 행사기간 중 연예인들과 유명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전화수신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첫날 아피싯 총리가 직접 전화수신원 역할을 할 때는, 태국의 유명 스타들이 총리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언행을 보고 있노라면 화합과 행복을 추구하는 태국 사회 특유의 즐거움과 쾌활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날도 북동부 지방의 어느 농촌마을에서는, 한 소녀가 할머니와 함께 앉아서 지난 5월 방콕의 시위현장으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동구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크세] |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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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국 레드셔츠들이 참다운 존재감을 알렸던 사건이자,
21세기 전세계에서 발생할 정치적 격동을 미리 예고편처럼 보여준 사건이었죠..
벅역을 하고 자료를 편집하는 동안,
당시 제가 태국에 머물면서 70일간의 상황을 중계할 때의 상념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울노님께서 정말 대단한 작업을 하셨네요. 읽어 내려가기도 힘든데...
정성스럽게 정리 된 자료 잘 봤습니다. 유익한 자료 항상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항상 즐거운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