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고 유적지 탐방’을 다녀와서
7월27일
오후7시에 배가 서서히 평택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갑판위로 나갔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다. 두꺼운 구름속에 태양의 붉은 빛이 얇게 퍼져있었다. 이내 붉은 빛은 청회색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떠나온 항구 인근 도시에서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배는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사방은 칠흑으로 변해갔다. 바람이 시원했다.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면서 집을 나서서부터 출국심사에 이르기까지 답답하고 편치 못 했던 감정들이 사라지는 듯 했다. 내게 여행은 철저한 자유행위이다. 나를 영 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딱히 누구한테가 아니고, 혼잣말처럼 이것저것 물었는데 신통하게도 대답이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바다가 잔잔하다고 했고, 배는 15.8노트의 속도로 항진을 하고 있으며 내해를 빠져서 망망대해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정도이고, 산동성까지는 12시간 걸린다고 했다. 배의 항로는 거의 북서쪽이고 하늘의 구름으로 보아 중국에는 비가 내릴 것이라고. 자세하게 설명을 잘 해 주어서 이배의 선원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바람을 받아들이면서 뱃길에 눈을 고정시켰다. 바람은 내게 의식을 치르게 한다. 잡념들을 없애주고 몸을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게 한다. 파도와 바람에 말갛게 씻긴 작은 조약돌처럼. 이제부터는 어제와 다른 날들을 경험하리라.
선실로 돌아와 교사회의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자리했다. 이번여행의 의미와 장보고의 일생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곳의 위치를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야기 했다. 이번여행은 30여명의 일행이 함께하는 주말학교 해외탐방 프로그램이다. 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에서 뛰어난 무예와 용기로 무령군중소장이라는 위치에 까지 올라 군인으로서 출세를 하고, 그 후 신라로 귀국하여 신라ㆍ당ㆍ왜 삼국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우리의 위대한 선조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무한 무역 경쟁시대 한가운데 있다.
그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해양개척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1천2백여년전 세계 해상무역권을 제패하여 찬란한 해상왕국을 건설한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의 업적과 해양개척정신을 되새겨보는 것이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번 여행의 시발점은 여기에 있었다. 아이들의 생각이 많이 커질 수 있는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7월28일
더디게 진행되는 뱃편 수속을 마치고 오전 9시30분에 영성시 용안항에 발을 내렸다. 나는 중국 여행이 처음이다. 차창밖을 통해 내가 처음 만난 풍경은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나라 농촌을 크게 뻥튀기한 그런 모습이었다. 넓은 옥수수 밭에 이어 과수원들이 나타나고 낮은 언덕이 이어지듯 푸른 벌판이 계속되었다. 거의 똑같은 풍경들이다. 중국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이드가 산동성에 관한 백과사전식 지식들을 말해주는데 풍경처럼 지루하게 들렸다. 그리고 몇 마디 중국어를 가르쳐주는데 열심히 따라 외웠다. 나는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앞으로 만나는 중국사람들은 나의 서툰발음의 중국어를 듣고 웃어야만 했다.
2시간가까이 차를 달려 석도진 북부 적산에 있는 법화원에 도착했다. 시야를 가릴정도의 짙은 안개속에 습기를 머금은 바람까지 불어 안경이 희뿌옇게 되어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빨간 석류가 달린 석류나무, 보라색, 흰색 붉은색의 배롱나무들이 가지런히 열을 지어있는 언덕을 오르니 장보고 기념탑이 있었다. 이탑은 1991년 세계한민족연합회 회장 최민자교수가 적산법화원에 왔다가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것인데 1994년 7월 24일에 준공되었으며 특히<장보고 기념탑>이라는 여섯글자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친필휘호라고 한다.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기념탑이 우리 선조의 위대함에 긍지를 느끼게 하였다. 아쉽게도 장보고 동상과 대불이 있는 곳은 공사중이라 갈 수가 없다고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제지하는 바람에 다시 언덕을 내려와 법화원으로 향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적산 기슭에 자리잡은 적산법화원은 건립초기 법화경을 읽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인 법화원을 지어 유민들과 유학승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과 신라촌을 이끌었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과 적산법화원에 관한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시대 천태종승려 엔닌 스님이 입당구법한 내용을 일기체로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엔닌스님은 이곳 법화원에서 2년 9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여전히 걷히지 않은 안개와 사람들이 피워대는 향의 연기로 주변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공기는 후끈하였다. 중국의 불교는 기복불교라 했던 것이 기억났다. 신라인들도 이곳에서 그들의 복과 무사항해를 간절히 빌었으리라 짐작했다. 종루에 매달린 종모양도, 철탑의 형태도, 대웅보전이나 삼불전의 건축형태와 불상의 모습도, 스님들의 모습도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뭔가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시멘트건물에서 풍기는 생경함과 거대하다는 것의 억눌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관음전의 북쪽 벽에 걸려있던 월전선생님이 그리신 장보고 영정을 못 보았더라면 내 마음이 너무 허전했을 것 같았다.
점심식사 후에 위해를 지나 연대로 이동했다. 푸른들판과 조그만 소도시들이 번갈아 나타나더니 2시간쯤 후에 갑자기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화려하고 정비가 잘된 해변가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연대는 산동에서 가장 일찍 개발된 지역이라고 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바닷가 절벽에 위치한 아름다운 연대산공원이었다. 연대시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40미터 높이의 항로표지용 등탑에 오르니 가슴이 확 트이고 기운이 샘솟는듯했다. 연대시 주변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건축 양식의 유럽식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서로 지역을 나누고 있고, 눈아래 보이는 바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이었다.
연대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개항한 곳이라고 했다. 1862년에 벌써 통상구를 개설한 연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영사관건물들이 밀집되어 있고 잘 보전되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잘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교사원을 기웃대다가 나무터널을 지나 야랑정이 있는 절벽가까이 까지 내려가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다. 기분좋은 여름날의 저녁기분을 만끽했다. 저녁 10시에 남산 호텔에 도착하였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주변을 살필틈도 없이 방에서 짐을 풀었고, 아이들 방을 살펴보았다.
7월29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남산호텔 전경을 둘러보니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호텔직원인 듯한 젊은 아가씨들이 호텔 주변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서투른 중국어로 인사를 했더니 중국어로 답을 했는데 물론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중국식 정원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였다. 정자 아래엔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엔 연노랑빛 연꽃이 피어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서 중국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고는 혼자 웃었다. 공기는 맑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나는 자유로웠다.
최근에 조성된 남산 대불을 보러 갔다. 남산대불은 그야말로 남산위에 세워진 거대한 아미타불 불상이다. 대불안에는 또 9999개의 작은 불상들이 안치되어있다. 360여개의 계단위에 인민화폐 8천만원을 들여서 건립된 이 불상의크기는 38.66m이고 무게가 30톤이라 한다. 그리고 대불 아래쪽에는 여러불전들이 들어서 있다.
중국에 와서 조금씩 불편했던 마음이 남산대불을 보는 순간 극에 달았다. 넓다는것, 크다는 것, 많다는 것, 산중턱 커다란 바위위에 쓰여진 붉은 글씨들, 거기다가 극심한 폭염까지. 중국인들 의식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대권이와 상호가 기념품 가게에서 대나무로 만든 뱀을 사가지고는 계속해서 나를 놀래주었다. 귀여운 녀석들! 무서운 척 해주었다. 서둘러서 봉래로 이동했다. 봉래각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방배정을 했다. 봉래는 옛날에 신선들이 살았다는 산 이름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호텔이 자리한 해변가에 여덟신선 조각상이 이 도시의 상징처럼 사람들을 반긴다.
오후의 일정은 봉래각과 등주수성을 보러가는 것이다. 유명한 관광명소 답게 42°C의 끔찍한 날씨인데도 관광객이 넘쳤다. 봉래각에 들어와서 비로소 중국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수로변에 집과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무질서와 소란이 느껴졌다. 사람사는 모습이다.
성문을 지나 얼마를 걸어 올라가니 낮설은 건물들이 나타났는데 도교사원이었다..도교사원은 궁궐의 조성형태를 따랐는데 모셔진 신선들이 주재하는 장소와 역할들이 다르다고 하였다. 용왕궁은 바다의 용왕이 거주하는 궁전으로 거실ㆍ침실 등으로 분류되어있었다. 이곳은 현지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거나 출항할 때 안전항해를 빌기 위해서 찾는곳 이라고 하였다. 천후궁은 하늘과 땅의 신선이 사는 곳이고 백운궁은 구름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는데 불볕더위와 수많은 관광객들 틈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늘만 찾아다녔다.
그곳을 빠져나와 수려한 바닷가 절벽을 따라 쌓은 등주 수성으로 갔다. 성벽을 따라 걷는 것도 눈맛을 충분히 즐겁게 해줄수 있었지만 더위와 피곤함을 줄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채로 사방을 바라보니 그 풍경이 일품이었다. 그야말로 선경이라 할만 하였다. 출렁이는 파도, 아름답게이어진 성벽, 기암괴석들의 절벽.
아이들과 나를 흥분시킨 것은 삼발이 택시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이름하여 삼발이 택시는 커다란 세발자전거에 리어카를 얹어놓은 형상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우리는 목숨을 내놓고 택시를 타는 위험을 감수 했지만 실제로 그곳의 교통문화를 체험한 셈이었다. 중앙선을 넘나드는 것은 보통이었고 차선의 개념이나 양보의 개념도 없이 마구 달리는 차아닌 차를 타면서 우리는 그래도 좋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7월 29일 저녁에 있었던 일
아이들 이야기가 하고 싶다.
이틀 밤을 지내는 사이 아이들과 무척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를 놀리는 횟수도 늘어났고 그 내용도 다양했다. 우리들은 언어의 유희를 즐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봉래시 중심가에 있는 쇼핑센터와 긍덕기(KFC)에 가자고 했다. 선오, 재선이, 상호, 대권이를 앞세워 숙소를 나왔다. 귀염둥이 막내티를 보이는 재선이는 마음 내켜하지 않는 듯 했지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뭔가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재선이를 숙소에 혼자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계획도 없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도 없었지만 그냥 부딪혀보고 돌발 상황에 대처해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게 여행의 묘미란 직접체험에 있다. 아이들한테는 나의 열 마디 말보다도 무엇이든 스스로 겪어보게 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불빛으로 밝고 화려하게 치장된 호텔근처의 현대식 건물을 지나치자 이내 어두컴컴한 밤거리에 전구의 빛들이 흐리게 새어나오는 중국집들이 나타났다. 불빛이 어두운건지 밤길이 어두운건지 분간이 안 되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중국 음식점들 모습이었다. 많은 음식점들이 해산물을 파는 집들이었는데 붉은 큰 고무 대야에 해산물, 어패류들을 각각 나눠담고 팔고 있었다. 우리나라 어느 바닷가의 포구를 연상시켰다. 더위를 식히려는 듯 사람들은 가게 앞에 나와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흰둥이, 누렁이도 배를 땅에 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게 안은 한두 테이블 만이 손님이 있을 정도였다. 그저 소박하고 서민적인 체취가 느껴져서 밤길이 무서울 만도 했는데 안심이 되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걷다보니 사거리까지 왔고 대각선 쪽에 쇼핑센터와 긍덕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형마트라고 불리는 종류의 쇼핑센터였다.
재선이는 살 것이 없다며 한쪽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이것저것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물건을 골랐다. 내가 감탄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진 선오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라며 곰 인형 필통을 샀고, 착하고 재치가 넘치는 상호와 대권이는 줄넘기와 지우개 등을 샀다. 한국과 비교할 때 싼 편이라고 모두들 좋아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물과 음료수를 사가지고 계산을 하고 나갈 때 계산대에서 먼저 지불한 물건의 영수증을 요구했다. 먼저 산 학용품들과 일반 슈퍼의 계산대가 달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런데 상호가 영수증이 없다고 하니까 그곳 직원이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상황을 파악한 우리들은 직원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거짓말처럼 한 사람도 없었다.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서로 통하지 않는 말로 설명을 하다가 나중에는 상호 물건을 계산했던 직원을 찾아가 물건을 보이면서 영수증이 없다고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그 직원이 상황을 눈치 채고 나가게 해주었다. 답답하고 당황하였던 아이들은 순간 후련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좋은 경험이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이 외국어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했다.
쇼핑센터에서 나오자 또 긍덕기에 가서 치킨을 사오겠다고 하여 선오와 상호만 보내고 우리 셋은 광장벤치에 앉아있었는데 상호가 헐레벌떡 뛰어와 대권이를 불렀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권이보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들이 나오지 않아서 재선이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했는데 와서 하는 말이 그때까지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 얼마를 기다리니 아이들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의기양양하게 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영어가 안통해요. 겨우 주문했어요.”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서 봉지를 열어보고는 한바탕 실소를 했다. 치킨세트를 주문했는데 받아온 것은 치킨버거였다나.
이러한 일들이 두고두고 아이들의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얘들아 사랑한다.
7월 30일
뒤돌아보고 후회하고 미련을 갖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내 발은 앞으로 내딛기를 좋아하고 내 마음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텐데도 자꾸만 떠나는 버스의 뒤 차창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기쁨보다 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더 크기 때문일까?
이른 아침을 먹고 부산을 떨고 8시에 봉래각 호텔을 출발했다. 연대를 거쳐 위해로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몇 군데 들릴 예정이었다.
10시40분에 위해시의 내고산 동쪽 기슭에 있는 환취루 공원에 도착했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솟아오른 산꼭대기에 커다란 누각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게는 그리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중국 사람들한테는 사계절 내내 훌륭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 같았다. 녹음이 우거졌고 꽃들도 만발했다. 잠시 `환취루'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다가 어쩌면 이곳이 중국인들한테는 몽롱하게 취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환취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위해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상가 건물들과 사람들이 뒤범벅이 된 거리 풍경 너머에 배들이 정박하고 있는 항만 시설과 바다가 보였다. 약간은 실망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환취루에 올라왔는데 멀리 바라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들이 금방 원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산동반도의 제일 동쪽에 위치한 위해시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중국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위해시는 아름다운 경치, 깨끗한 환경, 온화한 기후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국가급 위생도시로 선발되었고 UN으로부터 <세계 인류 거주 환경이 가장 훌륭한 모범도시>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해시에도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 1895년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북양해군이 참패한 후 일본에 강점되었고 또 1898년에는 영국군의 조계지로 강점되었다.
오르던 길과 다른 쪽으로 환취루 공원을 내려오니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아편 전쟁 때 독일 사람들과 싸웠고 광주에서 아편을 태운 등세창이라는 사람의 동상이라고 가이드가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렇게 번화한 도심 속 공원에 세워질 정도라면 굉장히 역사적인 인물일 거라고 추측했다. 가이드가 주말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면 좀 더 풍부한 내용으로 안내를 잘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미진한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일행들 대부분이 쇼핑거리를 찾느라 야단들이었다. 하기야 선물 없이 식구들보기도 민망한 노릇일 것이다
땡볕의 무더위를 감수하며 거대한 동물원 관람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배에 올랐다.
7월 30일 배 안에서
한국을 떠날 때와 똑같은 배, 똑같은 방, 똑같은 방 식구였다. 돌아간다는 생각에 긴장도 풀렸고 모든 것에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편안하고 느긋해 보였다. 아이들 방을 둘러본 후에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리면서 선실에서 잠시 쉬었다.
저녁 메뉴는 삼계탕과 김치찌개 중에서 고르는 것이었는데 대권이가 삼계탕이 맛있다고 적극 추천하였지만 김치찌개를 먹었다. 느끼했던 속이 개운해졌다.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약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배가 살살 아파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나은 것 같았다. 여행 내내 끼니때마다 음식을 참 맛있게 잘 먹었다. 온통 기름에 지지고 볶고 튀긴 음식들을 김치나 단무지 한 조각 없어도 잘 먹었고, 중국 사람들의 주식이라는 희끄무레한 빵을 좋아할 정도까지 되었는데 어제 밤늦게 음식점에서 먹은 맥주와 어패류가 안 좋았는지 배가 조금 아팠었다.
여행할 때 기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것이 여행지의 음식이다. 먹는 행위가 문화체험인 동시에 원초적 욕구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교장선생님께서 나와 아이들에게 먹거리 추억을 남겨주셨다.
중국에서의 첫째 날 저녁 연대산 공원에서 내려와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봉래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저녁 7시 30분쯤 되었는데 이미 밖은 어두워졌고 버스안의 불빛도 희미했다.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교장선생님께서 불에서 갓 구어서 냄새가 구수한 꼬치구이 두개를 손에 들고 차에 타셨다. 누군가 번데기 구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 식사 전이라 군침이 돌았다. 어둡기도 했고 아이들과 맨 뒤에 앉았기 때문에 나는 그 꼬치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교장선생님께서 앞자리에 계신 어른들을 지나쳐서 아이들 쪽으로 오시더니 친절하게도 꼬치에서 하나씩 빼서 아이들에게 직접 먹여주셨다. “아이들 사랑이 참 각별하시구나.” 감탄을 하면서 은근히 배가 고프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아이들 틈에 끼어있는 것을 빌미로 하나 얻어먹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 마음을 아셨는지 마지막 한 개를 꼬치에서 빼내어 내게 주셨는데 입에 넣어 깨무는 순간 세린이가 “이상해.”하면서 뱉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내 입속에서 소화액과 섞인 그것을 나는 숨도 안 쉬고 삼켰다. 매슥거림을 참아야했다.
그 후론 대학생 김영흠군은 나만 보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거 먹었죠?”라며 놀렸다. 나는 호기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런데 누군가 옆에서 거들기를 “그것 때문에 지치지 않고 여행 잘 했을걸요. 그거 고단백 식품 이예요.” 어쨌든 지치지 않고 여행을 잘 한건 사실이다.
저녁식사 후에 세미나 실에서 아이들과 장보고에 대한 영상물을 시청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버스로 장거리를 달려왔고 무더위 속에서 동물원 관람이 힘들었는지 모두들 졸면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을 환기시키고 여행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는데 너무 졸리다고 하소연을 하여서 모두 잠자리로 돌려보냈다.
나와 한방을 쓰는 권선원 선생님은 배멀미가 심해서 선실에 누워 있겠다 하여 나는 정선영 선생님, 이영숙 선생님이 계시는 방으로 가서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참으로 좋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에는 잠자는 것이 무척 아깝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을 위해서 떠오르는 많은 상념들을 접고 마음을 추스르고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