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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도 시간을 기억한다-사이코메트리
“범인이 두고 간 단서는 이 뿐이야.”
“이게 뭐죠? 종이로 만든 고리 같은데…”
“이건 뫼비우스의 띠[1]야.”
“뫼비우스의 띠?”
“그래, 어쨌든 사건은 미궁이고,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두고 간 이 기묘한 종이조각 뿐이야. 이제 네 힘이 필요해, 에지 ”
“글쎄… 한 번 해보죠….음…. 보이는 건… 가위와… 육각형…그리고 별….”
위 에피소드는 “미스터리 극장 에지”라는 일본 만화의 일부분입니다. 불량스러워보이는 고등학생 에지는 우연한 기회에 엘리트 여형사 시마를 알게 되고, 그녀를 도와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하는 활약을 하게 됩니다. 아직 고등학생일뿐인 에지가 어떻게 경찰들도 못 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만화 속에서 에지는 사이코메트리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년, 즉 사이코메트러(psychometrer)로 등장합니다.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이 말은 그리스어의 ‘Psyche[2](혼, 영혼)'과 'metron(측정)'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로써, ‘사물에 깃들인 혼을 측정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미국의 과학자 J.R.버캐넌이 제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 물질을 통해서 과거의 잔상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투시의 일종입니다. 사이코메트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나 생명체가 아닌 식물이나 물건들에게도 그 것이 겪어온 과거가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되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사물에도 각자의 혼이 스며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전자기적인 정보의 흐름이 새겨진다고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전혀 알 수 없지만, 개중에 특별히 영감이 발달되어 있고 심령적 현상에 민감한 사람들은 물건들을 접촉하는 것만으로 그 물건이 과거에 겪은 일들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능력이 존재할까요?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이 이 비밀스런 능력을 이용해 범죄 수사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범죄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신변을 숨기고, 그들의 능력을 부정한다고 말이죠.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1964년 유트레히트의 미시시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해결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제라드 크로와저(Gerard Crois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밖에도 무수한 미궁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백과사전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그 실체가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사이코메트리는 사실 그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능력보다 그 현상 자체가 더 신기합니다. 도대체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물체가 어떻게 그것과 접촉한 모든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어떤 원리로 간직하고 있을까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를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존하는 사이코메트러, CSI 과학 수사대
혹시 작년 일요일 낮 1시에 TV에서 방영하던 ‘CSI 과학수사대’를 기억하시나요? CSI란
Crime Scene Investigation(범죄 현장 수사)의 약자로 는 범죄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사건 해결에 중요한 증거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사건을 분석하여 범죄의 원인을 밝혀내는 감식 수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유명해진 이 시리즈는 여러 종류의 스핀-오프(spin-off) 드라마[3]로 만들어질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들은 다른 수사관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범죄 현장에 도착하여 현장이 훼손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증거들을 수집합니다. 범죄현장에 놓여있는 물품이라면 뭐든지 그들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지요. 범죄 현장에 놓여있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그들의 눈에 뜨이면 범인을 검거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에 범죄해결에 있어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은 각 주마다 CSI 팀이 구성되어 있어 과학적인 범죄 해결에 힘쓰고 있지요.
가끔 TV에서 사극을 방영할 때 보면 죄인을 심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범인의 자백이었습니다. 따라서,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가 생기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심한 고문과 가혹 행위가 따르는 경우가 다반사였지요. 그러나, 매에 장사없다고 심한 고문을 가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저질렀다고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의 법정에서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범인의 자백은 증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범인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는 반드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범죄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현대 범죄 수사에서는 과학 수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 수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그렇다면 과학 수사란 뭘까요? 과학수사란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막연한 추론이나 심증이 아니라, 현대적인 시설과 장비를 가지고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사회는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발달시켜 인간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으나, 그만큼 범죄도 다양해지고 지능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약삭빠른 범인들을 잡기 위해서 수사 방식도 그만큼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대응하고 있지요.
과학 수사(Scientific investigation)란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 기구를 이용하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수사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의학, 생물학, 화학, 생화학, 물리학, 독물학, 혈청학 등 자연 과학의 모든 분야는 물론 범죄학, 사회학, 논리학, 심리학 등 사회 과학적인 원리까지 총동원됩니다. 이런 학문 분야를 통틀어 법과학(Forensic Science)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법과학의 필요성은 오스트리아의 법관 한스 그로스(Hans Gross, 1847~1915)가 처음 주장했고, 프랑스의 에드몽 로카르드(Edmond Locard)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로카르드는 1910년 프랑스의 리용 경찰청에 처음으로 과학 연구실을 만들고 스스로 실장이 되어 범죄 해결에 과학적인 방법을 실질적으로 도입시킨 인물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경찰에서 과학수사의 일종인 감식 업무를 실시했으나, 19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후 국과수)가 설립되어 경찰청과 공조하고 있습니다. 현재 법의학, 생물학, 약독물학, 문서감정, 화학분석, 물리분석, 범죄심리분석, 교통공학연구는 국과수에서, 지문, 족흔(발자국), 거짓말탐지기, 몽타주 분석, CCTV 판독 등은 경찰청 과학수사과에서 서로 나누어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좀 끔찍하지만, 어떤 집에 강도가 들어 주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건 며칠 후, 그 근처에서 도둑질을 하던 사람이 잡혀왔는데 이 사람이 며칠 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강력히 의심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요?
예전이었다면 용의자를 물고를 내서 이실직고를 받아내는 방법을 썼을테고, 에지라면 피해자를 해친 흉기를 사이코메트리해서 거기서 범인의 인상을 읽어냈을 테지만, 현재의 수사관이라면 각종 증거들을 모아 국과수로 보내어 감정 결과를 기다릴 겁니다. 국과수에서는 먼저 법의학과에서 시신을 검시해 죽음의 종류(자연사, 병사, 자살, 타살 등)와 사인(死因), 사망 추정 시간 등을 밝혀낼 것입니다. 만약 피해자가 타인에게 흉기에 찔려서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면 먼저 흉기가 어떤 종류인지 밝혀야겠죠. 피해자에게 남은 상처 자국의 깊이와 모양, 각도 등을 조사하면 흉기의 종류와 모양, 날카로운 정도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도 밝혀낼 수 있답니다. 자, 용의자의 집을 수색하여 흉기로 의심되는 물건과 범행 당시 입은 옷을 찾아냈습니다. 여기에서 가해자의 지문과 피해자의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면 수사가 빨리 끝날테지만, 이런! 그는 용의주도하게도 벌써 흉기와 옷을 깨끗이 씻어버렸네요. 그렇다면 이젠 방법이 없을까요?
이런 경우에도 방법은 있습니다. 루미놀 검사(Luminol Test)라는 것인데, 이 것은 루미놀(3-아미노플탈산히드라지드, 5-amino-2,3-dihydro-1,4-phthalazinedione)의 알칼리 용액과 과산화수소수를 섞은 혼합액입니다. 루미놀은 과산화수소수와 만나면 산화되어 푸르스름한 형광빛을 띠게 되는데, 이 과정을 일으키는데는 촉매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피 속에 존재하는 적혈구의 헴(헤민, heme)은 루미놀 반응의 좋은 촉매입니다. 따라서, 피가 묻은 곳에 루미놀 용액을 뿌리고 불을 꺼 어둡게 하면, 헴이 촉매가 되어 화학 반응이 일어나 산화된 루미놀이 푸른 형광으로 빛나게 됩니다. 이 루미놀 반응은 그 민감도가 매우 뛰어나서, 혈액이 10,000배로 희석되어도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핏자국이나, 심지어는 빨래가 끝난 옷에 남아있는 미량의 혈액도 찾아낼 수 있어서 범죄 수사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루미놀은 반드시 혈액에서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미놀 산화 반응을 촉매할 수 있는 물질이라면 뭐든지 형광을 나타내게 하기 때문에, 이 자체로 혈흔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요. 좀더 확실한 결과를 원한다면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합니다.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비롯한 체모(體毛), 혈액, 정액, 침 등에서 세포를 분리하여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개인마다 특정적인 염기 서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유전자 지문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만약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의 모근 세포에서 유전자를 추출하여 이를 용의자의 것과 비교했을 때, 그 결과가 같다면 이제는 도망갈 구석이 없게 되지요.
법과학, 사물은 말한다
아무 죄도 없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들을 바라보면 어떻게든 범인을 잡아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피해자가 범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범죄 현장에 남겨진 사물들에게라도 당시의 기억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겁니다. 그 현장에 있던 사물들에게는 당시의 기억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일 뿐이죠. 이전에 우리는 사물의 기억을 읽어내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습니다. 그것은 사물에 손을 대고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직접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증거들을 수집해 이를 분석하고 추론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루미놀로 지워진 핏자국을 찾고, 인체의 모든 조각과 분비물에서 유전자를 찾아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지문과 발자국을 찾는 과정에서 발달한 현대 과학의 모든 분야가 총동원됩니다. 이들이 찾아낸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과거를 재구성할 때, 조각들이 많다면 더 확실하고 정확한 과거를 추론할 수 있을테고, 그것이 영문도 모르고 짓밟힌 피해자의 인권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사물에게서 과거를 읽어내는 법과학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hari-hara
[1] ) 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의 띠 모양의 종이를 한번 꼬아서 끝과 끝을 연결했을 때 생기는 곡면이다.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가 처음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뫼비우스의 띠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띠는 면이 한 개밖에 없다. 이 띠는 앞면과 뒷면의 구별이 없고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다.
[2] ) Psyche. 그리스어식 발음은 ‘프쉬케’. 즉,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로스신의 아내 이름이다. 아름다운 ‘영혼’ 또는 ‘나비’를 뜻하며, 영어로는 사이키로 읽는다. 에로스의 어머니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으로 아프로디테의 갖은 구박을 받지만, 결국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에로스와 결혼한다. 고통을 견뎌내고 결국 사랑과 희열을 얻는다는 이 이야기는 인간 영혼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주제로 많이 쓰여져 프쉬케가 곧 영혼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3] )스핀 오프 드라마. 어떤 드라마에서 파생되어 나온 드라마로 속편하고는 다른 개념이다. 속편이 전편의 주인공이 그대로 등장하여 내용만 다르게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스핀-오프 드라마에는 전편의 조연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거나, 전편과 내용이나 구조는 같으나 등장인물이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CSI 과학수사대’의 스핀-오프 드라마로는 ‘CSI:마이애미’가 있다.
첫댓글 제목만 보고 설마 하리하라님이 싸이코메트리를 인정하실리가... 하며 본문을 읽었는데 "현대과학이 인정을 안한다"고만 하시고 님의 생각은 확실하게 말씀 안하셨네요. 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당연히 인정 안 하죠....현대 과학이 인정하지 않는 건 저도 인정하지 못합니당...
제가 이 CSI의 열렬한 애청자 랍니다...!! 법의학 관련 책들도 뒤적 거리고 있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