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減膳撤樂[감선철악]이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근신하는 뜻에서
임금의 밥상에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폐하던 일을 말하며 나라의 변고란 천재지변으로
태풍, 홍수, 호우, 폭풍, 해일, 폭설, 가뭄, 지진 등 자연계의 변화로 받는 재난을 말한다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에도 임금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백성의 안위를 살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모든 것을 다 가졌을 것만 같은 조선시대 왕도
자신의 존재기반이 되는 근본은 어디인지를 늘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조선의 재해재난 전래이야기-병충해
병해
1.윤지경전
중종 조에 윤현이란 재상의 3자 중 3남인 지경이 가장 뛰어났다. 지경이 16세에 과거를 보아 진사가 되면서 성명이 일세를 진동하게 되었고, 구혼하는 사람이 구름 모이듯 하였다.
그 해 여름에 여역이 대치하여 윤공이 지경을 데리고 종부부인 최 참판의 집으로 가서 피접하게 되매, 지경은 최공의 재취 이 부인의 소생인 연화 소저와
인사를 하고, 장강과 같은 고움과 임사와 같은 어진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지경은 부모에게 간청하여 청혼을 부탁했으나, 청혼을 받은 최공은 지경이
진사급제를 하고 나서 누청에 출입했다는 것을 혐의하는 이 부인의 말을 듣고는 거절한다.
지경과 연화는 연달아 사병을 치르고 나서, 지경이 내당으로 연화를 찾아가 놀면서부터 그들의 사랑은 싹이 트게 되고, 포숙의 신의를 맺는다. 지경이
완쾌되고 여역이 수그러지매 윤공이 지경을 데리고 본부로 돌아가니, 지경과 연화는 이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 하다가 지경을 보내고 상사하던 연화는
부모에게 지경과의 사랑을 고하고 윤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아뢴다.
이에 최공은 딸의 소청을 들어 윤공에게 구혼하여 명년 봄으로 성례하기로 하니, 이듬해 봄에 지경이 정시에 장원을 할새, 윤공이 최공을 보고 첨상계화
성례하기를 원한다. 이 때 경빈 박씨의 소생인 희안군이 윤공에게 청혼했다 거절을 당하고, 왕을 움직여 박빈의 소생인 연성 옹주의 부마로 윤지경을
간택하도록 하니, 공교롭게도 입궐하라는 교지가 지경과 연화의 결혼식을 거행하는 날 내려진다. 이에 지경은 고석에 나아가 교배를 마치고, 즉시 승명하여 궐내로 들어가 연성옹주의 부마로 간택한다는 왕의 말씀을 듣고 그 부당함을 아뢴다.
그러나 왕의 옆에 앉아 있던 회안군이 “비록 납폐전안을 하였으나, 합궁전이오니 이제 간택하여도 제 어찌 거절 하오리까” 하고 아뢰는 말을 듣고 있던
지경이 희안군을 꾸짖고 왕의 불명을 간한다.
대노한 왕이 “작은 임금인 희안군을 짐의 앞에서 욕하고, 짐을 혼암한 임금이라고 능모한 죄를 묻겠다”고 하니, “전하 중흥하신 19년에 일명 같사온 성덕이 심산궁곡에 미쳤거늘, 유독 소신에게 물명하시고 무거하신 정사가 이러하시니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나이다”한다.
왕은 윤공 부자를 하옥시키고 최공에게 전지하여 파혼하도록 하며, 옹주와 지경의 성례를 주선하도록 하였다. 윤공 부자가 옥중에서 원정을 올려도 듣지
않고, 합계하여 파혼의 불가함을 직간하는 양사를 파직하였으며, 혼인을 앞두고 신랑과 사장을 가둠이 불가하다는 옥당의 상주를 받아들여 윤공 부자를
석방한다.
지경은 왕의 뜻을 끝내 거절할 수 없어 옹주와 결혼하고 보니, 자색이 전혀 없고 폭독불인 함이 외모에 나타나 있는 옹주를 첫날밤부터 멀리 하고, 집에
돌아와 부마의 교지를 땅에 던져 부친의 질책을 듣기도 한다.
지경은 옹주를 친영하여 온 후에도 옹주 궁에 가서 자지 않고 부친과 같이 외헌에서 지내며, 최씨를 자주 가 만나보고 최공에게 그들의 소원을 이룩하게
해 달라고 하나, 최공은 양가의 큰 복근이 된다고 하면서 오기를 끊어 달라고 한다. 지경은 최씨의 침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고 돌아온다.
지경이 참지 못하여 밤을 타서 담을 넘어 최씨의 침실로 들어가서 최씨를 달래어 한가지로 침석에 나아가 운우지정을 풀고, 이러한 후로부터 밤마다 최씨의 방에 가서 자고, 새벽이면 돌아와 조회에 참례하였다. 옹주는 합근도 아니 하였으므로 밤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낮에는 한 번씩 돌아와 보는 부마를
눈으로 볼 뿐이다.
지경이 밤마다 최씨의 방에 가서 자다가 최공에게 들킨 후로는 공공연히 낮에도 오고 밤에도 오니, 최공과 최씨가 민망하여 아무리 간하여도 듣지 않는다.
또 윤공이 알고 대책하고는 옹주궁을 떠나지 못하게 해도 듣지 않는다.
옹주가 드디어 이 사실을 알고 부마가 들어왔을 때 붙들고 천대가 대심함에 원통해 한다. 지경이 드디어 옹주의 불인을 꾸짖으매, 할 수 없이 입궐하여
모친인 박빈에게 하소한다. 박빈의 말을 들은 왕이 지경을 불러 꾸짖으며, “옹주를 박대하지 말라” 하고, 최공에게 전지하여 부마를 오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이에 최공은 윤공과 짜고 딸이 득병하였다 하며 부마를 오지 못하게 하다가, 마침내 딸이 죽었다는 부고를 보내니, 일가가 통곡하고 지경은 기절까지 한다. 지경이 깨어나 달려갔으나 최공은 들이지 않고, 장사를 마치고 나서 오라고 한다.
지경은 할 수 없이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최씨의 삼년상을 마치고도 최씨를 잊을 수 없다. 최씨의 침소 앞을 배회하며 슬퍼하는 것을 본 최공의 손자
선중이 “공은 부채와 필묵을 주면 고모가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그에게 부채와 필묵을 사다 주고, 그의 안내를 받아 최씨가 은거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서 죽어 삼년상을 치렀던 최씨와 감격의 상봉을 한다.
이러한 후로부터 조회에도 참례하지 않고 최씨에게 가 있으니, 윤공은 상심하다 산사에 갔는가 생각하였다. 옹주는 불화한 사이니 찾지 않고, 왕이 조회에
불참함을 의심하여 찾았다. 지경이 최씨한테 와 지낸지 20여 일만에야 윤공이 보낸 비복들에게 발각된다. 왕이 환관 김송환을 보내어 데려오도록 하니, 왕을 질욕하고 광인의 행세를 하며 “열 황소가 끌어도 못 가겠다”고 고집하고, 남원·심정 등이 조광조 등 30여 인을 음해한 흉계를 폭로하며 왕에게 가서 아뢰라고 한다.
이에 왕은 나졸을 보내어 부마를 잡아오게 하여 친국하고, 주상을 능모하고 옹주를 박대한 죄를 물어 지경은 충청도 대흥으로, 최씨는 함경도 함흥으로 각각 유배를 보낸다. 지경은 대흥으로 유배를 와서 초라한 귀양살이를 하며 실신한 체하니, 왕이 이듬해 환관 김송환을 보내어 개과여부를 알아보게 하는데,
김송환을 보고 조정의 정사를 비난하고 왕에게 직고하라고 하니, 보고를 받은 왕은 회개할 가망이 없음을 알고 다시 제주도로 정배하려다가 세자의 말을 들어 그대로 둔다.
명춘에 동관에 작서지변과 가작 인두지변이 일어나 왕은 주모자인 박빈을 처형하고, 복성군과 옹주는 정배를 보낸다. 세자에게 윤지경의 보신지계를
칭찬하며, 부마위 거두고 승지를 제수하여 부르고 최씨를 해배하도록 한다. 이에 지경이 배소에서 돌아와 왕에게 사은하고, 옹주가 흉계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풀어달라고 아뢰나 왕은 듣지 않는다. 중종이 거하붕고하고 인종이 즉위하고서 윤지경을 보고, “옹주는 과인의 골육동기라, 경이 데려다가 전과 같이 말고 후대하여 살면 내 죽어도 한이 없노라”고 한다.
이에 지경은 “오늘 하교를 간폐에 새겨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 즉시 인마를 보내어 옹주를 데려와 은근함이 극진하니, 옹주도 감격하여 원한을 풀고, 또
최씨가 대접을 극진히 하니 지경은 비로소 화목한 가정을 이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일사문고’ 소장본, 김동욱 교수 소장본, 미국 하바드 대학 소장본이 있다. 책의 체재는 종 17cm, 횡 15cm의 폭에다 매면 12행, 매행 18자 평균의 한글 관체로 쓴 총 98면으로 된 필사본이다. 이 작품도 작자와 창작 년대가 미상이다. 중종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제재로 한 문제 작품이다.
3.권용선전
명나라 때에 주인공 권용선은 한주 땅에 사는 권 승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용선의 3형제는 일찍이 소년등과하고 성혼하였으니, 첫째 형 호선의 부인은 최씨요, 둘째 형 인선의 부인은 윤씨요, 용선의 부인은 김씨이다.
호선과 인선의 두 형제는 금슬이 좋았으나, 용선의 부인 김씨는 숙덕이 없어 금슬이 좋지 못하고, 용선은 나이 15세에 상처하고 조속히 재혼하기를 꺼렸다. 권 승상은 용선의 재혼을 시키지 못하고 우현 득병하여 졸하니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용선의 3형제가 부모의 삼년상을 마치니, 황제는 3형제의 벼슬을
돋우어 부르니, 호선은 예부시랑이 되고, 인선은 좌부승지가 되고, 용선은 한림학사가 되어 입조하게 되었다.
용선의 숙부 권시랑은 일찍 치사하고 낙향하여 절강 땅에 가 살고 있었다. 권 시랑의 부인 오씨는 오 승상의 누이이다. 오 승상은 일찍이 간신의 모해를 받아 벼슬을 가하고, 산동 땅에 내려와 살며 만년에 현숙한 딸을 두었다. 오 소저가 9세 때 모친이 졸하고, 부친 오 상서도 뒤따라 졸하면서, 누이를 불러 딸의
장래를 부탁한다.
이 때, 강서지방에 도적이 성하여 민심이 흉흉했다. 조정에서는 용선으로 순무사를 삼아 민심을 수습하라 한다. 용선은 사방으로 순행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킨다. 용선은 가는 곳마다 태수와 자사들의 성연을 받았으나, 연석에서 아무리 선녀 같은 미기가 유혹해도 동심하지 않는다.
하루는 오 상서가 용선의 꿈에 나타나서, 그대는 나의 딸과 천정가연이니 실기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용선은 오 상서의 꿈을 꾸고 오 소저가 있는 절강 숙부 댁으로 갔다. 용선은 종제 봉선으로부터 오 소저가 현숙하다는 말을 듣는다. 봉선은 모친가 상의하고 종제와 오 소저의 결연을 주선한다. 용선은 오 소저를 한 번 대면하여 그 절색을 감탄하고 연정을 금하지 못하였으나, 국사를 등한히 할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한다. 용선은 상경 도중 고향에 들러 모친에게 오 소저의 이야기를 하였다.
용선이 상경한 후 권 시랑도 솔가하여 상경했다. 용선은 오 소저를 잊을 수 없어 자주 놀러 간다. 시랑 부부는 용선이 오 소저를 연모하고 있는 것을 알고
결혼시킨다. 용선은 오 소저의 혼기가 차기를 고대하면서, 하루도 잊을 수가 없어 기회만 있으면 찾아가서 논다.
하루는 황제가 용선을 데리고 후원을 소요하였다. 그 때, 주 태후의 딸 영희 공주가 후궁에서 놀다가 용선의 비범한 풍격을 보고 연모하던 끝에 모후를 시켜 황제를 움직이게 한다. 이에 황제는 용선에게 영희 공주와 결혼하라는 통지를 내린다. 통지를 받은 양가에서는 대경하고, 용선은 이미 오 소저와 결혼하였음을 상소한다. 황제는 대노하여 강제로 택일성례하게 한다. 용선은 오 소저와 성례하기 전에 공주와 결혼할 수 없다고 고집한다. 이에 권 시랑과 용선의 모친 김 부인이 상의하여 먼저 오 소저와 비밀리에 성례시키고, 다음에 공주와 성례하게 한다.
용선은 공주와 결혼하였으나 남같이 지내며 오 부인만을 사랑한다. 공주는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황제를 움직여 오 부인과 용선 형제와 권 시랑을
하옥시켰다가, 간신 주 승상과 모의하고 용선을 적국에 사신으로 보내고, 오 부인을 노왕에게 보내기로 한다. 오 부인은 노국으로 가다가 남강에 이르러
투신자살한 것처럼 해놓고, 형주에 있는 부친의 의매 김 부인 댁을 찾아간다.
용선은 이러한 줄도 모르고 적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무주에 있는 부친의 재종매부를 찾아보고는 비로소 오 부인의 남강 참사를 듣는다.
용선은 비관 끝에 실신하였다가 깨어나서 오 상서의 망령이나 위로하려는 뜻에서 오 상서의 무덤을 찾아 석물을 해 놓는다. 용선은 도중에 애태우던 끝에
여러 번 토혈을 한다. 그는 오 상서가 와서 형주로 가면 만나볼 수 있다고 일러주는 꿈을 꾸고 형주로 간다. 용선은 도중 간신 주 승상이 보낸 자객을
만났으나, 그 자객을 베고 무사히 형주에 득달하여 오매불망하던 오 부인을 만나 오래오래 그리던 정을 풀게 되었다 한다.
* 이 작품은 활자본으로 1918년에 발행한 신구서림본(pp.98)이 있다. 활자본 ‘수매청심록’은 이 작품의 이본이다.
4.조웅전
송 문제 시절에 좌승상 조정인이 우승상 이두병의 참소를 입고 음독자살했다. 천자는 조 승상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나머지 조 승상의 아들 조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와 함께 있게 하고, 태자는 조웅을 형제처럼 사랑한다.
간신 이 승상이 천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조웅을 후환이 두려워 죽이려고 한다. 하루는 조웅이 거리에 나가서 이 승상에 대한 욕을 거리에 써 붙이고
돌아온다. 그날 밤에 이 승상이 조웅을 죽이려고 한다는 몽조를 얻고 그의 매 부인이 조웅을 데리고 피신한다.
조정에서는 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등극한다. 이에 간신 이 승상이 권세를 마음껏 부리다가 마침내 유왕을 절조로 축출하고 자기가 제위에 올라
자칭 천자라 하니, 만조백궁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다.
조웅 모자는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부친의 초상을 그려준 월경 대사를 만나 산사로 들어가 우거하면서 수학하게 된다. 15세가 된 조웅은 모친과 대사에게 출세할 결심을 말하고 도승을 찾아간다. 낙산도사로부터 3척 신검을 얻고, 철궁도사를 만나 병법과 무술을 공부하게 된다.
조웅이 하루는 모친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위국공 장 진사의 집에 우연히 들려 장 진사의 딸 장 소저와 부모 몰래 백년가약을 맺는다. 조웅을 보내고
장 소저는 연모 끝에 병이 들어 죽는다. 조웅은 도사로부터 장 소저의 병사한 사실을 듣고, 도사가 주는 선약을 가지고 가서 장 소저를 소생시킨다. 이에
장 진사는 자기 딸과의 결혼을 승낙한다.
산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도산의 명부를 받들어 변적 이두병을 격멸하고 송실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선다. 도중에서 서번이 침입하였을 때 출전하다가 전사한 황 장군의 영혼으로부터 갑주와 보검을 얻는다. 이때 서번이 위국을 침공하였으므로, 위국으로 달려가서 위왕을 도와 서번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는다.
조웅은 위왕과 작별하고 태자를 구출하러 남해절도로 간다.
강호척사가 상처하고 후실을 구하던 중 장 소저가 현미하다는 말을 듣고 매파를 보내어 청혼하다가 거절을 당하고 강제로 취하고자 하므로, 장 소저가 이를 피하여 산양사에 있는 강산굴으로 조웅의 모친과 같이 지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조웅이 남해로 가는 도중 강호척사를 베고, 강산굴로 가서 모친과
장 소저를 만나보고는 즉시 떠난다.
태자의 적소에 득달하여, 바야흐로 참왕 이두병이 사자를 보내어 태자를 죽이려는 것을 물리치고 태자를 구출한다. 서번왕이 조웅을 죽일 흉계를 꾸미고
기다리고 있다가, 조웅이 태자를 모시고 오는 것을 보고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서번왕은 조웅에게 곤욕을 당한다. 조웅은 다시 서번왕의
항복을 받고 중국으로 와서 영웅·명장을 교합하기 시작한다. 참왕이 임명한 지방궁들의 차례차례로 베면서 위국으로 조웅은 위왕의 청에 의하여 위왕의
장녀를 태자의 비로 삼고, 차녀로 자기의 부인을 삼는다.
강산굴으로 가서 모친과 장 부인을 찾는다. 조웅은 위왕과 연합하여 수십만 대군으로 황성을 쳐서 참왕 이두병을 베고, 태자를 등극시킨다. 이에 송실이
회복되니 조웅의 명성이 천하를 떨쳤다고 한다.
* 이 작품은 목판본으로 경판본과 완판본의 양종이 있고, 활자본으로 1914년 발행인 덕흥서림본(pp.122)을 비롯한 5·6종이 있다.
5.홍계월전
이 작품은 명대를 배경으로 하였다. 주인공 홍계월은 형주 구계촌에 사는 홍 대랑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홍 대랑의 부인 양씨가 선녀의 태몽을 얻고 난 딸이다.
홍 대랑이 구우를 찾아보고 오는 도중에 북방절도사 장 사랑의 반란을 만나 산중으로 피난한다. 집에 있는 양 부인도 계월을 데리고 남방으로 피난한다.
양 부인은 피난 도중 수적을 만난다. 괴수 장맹길은 계월을 물에 던지고 양 부인을 데리고 가서 아내를 삼으려고 한다. 양 부인은 괴수에게 끌려갔으나,
심양에 사는 양각노의 딸로 과비가 되어 있다가 수적에게 잡혀 와서 괴수의 아내가 되어있는 춘낭의 도움을 받아 그와 같이 도망하게 되었다. 양 부인은
노승을 만나 춘낭과 함께 여승이 된다.
수적을 만나 물에 던져진 계월은 무릉포에 사는 려공의 구조를 받아 그의 집에 가서 자라나게 되었다. 계월은 려공의 아들 보국과 동갑이다. 여공은 계월을 기출같이 사랑하였고, 보국도 형제와 같이 지매다. 여공은 두 아이의 나이 7세가 되매, 월호산 명현동에 사는 곽도사를 찾아가서 두 아들의 수학을 부탁한다.
반란을 만난 홍 대랑은 부득이 반란군에 가담한다. 평란이 되매 조정에서는 홍 대랑을 반란군에 가담하였다는 죄목으로 절도로 유배시킨다. 홍 대랑이 무인도에 가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니, 몸에 털이 나고 흡사 짐승과 같았다. 양 부인은 여승이 되어 있다가 노승이 와서 대랑과 계월을 찾으라고 하는 꿈을 꾸고는, 춘랑을 데리고 길을 떠나 천신만고 하며 무인도에 도착하여 대랑을 만나게 된다.
선시에 계월이 남복하고 보국과 같이 공부하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계월은 장원이 되고 보국은 차장원이 되었다. 양 장원이 선생을 찾아뵈러 갔더니 비서
한 권을 주면서, 지금 천자가 위태하니 빨리 가서 구하라 한다.
이때 서번과 가달족이 중원을 침공하여 왔다. 천자는 계월로 대원수, 보국으로 부원수를 삼아 출전시켰다. 여 원수는 홍 원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 있게
나가 싸우다가 대패하고 겨우 살아 돌아온다. 홍 원수가 대노하여 여 원수를 질책하려다가 제장들의 만류로 용서한다. 이에 대원수 계월이 출전하여 적을
대파한다. 적은 겨우 30여 명만 남았는데, 벽파도로 도망하였다. 이에 홍 원수는 적을 추격하여 벽파도로 들어갔다가 그 섬에서 부모와 해후한다. 홍 원수가
부모를 보시고 회군하니, 천자는 대희하여 홍 대랑으로 위국공을 봉하고, 양 부인으로 정열부인을 봉한다.
대원수 계월이 회군한 후로 득병하여 병세가 중하였다. 천자는 어의를 보내어 진단하게 하였다. 어의는 진단하고 돌아가서 천자에게 홍 원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 하였다. 어의의 진단을 받은 계월은 자기의 신분이 탄로될까 근심하고 여복으로 개착하여 천자에게 기군한 죄를 상소하였다. 천자가 글을 읽고 대경대희하여 현직을 그대로 두게 하고, 친히 중매가 되어 계월과 보국의 결혼을 성립시킨다.
계월이 최후로 군사를 훈련시킬 새, 차 원수요 남편인 보국에게 군명을 내린다. 이제 보국은 대참하여 고의로 칭병하고 나오지 않는다. 대원수 계월이
대노하여 군명을 위반한 죄를 엄문하니, 보국은 마지 못해 나와서 처벌을 받고 통분히 여겨 결혼 후 두고 보자고 마음먹는다.
계월은 훈련을 마치고 나서 보국과 결혼하니 양인의 기쁨은 비길데 없으나, 보국은 아내가 사랑스러우면서도 괘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결혼 후
하루는 계월이 본관으로 들어가는데, 남편의 애첩 영춘이 교만하게 앉아서 인사도 하지 않는 지라, 계월이 대노하여 군사를 시켜 엄벌에 처하였더니,
보국이 이 말을 듣고 통분히 여겨 그날 밤부터 계월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에 계월은 탁숙하면서 수심으로 지낸다.
마침 오왕과 초왕이 반란을 일으켜 황성을 칠 새, 계월은 다시 대원수가 되어 남편 보국으로 중군장을 삼아 출전한다. 대원수 계월이 여러 번 중군장이요
남편인 보국의 위기를 구출해 주니, 전일 아내를 박대한데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한다. 역적을 토척하고 회군한 후로는 계월과 보국의 금실이 좋아졌다 한다.
* 이 작품은 활자본으로 1913년에 발행된 신구서림본(pp.56)을 비롯한 3종이 있다.
6.화옥쌓기
대명 세종 가정 년간 절강 소흥부에 사는 서용이란 일위명관은 늦게야 몽인이란 아들을 얻는다. 몽인은 16세가 되매 부모께 고하고 천하주유의 길을 떠나
서주의 땅에 이르러 이경운이란 소년 재사를 만나 지기를 삼는다.
그는 객사에서 적당을 만나 붙들려 가며 적한에게 매를 맞아 실신하였다가 깨어보니 선계에 와 있었다. 선계에서 일광도사를 만나 영산 취운동으로 가
몽인이 도사 밑에서 수학한지 수년이 되매, 천지조화를 가슴에 품게 되었으니, 도사는 신창과 용마를 구해주며 인간에 나가 공명을 이룩하라 하고 또 경화
선녀와의 천정계약을 어기지 말라고 일러준다.
몽인이 하산하다가 녹림정을 만나 두 적장과 싸우는데, 한 소년이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인사를 하니, 그 소년은 방도요, 두 적장은 류충과 황운이라고
하는데, 3인은 동심결의하고 삼 웅산에 웅거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몽인은 그들을 따라 산성으로 들어가서 후대를 받고, 후일의 상봉을 기약하고 나와 낙양으로 간다. 그는 주점의 맞은편 서각에서 놀고 있는 한 미인을
발견하고 찾아가 보니 척경화라고 하는 미기였다. 몽인이 일광도사의 말을 전하니, 경랑도 작야의 몽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몽인은 경랑과 계약을 맺어
신물을 교환하고 운우지락을 이루지 않고 이튿날 작별할 새, 경랑은 10리 밖에 있는 석춘정에 나와 전별연을 베풀어 준다.
이때 노운외라는 부호가 경랑의 미모를 듣고 기모 왕파를 움직여 만금을 주고 작첩하려고 하매, 경랑은 거역할 길이 없어 강수에 투신자살 하려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 만류한다. 그 도사는 남악 횡산에 사는 자양진인으로, 경랑과 시비 옥련을 데리고 가서 병서와 술법을 가르치며, 도명을 경랑은 방화, 옥연은
성랑이라 한다.
한편 몽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에게 그 사이의 경과를 고할 새, 경랑과의 계약은 고백하지 않고 홀로 오매불망한다. 조정에서 설과하매 몽인이 장원,
이경운이 타상으로 급제하고, 몽인은 한림학사가 된다. 황제가 서 한림으로 남방순무어사를 삼으매, 서 어사는 낙양에 이르러 경랑의 참사를 듣고 슬퍼하다가, 임무를 마치고 상경하여 병부대랑이 된다. 여가를 얻어 부모를 찾아보고, 비로소 경랑과의 계약과 그 절사를 아뢴다.
이때, 남만 왕이 묘족과 체결하고 중원을 침공할 새, 황제는 여 대랑으로 정남대원수를 삼고, 한림 이경운으로 행군사마를 삼아 출전하게 한다. 서 원수는
행군하며 삼웅산에 웅거하고 있는 전날 결의한 의장들을 불러오게 하니, 류충과 방도가 와서 왜장을 무수히 베고 만군을 대파한다.
이에 만왕의 비 석호 부인이 나와 송 원수와 대전하고, 그녀의 스승 철의도인이 요술로 명군을 대파할 새, 송 원수가 곤경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무운이 다하였음을 슬퍼한다. 이러할 때 두 소년대장이 나타나 송 원수의 위기를 구출해 주니, 그 소년대장은 자양진인이 보낸 방화도인과 성랑도인이다.
송 원수는 패잔한 명군을 다시 조발하여 만군과 대전할 새, 방화도인으로 군수를 삼고, 성랑도인으로 부군수를 삼는다. 적의 군수 철의도인이 요술을 부리매 방화도인이 신편으로 막아내니, 철의도인이 자객이 되어 방화도인을 암살하려고 명진으로 잠입하다가 도리어 방화도인에게 살해된다.
이에 만군이 전의를 잃고 후퇴하는지라, 명군이 추격하다가 서 원수가 전중에서 득병하여 사경에 이르고, 삼군도 괴병에 걸려 고생한다. 방화도인이 와룡
선생의 묘우를 찾아 기원하고, 몽중에 와룡 선생의 교시를 받아 약초를 캐가지고 와서 서 원수와 삼군의 괴병을 고친다.
방화도인은 석호 부인을 생금했다가 돌려보내며 만왕을 권하여 항복하도록 하나, 만왕은 듣지 않고 싸우다가 서 원수에게 생포된다. 석호 부인이 추장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하는지라, 서 원수는 만왕의 충성을 다짐받고 돌려보낸다.
이에 명군이 회군하는데, 방화도인이 득병하여 위독하매 서 원수가 간호하다가 흉중에 있는 옥패를 보고 내심으로 의심한다. 성랑도인의 고백을 듣고서 방화부인은 자기와 계약을 맺은 경랑이요, 성랑도인은 경랑의 시비 옥연임을 알고 3인이 일희일비하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눈다.
황제는 서 원수에게 전지를 내려 하남에 있는 황숙인 주왕의 역심을 무마하라고 한다. 서 원수는 하남으로 진군하여 주왕을 만나, 그 역심을 꺾어 황제께
상표하여 사죄하도록 한다. 서 원수의 회군이 황성에 이르매, 황제가 친영하고 경랑과 옥연을 접견할 새, 기군한 죄를 청하는지라, 황제는 고금에 없는 기사라 대희하며 '대사가 있거든 남복을 하고 조정에 나와 국사에 참여하고, 소사는 집에서 처리하라'고 한다.
전공을 표창할 새, 황제는 서 원수로 동각태학사에 외국공을, 이 사마로 사군상서 회남희를, 경랑으로 낙양회를, 옥연으로 하남회를 각각 봉한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비의 소청을 들어 서 몽인과 경랑의 숙약을 성취하여 주고, 이경운은 옥연과 계약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 1914년 9월 25일 대창서관에서 발행한 활자본이 있는데, 상권 120면, 하권99면, 합 219면이며, 16회로 되어있는 회장본이다.
7.유승상전
대명 홍치 년간 양왕의 이름은 유흥완으로, 개국공신 기의 후예요, 안국공 참의 아들이다. 그는 원배 화씨, 차배 공주, 3배 주씨, 4배 윤씨 등 4부인을 거느리고 화락하게 살아 가는데, 4부인한테서 12자 5녀를 두었으니 다 미남미녀들이다. 그 12자 중에서도 제 11자 창복은 화배의 소생으로, 부왕을 닮아 충효와 재덕을 겸비하고, 옥안선풍에 상통천문하고 하달지리하여, 20세에 장원급제하고 누진하여 사부상서가 된다.
그는 진 승상의 딸을 취하였으나, 진 부인의 방자혜질로도 가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신혼초야부터 금실이 좋지 못하다. 하루는 양왕이 아들을 불러
훈계하고, 오늘 밤에는 꼭 아내 방에 가서 자도록 타일렀더니, 술을 마시고 취해 들어가서 진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후원 연못으로 끌고 가서 빠져 죽게 한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양왕이 창복을 불러 태장을 하고, 진 부인의 시신을 찾으니 연못이 양자강으로 통해 있어 찾지 못하고 만다.
때에 황제가 사부상서 유창복으로 순무어사를 삼아 민정을 살피게 하니, 소주지방에 이르러 자사 김정의 탐학을 듣고 출도하려고 한다. 이러할 때
철희문이란 산림처사가 양자강에서 선유하다가 한 시신을 건져 살려 내니, 곧 유 어사의 부인 진씨였다.
철 처사가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양녀를 삼고 친녀와 같이 사랑하는데, 진 부인의 색덕을 들은 소주자사 김정이 진 부인을 납치하여 작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유 어사가 출도하여, 납치되어 가는 진 부인을 구출해 주고 보니 자기의 아내이다.
유 어사는 철 처사에게 선약을 주며 교자 안에서 자살한 진 부인을 소생시키라 하고는 떠나오니, 진 부인이 깨어나 남편의 구출을 받은 사연을 듣고는
참괴함을 이기지 못해 한다. 또한 이웃에 호영이란 거인이 진 부인의 색덕을 듣고 밤중에 납치하려고 한다는 기미를 안 진 부인은 2비를 데리고 담을 넘어
도주한다.
소주에서 아내를 구출하고 말없이 떠나 온 유 어사는 상경하는 길에 형주에 있는 월출산을 구경하고 소상강에 이르러 선유하다가, 세 시신을 건져내고 보니 또한 아내 진씨와 시비 벽란과 중행이다. 진 부인과 2비는 철 처사의 집을 도망해 나와 가다가 산적을 만나 강물에 투신자살을 했던 것인데, 두 번이나 남편의 구출을 받은 진 부인은 너무나 참괴함을 참을 수 없어 남편의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교자를 타고 본부로
돌아간다. 유 어사가 상경하니 군관 이현기가 올라와서, 진 부인을 모시고 상경하다가 군적을 만나 교자를 빼앗겼다고 아뢴다.
이 때, 윤배의 소생인 필자 창필은 화 상서의 딸과 일찍부터 약혼해 두고, 양가의 왕래가 잦으나 창필이 화 소저를 냉대해 왔는데, 성례한 후에도 금실이
화락하지 못하고 필자마저 양왕의 속을 썩히는데, 창필은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다시 이부상서가 된 창복은 여전히 독숙하며 재취를 원하지 않고 있다가, 윤 복사와 정 참정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어 윤·정 양 부인을 취했으나, 양 부인과도 이성지친을 맺지 않고 홀로 지낸다. 이러할 때 유 상서는 진 부인의 꿈을 꾸고는 진 부인이 도적에게 죽어 원혼이 되었는가 하며, 뉘우침과 괴로움을 이길 수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마침내는 득병까지 한다.
이 때 제왕이 모반기병 함에, 황제는 양왕의 제8자 동창후 유창광으로 대원수, 군부상서 화년경으로 부원수, 이부상서 유창복으로 좌선봉, 한림학사 유창필로 우선봉을 삼아 출정하게 한다.
한편, 상경하는 길에서 산적에게 잡혀 갔던 진 부인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적굴을 탈출하여 산중에 방황하다가 호부상서를 역임한 임공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서 지내는데, 임공은 남복한 진 부인을 남자로 알고 자기 딸과 결혼하게 한다.
한 거한이 임 소저의 아름다움을 듣고 납치하려는 순간, 진 부인이 임 소저를 데리고 도망하여 나와서 자기 여자위남한 까닭을 고백하고 소상강에 이르러
선녀의 내영을 만나 충산으로 가서 위 부인에게 사사하며 피신해 와 있는 벽 소저와 다정히 지낸다. 하루는 위 부인이 진 부인을 보고 가군이 위태하니 급히 가서 구출하라고 하면서 주는 선약을 받아가지고, 위 부인의 제자 천선을 따라 구름을 타고 소주로 간다.
한편, 출정한 유 선봉은 반군을 평정하고 회군하려고 하는데, 황제가 다시 유 선봉으로 가주를 순무하고 상경하라 하기로, 각주를 순무하다가 과음 끝에
득병하여 위경에 빠진다. 진 부인은 소주에 있는 월봉에 올라 초당을 지어 놓고, 여선의 복색을 하고 찾아가 선약으로 병을 고쳐 주고 돌아온다.
병에서 일어나 유 선봉은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여선을 찾아 월봉산으로 올라가서 그 여선을 만나 보니 뜻밖에도 자기의 아내 진씨가 아닌가. 유 선봉은
아내를 달래어 데리고 상경하는 길에 철 처사의 집에 들려 사례하고, 상경한 후로부터 유 선봉과 진 부인의 금실이 좋아지고, 진 부인은 자기와 권도로 결혼한 임 소저와 충산에서 사귄 벽 소저를 데려오도록 하고, 유 선봉은 우승상에 오른다.
유 승상의 동생 창필은 회군한 후에도 여전히 화 부인과의 불화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광필에게 하가한 공주의 딸을 재취하고는 화 부인에 대한 마음은 우심해진다. 그런데, 이부인의 유모 최씨가 화 부인의 색덕을 시기하여 모해하려고, 조카 순경을 시켜 칼을 들고 화 부인의 방 앞에 섰다가 창필이 보는 데서
도망치게 하여 화 부인의 투기심을 보이도록 한다.
창필은 화 부인을 질욕하던 끝에 칼로 찔러 죽이고, 부친의 벌이 무서워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가다가, 부상을 당하여 치장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백금을 희사하고 영릉지방에 이르러 괴질의 유행을 막아 민심을 수습하고, 청량산중의 산적을 평정하고, 절도사 주신을 도와 서번에 내침을 격퇴하고, 강산을 건너다 풍파를 만나 빠져 죽게 된다.
한편, 남편의 칼에 죽었던 화부인의 시신을 태운산 봉월암에 사는 태청도사의 분부를 받은 도인들이 나타나 초인으로 바꾸어 가지고 봉월암으로 업고 가서 소생시킨다. 봉월암에서 태청도사의 교시를 받은 화 부인은 여선의 복색을 하고 가서 강수에 빠진 남편 창필을 구출해 준다.
창필은 금릉의 정 태수를 찾아가 묵으며 강수에 빠진 자기를 구출해 준 여선을 잊지 못해 하며, 혹 화씨가 살아 여선이 되었는가 하고 새삼 자기가 죽인
화씨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는다. 화 부인은 모친의 재종이 되는 금릉의 정태수를 찾아가서 정태수의 부인 홍씨의 소개로 창필과 인사를 나누니, 창필은
화씨인가 의심하다가 화씨가 아니라는 말에 홍 부인에게 중매해 달라고 한다.
홍 부인은 조실부모하고 자기 집에 와 있는 주 소저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이웃에 사는 하처사의 아들이 화 부인을 탈취하고자 하기로 화 부인이 주 소저를 데리고 도망하다가, 연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오라비인 화 상서의 일행을 만나 본부로 돌아온다.
한편 길일을 고대하던 창필이 하생의 작란을 만나, 홍 부인한테서 비로소 화씨의 생존을 듣고 못내 기뻐하며 본부로 돌아오니, 양왕이 대노하여 형구를
갖추어 치죄하니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화 부인이 달려와 양왕 앞에 무릎을 꿇어 사죄하고는 남편을 극진히 간호하니, 창필과 화 부인의 금실이 비로소 좋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필사본으로 상·중·하 3권 3책으로, 상권 113면, 중권 96면, 하권 78면, 총 287면, 매권 13행, 매행 30자 평균으로 쓰여 있고, 필사 년대는 없으나
오래 된 필사본이다.
8.소문록
대송 진종 황제 때 소연이란 승상이 있었다. 3처를 취했으니, 첫째는 정씨요, 둘째는 목씨요, 셋째는 원씨이다. 또 세 창첩이 있으니, 취선·태진·월중매이다.
원비 정씨는 정 부마와 요로 공주의 끝 딸이다. 공주가 4자를 두었더니, 정문이 참화를 만나 죽고, 오직 소 승상의 부인 정씨와 종손 창이 있어 정문의 가통을 잇게 된 것이다.
소 승상은 여러 아내 가운데서 오직 정 부인이 5자 1녀를 낳아 다 명문거족에 혼취하였다. 장자 광의 아내는 김씨요, 차자 징의 아내는 심씨요, 삼자 현의
아내는 호씨요, 사자 윤의 아내는 목씨요, 오자 양의 아내는 한씨이다. 5형제 중 삼자 현이 가장 뛰어나, 풍채는 신선과 같고 문장을 천하를 울리고 있으나,
호 부인이 득병하여 오절하니, 현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이 때, 윤 시랑의 딸이 조실부모하여 외할아버지 김 시랑이 거두어 가르치니, 임사의 덕행과 양란의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눈물 마를 날이 없고, 오직 취앵이란 시비를 벗삼아 지낸다. 김 시랑은 소 승상의 자부가 된 딸로부터 소현의 말을 듣고 청혼하여 윤 소저를 출가시키니, 소문에서 윤 부인의 어질고 아름다움을 보고 못내 기뻐한다.
이 때, 조전에서 설과할 새, 소현이 장원급제하니, 황제가 한림학사를 삼고 장 황후의 동생의 딸 옥선군주를 사혼한다. 소 학사는 상처하고 다시 윤·장 두
부인을 취했으나, 의사가 냉락하여 구차히 여색을 은근치 아니하니, 부모와 형제가 의심하기도 하고 희롱하기도 한다.
소 학사는 윤 부인으로 가사를 주장하게 하고 예로써 십분 공경하되, 사사 은애는 일호 친함이 없고, 윤 부인도 또한 성도가 침정하여 만분 사색이 없되,
심중에 외로움을 숨기고 원을 참으며 오직 구고에게 의지하여 지낸다. 이에 정태 부인이 5자 중 오직 현만이 두 부인을 얻고도 금실이 좋지 않음을 근심하여 날로 권유하나 효과가 없고, 따라서 자녀의 생산도 없다, 소 학사는 황제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더니, 황제는 양 부인에게 생산이 없음을
듣고 다시 이질 되는 승상 조원의 딸을 사혼할 새, 소 상서가 비로소 부부의 낙을 누리게 된다.
조 부인이 궁녀 유 보모를 데리고 왔기로, 소 상서가 궁녀를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돌려보내라고 하나 듣지 않고, 끝내 보내겠다고 하면 같이 궁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지라 조 부인의 뜻을 꺾지 못한다. 유 보모의 사람됨은 내외가 같지 않아 사람을 대한즉 빛나는 말이 은근하여 금석을 녹일 듯 하되, 심중은 간포·시험하여 잔인한 일이라도 족히 참아 하는 여인이다. 조 부인이 또한 심정이 편협하여 윤·장 양 부인의 현숙함을 시기하여 안중의 가시같이 여기되, 다만 구고가 엄하고 상서의 기개가 엄위한지라 감히 투기를 발하지 못하나, 유 보모의 흉계로 윤·장 양 부인의 일생 신세가 평안하지 못하게 된다.
세 부인 중에서 조 부인이 먼저 생자할 새 이름을 몽흥이라 하고, 이어 윤 부인이 또한 생자하매 이름을 가흥이라 한다. 몽흥과 가흥이 놀다가, 가흥이 풍상을 만나 병을 얻어 겨우 세 살에 죽으니, 윤 부인은 아들의 뒤를 따라 죽고자 하고, 소 상서는 아들의 병에 무심하였음을 뉘우친다.
윤 부인이 겨우 낳은 아들을 잃은 후로는 번영에 듯이 없는지라, 정태부인께 청하여 소문의 별장인 안궁으로 가서 고요히 있겠다 하고는, 부모의 신위를
모시고 안궁으로 간다. 윤 부인이 안궁으로 가매 정태부인은 소 상서에게 말하여 양찬을 보내어 주림을 면하게 할 새, 소 상서의 명을 받은 유 보모가 쌀
대신에 모래를 넣어 보낸다. 그러나, 윤 부인은 쌀 받음과 치사의 편지를 써서 보내고, 시녀 취앵과 풀나물을 뜯어 정명하며, 날마다 서화를 익히더니, 묘원
이고의 내방을 맞아 관음보살의 화상을 그려주고 발원한다.
윤 부인이 하루는 향기를 찾아 앞산에 있는 화원으로 들어가 산삼을 발견하여 캐어 먹으니, 배가 부르고 신기가 상쾌하매, 날마다 그 산삼을 캐서 먹고
샘에서 솟아나는 감천수를 마시니 이후로 주림을 알지 못하고 지내게 된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가 있던 장 부인이 득병하여 죽고, 윤 부인은 안궁에 간 후로 소식이 돈절할 새, 주 부인이 양양자득하여 천하를 얻은 듯하다. 이 때에 소 승상의 친족되는 가씨가 남편 채생을 잃고 그의 누이와 같이 안궁에 와 살더니,
윤 부인이 안궁에 온 후로 친히 지내는데, 소 상서가 가씨를 찾아 왔다가 채 소저의 아름다움을 보고 가씨를 졸라 취한다. 이에 주 부인이 채 부인을 시기하여 소 상서를 질욕하니, 소 상서는 조소할 뿐이요, 조 부인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고, 안궁에 숨어 있는 윤 부인을 생각하게 된다.
소 상서가 안궁으로 윤 부인을 찾아가 위로하고 본부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나 듣지 않으매, 부친으로 하여금 친서를 보내어 돌아오게 할 새, 윤 부인이
마지 못하여 본부로 돌아오니, 채 부인은 나와 공손히 맞이하나 조 부인은 나와 보지도 않는다.
윤 부인이 돌아와 정당에 머무르며 가사를 맡아 할 새, 유 보모가 크게 우려하여 윤 부인을 해할 조각을 생각하니, 윤 부인은 조씨의 기색을 살피고 안궁에서 앓던 병이 다시 도지매, 정태부인께 청하여 다시 안궁에 가 조리하겠다 하고는 안궁으로 돌아온다.
이 때, 황제는 장 부인이 죽으매, 양 귀비의 동생인 참정 양의의 누이를 소 상서에게 사혼할 새, 소상서가 양 부인을 정당에 머무르게 하여 과애하며 떠날 줄 모르니, 조 부인이 또한 투심을 참지 못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해 한다.
소 상서가 여러 부인을 취하여 겪어본 후로 윤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뉘우치는 일이 많더니, 하루는 전세의 꿈을 꾸고 나서는 윤 부인을 은애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이 때 윤 부인은 묘원 이고에게 불경을 가져오게 하여 그 불경을 전사하여 관음보살에게 바치니, 관음보살이 현몽하여 내세 일을
일러준 후로 병을 다시 얻어 위독해지니, 이것은 관음보살이 윤 부인을 병들게 해 놓고 소 상서가 와서 간호하게 함이었다.
소 상서가 안궁에 가서 윤 부인의 병든 모습을 보는 꿈을 꾸고는, 이튿날 안궁을 달려가 보니 몽중과 같은지라,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며 약을 쓰니,
윤 부인은 남편에게 언제 그런 인정이 있었는가 여긴다. 이에 윤 부인은 죽기를 기약하였다가 남편의 지극한 정성과 친애함에 감동되어 회복할 기미를
찾으니, 소 상서가 만심 환희하고 여러 날을 머무르며 조회에도 나가지 아니하고, 윤 부인의 병이 좀 차도가 있으매, 보부로 돌아와 유 보모와 시녀들을
문초하여 중형을 가한다.
윤 부인이 병상에서 일어나 화장을 하고 있는데, 소 상서가 찾아와 화장한 윤 부인을 바라보며 눈이 어리고 정에 취하여 전비를 뉘우치고, 백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무한한 덕량을 드리워 옛일을 잊으라고 하며 위로하고, 본부에 돌아와 부모께 윤 부인을 다시 데려오겠다 하고는, 윤 부인의 거처를 정당으로
정하고, 윤 시랑의 사당을 후원에 세워 신위를 모셔오도록 하며, 조 부인을 나쁜 여인으로 만든 유 보모를 친구인 철 어사 분친의 후처로 보낸다.
윤 부인이 다시 본부로 돌아오니 조 부인은 깊이 들어앉아 나오지 않는지라, 윤 부인이 남편을 권하여 조 부인을 찾아가 위로하게 할 새, 조 부인이 상서를
한하여 절치하고 있다가 발악하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윤 부인이 매양 채·양 양 부인을 청하여 은근한 대접이 춘풍이 이화를 부치는 듯 완고할 뿐 아니라, 주 부인을 감화시키려고 무한이 애를 쓰니, 주 부인이
윤 부인에 대한 원한은 점점 풀어지나 남편에 대한 질욕은 여전하다. 소 상서는 윤 부인의 청을 들어 자기 시녀 취앵을 친구인 원 학사의 계실로 보내니, 원
학사가 또한 희첩을 원하는지라, 주 부인의 날개를 없이 하기 위하여 주 부인의 시녀 홍련을 보내니, 주 부인은 그런 뜻을 모르고 홍련의 장래를 생각하고
승낙한다.
이 때, 장 황후가 승하하매 주 부인이 애통함을 마지아니하고, 유 보모와 홍련이 없으니 누구와 앞일을 의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윤 부인에게
함화되어 남편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러다가 철공의 후처로 들어갔던 유 보모가 철공이 죽으매, 다시 소부로 와서 주 부인을 사수하여 윤 부인을 해치려고
할새, 요녀와 짜고 윤 부인의 인형을 만들어 윤 부인의 방 밑에 묻으니, 윤 부인이 그 음모를 알고 관음화상에게 빌었더니, 묘원이고가 찾아와서 그 인형을
제거한다.
유 보모가 그 음모로 중벌을 받고는, 주 부인과 친밀한 단성 공주를 찾아가 황제를 움직여 윤 부인을 축출시키고 주 부인으로 상원부인을 삼게 할 새,
정태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윤 부인을 옆집에 사는 소 승상의 심복 부하인 설홍의 집으로 보내어 숨어 있게 한다. 이에 주 부인이 다시 정당을 차지하여 유
보모로 하여금 가사를 맡게 했으나 소 상서는 일체 주 부인을 찾지 않고, 윤 부인의 행방을 찾지 못하여 상사 끝에 득병한다.
설홍이 문병 왔다가 소 승상의 엄명을 어기고 윤 부인이 자기 집에 있음을 아뢰매, 소 상서가 체면도 불구하고 밤중에 월장하여 윤 부인을 만나 그리던
회포를 풀고, 윤 부인의 아들 환흥 형제가 몰래 찾아오니, 이별한 지 1년 만에 부부와 모자가 다시 만나 즐김이 평상과 같다. 유 보모가 소 상서의 회춘을 보고 의심하여 소 상서의 뒤를 밟아 설가로 가서 엿보는데 윤 부인이 남편을 달래며 주 부인을 후대하라는 말에 감동되어 돌아오다가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다. 윤 부인은 주 부인이 자기의 거처를 알게 되매 안궁으로 들어가 숨는다. 주 부인이 윤 부인의 피신을 알고 분히 여기다가, 유 보모의 권고를 받아 윤 부인에게 편지하여 위로하고, 윤 부인도 답장을 보내어 주 부인을 위로한다.
천하가 태평하고 사해가 안연하더니, 남만이 강성하여 중원을 침공할 새, 좌승상 소현이 출전을 자원 평남대원수가 되어 아들 차흥을 데리고 출전할 새,
차흥이 큰 전공을 세운다. 이 때, 유 황후가 낳은 옥성공주의 부마 간택령을 내릴 새, 주 부인이 낳은 아들들도 응했으나 간택되지 못하고, 윤 부인이 낳은
환흥이 간택되매 황제가 윤 부인을 사하여 소부로 돌아가게 하니, 윤 부인이 은혜로써 세 부인을 위로할 새, 주 부인이 비로소 마음을 돌려 윤 부인과
화목해진다.
소 원수가 남만을 격퇴하고 회군할 새 황제가 친영하고, 윤 부인에게 사원부인의 직첩을 내리고, 소원수로 평남후를 봉한다. 공주의 길일이 와서 대례를
행할 새, 단성공주가 윤 부인의 현숙함을 보고 못내 탄복하며, 주 부인에게 윤부인의 아래 됨을 감심하라고 하니, 주 부인이 윤 부인을 찾아가 지난 일을
사과하고 유 보모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 유 보모는 마침내 등에 종기가 나서 죽는다.
윤 부인은 승상이 세 부인을 박대하는 것을 보고 승상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다시 안궁으로 가 숨는다. 승상이 찾아와 세 부인을 똑같이 대접할 것이니
빨리 돌아가자고 조른다. 이에 윤 부인이 승상의 언약을 굳게 받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부마가 황제께 청하여 조서를 내리게 하니, 윤 부인이 할 수 없어
황명을 받들어 본부로 돌아올 새, 주·채·양 세 부인이 윤 부인의 덕행을 감격하여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유일본으로, 14권 14책의 필사본이다. 총 949면으로 매면 10행, 매행 22자 평균으로 쓰여 있다.
9.적성의전
왕인공 적성의는 산수가 수려한 안평도의 제 2왕자로 태어났다. 제 1왕자는 항의라 하였는데, 형 항의는 심술과 행동이 사나왔으나, 아우 성의는 온후하고
기골이 장대하므로, 왕과 왕후는 항의보다 성의를 더 사랑하였고, 국민도 성의를 더 흠앙하였다. 이에 항의는 동생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를 느껴 항상
음해하고자 한다.
이 때, 모후가 우연히 득병하여 백약이 무효하고 점차 위중해 간다. 항의는 모후의 병에 대하여 무심하였으나, 성의는 주야로 시탕하며 날마다 하늘에
무후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빈다.
하루는 한 도사가 와서 이르기를, 일영주라는 선약이 있으면 모후의 병을 고칠 수 있거니와, 그 약은 서역 청용사에 있는데, 성의가 아니면 구득해 올 수
없다 하고 사라진다. 이에 성의는 모후의 병을 고칠 일념에서 부모가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서역을 향하여 떠난다. 그는 도중에서 선관을 만나 그의 주선을 받아 무사히 서역 청용사에 득달한다. 처용사의 도사는 성의의 출천한 효심에 감동하여 일영주라는 선약을 주며 빨리 돌아가서 모후의 병환을 고치라 한다. 그는 선약을 받아가지고 오다가 선관의 안내로 약수 3천리를 무사히 건너 부하들이 머물러 있는 데까지 온다.
항의가 동생을 보내고 생각하기를, 만일에 동생이 구약해 와서 모후의 병을 고치게 되면 일국의 인심이 동생에게 돌아가고 자기에게는 불리하리라
생각하고는, 부왕에게 이야기하여 동생의 마중을 가겠다고 하며 무사 수십 명을 데리고 떠난다. 항의는 도중에서 귀국해 오는 성의의 일행을 만난다. 항의는 성의의 불효들 문책하며 성의의 눈을 쳐서 물에 던지고 선약을 빼앗아 자기가 가지고 돌아온다. 항의는 선약으로 모후의 병을 고쳐 동생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삼는다.
성의는 형의 칼에 눈을 맞았으나 죽음은 면하고 눈이 멀었다. 파선한 편판을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죽림이 우거진 섬에 표착하였다. 그는 그 섬에서 겨우
정명해 나가면서 대나무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붊으로써 낙을 삼는다. 이 때, 중국 사신 호 승상이 안남국을 다녀오다가 그 섬에 들러 쉬고 있는데, 피리
소리를 듣고 사람을 찾게 한다. 성의는 자기를 찾으러온 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호 승상 앞으로 나아갔다. 호 승상은 성의 비범한 인물을 보고 불쌍히 여겨
중국으로 데리고 가서 천자에게 아뢴다. 천자는 성의의 뛰어난 피리소리를 듣고 감탄하면서 궁중에서 지내게 한다. 성의는 천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공주의
벗이 되어 놀며 지낸다.
한편, 성의의 모후는 완쾌되었으나 성의를 보지 못하여 밤낮 수심으로 지내다가, 성의가 기르던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써서 매어 주며, 공인인 성의가 있는 곳에 가서 전해 달라고 한다. 그 기러기는 중국으로 날아가 공주가 놀고 있는 궁중 완월루에 가서 앉는다. 공주가 기러기 다리에 매어 있는 편지들 성의에게 읽어 준다. 성의는 편지의 사연을 듣는 순간 너무도 감격하여 무심코 눈을 떠 보니, 신기하게도 눈이 열린다.
눈을 뜨게 된 성의는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공주와 결혼하여 중국천자의 부마가 된다. 성의는 천자로부터 여가를 얻어가지고 공주와 고국으로 돌아온다. 성의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항의는 무사를 보내어 성의의 일행을 죽여 없애라고 한다. 그러나 무사들에게 도리어 살해된다. 성의는 무사히 궁중으로 들어가서 감격 속에 부왕과 모후를 만나, 쌓이고 쌓였던 회포를 푼다. 성의는 잠시 고국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승상이 된다. 그 후
성의는 중국의 천자로부터 안평국의 왕세자로 책봉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왕이 되었다.
* 이 작품은 경판본·안성판본·완판본으로 간행되었고. ‘곽성의전(·聖義傳)’·‘적성의전(積成義傳)’·‘적성의전(狄成義傳)’ 등 동음이명의 제목으로 된 작품도 있으나 플롯이 동일하다. 활자본으로는 1915년 5월 24일에 발행한 영창서관본(pp.40)을 비롯한 4·5종이 있다.
10.한효순 왜란징조
만력 신묘에 한효순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무기고의 병기를 오랫동안 손보지 않았는데, 근년에 와서 새로 만든 것처럼 날카롭고 빛이 나니,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어서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중국 병력이 동원되어 구원했다.
신묘 연간 우리나라 군기시의 연못물이 저절로 솟아올라 담을 넘었는데, 한 늙은 아전이 말하기를, “옛날 을묘년에 이런 변고가 있을 때 남방에 왜적이
쳐들어왔었다.”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역시 이듬해(1592) 왜란이 있었다.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이 땀을 흘렸는데, 이듬해에 과연 역질이 크게 번졌다. 중국 구원병 제독 동일원이 왜적을 토벌에 성주에 주둔했을 때,
거기에서 관왕묘를 짓고 관왕상을 토소했는데, 이 관왕 상이 땀을 흘려 바닥에까지 젖으니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그런데 한 달도 못되어 사천 전쟁에서 크게 패했다. 사물의 징험이 이러니 헛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 중기)
11.괴질(怪疾)을 퇴치(退治)한 목촌리 당산
토주 된 이(李)씨가 와 계셨어. 그러면 연대를 모르겠소. 이건 낙안 읍지(邑誌)를 내놓고 봐도 잘 모르겄는디, 괴질(怪疾)이 저기서 들어 와. 괴질이란 건
옛날에 저 호열자. 그런디 당산 안에 계신 그 토주 이씨 영감이 꿈에 봉게, 저기서 괴질이 들어오는디, 수백 만 명이 먼 떼가 되어 들어 오드래여. 군사들
마냥이. 당산나무에서 헌(흰) 백건을 쓴 영감이 딱 서드니,
“저리 가! 저리 가거라! 여기 올 필요 없다! 저리 돌려라!”
아, 저 건너 마을이 용능인디, 용능 가서는 내일 아침부터 사람을 담아내는디, 형편없이 담아 내드라요. 그래서 이 마을 당산이 상하(上下) 사종(四種)인디
옛날부터 지(제, 祭)만 안 지내. 그래도 당산이 좋았다 그 말이여. 삼백 육십 년 전부터 당산이 되얐는디.
[낙안면 설화 8]
12.마마로 죽었다 살아난 아이
아 우리 고향에 박유신이라는 양반이 있는데, 그래 유신이라는 분이 누군고 하니 후족 인물이라고 하던 박종근씨 자제란 말여. [청중 : 김유신인가?] 아니
유신이지.
그래 인제 어떻게 됐느냐 하면, 그 유신이가 일곱 살 먹었을 때 손님마마를 하다가 죽었단 말여. 홍역을 하다 죽었단 말여. 옛날에는 홍역하다 죽은 애는 땅에다 안 묻는다 그랬어. 거적에다가 싸가지고 그냥 갖다가 낭구에다가 높이, 동구나무 가쟁이에다가 얹혀놔서 오작의 밥이 됐어. 그래 지 아들이 죽었으니까
거적에 싸서 갔다가 참 그 도랑말 앞 제방에, 옛날에 그 동구나무, 저 고목나무가 쭉 있는데 고목나무에다 갖다 얹어 놨어.
그 박종근씨 친구 되는 분이 마상웅이라고 그 분이 과객 지관질 좀하고 댕기고 어쩌구 이럭 하구 있었어. 그 마상웅씨가 천안 병천 장에를 이제 갔다가 어느 친구들을 만나 가지고 술을 좀 먹고 어떡하구 하다가서 그럭저럭 저물었어. 그래 이제 저물어서 두리번거리고 참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쪼고맣게 뭘
사먹고서, 그 친구네 집을 가면 언제나 반가이 대접을 하니까 거기를 가리라 생각하고 이라고 오는데, 그래 병천서 저물어 가지고서 한 이십 리를 오니까
밤이 이슥했단 말여.
그래 요면하게 강남이 앞에 거기서 개천 앞에를 내려 서니라니까 구진 비가 구죽구죽 온단 말여. 늦은 봄 초여름인데, 그렇게 이제 덥지도 않고 그저 춥지도 않고 그럴 때란 말여. 그래 구준(구진) 비는 오는데 할 수 없이 그 제방뚝에서 막 넘어서서 인제 그 박종근씨네 집을 찾아갈려면 호수가, 그 도랑말 앞에
제방을 너머가 인제 오는 길인데, 거기를 뜩 가니까 그래요. 그런데 어짠 느닷없이 쏘나기가 쏟아져, 냅다 바람이 불고. 그래 인제 그 등나무 숲이 등나무가
있잖아, 그래 거기를 이렇게 들어서니까 비가 안 들이치거든.
“그래 이상하다.”
큰 방울이 떨어질 적에는 비바람인 모양이여. 그래 고목나무에 그렇게 뜩 기대서 있노라니까 고목나무 위에서 원 소리가 난단 말여. 그런데 보니까 사람
소리여. 이상한 소리가 나. 다른 사람 같으면은 무서워서 도망을 가겠지만, 이 지관질을 하는 사람은 송장을 만지고 해서야 겁을 안 내거든. 그래 가만히 귀를 대고서 들으면서, 옛날에는 성냥이 없어서 담배 불을 부시돌을 켜 가지고, 부시라는 것은 강철쇠하고 돌하고 인제 딱 부대면 그 불이 반짝 일어나서 그걸로
담배 불을 피울 적에 그런 거로 해서 써가지고 담배를 피워 물고서 있노라니까, ‘엄마’ 하는 소리가 들린단 말여.
그런데 인제 그 무엇에 그 싸다 놓은 것이, 소리가 나니까 아무럭 해도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그래 살살 소리 나는 곳으로 겨 올라갔어. 올라가
보니까 떨어진 바지에다가 말아서 무얼 묶어서 거기에 갖다 얹졌다. 매달아 매단 말여. 그래서 이걸 안고 내려 온 겨. 안고 내려오다 이렇게 보니까 축축하단 말여. 그래 비가 와서 축축하니까 딱 내려다 놓고 이놈을 끌러 본 겨. 끌러서 손을 만져 보니까 손이 뜨뜻하거든. 그래서 이제 가슴을 만져 보니까 비가
스며들어 가지구. 그러니까 끌러 가지고,
“추워 엄마.”
이라고 있단 말여. 그래 '참 안되겠다. 자세히 봐야 되겠다.' 그래 그 담배불을 뻐금뻐금 하고서, 그 어떻게 얼굴형을 보니까 친구 아들이여. 가면 만날
아버지가 '얘, 아저씨한테 절 해라' 해서, 일곱 살 재롱이 보고 절을 하구 이라구 했지.
“너 무슨 애 아니냐?”
“으응.”
이라거든. 업구 그러니 비가 오니까 자리대기 그냥 그거 덮은 채 그냥 들어가지구 참 두루마기로 싸가지고 그래 올라가니까, 집안이 이렇게 여름밤에 가서,
“아무개 집 있냐?”
묻지 않고 뜩 찾으니까, 아는 친구가 있으니 거 마상웅여.
“그려. 아니 이 밤중에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왠 일여?”
그런데 보니까 등어리에다 무얼, 자기가 묶어다 내버린 거 모르겠어? 문을 꼭 걸어 잠구는 겨. 그래 보따리다가 집어 내버린 애를 업고 왔으니까 귀신에
홀린단 말여. 문꼬리를 잡아당기고서 신경질을 내면서 빨리 가라는 거지.
“네가 아무리 죽어서 못 살더라도 부모를 속이고 와!”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병천 갔다 오다가 이만저만 해 가지구서, 덕막을 와가지구서 이렇게 돼서 비탈길로 올라가서 끌러 보니까 자네 아들여. 그러니까
이렇게 왔다.”
그러니까 뒷문을 차고서 안방으로 들어가드랴. 날 궂는 날에 들여다보니까, 이거 우습더랴. 참 바깥에서 구준 비를 맞았으면 측측하지. 그래 안방으로
들어가서,
“아무개, 아무개 내 실지 마상웅이 실물일세. 내 도깨비가 아닐세.”
“이 밤중에 비가 오는데 마상웅이가 어째 올 리가 없고. 그 애 죽어서 갔다 내버려진지 이렌데, 벌써 썩어도 다 썩었지 왜 그 애가 오느냐?”
이제 끌러 내려놓고.
“엄마를 부르라.”
“엄마, 엄마.”
그래 부인이 환장할 일이지. 아이구 귀신이 왔건 송장이 살아 왔건 엄마 소리를 들으니까, 그래 그렇게 크던 애 잃어버리고 환장할 일이지. 불을 켜갖고
쫓아나가 보니까 사실 그렇다 말여. 그래서 얼싸 안아 내려놓고 미음을 끓여 먹이고, 거기서 참 밥을 같이 제대로 잘 먹고 잠을 자구서 그래 아무럭 하면
그렇게 놀랠 수가 있나. 그래 안 놀라게 됐나. 그런데 그때 손 묵었던 데가 커서도 시커멓게 자국이 나 있었어.
[사직동 설화 23]
13.강감찬과 마마손님
그라고 강감찬 선생이 이얘기를 하믄. 강감찬 선생이 어떤 일이 있는고 하이. 새로 이얘기로 하믄, 강감찬 선생이 일곱 살 자시 가지고, 뭘 했는고 하인께네
손님(天然豆)을 했다 말이라. 이전에 얽고 하는, 우리 조선에서 얽은 정승은 강감찬뿐이라 카는 기라. 강감찬 선생뿐이라 카거덩.
그런데 손을 했는데, 그 처음에 와여(와서), 그런 대인이라 놓으이 손님이 와여(와서) 손을 시킸는데, 얼굴이 본대 출생 얼굴카망(얼굴보다) 훨씬 나아, 면경을 놓고 보이. 그래 가 안 된다고, 저 손님 다부(다시) 불러 가지고 새로 하거덩. 새로 손님을 시키고 가. 내 몸으로 말이지, 처음에 손님을 하고 나이(나니) 얼굴이 보이까 훨씬 참 일등 호걸이라. 이래 하이,
“이래 가는(가지고는), 남자 얼굴이 이라몬 안 된다. 호사(好事)한다(好事한다. 즉 여자를 좋아한다는 뜻) 이기 아이다.”
그래 가지고 인자 손님을 다부 불러 가지고 두 번째 시킸다. 두 번째 시키 놓고 봐도 얼굴이 그기 아이라. 세 번 불러 시키께네, 세 번째는 불러 가지고, 저
손을 호통을 하는데, 굉장스리 뭐 귀신을 잡아 옇게 됐거덩. 그래 안 돼서, ‘그래 아이라, 이래 가는(가지고) 안 되이, 이번에는 융(영) 괴상스리 맹글자(만들자).’ 이래 강감찬 선생이 얼굴이 우리주리 매고(우글쭈글하고) 괴상했다요. [조사자: 어데가요?] 낯이. 낯에 마 얽어 가 우리주리맸거덩. 마 살결로 이리 매고 영
괴상시립아서. 이렇게 맹글었다 말이지. 그래 맹글어 놓고, 떡 손님은 가고, 면상(面相)을 들고 보이 참 괴상칙 했거덩.
“아! 옳지, 인제는 잘 했다. 이래야지 남자 얼굴이지.”
‘남자 얼굴 잘 나믄 와식종사(臥息終死)로 못 한다.’ 와식종사로. 집에 못 죽는다 이기라. 내 명(命)대로 못 산다 이기라.
[산내면 설화 8]
14.중국에 갔던 홍통사와 백통사
그런데 옛날 얘기라는 게 뭐를 특이한 이런 거, 근데 내가 다 잊어 버렸어요. 옛날에는 그 얘기를 할려면, 그 사람 이름도 잘 알고 벼슬 이름도 잘 알고 다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얘기를 할려면 중구난방 되고 잊어버려가지고 이름도 벼슬도 모르겠고.
우리나라 홍 통사 백 통사라는 역사로 나오는 거 있는데, 그것도 잊어버렸어. 그런데 홍 통사 홍씨고 백 통사는 백씨여. 근데 우리나라에 무슨
태종태세문단세 예성연종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조 500년 나도 거건 외는데. 그때 어느 임금 때 그 사람들이, 그때 임진왜란 나가기
전인데. 어느 임금 때 그 사람들이 중국으로, 대국이라고 그랬지. 청국 나라 사신 아니고 통역관으로 갔어요. 우리나라가 거기다 조공을 바치고 언제든지 대국 청(명의 잘못)나라 이런 데서 맨날 뭐 명령을 하달하면 뭐든지 복종을 해야 되고. 이러고 매여 가지고 살을 적이데.
거기 홍 통사 백 통사 두 사람을 우리나라에서 뽑아 가지고 청국 나라에 통역관으로 보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통역관 모르겠어. 옛날 일제 때는 말여 우리가 중국에서 살았어요. 만주 신경, 봉천 일본 사람들 하에는 그렇게 불렸는데. 우리말로 신경이 서울이여. 그러면 서울을 가지고 우리는 그전엔 경성라고 하고.
서울이면 허여튼 큰 도시, 이북이 평양이듯이 거가 신경인데, 그때는 중국이 거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은 심양이라고 그런다고. 심양이라 그러거든.
그러는데 그쯤 되는가 봐요. 이게 오래된 얘기니까 내가 대강 추리는데.
그려 중국에 가가지고 쪼금 기간이 있어가지고 나라에 볼일 보고 댕기면서. 이렇게 나와 가지고 중국 거리를 구경하면서 이렇게 댕기다 보닌가는, 미인
사진을 하나 잘 걸어 놓고서는 하루 저녁 손님 받는데, 우리 옛날 돈으로 천 냥이라고 그랬어. 천 냥이면 무지 큰돈인데, 대단한 미인이드래요. 이렇게
두 사람이 이렇게 가다가 보닌까는
“참 미인도 있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지. 저걸 천 냥씩이나 걸었는데.”
돈 천 냥 인께, 아무 사람들도 보고도 그냥 가는데, 그 홍 통사라는 사람은 이렇게 보드니,
“옛 그까짓 것 사나이가 한 번 낳다가 저런 미인한데 한 번 가서 어떤 여잔가 보리라.”
그렇게 하고서는 들어가고. 백 통사는,
“자네 미쳤나? 돈도 없는 게.”
지금으로 말하자면 출장비 공금을 좀 타가지고 간 게 있는데 들어갔어요.
“그 여자를 한 번 보겠다.”
그렇게 나오니까는, 그 색시가 중국 여잔데 굉장히 선녀같이 차리고 나와가지구서 이렇게 절을 하면서,
“하루 저녁 유하는데 나리께서는 돈 천 냥 있으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보니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더라는 게지. 그때 마음에는 필요한가 천 냥 딱 줬는데, 천 냥을 주겠다고 했은게 들어갔을 꺼여. 뭐여 시종들한테 안내 받아가고 들어갔는데, 이렇게 보닌께 그 여자를 너무너무 범할 수가 없는 존재드래. 너무 이쁘고 선녀 같테서. 그래서 돈을 그냥 주고서 그냥
나온 거여. 그러닌까는 그 아가씨가 이렇게 붙잡으면서,
“아버님! 제 절을 한 번 받으시여. 내 둘도 없는 은인인데 아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자기를 살려 줬은께,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다시 예를 갖춰서 절을 허고 그리고 헤어졌지. 그 다음에는 청국 나라 볼일 보러 갔으닌께, 높은 사람들 장관들
국방부 이런 장관들 맞는가 모르겠어요. 나 오래 돼서 잊어버려서.
그렇게 하고서 나왔는데, 백 통사라는 사람은 사욕이 많아서 사리사욕 채리느냐고, 그때도 중국에 왕 서방이란 사람을 말여 의부를 삼아가지고, 왕 서방 돈을 많이 활용해서 이 돈을 이렇게 벌었는데. 이 사람은 닥닥 떨어서 말여 그 여자를 줘 버렸다고. 그렇게 줘버리고서는 나라에 임명받은 일은 마쳤지.
그래가지고 귀국하라는 명령이 돼가지고 귀국할 적에, 백 통사라는 사람은 왕 서방네 돈을 빌려 가지고 중국 물건을 사가지고 이렇게 오고. 홍 통사란 사람은 돈이 없으닌께는 백수건달로 우리 조선을 돌아왔어요. 돌아왔는데 홍 통사는 나라의 공금을 축냈다고 나라에서,
“너는 나쁜 놈이다. 일도 제대로 못하고 그렇게 했으닌께 갖다가 감옥에다 저놈을 쳐 넣으라.”
형을 살고. 백 통사는 무지무지 그냥 돈을 써가지고 벼슬을 해 가지고 아주 사대부 노릇하고 잘 살았다고. 잘 살었는데 나라에서 가만히 하다가 청국,
임진왜란이 쳐들어 와가지고 우리가 원병을 보내달라고 청국에 사람을 보내가지고, [조사자:사신을.] 사신같이 가는데, 통역을 딸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누구를 천거했는가 하면 내내 감옥에서 풀려나온 홍 통사를 임명하게 돼가지고, 홍 통사가 또 중국에 가게 됐거든.
그랬을 적에 백 통사가 쫓아와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돈을 무지 벌어가지고 살면서도 그 왕 서방의 돈을 갚지 않을라고,
“이보게 자네! 이번 길에 왕 서방 만나걸랑 ‘백 통사는 말여, 싸그리 망해가지고 시종도 안 남게 염병으로 다 죽었다’고 그렇게 해주게.”
“자네는 하늘이 두렵지 않나. 그런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그러면 된다고 말여. 그렇게만 해 달라.”
돈을 안 갚으려고 욕심에 그렇게 했지.
“자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함세.”
그리고 떠나서 중국 땅을 밟았는데, 두만강을 착 건너서 들어 갈라고 보닌께, 고기 길거리에서 물장사를 하는 사람이, 거지가 다 된 왕 서방이 앉아서
물장사를 하고 있더라는 거지. 근게 조선에서 오는 사람들은 그땐 이렇게 담겼으닌까, 오는 사람은 그냥 일일이 붙잡아서 그 백 통사의 어떻게 사는가 안부
거를 물었는데, 홍 통사가 가다가 딱 걸렸잖는 게배. 그런게 딱 다달아 가지고,
“방가웁다.”
“방가웁다.”
“아이고 우리 백 통사는 어떻게 됐느냐. 어떻게 사느냐?”
그 사람은 이제 거짓을 고하느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척하면서.
“저 사람의 팔자라는 건 목숨은, 그 사람네는 모진 염병에 다 올라가지고 손자도 뭐도 그 집 아주 절손을 했노라고. 싸그리 아무 전게 다 죽어 버렸다.”
이렇게 했지. 날짜는 대강 잡아가지고 그 사람이 그랬는 거여. 그래 놓으니께 왕 서방이 막 통곡을 하더라는 거지.
“그 사람이 어째 이렇기 박복해 가지고서는 그렇게 죽었나. 참 애통한 일이로다.”
그랬어요. 인제 백 통사가 중국 땅을 척척 들어가는데, 인제 그걸 뭐라 그러지. 그게 무슨 청 같은 데서 하루저녁을 유하고 있는데, 거기에 중국 군졸들이
조선에서 나오는 사람 일일이 지금 말하자며는 ‘어디서 왔는가, 고향이 어딘가.’ 체크하듯이 묻는 건데,
“나는 이젠 아무 전게 사는 홍 통사다. 지금 통역관으로 사신을 모시고 가는 길이다.”
이렇게 돼가지고 밝히닌께는 어떤 군졸들이 착 나타나더니,
“저 홍 통사를 잠깐 우리 아씨님이 보시겠다고 한께 가시자.”
“나 잘못한 게 없는데, 연유도 모르게 어떻게 끌려가는 낸께.”
“아유 와 보시라.”
그래가지고 데려갔는데, 끈자금 으로 말하자면 그게 병부시랑이라고. 그러면 병조참판이지. 국방부 장관인 거여. 그런 으리으리한 집으로 데리고 가는 거여. 그래서 어떤 일인가 해서 앉았으니까 대청에서 이쁜 선녀가 몸단장을 차리고 나와 가지고,
“아버님을 뵐려고 그 국경 지대에다가 군졸들을 풀어가지고 조선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일일이 성함을 물었어도, 아버님 성함이 안 나타나더니 오늘에야
아버님을 만났다. 소녀의 절 받으라.”
하면서 큰절을 올리닌께,
“아주 이게 어떤 일이냐?”
이 사람이 엉거주춤하고 쩔쩔 매니까,
“저를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보닌께 그때 그 청록방에서, 청록이라면 지금으로 말하면 유곽 같은 데여.
“거기서 아버님의 은혜를 입어가지고 자기가 무사히 풀려나와가지고, 지금에 병부시랑 남편을 자기가 맞이해가지고 이렇게 행복한 생활을 사는데, 아버지가 그때 내내 병조참판으로 있었는데 역모를 당해가지고.”
양반들 세계가 그렇잖아요. 잘못되면 역적으로 몰려 일족을 멸하고 그러는데,
“아버님이 그때 역적으로 몰리고 뭐해 가지고서 벌금을 다 차압해 가고 뺏어가고 했어도, 벌금을 천 냥을 물리게 했는데, 그 천 냥이 없어서 자기가 몸 팔려
들어갔던 거래. 아버님 살릴려고. 그랬는데 아버님 같은 은인을 만나가지고 자기도 무사하고, 아버님도 다시 복직을 하고. 자기는 아버님이 상감을 신임을
받아서 더 높은 벼슬이 되었고.”
그리고 자기는 이제 병조참판이지. 병부시랑이라구 그랬으니께 모르겠어.
“그래서 지금에 이렇게 호화로운 거시기로 산다.”
식사대접 받고, 거기서 우리나라에 국사에 논하고. 원군을 받기로 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두만강께서 다시 왕 서방을 만났다. 그런데 왕 서방이
그 백 통사의 제사를 치러주고 있었다. 그날 날짜를 써가지고. 그걸 보고 조선으로 홍 통사는 돌아왔는데, 돌아와서 보니까 백 통사네 집이 진짜로 제사
지낸 날 염병으로 일족이 다 죽어 있었다.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노인정, 남필순(70, 여) 1996. 11. 9.
15.복 많은 석순이
복을 탈라면 대국 석순이 복을 타고, 멩일(명을) 탈라면 삼천갑사 동방한테로 타라. 대국 석순이가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나무(남의) 집으로 서른 셋 몇 살까정 다 먹고. 장가도 못 가고 그 동네만 살아. 그래 대국 석순이가 하루는 가만히 생각을 해본께.
“에라, 도중 먹을 땅에는 대국 장가를 못 가서, 대국 천지 귀경(구경)이나 하고 죽자.”
그래서 주인한 디 한 살 먹다 갈 것을 부자 집인데, 잡은 게 천 냥이여.
“나 이래서 저 장가도 못 가고 자석(자식)을 안 두고 내가 이렇게 못난 팔자. 부모 죽고 삼십 육정 넘지만 살 팔자니 하루라도 귀경이나 하다 죽어야겠다.”
그래서 천 냥을 해줬단 말여. 그 놈을 짊어지고, 그 돈을 아까워서 쓰덜 못 하고. 얻어먹고 댕겨. 얻어먹고 완전 무전여행이지. 이 동네 가서 밥 얻어먹고
저 가 자고. 이리 돈 천 냥을 짊어지고 무전거리를 가는디.
워쩜 젊은 여자하고, 젊은 여자가 빠져 죽을라면 노인이 붙잡고, 노인이 가서 빠져 죽을라고 하면 젊은 여자가 붙잡고. 서로 이렇게 싸워요.
“여보 노인장! 우째서 죽을라고 서로 이렇게 싸워요.”
“당신은, 행인은 갈 길이나 가라.”
“아이 안 된다고. 워떻게 한 내막을 알고, 인제 내가 도울 거 있으면 도우고. 그런게 인제 내막 좀 갈켜 달라.”
자꾸 사정하니께.
“후휴!”
아들이 지금 말하면 면장이나 부면장 같은 거, 계장을 했는가 벼. 근디 삼천 냥을 빚을 졌는디, 그래서 삼천 냥을 빚을 졌는디, 천 냥은 만들고 천 냥을 못
만들어.
“니 할범. 사흘 후면 죽어.”
인제 그 꼴 안 볼라고 아부지는 물에 빠져 죽을라고 하고. 삼천 냥도 저거 보통이어서 그렇지, 옛날 삼천 컸댜. 이제 천 냥이 모질라 나라에다 목을 바치니.
또 며느리도 지 신랑이 사형 틀에 올라가니 그 꼴 안 볼라고 죽고. 근게 서로 말이죠.
“내가 돈 천 냥이 있는데, 이 사람아, 살 수가 있는디.”
근디 내가 삼십 살 먹도록 벌었는디 그냥 막 줄 수도 없고.
“짊어진 게 천 냥인데. 시(세어) 보라.”
그라면서 보따리 끌러줘(풀어줘) 버렸어. 인제 그만 눈이 번쩍 뜨지.
“아유 시커머니 볼 것도 없는 거지.”
천 냥을 갖다 아들을 살리고 보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디.
“그 짓을 내한테 좀 갈켜 주라. 나 거져 준돈 됐다.”
“나, 안 줘도 괜찮은게 저 돈 쓸 데가 없는 사람인데.”
아무리 빗장 놓고 달아나려고 그래요. 그러고 갈 놈이 그땐 어쨌는지 모르지. 돈 천 냥 놨두니까. 그래 그 질(길)로 가다가다 산으로 가버렸어. 그래서
건골한 디, 뒤서거니 와가지고 기와집이 이 골짝 저 골짝 수 천 채가 있어. 아따 여기서 내가 이제 십 년도 더 얻어먹겠어. 그 놈 통도 하도 커서 얻어먹어야
한다고. 편한데 어떡하잔 말이여. 사람이 없어 한 동 집안에. 그 큰 노무 동네가 사람이 없어. 그 이상한 놈의 동네가 있어.
그래 그 동네로 갔어. 그 동네로 가서 불이 빤한 집이 한 집 있단 말이여. 그려 그 집을 들어가서 주인을 찾으니까 처녀들이 둘이 나와.
“여기 인적이 끊어진 지가 솔찬해 졌는디, 어짠 사람이 들어 오냐?”
“어짜서 이렇게 큰 동네, 이렇게 인제 내막 좀 알자.”
“사랑채로 들어가라.”
아주 초저녁을 잘 차려주고. 아 점심 굶었지, 저녁을 잘 차려줘서 잘 먹었어. 인제 처녀에게 내막을 물었어. 내막을 물은 게,
“이 뒷동네가 대국 종신들, 지금으로 말하면 검사, 판사 이런 사람들, 그 정승, 판사 이런 사람들이 전부 뒷동네가 사는데, 그만 다 죽고 없어져 뿌려. 다 죽고 지금 우리 형제 간인 말만은 처녀 둘 배깨(밖에) 안 남았다. 이거 어떻게 누가 할 수 없이, 저 이튿날 되면 다 없어진다.”
그 이제 그 석순이가 그거 하는 복을 탄 사람이니 안 무섭지. 이제 인적 떨어진 게, 고 동네 가면 죽은 게.
“에라 이래 해도 죽고 저래 해도 죽고, 내 팔자 돈도 몇 푼 없는 놈이 그까이 어떻게 도니, 거 귀경이나 할 거라.”
거 밤 열두시 경 그거 귀신들이 와갖고 난리라 이거여.
“요노무 귀신 어떻게 생겼나, 그라면 이제 담뱃대하고 담배 있걸랑 갖다 놓으라.”
담뱃대하고 화로하고 갖다 놓고, 담배만 피고 있다. 뭐 삼경 사경 하니 자시가 좀 넘응께 막 그냥,
“우당탕! 우당탕!”
막 청산놀음을 하고 사람이 난리를 부려. 그라더니 날리더니 두 놈이 떡 들어오드랴. 담배를 피고 있은게. 이제 이놈이 딴 사람 같으면 기암(기절)을 할
판인디 말이여. 그 담배를 피고 있어야.
“너 이놈들! 어떤 놈이냐.”
아이구 대국 석순이이(에)게 절을 너북하면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 이상하다. 이놈들이, 나를 어떻게 대국 석순인 줄 알고, 이놈들이.”
이제 거기서 용기를 얻었단 말이여.
“왜 이놈! 못 잡아 오냐.”
막 뚜두려 패니까.
“나 죽겠다.”
아이구 난리를 떠네. 그 떡 오더니 ‘아이구 대국 석순이’ 들고 전부 다 물러. 그러더니 막 대장같이 생긴 놈이 두 놈이 들어 오더라네. 두 놈이 들어오더니,
대국 석중순를 부를까 봐 절을 너부시 하더랴. 그라더니 이놈들이 안 하다가.
“그래, 니가 대체 무슨 원한이 돼서 군대면 군대지. 이 조정 대신들을 다 죽이냐.”
“기게(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죽은 귀신인디, 우리가 이 나라 군사들이라. 군사들인디. 양쪽 대신들이 당파 싸움으로 우리 군인을 갖다가 물 아래서 다
죽여 뿌렸다.”
저거 끼리, 골육지게 골육상잔은 우리 이북하고 육이오 때 터졌듯이. 그래서죽은 귀신들도 원한이 되서.
“죽은 귀신이 원한이 되서 우리 대국 대신들 다 죽였다.”
“처녀 둘 남아, 이거 갖다 머 하냐?”
“물어 가 잡아 먹으먼, 우리 인자 고향으로 물 밥 얻어먹으러 간다.”
석중이가 그러고 본 게, 한나(하나도) 무서울 것도 없어.
“느들 소원을 풀어 줄텐게 이 사람들 둘은 죽이지 말고, 느그 소원을 얘기 해라.”
“소 잡고 돼지 잡고 술 해 갖고 며칫날 즈그들 날 밝기 전에 실컷 멕이 주면, 우리 석순이 덕에 멕이 주면 우리 고향 산천지 가서 물 밥 얻어 먹으러 갈랍니다.”
그만 달아나 버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갖고 그랴. 그런데 방에 들어간 게 둘은 멀쩡이 질리(질려) 갖고 다 어디 갔어. 그런게 지금 이게 사람이 그 물에
빠지고 귀암(기절)을 하므는(하면은) 사람 코로 숨쉬는 코하고 입춤. 입 뭍으로 가면 사람이 살 수가 있댜. 그러니 입춤을 주린다 이거 같은 거. 입춤을 주고
한 게 이것들이 깨났어. 깨나가지고 이얘기를 죽 한 게.
“그러냐고. 고만 정신 차렸것다.”
찬물 떠다 놓고, 거기다 둘을 얻어 뿌렸어. 즈그 성은 큰 마을에, 동생은 작은 마을에. 그래가지고 그 얘기를 전해 가지고, 술 만들고 말 잡고 소 잡고 해 갖고, 적색 갈아 막 다비 같이 해놓고 있은게. 고 시간 된 게 이놈들 또 오는데 난리를 하네.
“그 잘 먹겠다.”
그라더니 이놈들 실컷 처먹는 귀신이 막 노래 부르고 하더니,
“여라, 잘 쳐 먹었다. 우리는 인자 고향 산천으로 물 밥 얻으러 갑니다.”
쓰윽 가더라. 그래 갖고설랑 정신을 차려서 본 게, 대국 지금 십 억인디, 그 인구 재선을 땅을, 땅 등기 문서가 양쪽에 다 있거든. 그 놈을 그만 떡 찬치(차지)해 뿌린게, 전부 대국 곳곳에서 전부 대국 석순이 땅이여.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683번지, 신은철(63, 남) 조사자 날짜 불확실
16.다래끼 났을 때
왼쪽 눈 위에 나거든 오른발 발바닥에 천평을 쓰고 왼쪽 눈 아래 나거든 지평을 쓴다. 또 오른쪽 눈 위에 나거든 왼쪽 발바닥에 천평을, 오른쪽 눈 아래
나거든 왼쪽 발바닥에 지평을 쓰면 곪지 않고 낫는다. 곪기 시작하면 효험이 없다.
발바닥에 ‘상’ ‘하’ 글씨를 써 놓고 잠을 잔다. 어린 아이의 고추 끝을 다래끼 난 부위에다 문지른다. 발에 ‘왕’ 자를 쓰거나 콩을 단다. 오른쪽 눈에 다래끼나
나면 왼발에 땅 지자를 쓰고, 왼쪽 눈에 나면 오른발에 하늘 천 자를 쓴다. 아무도 없는 샘물에서 물을 바라보며 “내 다래끼 빠졌구나” 하면 된다. 손톱, 발톱을 깍고 손톱을 칼로 벗긴다. 손톱, 발톱에 바늘로 십자가를 긋는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뽑아 눈물샘 구멍에 닿게 하여 이 물질을 제거하면 된다. 삼거리에
돌멩이를 삼각형 모양으로 놓고 다래끼 난 쪽의 눈썹과 콩을 놓아 다른 사람이 차게 한다. 실을 엄지발가락에 묶는다. 얼레빗을 방바닥에 문질러 열이 나면
그것을 눈에 대면서 ‘다래끼 삭카 주시오, 다래끼 삭카 주시오.’ 하고 빗한테 빈다. 길에다 솥은 걸어놓고 누가 가서 고걸 탁 차면 낫는다.
- 병충해 <무주문화재지 민간의료>
17.동티가 났을 때
울타리에 있는 나무(살구, 복숭아, 밤, 감 등)을 잘못 베면 동티가 난다. 부적을 써서 붙이는데 나무를 건드려서 났으면 목신부를 쓰고, 흙을 건드려서 났으면 토신부를 쓴다. 부적의 생김새는 목신부일 때 모 자를 쓰고, 토신부는 목 대신 토 자를 쓴다.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한다. 해가 넘어가면 밥을 해서 문 앞에 앉아서 밥, 숯, 고추, 칼로 굿을 한다. “호세이, 발에 따라 죽은 귀신, 못 다 먹고 죽은 귀신,
발끝에 따라온 귀신” 칼등으로 머리를 십자로 친다. 다시 “이집 대주에 오지 마라.” 칼로 열십자를 긋는다. “호세이” 칼을 던진다. 이때 집안으로 향하면 다시 집밖으로 향할 때까지 바가지 하고 칼을 엎어 놓는다. 초상집이나 이런 갔다가 동티 날 때는 진언을 염한다. 그 환자를 방에 놓고 부엌칼을 3개를 가지고
“헷세, 성주로 물리는 게 아니라 조상으로 물리는 게 아니라 잡귀, 잡신으로 물리니 쩍 나가지 않으면 이 칼로 목을 베어 대천 한 바다에 무시 가메(마)를
시킬테니 썩 나가거라, 헷세” 하고 말한다.
이렇게 진언치고 나서 “각항지방 심리가 두유여이 이실버 계로이마 필자상 정시우산쟁이신 이십팔수 시화(와)라 상구풍전제갈량 육국진승 진시방 혜(세)밀촐대 촐대방 김이서방 제갈량 육국진승 진시방 벽설의리 진서방 기밀촐대 촐대방 기미서방 제갈량 벽설의리 우리주 어명극형 사팔세” 하고 귀신 나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선 복송나무(복숭아나무) 동쪽으로 난 것을 꺾어다가 3개 두들기면서 ‘어명극형 사팔세’ 하고 말한다. 계속하면서 나가라고 명령한다.
아픈 사람을 방이나 마당에 놓고 한다. 끝으로 바가지를 깨기 전에 칼을 집어 던지는데 그 칼끝이 십자 골로 나가면 나간 거라고 그랬다. 그러면 물을 거기다 내버린다. [조사자 : 무슨 물을 내버려요?] 밥하고 물하고 소금하고 타가지고서 그렇게 물이 들어 있는 바가지를 들고 복송나무를 들고, 탈 3개를 거기가 담아가지고서 이걸 물려갖고, 그걸 내버리고 칼끝이 나가면 십자를 그리고, 거기다가 칼을 이래 꼽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 놓았다. [조사자 :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 할 때 바가지하고 물하고 소금하고 밥하고 복숭아 나무자기 3개를 준비하여 놓고 하는 거군요?] 칼을 이제 이렇게 +자로 그려놓고 그 위에 꼽아놓고 바가지를 그 위에 씌웠다.
<무주문화재지 민간의료>
충해
1.민옹전
주인공 민옹은 남양 사람이다. 무신년 싸움에 대공을 세우고 첨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지를 품고 고서를 독파하면서 대인의 사적에 대하여 흠모의 생각을 금치 못하며, 그도 장래에 큰일을 해보고 싶었다. 7세 때에는
‘항탁위수’라는 항탁이 7세 때 위수가 되었다는 것을 써 붙였고, 24세 때에는 항우가 강동으로 건너가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였던 ‘항적도강’을 써 붙였다.
40세가 되는 해에는 맹자의 ‘사십이부동’의 문구를 써 붙였다. 그는 해마다 출세를 하지 못하고 늙었던 것이다.
어느 해 정초에 그는 아내가 “올해에도 벽에다 글을 써 붙이지 아니 하오이까” 하면서 불평 겸 남편을 조롱한다. 그는 “왜 써 붙이지 않겠소” 하며,
‘범증호기계’란 문구를 써 붙인다.
계유 갑술년 내가 17·8세 때 우연히 아픈 데 없이 밥맛이 없고, 잠이 오지 아니하고 말랐다. 그래서 나는 병으로 인한 근심을 잊으려고 서화·골동품 등을 사
들여서 보기도 하고, 이야기꾼·음악가 들을 청해서 놀았으나, 그것도 오래가니 싫증이 났다. 그 때 나는 민옹의 소문을 듣고 그를 청했다.
민옹이 들어오더니 인사도 없이 버티고 섰다가 퉁수 부는 사람의 뺨을 후려갈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은 손님을 청해서 놀려고 하는데 왜 노기를 띠고
있느냐” 하며 꾸짖고, 또 피리 부는 사람, 거문고 타는 사람들이 수심을 띤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꾸짖는다. 민옹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아무도 대꾸를 못한다. 나는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민옹과 같이 있기로 했다. 나는 민옹의 기상천외의 희언과 행동으로 잠도 잘 자게 되고 밥도 잘 먹게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민옹의 소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왔다. 그들은 민옹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한 사람이 귀신을 보았는가고 묻는다. 그는 등잔
그늘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귀신이라 하며 이유를 말한다. 또 한 사람은 신선을 보았는가고 묻는다. 그는 곤궁해서 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이 신선이라 한다.
또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토별 설화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의 언변과 희언에 당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가장 어려운 불사약을 보았는가고 묻는다. 그는 불사약이 밥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좌중이 “서쪽 지방에 황충이 생겨 농사에 지장이 많아서 조정에서 잡으라는 영이 내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민옹은, “그런 작은 버리지를 잡지 말고 종로 바닥에 걸어 다니는 큰 황충(인간)을 잡으라”고 한다. 민옹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으나, 그는 엄숙한 태도로 태연히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 이 작품도 ‘연암외집’에 실려 있는 작품인데, 연암의 소설작품 중에서 ‘허생전’과 ‘호질’ 다음으로 긴 작품이다.
2.빈대절터
이 근처 이야기로서는 불당골(佛堂谷) 불교라 쿠는 불(佛)자 하고 집 당(堂)자 하고 골 곡(谷)자 하고 그래, 불당곡. 불당곡이 있는데 건너편 산이
서당곡(書堂谷)이거든요. 그런께 요쪽에 말하몬 남쪽 산은 서당곡인데, 거게 보자이 팥골이라는 마을에 인가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옛날에도 있었는데 그 서당곡이라는 거기에는 서당이 있어 놓으니까 서당곡이라는 지명이 나와졌고, 불당 거기에 절이 있었어요. 지금도 가몬 그 터가
있습니다. 그 터가 있는 데 지금 대(竹)가 집 부근에다가, 부근에 심은 대가 지금도 뿌리가 살아 있습니다. 그 불당곡에 가몬 일 년에 내가 한두 번은 꼭 갑니다. 어머니 묘가 불당곡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절이 왜 없어졌노? 그 절이 왜 없어졌노 하몬 빈대가 많이 끌었더랍니다. 옛날에 그래 그 뒤에 우리 선조들 얘기 들어 보몬, 아주 몇 백 년 뒤에도 가니까 돌맹이 밑에 빈대가 그대로 살아 있더라는 데 어짭니까? 지독한 빈대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런께 전부 주지 겉은(같은) 이런 사람들이 빈대
땜에(때문) 떴다 이 말입니다. 지금 거기에 가몬 내 혼자 가 살아도 살 수 있습니다.
[사등면 설화 24]
여 산청군 신안면 챙헌리(山淸郡 新安面 靑峴里)라는 데 넘어가몬 옛날 절골이 있었어요. 그래 절골에 절이 하나 있는데, 집현산 밑에 절이 있었거든예.
그 절이 빈대 때민에 망했어예. 우리가 쪼맨할째(어릴 때) 소 미이러(먹이러) 가서 볼라치면 담부락(돌담) 구녕에 빈대 껍지가 완전하이 딱 있었는데요.
그래 빈대가 너무나 많아 논께네, 고마 중이 하나 있다가 백마사라는 절로 갔는 기라요. 챙헌 절로 비아 놓고. 그래서 설이 돼서 그 불공할라꼬 챙헌 지(자기) 있던 절로 왔는 기라요. 그래 오니께네, 문을 연께네 고마 빈대가 도록도록 하이 지동(기둥) 매로(같이) 딱 뭉치 가꼬(가지고), 방 가온데 요래 가꼬 저
천장으로 딱 대이가 있더라요. 그마 놀래서 문을 탁 닫아 비리고 쫓아 나와 갖꼴랑(가지고는) 그 절에 다시 안 가고 말았는데.
그때에 그라고 나서 절골 바우가 고만 너무도 악한 바우가 있는데, 바우 끝에 요래 도로하이 쌓아 놓은 탑이 있었어요. 그래 탑이 있는데, 탑 안에서 종소리가 세 번 탕 울리민서로,
“그 절은 묵어야 된다.”
쿠더라요. 그런데 뭐 소리가 울리더라 말이지요. 그래 탑 안에서 울리는데, 그 중 귀에 그래 듣기는 기라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마 영원히 절로 묵하 비리고(묵혀 버리고) 갔는데.
그라고 난 뒤에 몇 년 좀 있었는데, 옛날 사람들은 저 산에 인자 풀하러 가거등요. 그런데 절골 절터에, 여는(여기는) 각시나무라 쿠더나(하든가)· 연자꽃. 고기(그것이) 고마 절터 밑으로 맨맨 하이 서 가 있었거든. 봄 되몬 발가이(발갛게) 핐단 말다. 그런데 연자꽃 밑에 가서 풀로 하이께네, 고마 좀 있으께네,,
“우르르.”
“우르르.”
거꼬 하거든. 그래 두 번꺼정(까지) 듣고 세 번째 쪼깨(조금) 있은께,
“우르르.”
쿠는데, 나무가 버르르 떨더라 캐. 그 사람이 깜짝 놀래 갖고, 그 연자나무를 치러본 께네(쳐다보니까) 딱 거짓말 아이지, 고마 지네가 딱 요렇더라 캐.
이 자로 치몬 딱 장골(壯丁) 한 발도 되겄더라 캐. 한 발 되는 기 너비(넓이)가 이런 기고마. 연자·에(연자나무에) 착 후이(휘여)가 붙어 가 있는데.
그거로 마 채리(쳐다)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놀랬던지 고만 놀래 가지고 좀 내리오다가 마 기절을 했삤어. 기절을 했는데, 그 질로 그 사람은 죽어 삤는 기라. 그 자리서 죽어 삐맀어. 고만, 좀, 내리오다가 후더끼(쫓겨) 내려오다가 기절로 해서 죽어 삐리고. 그라고 난 뒤 후로 그 절골 절터라 쿠는 그 절은 고마 영원히 망해비리. 절골 이름이 지금도 절골이요.
그래 망해 비리고(버리고) 말아 삤는데, 한 번은 백마산 절에 중이 백마산에 거서(거기서) 딱 꿈을 꾸는데, 그 절에 중이 꿈을 꾸니께네, 산천군 신안면 칭언리 그 절에 오는 기라요. 그래 꿈에 절에 오니께네, 여탄한(이렇다 할 만한) 각시가 나오더라 캐요.
“도사님, 우찌 이적지(이때까지) 절로 비아 놓고 이래 갖고 저 안 오시느냐? 혼자서 이 절을 지킴서 무거이(무던히) 욕을 보고 있는데, 도사님이 와(왜) 진작 안 오시고 인자(이제야) 오시느냐?”
“내가 내 일이 바빠서 그래 이적지 몬 오고, 내가 오늘은 불공을 올릴까 싶어서 온다.”
꿈에 고마 불공 올리러 바아(방에) 드간 기라요. 그래 꿈에 바아 불공 올리러 부치(부처) 앞에 딱 드가(들어가) 선께네, 완전한 지네가 딱 서리 갖고 그 중을
딱 잡아 삼킬라 쿠더라 캐요. 가함(고함)을 지르고 놀래 깨이께네 그만 꿈이더라요. 그래 그런 전설이 있오. 절골 전설이요.
[명석면 설화 5]
지금 요새는 몰래도 우리 클 때는 그칸다. 돌 기왓장을 들시이 빈대로 여러 있단다. 옛날에는 절이 있었던 모양이라. 빈대로 빠짝 마린 빈대가 있단다. 예전에 북골(현곡면 남사동에 있는 지명) 절이 있었든가? 붓골 절터듬이라 크는데, 그게 그렇다는 소리가 나데. 우리 어릴 때 그러데. 구들장 띠로 가먼 빈대가
말라 가 하얀 빈대가.
[현곡면 설화 153]
저 부림면(富林面) 여배(余背)라 쿠는 데 안에 드가면 유학사(留鶴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머무를 유짜, 새 학짜 유학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 절이 어른들
얘기를 들으면 합천 해인사(海印寺)보다 먼저 생겼다 합니다. 고 절이 먼저 생겼는생겼는데, 옛날에 절터는 지금 현재의 절터보다 고 우에(위에) 있습니다.
유학사 절 있는 데 고 우에 보먼 덤(바위)이 있는데, 큰 덤이 있는데 거게 절이 있었는데, 옛날에 하도 빈대가 많아 가지고 절이 폐지가 되어 절이 알로
(아래로) 옮기삤다. 현재도 유학사라는 절이 암자보다는 좀 크고 절이 고찰로써, 옛날 절로써 지금 있습니다. 이 절을 갖다가 무학(無學) 선생님이 절터를
잡았다 합니다.
[부림면 설화 11]
3.제천 송학사의 빈대
그전에 빈대가 하도 많고 끼서 중놈이 본래 불지를 못 해서 망했데요. 절이 빈대가 껴가지고. 별 얘기는 없고 한 동안 절이 폐지가 됐다는 그래. 그게 뒤에
어떻게 중수가 됐다고 그래더구만요.
글쎄 그것은 잘 모르는데 빈대가 많았는데 그래요. 중 하나이 동냥을 갔다 오니까 중들이 그 빈대가 다 파먹어 없어지고, 그 법당에 전에 없던 일을 지둥이
하나 서 있더래요. 그래 중이 ‘이게 뭔 지둥이냐’고 건드리니까, 거기서 그만 빈대가 확 헤트러지더니, 그 중 마져도 다 파먹어 버리고 말았대요. 지금도
돌맹이를 들어 보면 빈대가 있다는 거여.
[영월읍 설화 138]
4.이와 빈대와 벼룩의 싸움
예전에 서울서 빈대 없는 집이면 풀 것이, 예전 날이면 뎀부랍이다 썩 문질르며는 빈대피요 그래서 잤다는 얘기요. 아이 글쎄 썩 문질르며는 빈대 피여.
그러구선 빈대가 내려 왔다 올라갈 적에는 이 재산을 불러 모둔 댔어. 내 집 내 집 숭볼기라구.
빈대가 왕인디. 저녁마다 겟말 뒤적거리면, 저녁이 되면 빈대한티 죽을 일 이 하구 벼룩, 밀주 다 썪어 터진 거, 생농 보리술이나 대접으로 줘두 덜컥덜컥
먹구, 시커만한 송편 이만큼 짓는 거 짐치국이다 막 집어 먹었어두 구십 팔십 살었어.
지금 사람들 마냥 매일 양치질하구 저녁마다 발 닦구 이런 식의, 그전 양반들은 일 년두 맨방이여. 삼 년두 맨방이여. 상투 밑 한 번 안 치구, 그냥 여기가
덥적덥적 한 서캐가 실었단 말여. 머릿속에 맨 서캐뿐이었어. 댕기 조금 땄을 적에 서캐 안 있구 젼뎠남. 아 그래 댕길 땄었단 말야
그런디 빈대가 왕여, 건디 두 사람이 자는디, 피를 좀 긁어 먹으야 헐텐디 빈대가 요렇게 천장에서 내려다 보니께, 이하구 벼룩이라는 놈들이 먼저 선식을
혀. 이놈들 천하 고얀 놈들 좀 봐. 지금 말루하면 어디서 음식이 들어오면 어른부터 잡수시게 한다든디, 저런 이녀석들부터 먹는다구. 먼저 선식을 해서
먹거든.
“이놈. 너희 놈들, 이놈들 그럴 수가 있느냐.”
불호령을 할 참인디. 시비가 났어 이 하구 벼룩이 싸움이 났단 말여. 아 빈대란 놈이 싹 내려다 보니께, 천하에 괘씸한 놈들이니께 혼내야 하겠거든. 지금
말로는 신작로서 애들이 싸우면 못 싸우게 말리듯 내려가 혼내야 하겠거든. 내려가서는 벼룩이란 놈부터 안 되먹은 놈이라구 먼저 손 잡히는디 괘씸하거든. 다리를 한 마디 끊어 짤라 버렸어. 이란 놈을 가서 혼내러 가니께, 벼룩이 짤라진 발을 가지구 이를 냅다 동가슴 들구 차가며 시비를 하대. 그런디 빈대가 그간 무슨 약속이 있던지, 이 하구 벼룩이란 놈이 ‘저놈이 어른이면 어른이지, 우리 싸움에 지가 무슨 상관이 있냐’구. 두 놈이 다 덤벼서 빈대를 꼭 눌렀어. 빈대가 벼룩 눌러선 납작해져 버렸고, 저 이 잡어서 봐. 이 앙가슴 새까맣게 먹졌유. 벼룩 부러진 다리루다 냅다 옆으루다가 걷어차서 이가 새카뮤.
옛날에는 배에 풍선두 나심방 동서남북 쪽 가리는 수가 없을 시절이 이는 반드시 북쪽으로 방향을 가리켜, 백 마리 이가. 우연한 사람이 잡으면 30~40마리 다 되거든. 바지 혼수리 우연하면 서캐 같은 거. 그럼 초가을이 바지저고리라고 해 입은 거 섣달 다 가도록 입는디. 내복이 어디 있어. 지금 파자마, 잠옷 좋지. 그전 날에는 그게 어딨어. 낮에 입은 놈 그냥 입구 자는 게 잠옷유. 그런 시절인디 지금두 좋은 종이다, 어디 이 근래 이를 구할래야 구할 수 없어. 이를 몇 마리 구해다 씩 놓구서 댓수가 어디로 많이 가냐면 북쪽으로 많이 가지. 북쪽으로 향해. 어디 가든지 이건 세상없어도 북쪽이여. 그러면 남쪽은 예구나, 동은
예구나, 서는 예구나 알 수 있더란 겨.
[당진읍 설화 45]
5.벼룩과 빈대와 이의 싸움
빈대허고 이허고 서히 다툼이 났단 말여. 기운 장 쌤이 나가지고 서로 허는디, 이란 놈이 벼룩 뺨을 쳤던게 벼. 근게 벼룩이 뺨을 되게 맞어서 뽀쪽허니 생겨, 주둥팽이. 그러고 뾰쪽허다고 뺌이 볼태기 살이 안 붙었어. 자빠지먼서 발로 툭 찼더니 이란 놈이 먹퉁이 나 앉어 뭐이가 먹이졌거든. 자빠져도 빈대허고 자빠졌던게 벼, 그래서 빈대란 놈이 납작허드레.
[칠보면 설화 35]
6.빈대절터 청심암 전설
지금 여기서 저 사거리 있지요. 그만큼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그때는 처백용리에서 2km 백양사에서 암자가 있지요. 백양 근처의 청심암. 옛날에 암자가
그런게 청심암 들어가는 길은 바랑굴, 스님이 바랑을 질머지고 다녀. 거기 들어가면 또 바람이 세요. 저수로 막고는 거기를.
그런데 빈대가 많아가지고 빈대 때문에 살덜 못 허고, 그곳을 불을 질러버리고는 이제 나오는디, 불을 질러버리고 스님들이란 가다 가면서 불을 질러버려
게다. 모든 보물을 스님들이 가져갈려다가 뇌성벽력을 쳤은 게 놓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그 터가 있어요. 그 지둥을 슨(세웠던) 주춧돌이. 그러니까
보물을 가지고 가다가 머문 곳이, 하나는 촛대바위가 되버리고 병풍바위가 높거든요. 그래가지고 그런 바위가 되고 병태(병풍) 바위라고 그런 바위가 전설에 남어 있어요.
[북이면 설화 3]
7.백질바위와 빈대절터
언간 높으니께 백(百) 질(길) 된다 고마 이래 된 께. 그기 백질바우가 됐어. 그런데 백질바우 밑에 가만 여러 가지 기암기석이 마이 있지. 근데 백질바우라
카는데 거 우에 올라 가만 예전에 그 밑에 댕기미 무신 버섯이 아이라 뭐 선주(식물명은 선주름잎)라 카는 그런 방구에 나오는 거 있쟎아요, 반찬 맨드는
그런 거 딸라고 발을(방구인 듯) 우에 매고 중간에 허리에다가 껄방에다가
우에는 뒤에서 니러 가만 그 본래 이렇기 산이 기울기 돼 있는데, 그래서 거기 올라 가면 크지, 그기 인제 백질바우라. 그래 고서 한 오십 메다 가는가,
요짝으로 나와 가주고 예전에 거게 절이 하나 있었어.
왜 절이 그 유지를 몬했나 하면, 첨에 쪼만하게 지서 암이라. 절이 아니고 암잔데, 지사중이 하나 있고 이랬는데, 지금은 약이 좋은께 그 빈대라고 구경
모하지요. 예전에 우리 알기로 여게서 살찍에 빈대 물어싸기 때문에 지녁에 잠을 몬 잤거든. 그 절에도 빈대가 있어 가지고 중이 견뎌 내지를 모 했어.
그래서 고만에 그 절이 폐지가 됐다는 기라.
그래 지금도 근년에는 그런 소리 없더라마는, 풀하러 갔는 산나무꾼들이나 풀 하러간 사람들이 거 가서 요만한 돌키 어데 있어 하나 덜씨만, 거어 빈대가
소복하다 캤어. 그래 요새는 아무 얘기도 안 해. 산이 깊어서 그랬는가 가지도 안 하고. 그래서 그 절이 있었다 그 말도 있어.
[낙동면 설화 5]
8.빈대절터 대원사
울주군 온양면(蔚州郡 溫陽面)에는 대운산(大雲山)이라고 하는 큰 산이, 높은 산이 있습니다. 이 산에는 대원사(大原寺) 카는 옛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될 정도로 큰 절이었는데, 옛날에 이 절에 주지가 별 마음씨가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가 신도들이 찾아와서 하도 귀찮으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좀 편하게 지내야 되겠는데, 너무 많이 찾아 와가지고 이거 골치다. 내가 산보는(死後의 잘못 말함) 자식을 두는 것도 아니고 사다가 죽으면 그만인데….’ 늘 그런 끼꿈하게(언짢게)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가 조금 머물았다고 합니다. 이 주지가 묻기를,
“하, 원수겉이 사람들이 너무 찾아와가지고 골치가 아픈데, 어떻게 하몬 사람 안 오도록 할 수 없겠느냐?”
그렇게 방정맞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 도사가 듣고,
“그야 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당장 그런 뭐 수가 있습니다. 그 절에 들어오는 산 모랑지(모퉁이)를 끊어다가 길을 내십시요. 그리하면 손(손님)이 덜 올
겁니다.”
떠나갈 때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사가 지나가고 난 뒤에 사람을 시켜서 그 산모랑지를 꽹이를 가아(가지고) 파고 길을 내었는데, 그 길을 내고 난 뒤에는 사람이 안 오고, 빈대가 아주 많이 일어가지고 빈대 때문에 그 절이 망해 뿠다고 합니다. 절이 망하니까 사람들이 안 오고 소원대로 되기는 됐다고.
이런 것은 흔히 손님을 귀찮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는 하나의 전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울산시 설화 21]
9.빈대 때문에 망한 절
그 정자(亭子里)를 낼바다보는 저 산봉(山峰)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라머 현재 너리펑펑한 광장이 되가 있습니다. 거기에 옛날 절이 섰다 카는 그기 있습니다. 주춧돌이 있는데, 그 부근에 기왓장이라든지 쪼가리 말입니다, 혹은 돌이 있거등요. 그 돌을 디시믄(들추면) 반다시 빈대 내(냄새)가 납니다. 또 빈대 껍디기가 나옵니다. 그래가주고 여게 절은 있었는데, 빈대 껍디기가 나옵니다. 그래가주고 빈대 때민에 감당을 몬 해가 절이 망했다.
[강동면 설화 2]
10.빈대 때문에 망한 탑 절터
이조 때 관곈디, 그 년도는 자세히 모르는디 거기 절골이 있었습니다. 그래 절골이서 절이 많해서 중님들이 많했어요. 많했는디 거기서 밥을 할라면은 쌀을 씻을 거 아닙니까? 씻구 보닝게나 그 뜨물이 요기 오층탑까지 탑골까지 내려왔어요.
내려왔는디, 그절이서 빈대가 많아서 중님들이 부재를 못 했습니다. 부지를 못해서 할 수 없이 그 절을 버리구서 그냥 떠났다 기거예요. 그때에 왜정 때 부여 경찰소 서장이 일본 사람였었어요. 거기 그 절이 허물어져 갖구서는 씨러졌습니다. 그래서 거기 절에를 캐보닝게 그때에 마패가 나왔어요. 뭐냐면은 양짝에 금거시기루 해서 딸랑딸랑 방울 거시기가 나왔습니다. 왜정 때 일본서장이 그걸 가지구서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부여군 초촌면 은평1구 경로당, 윤경림 (58, 남) 1983. 2. 3.
11.비내 바위와 빈대 때문에 망한 절터
거기서 좀 올라가면 비내바우라는 바위가 있어. 근데 그 바우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뚝 불어진 바위가 있거든. 근데 그 바위가 사람이 비를 피해도 한 백 명
피할 수가 있어. 그 위도 한 백 명 앉을 수가 있구. 산에서 그 쑥내민 바위가 있는데 그게 비내바위여.
그런데 그 바위 밑에 옛날에는 절에 암자가 하나 있어더랴. 우리는 보도 못했지만 전해 내려오는 게 그려.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말은 그렇겠지. 거기 빈대가 하도 많았싸서 그 절을 태워서 없어졌다 말이 전해서 내려오지. 여자덜 비내 꼭지같이 생겼다고 해서 비내바위여. 비내바위는 아직도 있지.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치목마을, 김영래(80, 남) 1993. 5. 1.
12.모기를 비틀고 소금을 만든 검단선사
[조사자 : 모기가 어떻게 했다고요?] 모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검당은 검당 선생님이 모기가 입을 삐뚤어 버려가지고 못 문다 그랬어. 못 물어. 검당
그쪽으로는 사람을 안 문다고.
[조사자 : 검당 그쪽으로 소금은 어떻게 만든다고 했어요?] 소금은 그 양반이 가매 만들어 놓고, 다른 데 흙을 말려가지고 수더분하게 하는데, 거기 검당
선생은 구덩이 파 가지고 물만 길어다가 붓고 불만 때면 소금이 됐다고 했어.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랬어.
고창군 심원면 용기마을 슈퍼 앞 길가, 정수덕(71, 여) 2009. 8. 17.
13.모기가 물지 못하게 한 검단선사
[조사자 : 검단선사의 신의한 이야기 그런 거 들은 적 없으세요? 검단선사가 모기를 비틀어 놔서 모기를 안 문다는데 그런 얘기 못 들으셨어요?] 그런 얘기도 있어요. 그 얘기도 산적들이 자면서 검단선사한테 얘기를 했어요.
“여기 모기떼가 다른데 바닷가보다 억세고 사나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다. 내가 시정을 해 주마.”
하고 나서 실력에 의해서, 조화 능력에 의해서 부처님한테 치성을 드리고 나서 모기 목이 비틀어지는 조화를 부렸다고 하지요. 그 뒤로는 그 근방 모기가
있기는 있어도 많이 물거나 쏘지 않아서, 소금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편해졌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요.
고창군 고창읍 제보자 자택, 이기화(75, 남) 2009. 8. 17.
14.개미가 물지 않게 하였던 강감찬
영광 원자력 발전소 용수원이 되는 수몰이 되었는데, 거기 우곡마을 모정에 가면 개미가 물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요. 왜냐하면 강감찬 장군이 거기를
지나다가 개미가 달려들어 물으니까 목을 비틀어 버려서 그런 전설이 있어요. 모기가 사등 마을이 바닷바람이 부니까 모기가 없는 지도 모르지요.
[조사자 : 어떤 분이 말씀하시는데 검단선사가 거기서 소금 만드는데 모기가 자꾸 물어서 비틀어서 그렇다.] 그런 관계가 있겠지요. 저는 사등 마을에 모기가 안 문다는 건 처음 듣고. 운곡마을에서는 개미가 사람을 물지 못 한다. 강감찬 장군이 목을 비틀어 버렸다. 그런 게 있지 않나요? 최 고은 선생이 개구리가
삼사월에 우니까 개구리 소리를 울지 못 하게 했다고 그런 말이 있지요.
고창군 고창읍 노인회 고창군지부사무실, 나홍찬(90, 남) 2009.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