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가는 길
나는 정년을 11개월 정도 남겨놓고 있는 중학교 교장이다.
전공은 사학이나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고등학교 땐 문학동아리 활동도 했고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수필로 등단도 했다.
짬을 내기 어려운 직장생활, 승진대열에 줄을 선 사람의 여유 없음이 등단했다는 사실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책 한 권 변변히 내지 못한 현실의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도 여전히 좋은 독자가 되고 싶어 책은 틈 나는 대로 열심히 읽고 있고, 한글에 대한 사랑 역시 누구 못지않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다.
한글의 오염, 이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스마트폰 세대’의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 교육청 장학사들, 심지어 뉴스를 만들고 보도하는 기자들 조차 귀하고 소중한 우리의 말과 글을 별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마디로 ‘무관심과 오염’이 한글을 대하는 우리 모두의 현실 인 거 같다.
실제로 ‘한글사랑 생활수기 공모전’을 보도하고 있는 신문조차도 큰 제호의 제목을 용법에 맞지 않게 뽑아놓았다. ‘‘환절기 건강관리’ 이렇게 지키자‘ 라는 제목인데 글의 주어가 건강관리이기 때문에 건강관리를 지킨다는 말은 의미에 맞지 않게 쓰인 말이다. 지킨다는 말을 살리려면 ’환절기 건강 이렇게 지키자‘ 라고 쓰는 게 맞고, 관리에 무게를 두려면 ’환절기 건강관리 이렇게 하자‘라는 표현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존대말이나 경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사회는 이기적이고 경우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경어는 쓸 데 없는 이중 경어에다 남을 높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말을 예사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내가 아시는 분”이란 표현이다. 이 표현은 상대방을 높이는 게 아니라 말하는 자신을 높이는 표현이다. 그 뿐인가 나를 높이다 못해 이제는 사물까지 높이는 잘못된 표현을 잘못인 줄도 모르고 쓰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대표적인 예가 ‘전화 오셨다’는 표현이다. 이건 전화를 한 사람을 높이는 게 아니라 사물인 전화를 높여주는 말이다. 제대로 된 표현은 ‘누구 누구가 전화를 하셨다.’ 또는 ‘어떤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셨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식을 진행하면서 쓰는 잘못된 표현 중 대표적인 예가 ‘누구 누구의 훈화가 있으시겠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이건 훈화하는 이를 높이는 게 아니라 훈화라는 객관적인 명사를 높여주는 말이다, ‘어떤 어떤 분이(께서) 훈화를 하시겠습니다’ 라는 표현이 역시 옳은 표현일 것이다. 높이고자 하는 주체와 주인공인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거기에 맞는 존댓말을 쓰는 것이 경어의 참 사용방법일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도 사회를 잘못 보는 사람이 있다.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일어서게 해 국기를 향하게 한 다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하는데 이 때 사회자가 붙이는 구령 역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아니고 ‘국기에 대하여 경례’라고 하는 것이 맞다. 참석한 사람들의 동작을 유도하는 안내이기 때문에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명사형의 구령을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에 방송이나 신문에서 또 억지 같은 표현들을 몇 몇 개 보았다.
‘어떤 수다를 하실까요?’ 란 표현인데 수다를 떤다는 표현은 들어보아도 ‘수다를 한다’는 표현은 첨이며 ‘폭행을 저질렀다’란 표현 역시 폭행이란 말에 폭력행위라는 행위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폭행을 했다’는 표현이 맞지 ‘폭행을 저질렀다’는 생소한 표현이다.
비슷한 예로 ‘퍼레이드가 열리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퍼레이드(perade)는 '행진'이란 명사나 '행진하다'라는 동사의 뜻을 가진 영어로, 행진을 하다라는 말이 맞지 행진이 열리다 라는 표현은 정말 우스꽝스런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이병헌이 나오는 모 광고 카피에 선택을 내리다 라는 말이 나와 카피라이터들까지도 용어를 저렇게 이상하게 쓰고 있나 싶어 그 광고 자체가 싫어졌다. 선택(가리고 뽑음)은 하는 것이지 내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유명세를 달리다’도 ‘유명세를 타다’로, ‘독서에 임하고 있었다’는 문어체의 표현도 ‘독서를 하고 있었다’로 쓰면 좋을 텐데 어째서 이런 낯선 표현들이 난무하는 것인지 방송이나 신문에서 예사로 쓰고 있는 이런 표현들을 볼 때마다 절로 고개가 가웃거려진다.
그 외에도 참가, 참여, 참석 등 비슷한 의미를 가졌지만 구분해 써야 하는 말의 잘못된 사용 등 비슷한 예는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최근 몇 일 동안의 방송 내용만 모니터해도 이런데 사회 곳곳에서 아무런 원칙이나 제재 없이 사용되는 말이나 표현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한글학자도 아니고 국어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너무 혼탁해지고 잘못 쓰여지고 있는 우리말이 꼭 원칙도 없고 무질서한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너무 잘 알아서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아무 생각 없이 쓰니까 더 의미가 덜한 우리의 말과 글.
나는 과연 우리말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쓰고 있는지 한글날을 맞아 자신의 언어습관, 글쓰기 습관을 한번쯤 들여다 볼 일이다.
첫댓글 한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적절한 상황어휘 선택이 사실상 쉽지 않아서 그래요.
그만큼 한글의 파생적 어미(語尾) 영역이 많아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름으로 받아들이는 비약적 자기언어화 탓도 있겠지요.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도 역시 올바른 표현이 아니지요.
나역시 혼돈되는 표현을 종종하고 있지요.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