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내 딸
막내는 아빠 엄마의 연리지에 네 번째로 달린 꽃이며 열매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녀석이라” 하면 아빠 눈으로 들어가겠다고 덤빈 사랑동이다.
막내가 잉태하기 전이다. 누구도 스승을 애국자라 보지않지만, 1975년 스승께서 나라를 염려하시며
“나라의 위기가 닥치니 너희들이 임지에 가서 기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기간은 육십 일인데 이 기간은 육천 년을 탕감하는 기간이라고 하셨다. 그때는 분가했을 때라 친정 어머님을 모셔다 놓고 경남 하동으로 떠났다. 전국에 도착한 모든 대원은 12 월 1 일부터 첫 새벽에 높은 산꼭대기 정해진聖地성지에 올라가서 나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60 년 전 후 하여 대 변란이 있었다고 한다.
“6,25 때는 여름이라 괴뢰들이 남침하였을 때 체질적으로 더위도 참기 힘들었고, 또 장기전이라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었던 점을 감안한 그들은 남쪽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성탄절 12월 25일에는 망년회를 겸해서 흥청망청 들뜨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임진강 어름 위로 건너 와 하루만에 완전 남한을 정복할 심산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고 하시며 나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 남한에서는 ‘선 경제 후 통일“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을 때, 북쪽에서는 ’‘선 통일 후 경제’ 를 계흭했던 때다. 그런데, 전국의 명산에서 부인들이 같은 시간에 일제히 세벽기도를 드렸을 때. 60년만에 임진강이 얼지 않은 이변이 일어났다.
靈媒字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부인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강물에 계속 던지자 강물이 얼 수 가 없었다 는 상징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여러 영통인들이 증언했다.
내가 임지인 하동에 있었을 때 우리 상우가 발걸음 띠며 다닐때였다 시어머니는 경노당에서 바다 물이 갈라진다는 진도로 여행을떠나는 날이었다한다. 버스타는 집결지가 우리가 사는 큰길인데 차를 타려고 가는데, 우리 둘째 아들 발걸음을띤 상우가 자박자박 거리며 큰 길로 나와서 어머님은 차를 타려고 급히 가는데 아이를 보자 놀라서 “얘가 왜 큰길에 나왔어” 하며 놀라자 상우는 할머니를 보고 상우는 안아 달라고 팔을벌리는데 차는 타야고 해서 아이를 우리집 골목까지 안고와서 “어여 들어 가” 하고 돌려 세워놓고는 급히 차에 올라탓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태운 차가 출발하자 모두들 웃으며 서로 인사하고 떠드는데 어머님은 상우가 집으로 잘 들어 갔는지 또 도로 나와서 할머니를 찾는지 불안해서 좋은 걸 봐도 좋은 걸 하나 못 느겼다고 한다. 밤에 여관에서 자고 돌아 올 때까지 하나 좋은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어느 부모나 우리 성혼 가정의 아이들을 돌 본 부모들도 역사 앞에는 모두 공로자라고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또 60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또 교회에 와서 서성거리던 청소년 소녀 둘울 달고 왔다. 둘은 중학교 갈 기회를 놓친 것 같아보였다. 그런데 내가 사는 성남에는 市로 승격되자 천막을 쳐서 야간에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곳도 생겨니고 우리 교회에도 최정찬 목사님이 오시자 야간에 중학교 과정을 개설하여 공부 시켰을 때다. 그래서 두 아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잡아 주려고 데리고 온 것이다. 가족 여섯이 자는 단칸 방에 말 만한 둘을 보태자 여덟이 끼어서 자면서 야간에 공부하도록 보냈다.
시부모님의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조차도 나를 이해 하지 못해서 비난했지만, 동지는 말 없이 협조하였다. 데려온 인희라는 아이는 우리 사는 형편이 눈에 보였는지
“엄마 먹을것이 떨어지면 길에 나가서 우리 다 같이 장사라도 하자” 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오빠가 서울 온 김에 우리 집에 와서 보니 버젓한 학교도 아니고, 돈 버는 일도 아닌 걸 보고는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너들이 딸이 없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왜 그 아이를 를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 했다. 맞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배움의 시기는 씨를 뿌리는 것처럼 때가 있는 것이라 늦긴 해도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라 해도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희라는 아이는 오빠따라 가고 경희만 일 년을 데리고있는 것도 어려웠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경남 하동에사는 부모님을 이사오게 하였다.
그러자 그 부모님이 서울 성동구에 방을 얻자 나도 이사하는 집으로 갔다. 우리 막내 산후 조리기간이라 푸석푸석한 채로 업고간 아기를 이사온 방에 눕혀놓고 경희를 데리고 성동구에 있는 성동중고등학교 야간부 중학교에 편입을 시켜놓고 돌아왔다. 어영부영 하다가 또 배울 기회를 놓칠까 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경희의 부모님은 낯선 고장이지만 닥치는대로 일을하여서 남매를 공부시켜 경희는 성동 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또 남동생은 건국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러자 경희 남동생은 협회로부터 미국 브르짖트 포드 대학에 근무 발령을 받았다. 동생이 떠나가고 난 뒤 얼마 있다가 누나도 슬하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도미하여 지금은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여 큰 병원에, 또 딸아이는 대학원을 졸업하여 제약회사에 정식 직원이되어서 둘 다 미국 시민이 되었다.
나는 또 육천년 역사의 탕감을 60일로 하고 돌아오자 넷째 딸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동안 경희를 감싸며 배우게 해주려는 마음 때문에 태교라면 좋은 생각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기간이다
임신 8개월서부터는 배가 너무 불러서 쌍둥이인가 하고 병원에 갔더니 태아의 머리가 골반 보다 커서 수술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소견을 무시하며 셋도 무사히 낳았는데, 무슨 수술이냐고 하며, 진통이 왔을 때는 수술할까 봐 일부러 다른 병원에 입원하였다.
의사의 진단을 무시한 나는 진통이 격해지자 분만실에 와서는 낳다가 안 되자 의사는 수술해야 되겠다고 하는데, 시어머니는 펄펄 뛰면서 “우리는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한다” 고 거절하였다.
의사는 다급해지자 이러다가 둘 다 놓치겠다며 산모라도 살려야 되겠다고, 수술 도구를 꺼내자 이번에는 내가 또 백낙같은 소리로.
“선생님 우리 돈 많아요.. 하며 소리소리 질렀다. 다급하니까 나도 다른 사람이 된 것같이 발악하며
”어머니 아범에게 빨리 병원에 오라고 전화하세요“ 했더니, 어머니는 마지 못해서 전화를 하는데, 그 쪽에서 점심 먹으러 깄다고 했는지
”그러면 점심 먹고 돌아 오거들랑 병‘원으로 오라“ 고 전해 달라는 말이 들리자, ’두 생명이 죽고 사는 판에 밥이 문젠가 ”먹고 오거들랑“ 그 말이 내 심장에 옹이로 박혀버렸다. 하다하다 안 되자 결국 수술실에 실려가서 오후 3시에 아기 울음 소리를 들었다.
아기가 태어나자 병실로 옮겨 회복하고 있을 때다. 어머니는 아기보러 오는 사람만 보면 붙들고
“이 병원 돈 벌려고 아기 머리가 보이는데 수술을 시켰다” 면서 하루 종일 그 이야기다. 그 말만 들리면 나는 계속 ‘어째서 어머니 마음이 저럴까’ 하고 그런 소리 듣는 게 끔직해서 계속 울었다. 산후에 눈물흘리면 늙어서 안 좋다고 울지 말라고들 하는데도 그런 소리는 죽울만큼 듣기 싫었다. 수술비는 셋째 누이가 내주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대로 수술 시킨 게 분해서 퇴원 할 때 까지 그 말만 했고, 나는 그럴 때 마다 슬펐다. 또 청소부 아주머니들은
“우리 돈 많아요” “우리 집도 있어요” 하고 소리소리치는 산모는 첨 봣다 고 하며 흉내를 내었다.
아기의 성장 막내는 태내에서 부터 건강했다. 태어나자 머리숱이 많아서 보는 사람마다
“아이 머리 숱이 너무 예쁘다” 고 하자 큰 딸은 화를 내며
“치이 우리 아기 머리숱만 예쁜가 뭐” 하며 투덜거렸다.. 오빠가 된 상우는 으젖 하게 모든 걸 아기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아기가 젖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부러운 듯이 보자 아버지는 아이가 쇠외감을 느껴서 정서적으로 안 좋을까봐
“상우야 너는 아빠 젖 먹을래” 하니까 얼른 아빠 가슴에 안겨서 젖을 빨았다. 아이가 젖에 입을대자 동지는 불위에 얹힌 오징어처럼 오만상이을 찡그려져서 간지러우냐고 묻자 아프다고 했다. 아픈 것을 참고 아이의 허전함이 메꾸어질 때 까지 숱한 날들을 참으며 아이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느라 고통을 감내하였다. 상우가 젖을 빼면 팥 알갱이만했던 양쪽 젖꼭지가 앵두만하게 부풀었고 그 부위는 곪은 것처럼 붉었다. 그러나 상우가 잊어버릴 때 까지 계속 먹였다.
또 동지는 직장에서 돌아오자 아들를 들쳐업고 마당도 쓸고 빨래도 널고 보이는대로 일을했다. 그 당시에 우리는 배밭 부근에 살았다. 배밭집 아들은 동지와 동창인데, “종성이는 아이만 업고 참 불쌍하게 일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럴만큼 건강이 좋지않았다. 나는 기운이 딸려서 점점 아기를 이기지도 못 했고 아빠하고 큰 딸이 학교갔다 오면 많이 업어키웠다.
하루는 아이가 열이나고 몹시 힘들어 하였는데 동네 병원 다녀도 안돼서 왕십리 의학 박사가 보는 냇과병원으로 갔다. 나는 급해서 그러니 의사를 좀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급하면 일찍오지 왜 이제 왔냐고 하며 어림이 없었다. 차례가 되어 진찰을 하는데 가성 코레라라고 진단하였다. 약을 받아서 포대기를 두르고 두꺼운 오바를 씌워서 오는데 어찌되었나 하고 씌운 것을 들쳐보는데 얼굴이 나무에 달린 복숭아처럼 발그레 하였다 두꺼운 것을 덮어서 이슬 같은 땀이 함박젖었는데 나를 처다보는 눈이 흑요석처럼 반짝이면서 어떻게나 맑은지 너무예뻣다. 그리고 아버지의 웃음 열쇠는 바로 막내인 듯 막내만 보면 늘 웃어서 환한 태양아래 크는 풀처럼 티없이 잘 자랐다. .
막내의 첫 돌 날
권 목사님 내외 분이 기도 해 주시려고 오셨다., 점심 준비를 해 놓고 어머님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어머님이 오시자 식사를 같이 하려고 하는데, 어머님이
“나는 나설 때 보니, 식은 밥이 쉴 것 같아서 끓여 먹고 와서 밥을 못 먹겠다” 고 하셨다. 어머니는 ‘먹거리를 버리면 죄로 간다’는 신조가 어머님의 철칙이다. 그렇게 알뜰하게 사신 덕에 많은 식구를 굶기지 않고 살 수 있게된 것이다. 또 피가 나도록 그렇게 아끼지만, 정작 목돈이 들어 가야할 때면 어머님은 궤짝을 열어서 돈을 꺼내주었다. 어머님이 돈꾸는 것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 정신을 시누이들도 또 우리 두 딸도 꼭 닮아서 태어났다. 나역도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꾸어 본 일은 없다. 그런 것이 가풍인 것 같다.
막내는 말을하기 시작하자, 너무 어른스런 말만 해서 모두들
“얘 어른” 이라고 하였다. 밤이면 막내가 하루에 보고 느끼는 것을 아버지에게 다 이야기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다기 보다는 이야기 하는 모습을 웃으며 보다가 다 끝나면,
“아이구 우리 다수야” 하며 안아 주었다. 다수는 수다쟁이라는 말이다
큰아들은 심심하면 아기를 울리고 동생이 울면 오빠인 상우도 따라 운다. 나는 짜증 스러워서
“너는 또 왜 우니” 하고 고함을치면
“아기가 울어서” 하며 같이 울었다.
막내가 점점 자라자 오빠가 찝적거리며 울릴 적마다
“엄마는 왜 나를 끝에 낳아서 맨날 맨날 오빠에게 구박받게 하냐” 고 패악을쓰며 엉엉 울었다. 상우는 그러면 동생에게
“야 너 낳느라 고생해서 어머니가 이렇게 아프디” 고 하자
“누가 날 낳아 달랬느냐” 고 엉엉 하며 더 섧게울었다.
벌써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엄마 고마워요” 한다
“뭐가” 하고 물으면
“오빠도 낳아주고 또 언니도 낳아줘서 너무 고맙다” 고 한다.
막내가 다쳤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인데 동네 아이들이 와서 막내하고 놀다가 갑자기 뒤에서 장난치며 미는 바람에 막내가 계단에 폭 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으키고 보니 코를 다쳤는데, 피도 나지 않고. 별 아프지도 않다고 하며 예사롭게 잘 놀았다. 그런데 코는 물렁 뼈라 그런지 콧잔등이 푹 들어가서 고랑처럼 패여 며칠이 되어도 원래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는데 수술을 하려면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수술비도 백만원이 든다고 하자 눈앞이 캄캄하였다. 병원을 나와서 말없이 아이의 손을 잡고 힘없이 걸어오는데 막내가 아빠 표정이 어두운 걸 보고는
“아빠 우리 진우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하지” 하더니
“아빠 나 괜찮아” 하면서 아버지를 안심 시키려는듯 잡았던 손을 마구흔들며 방글거렸다.
버스에 두고 내렸다
막내가 여섯 살때 인지 다섯 때인지, 그 때는 지하철이 없을때라 버스는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이 많이 탓다. 내리려면 보통 힘으로는 안되고 좁은 사이를 뚫고나오는 나방처럼 사람을 비집고 내려야했을 때다. 따라 내리려니 했던 막내가 내리기도 전에 차는 휭하고 떠나버렸다. 자양동 고모네 갔다가 돌아 올 떼는 후암동 가는 버스를 타고 신답동에서 내리면, 길 건너면 용답동 우리가 이사 온 동네다.
갑자기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그 사이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어서 ‘막내는 어른 스러워서 그 차를 타고 있다가 도로 오겠지’, 하고 집으로 와서 큰 딸을 버스 내리는 장소로 보냈다, 그때가 학교들어가기 전이니까 여섯 살이나 다섯 살쯤이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그 버스는 어두워서도 오지 않았다. 큰 딸이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컴컴할 때 막내가 내리더라고 했다. 아이가 내리자 버스 앞에 서있던 언니가
“진우야” 하며 등을대자 언니등에 업혀 오는데, 언니가 집에까지 울면서 걸어와서 ‘언니는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고 또 아빠에게 또 수다를 떨었고 아버지는 대견스러운지 웃었다. “너 엄마가 안 보이자 많이 울었겠네” 하고 물었더니,
“아니 아저씨, 이 차가 아까 왔던 되로 다시 도로 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 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다고 천연덕 스럽게 말했다.
초등학교 입학
우리 믹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은 내가 데리고 갔다. 단임 선생님은 중년이 넘어 보였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꽃 이야기를 하시며
“학생 여러분 선생님은 무슨 꽃으로 보이나요” 하자
“할미꽃요” 하고 막내가 대답했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는
“엄마 선생님이 얼마나 실망 하셨을까요” 하면서 몹시 걱정을 했다. 제 딴에는 늙었다는 인상을 느꼈으니까 무심코 그런 대답이 불쑥 나온 것 같다. 또 선생님이 반장 선거에 나올 사람 손들라고 하셨는지 맨 먼저 진우가 손을들고 나가서
“내가 반장이되면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은 가르쳐 주겠다” 고 하자, 다음 차례 반장 후보자는 머리를 예뻐게 닿은 여학생이 나가서 진우가 말한 것과 또 다른 말도 해서 진우는 반장에 덜어졌다 고 선생님이 내게 알려주었다.
두루뭉수리에다 새우 눈에다가 코까지 찌그러져도, 학교비디오에 나오고 상급학교에도, 대학교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장학생이 되어 잘 다녔다. 그런데 어릴 때는 가끔 심술을 부려서
“너는 할머니 심술을 닮았다” 하며 타박을 주었더니 한 번은
“엄마는 왜 우리할머니를 들먹거리느냐” 고 엉엉 울며 대들었다.
“맞다 내가 잘못했다” ‘너는 그분의 핏줄을 이어 받은 손자라 마음이 아팠던 거구나’ 할머니를 감살 줄 아는 막내가 참 신통했다.
나는 시어머님이 누구를 존경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내가 들은적이 없다. 나는 반대로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좋은점만 보여서 존경해주는 버릇이 베었는데. 어머님은
“그까짓 거” 하는 자세를 나는 심술로 간주가 되었나보다. 그러고 부터는 한 번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막내 딸은 얘 어른 같아도 나오대로 또 불쑥 불쑥 말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에게 알기 쉽도록 듣기 좋게 말하는 타입이다. 옛날에 그런 심뽀가 함부로 경솔하지 않는 것으로 쪽으로 달라진 것 같다. 요즘 와서 막내의 시어머니께
“우리 막내는 심술이 좀 있다” 고 이실작고를 했더니 “
“그런 점은 한 번도 못 느꼈다“고 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막내의 약혼
큰 월케가 시집오자 제일먼저 시누이를 정형외과로 데려가서 코를 원래처럼 고쳐주었다. 대학교 일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우리 단체에 막내의 성혼 원서의 서류를 내어놓았을 때다. 그럴 때 막내가 언니 집에 갔던 날이다. 그 때 우리 협회에서 서명운동을 받을려고 다닐 때에 큰 딸은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서명 운동의 원서를 받으러 가야한다고 하면서
“진우야 너도 좀 같이 다니자” 하고 협조 해달라고 하자, 막내는 놀라서 아버지에게 와서는
“아빠 언니 받으러 다니는 그런 게 뭐야. 아빠 나는 그런 거 못 한다” 면서 엉엉운다. 그리고 또 그 교회 사람들은 다 가난해서 지하실에 산다는데, 나는 지하실에 살 자신도 없다고 하면서 내 서류는 빼 달라 며 울었다.
우리 가정들 모두는 누구 물론하고 봉사활동만 했을때라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빠 생각에도 너무 어린 걸 보내면 되겠나 하고 걱정되어서 사위가 2세국에 시무할 때라 사위에게 가서,
“여보게 우리 진우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진우 서류를 빼주게” 했더니 “아버님 그냥 가만히 두세요” 했다.
드디어 약혼이 정해지는 날이다. 많은 선남 선녀들이 모인가운데 한참 매칭이되고 있을 때
“이진우” 하고 호명이 되니까 같은 학교 학생들이 “와아” 하고 함성이 터졌다., 곧이어
“유형룡” 하자 군인이 나가는데 밤톨처럼 뽀얀 얼굴이 한 눈에도 참 예뻤다. 약혼이 정해지자 나는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며느리는 또 누이와 혼약이 이루어져 집에 도착한 새 신랑자를 다음날 며느리가 서울로 데리고 같이 가더니 멋진 양복과 구두를 사주었다. 다음 날 새 옷으로 갈아 입히니까 더 멋지고 예뻐 보였다.. 이튿날 경남 창원 자기 집으로 보냈다. 두 사람도 서로 만족한 것 같았다.
축복식
축복식 날은 너무 너무 들뜨서 인지 꿈결처럼 지나가서 지금은 기억에도 없다. 장인이된 동지는 며느리가 사돈께 올리는 예단 이불을 봉고차에 실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와 사돈 양위분과 딸 사위를 태우고 시댁인 창원으로 장 시간 달렸다. 그 먼길에 즐거운 대화를 끊임없이 했을 것인데, 지금은 무슨 대화를 하며 갔는지 다 기억에서 지워져 버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시어머니된 분은 새벽에 나오느라고 집안도 안 치웠는데, 하고 걱정했다.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 지하실도 아니고 집안도 단정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자러가는 딸 내외에게 내일 세벽에는 두 사람이 부모님게 세벽사관을 올려야 하니, 새벽에 일어나는 대로 한복으로 단장하라고 말해 놓고는 잠이들었다.
다음 날 세벽 두 사람은 세수하고는 한복을 끌어안고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딸도 사위도 한복을 어떻게 입는지 몰라서 아버지나 나도 새사위와 딸을 아기처럼 한복을 입혀주었다.
“자 됐으니 인제 들어가 봐라” 하고 시어른 방으로 보냈다.
시어른께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예를 받자. 시아버지께서는
“나는 너들에게 도둑 맞거나 또 없어질 수 있는 재물을 물려주기 위해서 산 것은 아니다. 다만 도둑 맞을 수도 없고, 또 없어질 수도 없는, 선한 공적을 물려주기 위해서 여태 살아왔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렇게 살기바란다” 하고 당부하셨다 한다. 그리고 또
“스승께서 나를 신임 하시니까 내게 회사 창고 열쇠를 맡기셨다” 는 말씀을 듣자. 딸은 ‘정말 우리 아버님 훌륭하게 사신분이구나” 하는 존경심이 들었다 고 하였다. 말씀을 마치시고는
“친정 부모님께도 예를 올리거라” 하며 우리방으로 내 보내자, 남의 자식이 되어 행복에 젖은 모습에서 배신감 같은 서운함 때문인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가 남의 자식이되었다.’ 싶어 그런지 고만 아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비오듯 흘려내렸다. 정작 딸도 새사위도 나도 모두는 울기는 고사하고 좋기만 했는데, 그런데 아버지는 막상 품안의 새가 그것도 방글방글 웃으며 미련없이 날아간 것이 야속하고 서운했던 것인지, 나 조차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사돈 우리 진우는 부모님께 잘 할 것입니다. 이제는 다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 해 보니 당신은 아마 어럼풋이 당신의 운명을 짐작했는지 ‘이제는 막내 내외를 볼 날도 많지않을 거라’ 는 예감 때문인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막내의 시댁 방문
딸의 시댁은 전라도 여수다. 딸은 시댁에 가서 황소며 농촌의 모습이 다 신기하고 생소했던 것 같다. 시아버님은 손으로 만든 다 낡은 책상을 가르키며
“이 책상은 아버지가 3년 노정 때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때 사용한 책상이야” 보이는 것마다 다 의미를 부여하며 설명하시는데 마치 시댁은 박물관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시 조모님은 아주 오래 전에 다쳐서 오랫동안 걷지도 못하시고 방에 붙은 낮은 화장실에만 뭉가적거리며 다니실 정도였다고 헸다. 수발할 큰 어머니조차도 허리가 아파서 고생 하신다는 말을 듣고. 막내는 큰 통에 더운 물을 가득 받아서 할머님을 온몸을 때를 불려가며 손이 잘 닫지 않는데를 골고루 씻겨드렸다한다. 그리고 손 발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드리고 옷을 갈아 입혀드렸다고 하였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처음 만난 새손부를 데리고 자면서 아버님의 어린시절과 당신이 시집 올 때의 이야기를 밤이 이슥하도록 들려주셨다고 했다. 떠나 올 때는 할머니는 깊이 간직한 주머니를 털어서 몰래 손에 쥐어주신 돈을 돌아오는 차에서 펴보니 꼬깃꼬깃한 돈이 팔만 원이나 되었다 한다. 막내딸은 자랄 때 외할머니 친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으며 자라서인지 할머니를 금방 친숙하게 대할 수가 있었던 것같다.
그후 돌아가실 때까지 어버이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조모 또 시외할머님을 방문해서 목욕도, 머리염색도 해드리고, 할머니 다니는 교회도 같이 가며 기쁘게 해드렸다 한다 너들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담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젊은 이들은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갔다지만, 수하가 올리는 효도를 아침 이슬에 비유 한다면, 어른들께서 手下수하에게 내리시는 사랑은 우박이요 장대비다. 큰 사랑이요 축복을 받을만치 열 곱절 백곱절도 넘는 어른의 사랑과 축원을 받을 수있는 실속있는 일은 어른을 뵙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린 두 아들 딸에게 생생한 산 교육을 시킨 것이라 참으로 지혜로운 일은 아이들에게 효도를 보여주며 가르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어릴때부터 막내를 “애 어른” 이라 한 것처럼 어른을 공경하려는 마음씀씀이를 보는 것이 친정 쪽에서는 가장 대견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성한이 탄생
혼인한지 오래되어도 아기가 없자 답답해서 물으면 계흭이 있다고 말했지만 몹시 초조했다. 그란데 7년만에야 외손자 성한이를 잉태했다. 바같 사돈은 반가운 소식을 듣자 며느리 먹이려고 낚시로 붕어를 잡아와서 어머님이 뾰앟게 고아서 주자 그 좋은 보약을 먹자 다 토하고 한 방울도 먹지 못했다 한다
태중애 산모가 먹으면 잉어처럼 잘생긴 아이를 낳는다는데 참 안타까웠다. 여름에 득남하여 사위가 분만실에서 아기를 안고 나오는데 젖은 앞 머리가 한 가닥`이` 또르르말려 올라간 것을 보고 모두는 웃었다. 사위가 고수머리라 아기도 똑 닮아서 태어났다. 그런 경사도 우리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와 동지는 보지 못하셨다. 혼인할 때 막내는 처음부터
“나는 아이낳고는 절대 아이들을 혼자두고 집을 비우거나 직장을 가지 않는다” 고 아예 선포를 하더니 정말 아기낳고는 아기만 키웠다. 외손자는 귀공자처럼 튼튼하게 잘 자랐다
친할아버지가 성한이란 이름을 보내주셨다. 아기가 8개월이 되었을쯤에 스승님의 전국집회가 천안 선문대학에서 열렸을 때다. 각 지방에서는 대형버스를 대절해서 천안으로 집결했다. 성님서도 시간 전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마침 창원 성한 할아버지가 탄 대형버스가 도착하는 것이 보여서 나는 반갑다고 닥아가서 인사를 했는데, 성한 할아지의 시선은 계속 두리번 거리셨다.
같은 버스에 탄 사람들끼리 모두 운동장에 자리를 펴서 군데 군데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할아버지의 정신이 다른데 있는지 주위를 살피며 침통한 안색이다. 잔뜩 흐려서 소낙비가 내릴 날씨같은 안색이라 내 짐작에 천안까지 올 때는 일각이 여삼추처럼 얼른 손자를 안고 싶은 마음에 급했는데, 내리자 마자 아들며느리가 손자 성한이를 안겨 줄 줄로 기대했지만, 그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이 저렇듯 야속하신 것으로 보였다.
자리를 잡고 한참을 앉아있을 때서야 사위 부부는 나들이나 온 것처럼 유모차를 밀면서 부모님을 찾느라 실피며 다닌다. 내가 부르자 웃으며 뛰어와서
“아버님” 하고 며느리가 와서 반갑게 인사해도, 못 본척 대답도 없고 오히려 더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아보였다. 아기를 안겨드려도 시선은 굳어져있는데, 성한이는 할아버지의 손이닿자 다리 운동을 하느라 풀쩍픟쩍 뛰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자, 막내는 눈치를 채고
“아버님 성한이 목욕시키고…. ” 하며 변명을 하려들자
“시끄러” 하고 고함을치자 찔끔해서 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손자가 보고 싶었으면 저러실까’ 하는 마음을 나는 알지만, 젊은 것들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다 자기가 당해봐야 비로소 배우는 것이다. 또 남들이 성한이 할머니에게
“금덩어리 보다 귀한 손자네요” 말하면
“귀한 손자를 그까짓 금덩어리와 왜 비교하느냐” 고 화를 내신다 하니 천륜의 이치가 참 오묘하고 무진하고도 깊다.
할아버지
보통 때 성한이는 유치원만 끝나면 날아가듯이 풀적거리며 집으로 가는 차에 먼저 올라탔던 성한이가, 그날은 끝나자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훌쩍 거려서 그것을 본 선생님은 놀라서,
“성한아, 왜 그래 어디 아퍼” 하자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선생님 오늘은 집에 가도 우리 할아버지는 안계셔요” 하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드란다. 사돈이 아들네로 오셔서 계실 동안은 어서 집에 가고 싶어서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집에 가도 반겨줄 할아버지가 안계신 텅빈집을 상상하자 너무 적막하고 허전했었나보다.
할아버지의 지극정성의 열매가 오매불망 첫손자 성한이다. 손자 성한이 또한 조상의 사랑이 몸에 베이게 여물도록 배려한 것은 딸내외의 효심이다.
시어른이 직장에 휴가를 받아 창원에서 내려 오시면, 딸은 부모님이고 좋아하시는 낚시를 하실 수 있도록 바다나 개울로 가서 잠 잘 수 있는 펜션을 미리 예약하였다한다. 그러면 祖孫조손이 어우르져 회포를 풀 수 있도록 배려 해주는 것은 아이들의 정서에도 물론 어른의 생애에도 더 없는 녹용 보약보다 더 소중한 시간들이다. 나는 살기 어려울 때라 돈 드는 것이 안쓰러워서
“너들 살기도 빡빡한데” 하고 걱정하면
“엄마 나중에 진수성찬으로 제사지내는 것보다 계실 때 모시는 것이 더 좋지않느냐”고 하였다.
자랄 때 할아버지와 잊을 수 없는 조손간에 얽힌 추억으로 자란 성한이도 먼 훗날에 온 가족이 함께했던 감미로움을 추억을 회상하면서 나중에 가정을 가졌을 때, 자기끼리만 여가를 즐기지않고, 슬하의 아이들을데리고 조손이 같이 호흡 할 수 있도록 서로의 체취를 베게할 수 있도록 마련해 줄 것이라 확신한다.’ 옛말에도 효자가문에 효자가 날 수 밖에 없지않겠는가. 보았던 대로 배운대로 우리 성한이도 부디 엄마 아빠의 효심을 닮아가기를 바란다‘
재기차기
한번은 갔더니 “할머니 나 유치원에서 구정때, 민속 놀이로 재기를 찼는데 여러 번 찼어요” 하고 자랑했다.
“그럼 할머니 보는데 서도 한 번 차 봐라” 했더니 재기를 차는데 계속 헛발질만 되니까
“에잇 참 한복을 안 입으니까 안 차지네” 해서 모두 배꼽을 잡았다..
“성한아 그런게 분위기이고 또 자신감이란다. 노래나 춤도 분위기가 되어야 나오는 것처럼 명절도 아니고 한복도 안 입고 또 응원할 친구들도 없으니까 안 차지는갑다”
“우리 성한를 한복을 입혀 놓고 또 친구들이 구경했으면 성한이는 틀림없이 많이 찼을 것 같다” 할미가 생다지로 힘든 부탁을 했던 것같다 성한아…..“
성한이 리드쉽
성한이 정희가 우리집에 왔을때다. 우리 빌라에는 놀이터가 없어서 학교운동장으로 가려 해도 조무래기를 데리고 길을 건너야 돼서 겁이 나서 못 갔다. 그래서 이웃집 은행 나무 밑에 은행을 줍자고 큰 그릇을 하나씩 주었다. 모두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 줍기 전에 성한이가 애들에게
“너들 흘리지 말고 빠트리지 말고 잘 주워” 하니까 세진 우진이도 “알았어” 하고 끄덕이는데 성한이는 같은 나이인데도 리드쉽이 보인다
또 부근에 큰 외삼촌이 살아서 놀러 갔을 때다. 큰 외삼촌의 봉고를 타고가는데, 유치원에서 숫자를 배웠는지 70번 버스가 지나가면
“70번 버스를 타고 신나게 달려보자 띠띠 빵빵 띠띠 빵빵 신나게 달려보자” 하고 발음 조차도 서툴면서 크게 노랠불렀다. 또 60번 버스가 눈에 띄자
“60번 버스를 타고 신나게 달려보자 띠띠 빵빵 띠띠 빵빵 보이는 번호 마다 불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외삼촌이 얼마나 웃는지 나도 너무 신기했다. 발음이 서툴러서 더 우스웠다. 보이는 차 번호 마다 열심히 불러서 우리 성한이 배우는 것마다 활용도 열심히 잘하네…..
.어느날은
내가 성한이네 집에 할미가 세진 우진을 데리고 놀러 간 날이다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성한이는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계속 엄마에게 왜 이리 안 오지 하고 기다린다고 전화가 계속 왔다. 경기도에서 아산까지는 세 시간이 족히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성한이는 성한이대로
“엄마 왜 이렇게 안 오지” 하면서 울고있다고 전화가왔다. 성한
이는 참 정이 많은 아이다. 또 우진이 세진이도
“할머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하면서 아직도 멀었느냐고 주리를 틀어서 나는 지루함을 들어주려고 계속 바같으로 눈길을 돌리게 했다.
‘고모네로 가는 길은 집도 있고, 논도 있네,“
”성한이네 가는 길은 들판도 있고 소도있네“, 노래를 부르니까 아이들도 같이 따라했다
“할머니 판자집도 있네요”
“할머니 나무도 있네요” 해서 그렇게 노래를 하면서 갔는데, 아마 서로들 어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 초조하고 지루함이 느껴진 것같다
기본예의
고모네 도착해서 세진이랑 우진이가 성한이를 따라서 놀이터에 놀러갔을 때다. 성한은 자전거를 타고 세진 우진이는 자전거를 따라 가다가 더워서 놀이터에서 놀이 기구를 탔다 한다. 그러다가 더우니까 둘은 집으로 와서 쉬고 있을 때다.
한참만에 성한이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다보더니 세진이 우진이가 앉아있는 걸 보더니
`“야 너들 간다는 말을 하고 와야지 말도 안하고 집으로 오면 어떡하느냐‘ 하면서 문앞에서 엉엉울었다. 몸에는 땀범벅이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영문을 몰랐다. 성한이는
“나는 너들이 안 보여서 집을 잃어버린줄 알고 여태 찾으러 다녔잖냐“ 어린 것이 얼마나 놀랐으면 긴장감이 풀리자 엉엉 소리내어 울었겠는가. 제딴에는 놀라서 얼마나 찾아 다녔으면 저렇듯 울까 싶었다. 어려도 자기집에 와서 같이 나간 이상 보호해야 된다는 마땅한 책임감이다. 그러더니 눈물을 이리저리 훔치고는
“야 너들 내게 말도 안 하고 집으로 온 건 분명 잘못한 거야. 사과 해” 하자 우리 세진 우진이는 눈이 똥그래서 사과가 먹는 건지 뭔지도 첨들어 봐서 서로 처다보고 있었다. 성한의 표정을 봐서는 짐작은 했겠지만 사과하는 것을 할미가 미처 가르쳐주지 않아서 여태 한번도 해 본적도 들어본적도 없어서 세진 우잔이는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미안한 표정만 지으면서 민적거렸다. 성한이로서는 잘 못 해놓고 사과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지 독촉하자 더 난처한 표정만 짓고 고개만 숙이자, 성한은 답답한지 눈물을 닦으면서
“너들이 먼저 사과하면 나도 너들에게 사과할 테니까 먼저 너들이 사과 해” 가히 사정하다 싶이 하면서 눈물을 훔친다. 성한은 똑 바른 예절을 엄마에게 정식으로 배워서 가족끼리도 “고맙습니다” 또 잘못했을 때 “죄송합니다”. 그런 예의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 할미가 미쳐 가르치지 못 해서 ‘성한이를 화나게 했구나.’ 그런게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기본 교육인데
“성한아 우리세진이 우진이에게도 못 가르친 할미탓이지 잘 했다고 우기느라 사과를 안 한게 아니란다”.
“잘못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의 표현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또 가정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기본 예의란다. 할미가 성한에게 한 수 배웠다. 성한아 네가 맞는 거다. 너라도 예의를 지키면 많은 사람도 따라 할 것이다.
가정에서 안 해 본 거는 어디에가서도 못해서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수 가 허다하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필수인데 할미와 같이 살면서 내가 귀한 손자들에게 안 가르쳐서 또 성한이를 답답하게 했구나. 내가 아이에게 기본 예의도 못 가르쳤다 싶어 정말 미안했다.
성한이 오빠가되었다
성한이가 다섯살 되던 해 푹푹찌는 한더위 8월15일에 여동생이 태어났다. 오뉴월에 병원에서 퇴원해서 산모와 아기가 집에 도착하자, 아가는 배가 고파서 울다가 까르르 넘어가고. 에미는 젖이 불어 탱탱하지만 젖구멍이 막혔는지 젖이 나오지 않아 어미는 어미대로 아파서 쩔쩔매는 판이다. 그럴때 나는 또 우울증인지 뭔지 우리큰 며느리가 아기 보러왔다가 갈 때 나도 따라가려고 나섰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내가 미쳤나 싶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하자 딸은 만약 그때 엄마까지 갔으면 나는 미쳤을 거라했다. 날은 푹푹찌지 집도 좁지 아기는 울어대고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산모 먹을 것도 장만하고 할 게 수두룩한데, 내가 왜 다 뒤로하고 오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그때 내정신이 아니었다. 며느리가
“어머니는 남는 게 좋겠다”고 만류해서 며칠지나자 산후조리사가 온 후에 돌아왔다. 성한이는 또 성한이대로 자기만 사랑을 받다가 오는 사람마다 성한이는 처다 보자도고 않고 아기에게만 관심이 쏠리자 성한이도 고아처럼 외톨이가 되어 시무룩해젔다. 그럴 때사위가
“어머니 아기 이름이 나왔어요” 하자 성한이는 아빠의 입을 막으며
“아빠 말하지 마 내가 말 할게” 하는데, 사위는 성한이 말을 예사로 듣고,
“정희로 지었어요” 말하자 성한이는 또 섭섭해서 엉엉 울면서
“아빠. 아기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할머니께 가르쳐 드릴려고 했는데 왜 아빠가 말하느냐” 고 하며 섪게 울었다. 그때 성한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맘이 안쓰럽다.
성한이는 한창 말성부릴 나이가 되어 동생이 태어나자 어쩐지 버림받은 아이처럼 꺼츠럼 해보이고 쓸쓸 해 보였다. 또 자라면서도 가끔 정희에게 눈을 부라리거나 오빠 행새를 하며 조금만 심술을 부려도 정희가 얼핏하면 삐이 울어서 엄마에게 오빠를 야단맞게 했다. 우리성한이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허전함도 더 컷을 것이다
성한이 초등학교 입학
미운 일곱 살을 넘기고 다음 해에 학생이 되었다. 여름 방학때 할아버지를 뵈러 창원으로 혼자 내려갔을 때란다. 할아버님이 바다낚시 가시면서 성한이를 대리고 가셨다 한다. 그런데 낚시를 하려고 자리를 잡아서 낚기 시작하자 해가 기울도록 할아버지는 일곱 마리를 낚으셨는데, 일 학년짜리 성한이는 고등어랑 아홉 마리를 낚았다고 자랑하였다.
“성한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낚았니”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 낚시대를 잡고 있으면요 찌가 흔들리고 잡고있는 낚싯대에 감이와요 그러면 낚시대를 잡아 올리면 돼요” 하고 설명하는 성한이가 내 눈에 꼬마 강태공처럼 보여 더 없이 멎져보였다.
정희를
손녀가 보고싶어서 한 번씩 가보면 여자애가 제엄마 어릴 때 눈사람처럼 생겼는데, 손녀도 영낙없는 두루뭉술 눈사람같았다. 그런 못남이가 사람이 많으면 엄청 좋아했다. 그러다가 집에 오려고 엄마등에 업혀서 밖으로 나오면 바깥이 더 좋은지 나풀거리며 방글거렸다.
그런데 내가 탈 버스가 도착하면 할미가 타고 가는 버스라는 낌새를 알아 차리고 몸부림치면서 뽀얀 얼굴에 눈물을 뚝뚝 떨어지면서 울었다. 돌아오면서 ‘우리 두루뭉수리가 곰배처럼 뒤 꼭지까지 툭 튀어 나와서’ 은근히 걱정이되었다.
하루는 티비 영상에서 툭 튀어나온 두상을 교정하는 헬멧 선전이 나오기에 얼른 딸에게 전화를 걸면서
“지금 두상 교정하는 헬맷 선전 나오니까 보라”고 했다. 그런 걸 사서 뒤꼭지를 예쁘게 다듬어 주어야지 했더니 엄마 알아보니 별로라고 면서 시답잖게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저절로 두상이 점점 예쁘게 만들어지더니 지금은 짱구머리로 일부러 만든 머리 보다 더 예쁘다.
정희 유아원
정희에게도 사회성을 길러주려는지 동내 유아원으로 보냈다 한다. 들여보내 놓고 오려는데 따라 오겠다고 우는 걸 억지로 떼어놓고 오자 3일동안은 벽을지고 끝 날때까지 부동자세로 그렇게 앉아 있었단다. 3 일이 지나서는 점심먹고는 잠잘 시간일 때 발딱 일어나서는 먼저 누운 아이들 침대를 둘러보면서 이불을 일일이 잘 덮어주고는 자기자리에 눕더라고 선생님이 말해주었다고 한다. 정희에게도 엄마처럼 남을 배려하고 보살피려는 따뜻함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정희 초등학교 입학
입학하자 유아원을 다녀서인지 오빠와 권투도 하고 씩씩하게 자라더니 입학해서도 축구부에 들어가서 남자들애들과 같이 뛰면서 활발했다
하루는 아침에 에미가 정희의 가방을 메워 주면서 무거워서 안쓰러웠는지
“가방이 왜 이래 무거워” 하자 정희가
“지식이 가득 들었으니까요” ‘하이구, 참말로 두루뭉수리가 책이 지식인줄 아는 게 신통 방통이다.
막내는 결혼할 때 “나는 아이를 두고는 취직을 하거나 집을 비우지않을 거라” 고 아예 선포를 하더니만 성한이가 태어나고부터 정밀 직장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두 아이가 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그때서야 딸 정희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재능교사로 취직을 하였다. 퇴근 할 때는 딸 정희와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산 모롱이 오솔길로 같이 손잡고 집으로 왔다. 하루는 내가
“정희야 너는 공부가 재밋냐”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해서 속으로 또 뜨끔했다. ‘큰일이네 두루뭉수리에다 공부까지 날 닮아서 꼴찌하면 이거 되겠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되었다.
그런데 정희는 오빠 빽인지 활발하게 다니더니 육학년으로 올라가서도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 하여 남자를 젖히고 전교 학생회장에 당선이 되었다 한다. ‘꼴지 하는 아이를 설마 회장을 시켜주겠나’ 싶어 너무 신통했다. 하루는 정희 친할머니께서 전화가 걸려와서
“정희가 전교회장이 되었다네요” 하자
“글쎄요 우리 가문에도 여성지도자가 나올 조짐이네요” 해서 웃었다. 고모 할머니도 소문듣고 신통하다면서 축하 케익을 보내주었다.
중학생 되다
어느덧 우리정희가 중학생이 되었다. 막내네는 부부가 근검 절약하며 열심히 살았다. 사위가 출근할 때 도시락 두 개를 들고가서 “애 왜 두 개나 들고 가니” 했다 그 회사 앞에는 대학교 앞이라 먹자 골목이고, 또 대학내 식당도 있지만 싸주는 놈이나 들고가는 사위도 고마웠다.
그 덕분에 좀 넓고 양지바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환하고 넓은 정희의 공부방도 생겼다 고 하였다. 그동안 나는 지방에 있었는데, 몇 해 못 본 사이에 이사 했다고 해서 갔을 때다.
어느새 정희는 키가 엿가래 늘어나듯 훌적 커져서 엄마 어릴 때 눈사람이니 두루뭉실이니 했는데 그런 건 형체도 없어지고 키큰 코스모스처럼 청아한 아가씨로 변해 있어서 너무 신기했다. 중학교 들어가자 또 반장이 되었다고 한다.
딸은 이사를 가도 학교 10년의 경력이 있어서 금방 취직이 되었다. 직장나가면서 또 방송통신대학 유아 교육과에 입학하자 시어머님이 입학금을 대어주셨다 한다. 그 어머님은 새우눈이라고 놀림받던 막내를 신혼 때 쌍거풀 수술을 해주자 모두들 막내를 보고 동양미인이라한다. 유아교육과에 가서도 또 장학생이되었다 한다.
정희의 꿈
“정희는 앞으로의 희망이 뭐라니” 하고 딸에게 물었더니 교육자가 되는 거라했다. 요즘 아이들이 억세풀처럼 억세서 갸느린 정희가 그런 아이들을 휘어내려나 좀 걱정된다. 우리 큰 외손자 성한이는 의료기구를 연구하는 계통의 대학생이 되어 대학 노래자랑을 할때 2등을 한 영상을 딸이 보내주었다.
부디 건강해서 내가 세상에 없을 때라도 大海에 물고기처럼 마음껏 소신대로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막내 부부는 어렵게 출발했지만, 성급하지 않고 계속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뒤에는 어른들의 정성이 끓임없이 뒷받침되니까 옥수수 알처럼 느긋하게 또 빈틈없이 차곡차곡 채워지며 개미처럼 꾸준히 성장의 일로를 걷고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방학 기간 아이들의 일터
지난 여름 방학 때는 우리 성한이도 외삼촌이하는 노동현장에 세진이랑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들말로는 고생을 해봐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경험도 되고 면역도 된다고 한다 우리 두 아들도 대학 다닐 때 알바를 해서 큰 아이는 운전대를 잡고 때로는 강원도 까지 갔을 때는 꼬박하루 밤을세울 때도 있었다한다 또 둘 째 아들도 중국집 배달이나 또 신문배달을해서 겨울이면 산모처럼 무릅이 시럽다고 해서 내가 겨울내복에 무릅에 두꺼운 천을 덧대어 꾸메 주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수하에 아이들을 미리 단련 시켜야지 곱게 곱게 키울 생각은 없는지 편하게 키우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에 취업 못한 청년들이 수두룩한데도 농촌에는 일꾼이 없어서 난리들이고, 또 여기저기 일 할 일꾼이 없어서 외국인이 아니면 일가 텅텅비는 현실이라 우리 나라의 상황이 암담하다고 생각해 본다.
정희 특고에 합격
정희도 사촌 오빠가 다니는 영월 소방 마스트 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단다. 사람들은 새싹이 자라는 것만 신기해하고 좋아하지 본인은 그만큼 늙는 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한다. 그래도 만족한 것이 부모다. 부디 기능껏 발휘하면서 사는 후손들 되기를 비는 마음이나뿐 아니라 모든 조상이 바라는 한결 같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