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
사평리는 모릿들 또는 모래들 등으로 불리운 듯하다.
사평리는 상사마을, 하사마을, 원진마을, 신평마을, 장등마을로 구성된다. 상사마을은 사평리안에서 웃 아랫으로 나누어 부를 때 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윗사평의 뜻으로 상사마을이라 부른다.
풍수학상 마을터가 학체형국이라 전하고 상사엔 사기를 굽던 사구배미, 사평중학교 뒷산을 달메라고 부른다. 여산송씨 고가가 있고 외손 발복터라고 전한다.
하사
하사마을은 풍수학상 봉의 형체라 한다하여 노인정을 봉산 노인정이라 이름하였다. 주요 지명으로 귀학쏘들, 세폿들, 부엉바위, 욧골, 마당재 등이 있고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내 건너에 있는 당산 나무에 지금도 당산제를 성대히 지낸다.
마을엔 애경사를 주관하는 위친계가 1933년도에 창립, 운영되고 친목도모를 목표로하는 복천계(1973)가 있으며 하사청년회는 남면 각 마을 청년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하사 청년회는 매년 노인위안잔치 및 노래자랑 대회 등 푸짐한 행사를 갖는다.
원진
원진 마을은 사평리에 속하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원진 마을은 서쪽과 북쪽은 구봉산과 각시바위가 있고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있다.
신평
신평마을은 원래 하사마을의 일부로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하였다. 신평은 새신자와 사평리의 평자를 각각 취하여 신평이 되었다.
신평은 5일장이 서는 곳으로 남면의 중심부이며 김해김씨, 전주이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전주최씨 둥 많은 성씨들이 상존한다.
마을엔 사평터미널, 사평주조장, 외남면 사무소터, 남면 주재소터, 사평우체국이 있다,
남면의 다른 마을은 농사가 주 소득원인데 반해 신평은 5일장을 위시한 상업활동이 주소득원이다
장등
장등마을은 원래 원진 마을의 일부로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하였다. 장등의 뜻은 장승이 있던 곳이라 처음엔 장승동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장승도 었어지고 지명도 장승등에서 장등으로 불리었다. 장등 마을엔김해 김씨, 밀양 박씨, 나주 임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원리
원리는 원동 마을, 개정지 마을, 원산마을, 석복마을 등으로 구분된다, 개정지 마을의 뜻은 산과 들이 만나는 지점을 개정지라 부르는데 바로 산아래 밭이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개정지 마을이라 부른다. 월산 마을은 달월과 메산을 각기 한자로 취하였다고한다. 월산마을의 지형은 반달 모양을 하고있다.
운산
운산마을은 송산마을, 신방마을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된다, 1800년경에는 100호 이상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대나무 밭과 논이되었다, 운산의 지명은 1800년경에 나그네가 하늘에 많이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산은 낮으나 구름으로 덮혀있어 마을을 이루고 살면 구름이 없어지고 밝은 햇빛을 보면 무병 장수한다고 부자로 살 것이라하여 운산이라 불렀다.
검산
검산 마을의 지명은 검산 마을의 검자와 화산 마을의 산자를 취하여 검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검산 마을엔 덕수 이씨, 전주 이씨, 광산 김씨, 밀양 박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화산 마을은 화산봉 아래에 있으므로 화산 마을이라 부른다, 강릉 최씨, 밀양 박씨, 하동 정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대곡
대곡리의 지명은 한실 마을의 지명을 한자화한 것이며 크다는 의미로 큰 대자를 취하고 고을의 축약형식인 골곡자를 각각 취하여 대곡리라고 불렀다. 대곡리는 한실마을, 청룡마을, 대원동 마을, 쌍용마을 등 4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된다.
고려시대에는 자치현인 대곡현의 행정 중심지던 곳이었다. 한실 마을엔 재미있는 지명이 있는데 장뜰이다. 삼한시대에 장이 이곳에 있었다하는데 현재는 농경지이며 이와 관련하여 마을의 서쪽에 장뜰보가 있다. 옥배미는 옛날 감옥터가 있었다하여 옥배미로 불리우고 동헌배미는 동헌터라고 전해져 이렇게 불린다.
벽송
벽송마을은 절벽위에 푸른 소나무가 있으므로 벽송이라 하였다. 마을엔 고인돌 22기 동쪽으로 청룡산, 서쪽으로는 천운산 자락 도둑굴과 납석 광산이 있으며 북으로는 섶밭재가 있다.
조선시대엔 큰 주물공장이 자리하였고 1860년도 초엔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과 지역민과의 알력속에 마을이 전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에 동복현감 정원필이 마을 복구에 심혈을 기울여 주민들이 규휼불망비를 세웠다.
마을앞 고인돌은 부산 태종대에서 옮겨온 선녀바위라하여 태선바위라고 불린다. 벽송의 옛 지명은 큰 우물에 소나무가 비친다하여 송정이라 하였는데 고려말에 한 도승이 벽송이라 부르면 크게 융성할 것이라하여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포란
포란 마을은 비봉포란 형국이어서 마을 이름이 포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엔 웃똠과 밑에똠이라 부르며 한자로는 상포란, 하포란이라 부른다.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이므로 명당의 지혈을 지녔으며 동서북쪽은 구봉산이 감싸고 벌통바위, 각시바위, 도토마리재와 배자치가 있다.
장전
넓은 밭이 마을앞을 가득 메워 밭전을 넣어 장전이다.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정리되었지만 예전 봉황대 보가 서기전엔 밭이었다고 전한다. 장전은 형세가 완만하고 물흐름에 막힘이 없어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지녔다하며 지금 광주 인근에선 장전 마을앞 냇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원지가 되었다.
장전 마을은 광산김씨, 김해김씨, 서산유씨, 함양박씨 등이 거주하고 영봉사 절 입구라하여 마을 입구 고개를 사문고개라 부르던 것을 사목곡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봉황강보가 있어 풍년을 기약하는 좋은 환경을 지녔고 5-6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뽁주골이라는 자연굴이 있으며 동명 수양관 입구터엔 주막집이 70년도 중반까지 있었다.
오룡
오룡 마을은 구봉산의 다섯 산등이 마치 다섯 마리 용이 감싸는 형상이라 하여 오룡이라 불렀다, 오룡 마을엔 광산김씨, 진주하씨, 전주최씨, 동래정씨, 언양김씨 등이 살고 있다. 오룡 마을엔 영동마을, 신동마을, 동천마을이 있었으나 신동, 동천은 폐촌되었다. 마을엔 영봉사, 천왕사, 불주사 등 세 절이 있었으나 폐사되었고, 불상은 대원사로 옮겨갔다고 전하며 지금은 절터만이 자리하고 영봉사 절 입구라하여 사문곡, 불주산(부처산)엔 중들의 기거를 알리는 중산골엔 불주사의 것으로 보이는 돌담, 돌구시, 절터가 있다.
마을 지명중엔 또, 숯을 대규모로 굽던 가마숯골, 옹기를 굽던 옹구점골, 아홉 봉우리의 구봉산 꿩사냥의 매를받던 매봉, 청왕산 절이었던 앞들을 중보뜰, 수반들 등이 있다. 오룡을 거슬러 오르면 영동 마을이 있는데 뜻은영봉사의 이름을 취하여 영동이라 하였다. 영봉사는 조선시대까지 큰 절로 유지하였으나 매봉산 기피등에 동복오씨가 명당을 쓴후 영봉사 대웅전 부처상이 일출을 늦게 받는 형국이 되어 쇠락한 후 폐사하는 안타까움을 겪었다. 옛날 동복에서 천왕재를 넘어 구봉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큰 '동천' 주막이 있었다.
주요 지명은 중이 살던 중골, 중시암, 남악굴, 양지쪽 불주사터, 영봉사터, 부처님 동네라는 부처골이 있다.
용리
용리의 지명은 용이 산등을 타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 하고 산등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용안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명중에 큰똠, 아랫똠, 작은똠, 서당골, 새터, 방축으로 구분된다. 성씨의 분포를 보면 함양박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동래정씨, 광산김씨 등 많은 가구수를 자랑하며 동복 팔경 중의 의뜸인 봉황강과 고소대가 있고 봉황강은 용의 안식처라하여 용안수라고 부른다.
주평
주평마을은 배나들이라고 부르기도하는데 동복천에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나룻터나 선착장의 의미를 갖고 있다.배나들이에서 배주자와 들평자를 취하여 한자로 주평이라 한다. 관산김씨, 칠원윤씨, 전주이씨 등이 주로 거주하며 배가 들어올 떄 소리치던 곳이라하여 '소리목'이 있다. 샘터로는 땀때기샘, 흠골물통, 난간시암, 한테시암 그리고 삼굿터, 키다리 주막터 등이 있다.
다산
다산마을의 지명은 차를 재배하여 다자와 뫼산자를 취하여 다산이라 불리운다. 다산은 다공마을, 송암마을, 도마등마을, 야동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도마동마을은 폐촌되었음) 주로 거주하는 성씨는 동복오씨,광산김씨, 압해정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다산엔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고, 매년 당산제를 지내며 후학을 위해 장학 사업을 활발히 펼치신 김재수님의 삶터였으며 다산미술관이 있다. 옛날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다.
절산
절동 마을은 절산리라고 하였다. 절산리는 절동마을, 방축골, 장선 마을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있다. 절동 마을의 뜻은 예전 마을에 절이 있었다하여 고절동, 절동이라 부른다, 마을을 세분하면 골모실, 새암골, 가운데똠, 뒷질, 아래똠, 모롱지로 구분된다, 절동 마을엔 대부분 광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된다
장선
장선 마을은 마을의 형태가 긴 배와 같다하여 장선이라 전하며 김해김씨, 광산김씨 등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고인돌 7기, 천연동굴, 수령 4백년된 정자나무와 행주대혈의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사수
사수 마을은 삼면이 하천이어서 황천의 염라대왕이 건너오지 못해 노인들이 장수하는 곳이라고 전해온다. 주요지명중 하나인 가마쏘는 마을 앞에 있었는데 가마를 타고 가다가 신부가 빠져 죽었다고 전해온다. 지금은 수몰되었다. 그리고 새터께, 한두매비, 연개배미, 지픈배미, 포강배미, 진배미, 삼국께, 정골, 재마당골, 백록봉, 상장몰산, 각시바위, 서방바위, 아기바위, 방실보, 당산거리, 삼거리 등 지명의 대부분이 주암댐에 수몰된 아픔이 있어 기억해야할 지명을 나열했음을 적는다. 사수마을은 대전마을, 두강마을, 송정마을의 자연마을로 구성된다.
내리
내리 마을은 모후산 용문재 아래에 큰 저수지가 있으며, 그 아래에 밀양,삼산마을과 사평-동복간 도로변에서 가까운 신암,중촌,평촌 마을이 있으며, 자유학구로 학생들이 동복으로 초,중학교를 다니므로 어른이 되고난 후에도다소 거리감이 있으나 8.15축제 등을 통하여 동화되고 있다.
대전
대전 마을의 뜻은 한밭이라 하여 큰밭 너른 밭이란 의미를 지닌다. 1989년 충북대 이용조 교수팀은 대전 마을에서 구석기 시대의 많은 유물을 발굴하여 우리 남면에 5만년전부터 조상이 살았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대전 마을엔 양반촌에 있는 큰 당산나무가 있고 광산김씨의 집성촌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주산산 마을의 지명은 배소마을의 한자 주자와 뫼산자를 합하여 주산리라 하였다. 배소마을은 배를 만들던 곳이란의미를 안고 있다. 마을에서는 배수라고 부른다. 마을엔 효열부 파평 윤씨 기적비가 있고 연자매 엘림기도원, 유마사 가는길엔 고즈넉한 '강촌의 풍경' 찻집이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남계
삼거마을에서 내려오면 남계마을이 있는데 마을에 고인돌 11기가 있고 남계분교, 남면 동국민학교가 있었으나1992년 2월 28일에 아쉽게 주암댐 수몰로 인한 학생 감소로 폐교되었다.
삼거
삼거 마을의 유래는 유마리를 거쳐 순천으로 넘는 말거리재로 가는 길과 진사골로 가서 송암의 도마동으로 가는길과 남방으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형성되어 시거리라고 불렀다.
유마
모후산은 지금껏 빈촌이었던 유마마을과 고향에 고로쇠 약수를 듬북주어 관광산업에도 일조를 하고 마을엔 부를주고 있다.
유마사에서 내림천을 따라 내려오면 한적한 풍경의 유마마을과 삼거 마을이 있다..
첫댓글 정수야 ! 공부 잘 했다. 덕분에 고향의 상세한 내력을 알게되었구나! 마을 마다 그런 심오한 뜻이 있는줄 몰랐었는데 ...늦게나마 알게 되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