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1일 의성 사촌마을 晩翠堂(=보물 제1825호,-안동김씨 김방경의 후손 도의공파 종택) 강당에서 천서 김창회의 선비 정신 강의 에서 들은 청백리의 한 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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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을 가로채는 쥐새끼는 누구인가
제주도에는 청백리 이약동(李約東)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서 부패를 근절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이약동이 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일이다. 당시 제주도는 중죄인들이 귀양살이하는 멀리 떨어진 섬에 불과했다. 물자가 항상 부족해 백성이 굶주리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보던 사람들인 이속(吏屬)들이 중간에서 공물을 가로채 배를 불리는 일이 만연했다.
이약동은 부임하자마자 각종 공물과 세금에 관한 문서들을 검토했다. 문서들을 하나하나 검사한 결과 이속들이 상당한 양을 중간에서 슬쩍한 것이 드러났다. 이약동은 그들을 추궁했다.
“공물이 다 어디로 간 것이냐? 누가 횡령했느냐?”
“아마도 쥐가 먹은 것 같습니다. 늘 있는 일이지요.”
이약동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구운 소금도 역시 쥐가 먹어 없어진 것이냐?”
“그렇지요. 쥐가 많아 없어지는 양이 상당합니다.”
이속들이 다시 쥐 핑계를 대자 이약동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소금이 없어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쥐가 필요하며 얼마나 큰 쥐가 필요한 것이냐? 이 쥐들은 필경 너희들 이렸다!”
그러면서 이속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들의 입에다가 소금 한 바가지씩 처넣었다.
“너희 같은 큰 쥐들이 한 바가지도 먹지 못하는데 작은 쥐들이 도대체 얼마나 먹을 수 있단 말이냐? 먹지 못한다면 너희가 중간에 가로챈 것으로 알고 크게 벌을 내릴 것이다.”
이속들은 소금을 먹지 못했고 큰 벌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제주도에서는 공물과 세금을 중간에서 횡령하는 일이 없어졌다.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기다
본래 제주에서는 한라산 산신제를 매년 2월 백록담에서 지냈다. 제사 때가 되면 많은 이들이 동원되어 며칠씩 산에서 야영해야 했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약동은 이런 폐단을 조정에 알리고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 현재 위치로 옮기게 했다. 이후 산신제 때문에 고통 겪는 주민이 없어졌다. 아라동 산천단에는 그가 세운 묘단과 신선비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다. 1996년 제주의 문화예술인들과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이씨 문중회가 건립한 것이다. ‘이약동 선생 한라산 신단 기적비’가 있다.
▲백록담에서 한라산 중턱으로 옮긴 산천단.
말채찍 하나도 함부로 받을 수 없다
제주도 백성은 이약동의 선정(善政)에 감동해 송덕비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약동은 이를 마다하며, 일 채의 선물도 받지 않았다. 마지못해 말채찍 하나를 받았을 정도로 청렴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재임 중에 착용했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런데 한참 동안 말을 타고 가다 보니 손에 든 말채찍이 눈에 띄는 것 아닌가. 그는 “이것은 백성이 제주목사에게 바친 것이니, 후임 제주목사가 써야 한다”며 즉시 채찍을 성루 위에 걸어두고 떠났다. 그 후 후임자들은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놓고 모범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자 백성은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념했는데,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 했다.
▲이약동 선생 한라산 신단 기적비 정면 모습.
금갑옷을 바다에 던지다
이약동이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향할 때 일이다. 항해 중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배가 빙빙 돌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공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약동이 수하 관리에게 물었다.
“나는 이 섬에 와서 한 가지라도 사리사욕을 취한 것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부정을 저질러 신명이 노한 것이 아닌가. 일행 중 누구라도 섬의 물건을 챙겨온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비장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했다.
“제주도 백성이 목사님을 위해 바친 금갑옷을 실어두었습니다. 나중에 목사님이 갑옷을 입으실 때 드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그만….”
이에 이약동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이제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 했다. 갑옷을 바다에 던지자 즉시 파도가 그쳤고, 곧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갑옷을 던졌던 곳을 ‘투갑연(投甲淵: 갑옷을 던진 물목)’ 이라고 한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근무하던 제주목관아지.
한 평생 청렴하게 살다간 청백리 이약동
이약동(李約東)은 태종 16년(1416)에 태어나서 성종 24년(1493)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호조 참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세종 23년(1441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문종 1년(1451)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혔다. 그는 수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도 지역민에게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다.
이약동은 사간원대사간(사간원의 으뜸 벼슬)에 올랐고, 한성부 자윤과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말년에 고향 김천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이때 그는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계의 시를 지어 남겼다.
家貧無物得支分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
惟有簞瓢老瓦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일세
珠玉滿隨手散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不如淸白付兒孫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 하네
글 김정희 / 사진제공 제주관광공사
출처: http://blog.busan.go.kr/1373 [부산시 공식블로그 쿨부산]
첫댓글 이 시대에 감옥가는 님들은 뭘 배웠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