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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신약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신약성경이야말로 가장 서정적인 문학 작품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여러 가지 비극적인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신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위대한 흐름은 승리와 기쁨의 운율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그늘이 덮쳐 오는 것을 보시면서, 자신에게 일어날 끔찍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충만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들여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실 기쁨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시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으로 인하여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은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기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사도행전은 이제까지 쓰여진 책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힘을 북돋아 주는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초대 교회 사람들은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온 세계를 뒤집어놓고 있었고,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모든 서신서에는 '기뻐하라'는 권면이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위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불려진 교회의 위대한 찬송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임금의 자녀들,
너희 순례길에서 즐겁게 노래하라
존 케닉(John Cennick)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계와 사는 나라는 달라도 자기들이 받은 구원을 깊이 묵상하였을 때 그 구원이야말로 그들을 놀라움과 사랑과 찬미'로 감격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찬미의 가락이 지배적인 특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체험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비참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어휘상 모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큰 구원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 놀라움과 찬양과 찬미로 기쁨이 충만해지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가장 지독한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 중 대다수가 우리의 상태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에 걸친 강해 설교를 통해서 저는 그런 현상의 진정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구원의 위대성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구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잉태되었고, 창세 전에 계획되었고,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경륜적 역할 분담이 된 일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큰둥하고 무감동이라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다른 모든 것들을 이것에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심각하게 검토해 보고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보면 그렇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구원을 보며 묵상하면서도 그 구원의 위대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저는 그런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어느 누구든지 이런 것들을 희미하게라도 진실로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의 존재 전체를 변화시키는 주도적 동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주제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많은 분들이 이구원을 하나님 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정말 우리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어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들을 주는지 알게 된 다음에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 자신의 생활과 체험을 살펴보면 그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축복들을 왜 스스로 박탈당했는지 분명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풍성한 것들을 받고서도 왜 이렇게도 가난한 채로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임을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의미에서 대단한 부를 제공받았다면 그것들을 잘 보존하라는 격려와 권면의 말을 들을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훌륭한 부요함을 제공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충만히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지혜의 창고를 받았으며,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궁색하고 궁핍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스스로 모든 풍성한 것들과 가장 위대한 것들을 활용하려 하지 않고 그저 안일하게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째서 이런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일까요?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죄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영혼을 망쳐 놓으려는 막강한 원수와 적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지 못하도록 빼앗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가 우리에게서 축복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도 그 영광을 빼앗아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관한 한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거의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끄러워하고 주저하고 불행하고 확신이 없이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영광을 빼앗기시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 목적을 위해 전심 전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의도하신 것들을 우리가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에 마귀는 언제나 혈안이 되어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싸움을 걸며 방해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능을 둔화시키고, 우리를 끌어내려 땅만 보게 하여 눈이 침침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볼 때 기독교 설교의 큰 기능은 이런 위험들을 우리에게 경고해 줄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아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편과 우리의 편에서 그 구원의 위대함을 알아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마귀를 대항할 수 있고, 마귀는 우리로부터 달아나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해져서 마귀를 완전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고, 육체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마귀가 시도하는 모든 유혹과 공격을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궁극적인 방식은 신약성경의 복음 속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이 영원한 새생명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 문제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본질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계획된 것,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하신 것,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33년 동안 모든 일을 견뎌내신 것, 그분이 하신 거의 모든 설교, 기적들,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등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일의 마무리 부분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대번에 신약의 중심적인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영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요한복음의 주제가 그렇습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서들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주제를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명한 요한복음 3:16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무엇 때문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이것은 소극적인 차원입니다. 이어서 적극적인 차원이 나옵니다ㅡ"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입니다!다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하시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어째서 하늘의 궁전을 떠나셨습니까? 어째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요한복음 10:10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말씀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강조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고 선언함으로써 이 점을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것은 신약성경의 위대한 중심적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저는 지금 그 주제를 소개하는 정도이지만 여러분이 그 주제에 대하여 좀더 분명히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 신약의 중심 테마입니다. 그런데 어떤 설교자도 단 한 번의 강해 설교를 통해서 그 주제를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주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하기 전에 먼저 여기에서 이 주제에 관해 설정되어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발견한 첫 번째 원리는 구원의 본질과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어쩌다가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낮은 평가를 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이상한 답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국가니 비기독교 국가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국가 전체가 기독교화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의 차원에서 생각하기도 합니다. 유아 세례를 받았다든지 아니면 성인 세례를 받았다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등록 회원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또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어떤 예식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공회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서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는 거지요. 한편 어떤 사람들은 선한 삶을 영위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훈을 따라서 개인적으로 그 교훈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 애를 쓰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보여 주신 완벽한 모범을 따라가는 것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규모를 점점 더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방금 제시한 이런 것들이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독교의 가장 높고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시작 단계조차 되지 못하며,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주장의 허상을 재빨리 간파하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저는 과거 몇 년간 많은 중국 사람들 속에서 일반화되었던 구분법에 대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이상의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사람들' (Jesus people)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서구에서 중국에 온 모든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위 기독교 국가로부터 왔고, 또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술주정뱅이와 부도덕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으며, 만일 기독교가 저런 것이라면 자기들은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또 다른 서양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전에 온 사람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제대로 구분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죄사함을 믿는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또한 기독교 구원의 본질 자체를 알기 위해)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죄사함에 관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을 그런 차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기독교 구원의 본질과 목적은 영생을 소유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요? 그들의 죄가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이것이 바로 큰 차이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결코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간의 관계를 신속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갖고 방황하고 있으며, 많은 이단들이 교회에 몰래 들어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과 영생간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체로 따로 떼어 생각한다든지 다른 요소와 상관없이 직접 가능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죄 사함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는 영생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칭의와 성화(聖化)라는 단어에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손해가 있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 버리십시오. 신약성경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의롭다 하심과 죄 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죄 사함과 칭의라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거짓된 신비주의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며, 스스로를 기만하여 가장 큰 비극과 불행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에 있어서 죄 사함은 구원의 종점은 아니지만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회개와 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는길 이외에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영생(永生)은 칭의 義)와 동일한 단어는 아니지만 영생은 칭의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 이란 가장 우선적으로 터를 닦는 일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전쟁 동안에 파괴된 건물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건물은 벽이 무너져 벽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면 먼저 그 무너진 것들을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거기에 흩어져 있는 벽돌들과 오물들을 치워야 합니다. 새로 지을 그 건물의 기초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영적인 체험에 있어서도 정확히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것들이 먼저 처리되지 않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만 치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생명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와 죄책에 대해서 먼저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 이 두 가지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일 죄 사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 그 새생명을 달라고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신비주의적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칭의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인이 거룩한 새생명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칭의의 기초 위에서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 웨슬리는 16세기 스코틀랜드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이 쓴 책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의 제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정의를 발견한 이래로 그 정의를 퍽 좋아했습니다. 기독교란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과 목적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원리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이 생명을 갖기에 합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생명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기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잘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이 영생을 선물로 주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영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신약성경 전체 내용의 절대적 기본이며 사활을 좌우하는 핵심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2:1-3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상태가 바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선물을 받기 전에 처해 있었던 전인류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즉시 일어나는 질문 사항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로 해서 인간이 그런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임을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적으로 허물과 죄 가운데서 죽어 있다면, 복음이 우리에게 별효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인간이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됩니다. 그 창세기 3장은 정말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장입니다. 창세기의 처음 세장을 떼어 내고도 온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제법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런 것들은 조금도 믿을 필요가 없다. 과학적인 지식은 그런 일을 받아들일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제가 볼 때 성경의 교리들은 모두 다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알고 인식하기 전에는 기독교 구원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적 고통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이란 어떤 동물적인 단계에서 진화 중에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짐승의 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완전을 향해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아직 충분히 높은 곳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이 진리라면 성경의 많은 부분은 잘라져 나가야할 것입니다. 특히 '진노의 자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많은 부분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불완전하거나 부적합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만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고 확언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만큼 이 교리를 철저하고 분명하게 가르치신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저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 말씀의 차원에서 볼 때에만 이 모든 것이 진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벽하게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 상태와 조건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살아 있는 영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서로 교통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하나님은 사람이 그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따먹을 수 있으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먹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순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더욱더 큰 의미를 가진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나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의 기록은 우리에게 그 사건의 실상을 계속 말해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불순종한 즉시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가 깨졌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반가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쫓아내셨고, 그들이 돌아와서 완전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룹들과 화염검(劍)을 두어 지키셨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힘과 능력만 부여받은 채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상실했고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피조물로 전락하였습니다. 인간은 무지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으며 실로 하나님과 원수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영적인 일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도의 기쁨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교리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교리는 어떠한 면에서든지 자기 생활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제 인간은 자기 아비마귀에게서 태어나서 마귀의 특성을 그 성질과 생활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특성들 중 가장 악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적개심(敵을 가지고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말씀 드린 타락 교리는 성경적 구원 교리의 본질적인 부분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인간은 영생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 말씀에서 유추하여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로마서 5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라고 표현하셨음-은 우리가 타락 교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더 고상하고 조금 더 고차원적인 인간적 지식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죄악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세 번째 원리, 즉 영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을 명백히 밝혀 주시는 말씀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과 관련하여 이 사실은 논리적인 필연성을 가집니다. 성경의 교리는 완전한 논리와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한 부분을 부주의하게 생략한다면 전체 교리가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고 결심한다 할지라도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그 생명을 다시 찾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화염검을 두고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수준은 우리가 결코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지점이며 우리 자신의 공력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수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는 누구도 결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선한 행위에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다 바친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는 데 있어서는, 여러분이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저질 인간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예배당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고 선행을 열심히 행하고 있다고 강변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런 것들을 신뢰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도덕성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추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죄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요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선물로 받을 때에만 영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영생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렇게 기도하시는 그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우리에게 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신비주의의 가공할 위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는 신비주의는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입니다. 그는 늘 철저한 회의론자(懷疑論者)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비주의 이외에는 세상을 구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주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과, 우리의 문제는 그 생명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헨리 스쿠갈과 비슷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러나 거기에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절대자(絶對者)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또는 영원한 존재 속으로 점차적으로 침잠하여 그 속에서 무아지경이 됨으로써, 절대자로부터 생명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동정심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인간 단독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영원자(의 가슴속으로 침잠(沈潛)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많은 형태를 띠며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 이상한 주장을 합니다. 즉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을 받기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저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는 거지요.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이 여기에서 이 사실을 외치고 계십니다. 또한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 로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이 가능했다면 그분이 왜 하늘 영광을 버리고 굳이 이 땅에 내려오셨겠습니까? 왜 굳이 목수로 일하셔야 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왜 굳이 견뎌내셔야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극심한 고뇌와 말할 수 없는 수치와 피땀 흘리는 고통을 무엇 때문에 당하셔야 했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전체 계획이 다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참으로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이 어떤 행복을 발견하셨든지, 어떤 해방감이나 자유를 느끼고 계시든지, 어떤 마력이나 신기한 일이나 기적적인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 드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무서운 기만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이 깜짝 놀라서 너무 늦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도록 오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