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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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776년 ~ 1800년 | |
성 명 | 이산 |
왕 비 | 효의왕후 |
부 친 | 장조 |
모 친 | 헌경왕후 |
앞선 왕 | 영조 |
다음 왕 | 순조 |
조선의 제22대 국왕 |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하여,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0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조선 진종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5년에는 손자의 권력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 할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조회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꾀하는 한편,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소 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이른바 세도정치를 하였는데, 홍국영이 지나치게 정권을 쥐고 흔들자 정조는 그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하다 결국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이자 여당인 노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어서, 봉건적 특권을 약화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그리고 안동 김씨들이 정치 일각에 집권하면서, 나중에 세도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든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시켰다. 또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영을 신설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용영 설치는 군대를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
1791년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해 상인들의 상업 활동의 자유를 크게 넓히고, 수령 등의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정조 사망 이후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립하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대부분 천주교 신도인 남인들이 제거된 신유박해(1801년), 오가작통법 실시 등의 조직적 탄압이라는 수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안동 김씨 일파가 벽파에게 박해를 많이 받아, 시파 일각인 안동 김씨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조순은 순원 왕후가 죽은 뒤 세도 정치를 시작하고 만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음력 6월 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소요산에 황금,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음력 6월 16일에는 사순청량음, 금련차, 웅담고를 투약했으며 다시 가감소요산 세 첩과 금련차를 쓴다.[1] 음력 6월 20일에는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과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를 사용한다. 정조 스스로 가미소요산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2]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이다. 처음에 받은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대한제국 때인 189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난 후에, 정종에서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관계 | 호칭 | 관계 | 호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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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 조선 숙종(肅宗) | 증조모 | 숙빈 최씨(淑嬪 崔氏) |
조부 | 조선 영조(英祖) | 조모 | 영빈 이씨(暎嬪 李氏) |
외조부 | 영풍부원군 홍봉한(永豊府院君 洪鳳漢) | 외조모 | 한산부부인 이씨(韓山府夫人 李氏) |
부 |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 모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
양부 |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 양모 | 효순소황후 조씨(孝順昭皇后 趙氏) |
호칭 | 출생 | 사망 | 자녀 | 부모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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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 1753년 | 1821년(69세) | 없음 | 김시묵(金時默), 홍씨 | |
원빈 홍씨(元嬪 洪氏) | 1766년 | 1779년(14세) | 1남 | 홍낙춘 | 홍국영의 동생 |
화빈 윤씨(和嬪 尹氏) | 1765년 | 1824년(60세) | 없음 | 윤창윤 | |
의빈 성씨(宜嬪 成氏) | 1753년 | 1786년(34세) | 1남 1녀 | 성윤우, 임씨 | |
수빈 박씨(綏嬪 朴氏) | 1770년 | 1822년(53세) | 1남 1녀 | 박준원, 원씨 |
호칭 | 출생 | 사망 | 모친 | 자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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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군(常溪君) | 1770년 | 1786년 | 원빈 홍씨 | 조선 철종의 큰아버지 | |
문효세자(文孝世子) | 1782년 | 1786년 | 의빈 성씨 | ||
옹주 | 1784년 | 의빈 성씨 | |||
순조(純祖) | 1790년 | 1834년 | 수빈 박씨 | 2남 4녀 | |
숙선옹주(淑善翁主) | 1793년 | 1836년 | 수빈 박씨 | 1남 | 홍현주(1795년~1865년)에게 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