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관한 이해는 다양한 견해로 반영되어 왔다.
속죄에 관한 오류 사탄속전설 이 견해는 오리겐(Origen, A.D. 185-254)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이 설은 사탄이 전쟁의 정복자로서 포로된 자들을 붙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탄이 사람들을 잡고 있기 때문에 속전을 하나님께가 아니라 사탄에게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인간의 죄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속전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더 나아가 사탄은 사람을 자유케 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그런 권세가 있으시다. 이 설이 잘못인 것은 사탄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후원자로 만든다. 십자가는 사탄의 심판이지 사탄에게 속전이 아니다.
발생반복설(Recapitulation Theory) 이 설은 이래니우스(Irenaeus, A.D. 130-200?)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리스도가 아담의 생의 모든 국면을 통과하며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죄의 경험까지도 하셨다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하실 수가 있으셨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 알려지신 것은 사실이다(고전 15:45).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시던지 개인적으로 죄와 접촉하시지 않으셨다(요일 3:5; 요 8:46). 이 이론은 속죄를 등한히 하므로 미완성된 견해이다.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지 그의 생애가 아니다.
보상설(The Commercial Theory) 이 설은 안셈(Anselm, A.D. 1033-1109)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하나님은 죄를 인해서 그에게 드려야 했던 존귀를 빼앗기셨다. 따라서 그 회복은 죄인들의 심판을 통해서나 만족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선물에 의한 충족으로 해결하시기를 택하셨다. 그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존귀를 드렸고 보상을 받으셨는데 그가 그것을 죄인들에게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설은 죄값을 사탄대신 하나님께 지불을 했다는데서는 옳았다. 이 설은 하나님의 자비는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생애의 순종은 등한히 한다. 이 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무시한다. 이 설은 그리스도는 죄의 형벌을 위해 죽으셨음을 강조하는데 로마 카톨릭의 입장이다.
도덕적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 이 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아벨라드(Abelard, A.D. 1079-1142)이며 버스넬(Horace Bushnell)같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다. 도덕적 감화설은 안셈의 보상설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 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속죄로 필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죄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 인간을 대한 그의 사랑의 전시였다. 이 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위한 기초가 그의 거룩이기 보다 그의 사랑이다. 이 설은 역시 사람들의 감정의 움직임이 그들을 회개로 이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임을 확실히 한다(마 20:28). 그로 인해 죄인도 단지 사랑의 전시로 인한 영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의로워진다. 우발설(Accident Theory) 이 설은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도는 그의 메시야직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이 이론은 그를 천국의 설교와 그 과정에서 오해로 인하여 짓밟혀졌다고 보았다. 슈바이쳐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이 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연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임을 분명히 가르친다(마 16:21; 17:22; 20:17-19; 26:1-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행 2:23). 더욱이 그의 죽음은 대속으로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한다(사 53:4-6).
모범(순교)설(Example (Martyr) Theory) 모범설은 종교 개혁자들의 반동으로 16세기에 쏘시너스파(the Socinians)에 의해 처음으로 주창되었으며 보다 근래에는 유니테리안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 이 견해는 도덕적 감화설보다 더 자유주의적 견해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에 필연적이 아니었으며 죄는 처벌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죄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죽음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리스도는 순종의 본이시었으며 그것은 사람들을 고무시켜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변화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견해의 약점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1) 성경이 속죄를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함을 역설할 뿐아니라(롬 3:24),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은 불신자를 위한 모범이 아니라 신자를 위한 모범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벧전 2:21).
통치설(Governmental Theory) 그로티우스(Grotius, 1583-1645)는 소씨너스의 모범설에 반동으로 통치설을 가르쳤다. 이 설은 모범설과 개혁자들의 견해 사이에 타협이었다. 그로티우스는 하나님은 동등한 지불을 요구함이 없이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로티우스는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용 화폐의 지불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통치원리를 후원했다고 추론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징표 지불을 받으셨고 율법의 요구를 폐기하셨다. 그리고 그의 통치의 원리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통치이론은 하나님이 변화에 굴복하신다는 것이며 위협은 하시지만 심판은 하시지 않으신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값을 지불함이 없이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화해의 필요성을 가르친다(롬 3:24; 요일 2:2). 하나님의 진노는 진정되어야 한다. 역시 대속은 반드시 죄에 기여해야 한다(고후 5:21; 벧전 2:24).
속죄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초적인 의미는 대리의 특성이 있다. 그는 죄인들의 자리에서 죽으셨다. 그는 그들의 자유를 사셨고 그들을 하나님께 화해케 하셨으며 그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케 하셨다
대리적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리적인 것이었다. 그는 죄인들 대신에 그들의 자리에서 죽으셨다. 이는 역시 Vicarious라고도 묘사하는데 라틴어 vicarius에서 왔고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의 자리에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가야 할 심판을 대신 지고 가심으로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을 대신하여 짊어지셨다.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하여 대리적 속죄를 이루셨다는 성경 구절은 적지 않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5, 6).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8). 두개의 전치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리적인 것을 강조한다. 그 전치사 그리고 번역된 위하여(For)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대신에 죽으신 것을 의미한다(마 20:28; 막 10:45). 전치사 후퍼(huper) 역시 For로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하여 혹은 죄인의 대신에 죽으셨음을 뜻한다(갈 3:13; 딤전 2:6; 고후 5:21; 벧전 5:18). 빌레몬서 13절은 후퍼(huper)는 반드시 누구의 대신에를 의미해야 한다.
구속 구속이란 말은 헬라어 아고라조(agorazo)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시장에서 구매했다는 뜻이다. 자주 시장에서 노예의 매매에 쓰였다. 이 말은 죄의 노예시장에서 산 바된 그래서 죄의 예속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묘사하는데 쓰였으며 신자의 자유와 죄에서 구속을 위한 구매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고전 6:20; 7:23; 계 5:9; 14:3, 4). 신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사신 바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구속받은 자는 모순되게도 노예이다. 하나님의 노예인 것은 그들이 값으로 산바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기적인 안락의 자유로 그리스도에 의해 사신바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다. 신자의 구속에 연관된 두 번째 용서는 exagorazo이며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정죄만하고 구원할 수 없는 율법의 저주와 속박에 구속한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율법에 예속과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갈 3:13; 4:5). 율법을 이루지 않은 모든 자에게 임한 진노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그 저주에서 자유케 하셨는데 이는 법에 근거한 자유이다. 세 번째 속죄에 대한 용어는 Iutroo인데 이는 값을 지불함으로 해방을 얻었다는 뜻이다. 속전을 내고 자유게 된 사상은 이 말씀안에서 분명하다(눅 24:21). 신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소유가 되기 위하여(단 2:4) 그리스도의 피로 사셨다(벧전 4:18). 구속은 죄를 위한 견해이다. 인류는 죄에 예속되었으며 죄의 예속과 노예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했다.
화해(Reconciliation) 화해의 강조는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소격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안으로 들어왔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벽을 만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다(사 59:1-2; 골 1:21, 22; 약 4:4).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수됨과 하나님의 진노가 옮겨졌다(롬 5:10). 화해는 하나님께 죄의 담을 옮기시고 화평케 하시며 사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다. 화해에는 두 부분이 있다. 화해의 객관적 국면은 인간이 하나님께 화해되기 전에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고후 5:18, 19). 이것은 임시적 화해이다. 화해의 주관적 국면은 인간이 믿을 때 하나님께 화해되는 것이다(고후 5:18, 19). 이것은 경험적 화해이다. 화해라는 말은 헬라어 katalasso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변화하게 하다 혹은 화해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화해의 시발자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 자신에게 화해케 하신다(고후 5:18, 19). 다른 한편 인간은 화해의 대상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에서 떠났기 때문에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화해는 온 세상을 위해 준비되었으나 그 효과는 개인의 신앙으로 받을 때 뿐이다.
속량(Propitiation)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완전히 만족케 되시었다. 그것은 그의 의로우신 표준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신자는 이제 하나님께 용납되었으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용서받았다. 구약에서 kaphor은 덮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죄에 대한 의식적 덮음을 포함한다(레 4:35; 10:17). 헬라어 hilaskomai는 속량이란 뜻으로 신약에서 두 번 나온다. 히브리 2:17에 그리스도가 죄를 속량하셨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역시 명사형으로 세 번 나온다(요일 2:2; 4:10). 그리고 hilastesion(화목제물), 롬 3:25) 속량은 몇 개의 개념과 연관이 있다. 1)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그의 진노는 직접 죄를 향하시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진노를 가라앉힘이 필요하다.
2) 하나님께서 치유책을 마련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를 해결하게 하셨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달램이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의 거룩을 만족케 하였으며 그의 진노를 피하게 하였다. 속량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진노를 가라앉힘이다. 그의 거룩이 입증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케 되었다.
용서(Forgiveness) 용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위이며 이로 인해 그는 죄에 대한 만족과 속죄가 되었으므로 죄인들을 대적했던 고소(책임)를 옮기셨다. 용서에 대한 몇 개의 헬라어가 있다. Charizonia가 있는데 이 말은 은혜란 말과 연관이 있으며 그 의미는 은혜에서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빚의 탕감에 쓰였다(골 2:13). 그 문맥은 우리의 빚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우리를 대적하는 고소의 죄를 무상으로 용서하였음을 강조한다. 용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말은 aphiemi로 그 의미는 가게 하다. 풀어주다 혹은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명사형은 에베소서 1:7에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강조하는 것은 신자의 죄는 용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때문에 용서되었거나 멀리 보내졌다는 것이다. 용서는 신자의 삶 속에서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였다.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죄이다(골 2:13).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하는 필요한 죄에서부터 날마다 청결케 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용서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 인간은 범죄했으며 그의 죄는 옮겨지는 것이 필요하다.
칭의(Justification) 용서는 구원의 부정적인 면이며 칭의는 긍정적인 면이다. 칭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서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칭의의 중요한 강조는 긍정적이며 두 중요한 양상을 포함한다. 그것은 모든 죄의 용서와 제거이며 하나님에게서 분리됨의 종결이다(행 13:39; 롬 4:6-7; 5:9-11; 고후 5:19). 칭의는 역시 믿는 자에게 의의 수여와 의로워진 자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의 수여를 포함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며(롬 3:24) 개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일어난다(롬 4:2; 5:1). 칭의의 근거는 어떤 행위가 아닌(롬 4:5)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롬 5:9). 칭의의 방편은 신앙이다(롬 5:1). 칭의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완전하심과 그의 표준을 유지하신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되었기 때문에 죄인들과 교제로 들어오실수 있으시다. 칭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표준을 깨뜨렸다. 인간은 그와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속죄의 범위 속죄의 범위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온 주제이다.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제한된 속죄 이 속죄는 한정된 혹은 특별한 구속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람들의 특별히 수에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적 지원은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을 위해 죽으셨다. 선한 목자로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그 양들을 위해 버리셨다(요 10:15). 우리에 포함된 모든 양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롬 8:32-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특별하다. 그는 같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참고, 롬 1:17; 8:29; 9:13; 골 3:12; 살전 1:4; 살후 2:13).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특별하고 한정적이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상도 그렇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죄를 위해 속죄하셨다면 그 속죄의 대상은 특별한 그룹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죄의 효과는 약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속죄한 자로 구원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주권적이시라면(엡 1:11) 그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으셨는데 만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었다면 속죄는 만인을 위한 것이며 만인은 칭의된다. 그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편주의에 이르게 된다(만인이 구원받는다는 설).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가 모든 족속과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며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사하게 모든 이란 말이 사용되었다(고후 5:15).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계급이지 모든 개인들이 아니다.
무제한 속죄 이 이론은 복음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의 죽음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만 효과적이다. 이 견해는 아래와 같다. 1) 만일 신약의 언급이 문자 그대로의 뜻을 취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2) 제한속죄는 성경의 본문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지 않았고 보다 더 논리적 전제에 더 의존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된다.
3) 요한이 묘사한 것으로 세상은 하나님을 미워한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그리고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세상이다(참고, 요 1:29; 3:16, 17; 4:42; 요일 4:14). 이런 구절들은 보편속죄를 강조한다.
4) 누구든지란 말이 신약에 110회 이상 사용되었으며 항상 제한되지 않은 의미로 쓰였다(참고, 요 3:16; 행 2:21; 10:43; 롬 10:13; 계 22:17)
5) 모든 이란 말이나 이에 상응하는 말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불경자를 위해 죽으셨고 모든 사람은 불경건하다(롬 5:16).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암시하고 있다(고후 5:14-15; 딤전 2:6; 4:10; 딛 2:11; 히 2:9; 벧후 3:9).
6) 베드로후서 2:1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사신 주를 부인했던 거짓 선생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가리킨다. 그 문맥은 이들은 멸망할 이단들이나 그들에 대해 말씀하기를 주께서 그들을 사셨다고 했다. 이것은 제한속죄의 견해를 반대한다.
7) 성경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한다(딤전 1:5; 롬 5:6-8). 죄인들은 어디에서도 교회나 택자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
구원의 과정 하나님의 편에서 아버지의 역사 1) 선택 선택의 교리는 여러 범위가 포함된다. 이스라엘이 선택됨(신 7:6) 천사들이 선택됨(딤전 5:21), 레위 제사장들이 선택됨(신 18: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택됨(렘 1:5) 그리고 신자들이 선택되었다(엡 1:4)
선택이란 무엇인가?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위이다. 그의 주권적인 기쁨으로 어떤 예지된 공로가 없이 사람들 중에 어떤 수를 선택하여 특별한 은혜와 영원한 구원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에베소서 1:4에 그가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였다. 그 동사 선택(eklego)는 사람들 중에서 불러낸다는 의미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개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말은 항상 중간상태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그와 교제하고 그들의 구속된 삶을 통하여 그의 은혜를 반영하도록 선택하셨다. 선택의 특성은 (1) 선택은 영원전에 하셨다(엡 1:4). (2)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며 (3)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서 하였다(롬 9:11; 딤후 1:9). (4)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엡 1:4) (5) 어쨌든 인간에게 조건이 없으며(딤후 1:9; 롬 9:11) (6) 하나님의 공의의 반영인데 (7) 선택에서 하나님을 대적할 불공정의 책임이 있을 수 없다(롬 9:14, 20).
예정(Predestination) 예정이란 말은 헬라어 Prorizo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미리 예정한다는 뜻이며 신약에 여섯 번 나온다(행 4:28; 롬 8:29-30; 고전 2:7; 엡 1:5, 11).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그의 주권적 선택으로 신자들을 구별하시는 것이다. 예정의 특성은 모든 사건을 포함한다. (1) 개인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다(행 4:28). (2) 예정은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로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엡 1:5) (3) 우리의 궁극적 영화를 확증한다(롬 8:2-30) (4)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목적이 있고(엡 1:6) (5) 우리의 영원한 상속을 안전케 하며(엡 1:11) (6) 예정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며 그의 뜻에 따른 것이다(엡 5:11). 그러나 선택과 예정은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지 않는다.
입양(Adoption) 입양이란 말(huiothesia)는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의 새로운 신분과 같이 권리와 특권을 묘사한다. 그 말은 로마의 관습에서 왔는데 거기서는 법적 의식에서 양자는 차자의 모든 권리가 주어졌다. 이 의식에서 네 가지 일들이 있었다. (a) 양자는 그의 옛 가정에 가졌던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그리고 그의 새 가정에서 완전히 합법적인 아들의 권리에 모든 것을 얻는다. (b) 그는 그의 새 아버지의 자산에 상속자가 된다. (c) 양자의 옛날 생애는 완전히 지워진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모든 빚은 취소되며 마치도 그들이 결코 거기 없었던 것처럼 지워졌다. (d) 법의 견지에서 양자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의 새아버지의 아들이다. 바울은 이런 로마의 배경을 채용해서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의 새로운 신분을 묘사하고 있다. 입양에서 신자는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다(롬 8:15). 입양에서 신자는 율법의 예속에서 풀려나 아들로서 새로운 신분으로 들어간다(갈 4:5). 입양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누릴 수 있다(롬 8:15; 갈 4:6). 에베소서 6:5에서 입양의 행위는 예정과 연관이 있으며 영원전에 일어났으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 실현된다.
그리스도의 사역(work of Christ)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의 구원 성취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스도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속죄는 죄의 형벌과 예속에서 인간의 해방을 안전하게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켰다. 구원의 다른 중요한 국면은 성화이다. 성화(hagiasmos)는 성별한다는 뜻이다. 성화와 연관된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성화에는 주로 세 가지 국면이 있다. (1) 지위적인 성화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신자의 지위와 상태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였다. 지위적 성화에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간주된다. 그는 성도라고 선언된다(롬 1:7). 고린도교회에서 교회로서 그렇게 육적인 그룹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고전 1:2) 성화된 자들로 언급되고 있음은 주목할만하다. 이 지위적 성화는 그리스도의 단번에 죽으심을 통하여 성취되었다(히 10:10, 14, 29).
(2) 경험적 성화 지위적 성화의 신자는 그의 날마다의 삶과 경험에 연관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살전 5:23). 베드로는 신자들이 성화되고 거룩하게 되라고 명령한다(벧전 1:16). 이 경험적 성화는 신자가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성장한다(롬 6:13; 12:1-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다(시 119:9-16).
(3) 궁극적 성화 성화의 이 국면은 장래에 있고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신자의 마지막 변화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신자는 어떤 흠도 없이 주님께 나타나게 될 것이다(엡 5:26-27).
성령의 역사 구원에서 성령의 역사는 불신자에게 죄를 확신시키시는 사역을 포함하며 사람을 중생시켜 그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신자를 그리스도와 다른 신자들과 연합시키며 신자들을 인치신다.
인간편의서의 구원 잘못된 견해 구원을 위한 인간의 상태에 관해서는 몇 가지 잘못된 견해가 있다. (1) 회개하고 믿으라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하나의 분리된 조건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1은 회개와 신앙은 복음에 대한 반응에서 분리된 조목처럼 보지 말아야 한다. 회개와 신앙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함께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구원을 위해 그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2) 믿고 세례받음 이 역시 사도행전 2:28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드로는 죄의 용서를 위해 세례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는 그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세대에서 분리시키는 자들에게 그 세대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의 세대임을 환기시킨다. 그 분리는 세례를 통하여 공적으로 나타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세례는 사람들의 죄의 용서를 받았음을 의미했다. 두 번째 구절 역시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수임을 암시하는 구절로 인용되는데 마가복음 16;16이다.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역시 이 말씀도 구원에 세례가 필수임을 말씀하지 않는다. 이 구절의 마지막 절 안에서는 세례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정죄는 믿는 것을 거절하는데서 오는 것이며 세례받는 것을 실패하는데서 오지 않는다. 추가적으로 가장 오래된 신약의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6:19-20을 담고 있지 않다.
(3) 믿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라 구원을 위해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조건이 종종 로마서 10:9에 근거해서 믿음에 더해진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원을 위해 부가된 조건을 세우지 않는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의 신성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반드시 그의 신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로마서 10:9의 의미이다.
(4) 믿고 항복하라 사람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단지 복음을 믿음으로 되는 것인지 혹은 삶의 주님으로 그리스도께 반드시 항복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그 대답의 부분이 로마서 10:9의 오해에 있다. 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그의 주인되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만일 주님으로서 그리스도께 삶을 항복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면 육신적인 크리스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그가 말하는 자는 고린도 교인들로 그들은 참으로 육적이었다(고전 3:1). 주되심은 성경의 지식에 대한 적용에 근거하며 성경의 지식은 구원후에 따라오는 영적 성숙과 함께 온다. 주되심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에 더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 문제점은 제자란 말의 오해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그를 따르도록 사람을 부르셨다(참고, 눅 14:25-35). 그는 그들을 구원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그것은 배우는 자(제자)로 그를 따르도록 부르신 것이다. 제자직은 항상 구원을 뒤따라온다. 그것은 구원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는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더욱이 만일 제자됨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세례도 조건이다. 세례받는 것이 제자됨의 한 부분이기 떄문이다(마 28:19-20).
성경적 견해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위한 유일한 책임은 복음을 믿는 것뿐이라고 한다(요 1:12; 3:16, 18, 31; 5:24; 11:25-26; 12:44; 20:31; 행 16:31; 요일 5:13 등).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이다. 요한의 믿음이란 말의 사용은 바울이 신앙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구원의 신앙은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구원의 신앙은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인을 포함한다. (1) 지식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어떤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 구원에 중심 문제가 된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이다(롬 10:9-10).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면 죄가운데 죽으리라고 하셨다(요 8:24). 그러므로 구원의 신앙은 인간의 구원에 기본적인 진리를 믿는 것을 포함한다.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 그리고 그의 육체의 부활이다. 요한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진리들을 믿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요구(주장)를 기록하였다(요 20:30, 31).
(2) 확신 확신은 감정을 포함한다. 이 요소는 사람이 진리에 관한 지적인 삶만이 아니다. 그것들의 신성에 대한 내적 확신도 있어야 한다(참고, 요 16:8-11).
(3) 신뢰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결과와 이런 것들이 참되다는 확신의 결과로서 역시 확고한 신뢰, 의지의 움직임, 의지의 행동으로서 결정이 있어야 한다. 마음은 자주 의지를 가리키며 그것은 너희 마음으로 믿으라는 그 언급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롬 10:9).
하나님의 은혜 일반 은혜 정의 : 하나님이 주권적이시며 인간은 그의 죄의 상태로 타락했다면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초래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은혜에 주어진 다른 범주는 일반은혜와 효과적으로 은혜가 사용된다. 일반(공동)은혜는 그 범위에서 넓으며 모든 인류를 목표하였다. 일반은혜는 그들을 위한 신의 일반적 돌보심에서 나타난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이다. 보다 확대된 정의는 ⒜ 성령의 일반적 역사로 마음을 새롭게 하심이 아니라 그의 일반 혹은 특별계시를 통해서 사람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심으로 죄가 억제되며 사회생활에서 질서와 시민의 의가 장려되는 것이다. 또는 ⒝ 비, 햇빛, 양식 그리고 마시는 물, 옷과 은신처와 같은 일반적인 축복들로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일반은혜의 설명 (1)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반적인 축복 공통이나 일반이라는 말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이 은혜의 수혜자임을 강조한다. 물질적인 공급은 일반은혜의 한 국면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마 5:45).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신자를 위해 그가 예비하심과 같이 무신론적 농부에게도 곡식을 추수할 수 있도록 주신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비를 주시며 열매 맺는 계절을 주셨다고 하였다(행 14:17). 이는 하나님의 일반은혜의 제시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그의 모든 일에 넘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롬 2:4).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영적 공급도 해 주신다. 디모데전서 4:10에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주시며 특별히 믿는 자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보편구원을 말씀한 것이 아니나 영적인 예비하심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죽음이 그가 모든 사람의 구주로 가능성이 있으시고 실제로 믿는 자의 구주이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2) 죄의 제지 죄에 대한 하나님 제지는 적어도 네 가지 경로를 통해서 작용한다.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비록 라반은 적지 않게 야곱을 속였으나 하나님께서 라반의 속임을 제지하셨다(창 31:7). 사탄이 욥의 충성심에 관해 하나님께 도전했으나 하나님은 사탄이 욥에게 할 일을 제한하셨다(욥 1:12; 2:6). 성령을 통해서 : 창세기 6:3에서 하나님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는데 이는 성령님이 사람의 죄된 행위를 사람과 논쟁하시며 제지하신다는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서 : 선지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순종과 율법에 집착하도록 요구하신다. 그 사역에서 선지자들은 죄에 관해 경고로 제지 한다(참고, 사 1:11-20).
인간의 정부를 통하여 : 로마서 13:1-4에서 바울 정부의 수립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1절) 정부가 선 것은 악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불법의 사람(살후 2:6-7)이나 사탄의 세력을 붙잡고 계신 것은 악과 죄를 제지하심이며 이는 성령님이 하신다.
죄를 확신케 함 이는 물질적인 공급의 일반은혜보다는 더 좁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죄에 대한 확신은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이 아니다. 성령의 죄를 확신케 하는 역사가 요한복음 16:8-11에 진술되었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8절).
성령의 죄를 확신케 하는 역사는 삼중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들 속에서 죄에 관여한다(요 16:9). 그 죄는 특별히 그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그리스도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불신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상의 죄를 확신케 함에서의 성령님이 의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요 16:10)을 통해서 입증된다. 성령님이 세상의 확신에서 심판에 관여하심은 사탄이 십자가에서 심판받았기 때문이다(요 16:11). 사탄은 죄와 죽음을 방편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을 이기셨고 사탄을 멸하셨다. 만일 지배자가 심판받았다면 그 추종자들도 심판받을 것이다. 성령님은 이런 진리들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일반은혜의 필요성 일반은혜는 효과적인 은혜에 예비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일반은혜로 만인에게 나타내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에 참여할 때(마 5:45)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반영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연속에서 계시하셨다.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만인에게 개진된다(롬 1:20). 이런 하나님의 지식에 더해 성령께서 인류의 문제(요 16:8-11)에 해결을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관하여 사람들을 확신시킨다. 일반은혜는 효과적인 은혜에 예비적인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그의 죄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깨달음을 준다.
효과적인 은혜 정의 효과적인 은혜는 일반은혜보다 그 범위에서 좁다. 그리고 효과적이란 그 은혜가 주어진 자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은혜의 수령자는 모두 그 은혜에 반응하며 신자가 된다. 효과적인 은혜는 보통 은혜와 대조하여 특별은혜로도 부른다. 효과적인 은혜는 사람이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사람을 효과적으로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효과적인 은혜는 저항할 수가 없다. 마음을 변경시킴으로 사람이 완전하게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복종한다. 효과적인 부르심의 핵심은 그것을 받은 사람이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자진해서 믿는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은혜는 부르신다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였다(참고, 롬 1:1, 6-7; 8:28; 고전 1:1-2, 24, 26; 엡 1:18; 4:1, 4; 딤후 1:9).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초대이며 그에 의해 그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 사람을 설득하여 그 개인이 복음에 기쁘게 반응하도록 바꾼다.
효과적인 은혜의 설명 (1) 모든 사람이 부름받지 않음,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택한 자에게 제한된다. 로마서 1:5-6에서 바울은 이방인 중에서 선택된 그룹이 로마에 있는 교회를 이루도록 부름받았음을 강조하였다. 역시 고린도전서 1:24-28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유대인과 어떤 이방인을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셨다. 이 구절에서 부르심과 선택이 강조되었다(24, 25-28).
(2) 효과적인 은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불가항력적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미 신자의 의지에 역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기쁘게 그에게 나오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은혜를 저항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23-24은 복음이 안 믿는 자에게는 어리석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효과적이다.
(3) 효과적인 은혜는 인간의 의지에 반대로 역사하지 않는다. 사람은 아직도 구원받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을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행 16:31).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을 권면하시기를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셨다(요 5:40; 참고, 마 23:37). 저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하며 원치 않았다.
(4) 효과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이끄시는 능력을 포함된다. 요한복음 6:44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 오는 자는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다. 신자의 구원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것이 강조되었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야 하지만 아무도 하나님께서 설득하시고 그렇게 하도록 힘을 주시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올수는 없다.
(5) 효과적인 은혜에는 성령의 역사가 포함된다. 특별은혜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예비행위는 성령께서 반드시 그 사람의 불신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확신시키신다(요 16:8-11). 성령님은 역시 그가 그 사람을 중생케 하심으로 그 사람안에서 효과적인 은혜가 효력이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딛 3:5).
(6) 효과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야 한다. 효과적인 은혜의 선물에 반응함에 있어서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신앙은 내용이 있고 진리의 지식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은혜는 성령의 진리를 떠나서 주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성령으로 신자의 마음에 적용된다(히 4:12).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낳았음을 상기시키고 있다(벧전 1:23). 히브리서나 베드로전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중생을 효과있게 하는 도구임을 강조한다. 효과있는 은혜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적용은 사람에게 구원을 초래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7) 효과적인 은혜는 개인에 대한 것이지 그룹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전체로서 교회에 대한 것도 아니다. 야곱은 개인적 선택과 효과적인 은혜 수령의 한 예가 된다(롬 9:11-13). 하나님은 에서를 지나치시고 야곱을 택하시어 그의 은혜를 나타내셨다. 칭의가 개별적이듯이 효과적인 은혜도 단체적인 것이 아니다. 로마서 8:30에 하나님이 부르신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게 하신다.
(8) 효과적인 은혜는 영원전부터이다. 효과적인 은혜의 적용은 시간안에서이지만 그 계획은 영원에서 결정되었다. 로마서 9:11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영원전에 그의 은혜의 대상을 정하시는 결정은 하나이다. 야곱과 에서가 나기 전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그의 은혜를 나타내심에서 간과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권적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의 결과이다. 로마서 8:30은 효과적인 은혜의 적용은 그 은혜의 대상이 되도록 어떤 사람들을 예정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은 그가 전에 예정하신 자를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효과적인 은혜의 변호 (1) 그것은 죄 때문에 필연적이다. 에베소서 2:1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조건이 언급되었다.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이다. 만일 불신자가 죽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부르신다. 역시 그 은혜가 효과적인 것은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29-30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아무도 잃어버린 자(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신 자를 그가 역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아무도 잃지 않으신다. 그 본문은 강조에서 분명하다. 그가 부르신 자는 역시 의롭게 된다. 은혜로 부르신 자가 역시 의롭게 된다는 것은 효과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자에게 효과적이었음을 가리킨다.
(2) 효과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항상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다.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간과하신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는가?(롬 9:14).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제한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루심을 이해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동에서 옳으시다.
(3) 이 은혜는 인간이 믿어야 하기 때문에 옳다. 하나님이 효과적인 은혜를 주시는 사실은 믿어야 할 인간의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많은 성경이 믿음의 필연성을 강조한다(참고, 요 3:16, 18, 36; 5:24). 요한복음 3:10; 3:6은 특별히 사람은 그가 자원하여 복음을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지 그가 효과적인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효과적인 은혜에 대한 반대 (1) 책임이 불필요하게 된다. 사람이 죄로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반드시 효과적인 은혜를 드러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에 관계이다. 비록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시어야 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은혜를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진리는 그의 책임에서 인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 해결은 이것이 성경에서 많은 모순 중에 하나님을 인식하는데서 발견된다. 많은 성경이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인간이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이다(참고, 요 3:16, 18, 31; 6:37; 행 16:31).
(2) 그것은 불공평하다 로마서 9:14은 인간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옳으시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것이 없으시다. 만일 그가 어떤 사람에게 그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안하신다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것이 없으시기에 불공평하신 것이 아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만일 그가 그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신다면 의지의 행위는 모든 사람이 그를 배척했으므로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롬 3:11-12). 하나님께서 그의 효과적인 은혜를 목적없이 주시지 않으신다. 그의 목적은 조명하시고 중생케 하시며 죄인을 그와 교제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신다. 그의 목적은 효과적인 은혜를 받은 죄인들이 역시 그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목적을 선전하게 하심이다(벧전 2:9-10).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의 삶에서 그의 효과적인 은혜의 드러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중생 정의 중생(Paliggenesia) 신약에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 시대에 세상의 새로워짐으로 사용되었다(마 19:28). 두 번째 사용은 구속받은 사람의 중생이다(딛 3:5). 중생은 개종과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구원제공과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응을 가리킨다. 중생은 개종의 다른 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중생에서 영혼은 수동적이다. 동시에 중생에서 그것은 능동적이다. 중생은 영혼에 대한 신적 생명의 소통이다. 새로운 본성의 부여로서 혹은 마음의 그리고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 중생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은 그것으로 인하여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중생에 관한 성경 요한복음 3:3(중생이란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은 신생으로서 중생을 언급한다. 헬라어 다시로 번역된 말은 another이며 위에서부터라고 번역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중생은 위에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낳았다는 것이다. 신생은 육체적 출생인 첫 번째 출생에 대조되는 영적인 출생이다. 영적 출생에서 성령은 그 사람을 중생케 하신다. 그는 중생의 방편이시다. 요한복음 3:5에서 낳았다는 수동태이며 그것은 인간에게 이루어진 일이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성령이 그것을 산출하셨다. 디도서 3:5은 중생에 대한 다른 구절인데 이 구절은 중생이 성령에 의한 씻음과 새롭게 되는 두 가지 일과 연관되어 있다. 요한복음 3:5과 디도서 3:5은 두 가지 요소를 언급하였다. 물과 성령이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참고, 엡 5:26). 다른 물과 성령의 교리는 에스겔서 36:21-27에 회개를 통해서 오는 씻는 것을 가리킨다.
첫 번째 출생과 두 번째 출생 사이에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두 가지 출생의 대조
.
첫 출생
두 번째 출생
기원
죄있는 부모
하나님
방편
타락하기 쉬운 씨
타락할 수 없는 씨
본성
육신의 육체
영 - 영적
영역
사탄의 노예
그리스도의 자유인
지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중생의 설명 중생은 즉각적이다. 어린아이가 육신의 출생에서 특별한 순간에 낳듯이 영적인 출생도 성령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때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중생은 인간 경험의 결과이다. 출생은 중생자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행해진 어떤 것이다. 경험은 중생의 결과일 것이지만 그런 경험은 중생의 원인이 아니다.
중생은 인간의 노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13은 신생은 인간의 뜻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것을 가르킨다. 중생은 하나님의 행위이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협력한 성과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구원에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중생과 신앙이 구별되나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요한복음 1:12-13에서 그 둘을 나란히 두었다. 요한복음 1:2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한복음 1:13에서 그 바로 순간에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낳는다.
중생의 결과 새로운 본성 - 중생의 결과는 신적 본성의 수여이다(벧후 1:4). 신자는 의로운 삶을 위한 능력인 새로운 자아를 받는다(엡 4:24).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3:17). 새로운 생명 - 신자는 그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받으며(고전 2:16)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심장(마음)을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받게 된다(롬 6:13).
영원한 안전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 관해서는 두개의 구별된 견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인간은 그의 의지의 행동으로 구원받았으며 그 의지의 행동 혹은 특별 죄로 그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참 신자는 그의 신앙이 보존된다. 이 교리는 성도의 견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교리는 신자는 결코 미끄러지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참으로 죄로부터 그의 구주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그는 그의 지키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안전하다. 구원의 안전에 대한 기초는 인간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신자의 안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안전케 하시는 사역 신자의 안전은 아버지가 영원전에 구원으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엡 1:4). 아버지가 신자를 그리스도안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예정하셨다(엡 1:5). 아버지는 그들의 구원에서 신자들을 안전하게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롬 8:28-30). 아버지가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신 자는 그가 장래에 영광으로 이끄신 같은 사람이다. 아무도 그 과정에서 잃지 않으신다. 신자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 역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롬 5:7-10).
아들의 안전케 하시는 역사 아들이 신자를 구속하셨으며(엡 1:7) 신자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옮기셨고(롬 3:25) 그 신자를 의롭다고 하셨으며(롬 5:1) 용서를 예비하셨고(골 2:13) 그 신자를 성화케 하신다(고전 1:2). 더욱이 그리스도는 신자가 그와 함께 있기를 기도하시며(요 17:24) 그는 지속적으로 공의의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 주시며(요일 2:1) 그는 지속적으로 신자의 대제사장으로 중재하신다(히 7:25). 만일 신자가 구원을 잃는다면 그리스도는 신자의 중보자로서 그의 사역에서 효과적이 아니시다.
성령의 안전케 하시는 역사 성령님은 신자를 중생케 하시며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딛 3:5). 성령은 영원히 신자안에 내주하신다(요 14:17). 그는 구속의 날을 위해 신자를 인치신다(엡 4:30). 그는 우리의 장래의 상속의 보장인 계약금을 인시셨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과 신자의 몸으로 세례받았다(고전 12:13). 신자가 그의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누가 구원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구원이 신자에게 달렸다면 그것은 상실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면 신자의 구원의 안전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신자의 영원한 안전은 완성되었으며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더없는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