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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 風 (열풍)
작가: 이은집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훗근한 열기(熱氣)를 담은 바람이 막사안을 후비고 지나갔다.
또 비가 쏟아지려는지 창으로 보이는 하늘엔 엄청난 구름떼가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누웠거나 혹은 매트레스에 걸터 앉았다.
멀리서 간헐적으로 포성이 울렸다.
석호는 똑바로 누운 채 아까부터 흘러가는 구름떼를 쏘아보고 있었다.
양떼가 되고 선녀가 되던 보드라운 고국의 뭉게구름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성서류(聖書類)의 영화처럼 공포감마저 자아내게 했다.
『니 또 무슨 생각이가?』
껑정하게 키만 크고 빼빼 마른 명수가 그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가까이 닥아왔다.
『응…?』
석호는 눈으로 명수에게 옆에 누우라는 신호를 하고 여전히 하늘을 올려본다.
『그 심각틱한 얼굴 좀 걷어치레이!』
악의없는 명수의 힐난이 석호의 귓가에 와서 부딪쳤다.
『….』
『이 자슥아. 니 정신 나갔나?』
『그런지도 모르지.』
『하! 자슥 싱겁기는….』
『남의 말 하네.』
『뭐라꼬?』
명수의 경상도 액센트가 좀 더 높아졌다.
중학 시절부터 꼭 십년간을 서울에서 유학했다는 명수는 거의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석호에게만은 보통보다 더 지독한 사투리를 쓰곤 했다.
『옛 말에도 있어.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하아….』
『이제 알았으면….』
『씹구통(입) 닫아두란 말이가?』
명수가 재빠르게 이런 대꾸를 해서 석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웃읍나?』
『하긴 웃으울 것두 없지.』
석호는 천천히 일어앉아 파말에 불을 붙였다.
『니 불 버리지 말고….』
명수 역시 웃호주머니에서 파말을 꺼내 물었다. 그들은 파르스름하게 퍼져나는 담배연기에 시선을 모았다.
『바람 좀 쏘이러 나갈까?』
꽁초를 비벼끄며 석호가 명수를 건너다 보았다.
『오케이!』
그들은 런닝샤쓰 바람에 작업모를 아무렇게나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금시 빗방울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은 더욱 가라앉았다.
둘이는 철조망 가까이에 우뚝히 서 있는 야자나무 밑으로 갔다.
빗살같이 양쪽으로 갈라진 무성한 야자잎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적의 감시를 막기 위하여 자연림 그대로 보존하는 때문이었다.
『기적만 같군.』
명수가 먼저 입을 떼었다.
『살았다는 것이 말이지?』
석호는 갑자기 피곤과 허탈을 느꼈다.
『그렇잖은가?』
『글쎄….』
둘이는 어느새 긴 벤취에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었다.
바람이 지나칠 적마다 야자잎이 연인의 손길처럼 얼굴을 쓸었다.
『난 꼭 죽은 줄만 알았거든.』
심각한 이야기는 어감상 맞지 않는다며 명수는 표준어를 썼다.
그가 사투리를 쓰지 않음은 그때문이리라.
『왜…? 꿈자리가 사나워서…?』
석호는 출전에 앞서 들려주던 그의 꿈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도 그렇지만 우린 어차피 화약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지 않았나?』
『싱거운 줄만 알았더니 마음도 약하군.』
『인간의 본능인 다음에야 나라고 예외일 수 없지.』
『부정을 하면 위선이 되겠고….』
사실 석호는 명수의 말에 얼마쯤은 시인을 했다.
그러나 어저께 밤까지 한 막사 안에서 지냈던 선임하사 이하
십여명이 한꺼번에 전사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단 말인가?
석호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절감하고 있었다.
『후우-! 그만 들어가세.』
명수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뿜으며 벤취에서 일어앉았다.
『음! 금방 비가 쏟아지겠는데….』
그들은 다시 파말에 불을 붙여물고 막사로 향했다.
기어이 비가 쏟기 시작했다.
흡사 우박같은 세찬 기세였다.
『지독하군!』
『꼭 어저께 같은데….』
앞장선 명수가 막사의 문을 열었다.
『어데 갔다 이제 오나?』
문이 열리기와 거의 동시에 핏대를 세운 목소리가 고무공처럼 튀어나왔다.
『네…저….』
명수가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석호도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순간 석호는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지루한 항해에서 그들은 갑판을 무대삼아 몇 차례 리크레이션을 즐겼다.
석호는 명수의 지명으로 해서 <렛스 트위스트 어게인>을 불렀다.
그때 바크샤처럼 볼품없는 뚱뚱한 몸을 흔들며 트위스트를 추던 사나이!
『아니 그럼 저 사람이 우리 소대에 보충돼 왔단 말인가?』
석호는 이 묘한 인연에 웃음마저 터져나왔다.
『야, 임마! 왜 웃어!』
빗소리에 섞인 바크샤의 노호는 흡사 천둥소리 같았다.
석호는 이 무지무지한 오해에 대꾸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꾹 입을 다물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흥! 다르시구나. 학사 쫄병님이라….』
바크샤는 누구한테 알았는지 조소를 띄우며 빈정거렸다.
『아직 졸업은 하지 않았십니더.』
명수가 사투리 섞인 액센트로 대꾸를 했다.
『알고 있어, 이 키다리야!』
바크샤의 재치있는(?) 반격에 늘어서 있던 소대원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제야 바크샤는 음성을 낮추어 훈시를 계속했다.
『너희 두 놈은 그 자리에 서서 들어라. 에, 이와같이 우리는 놈들을 격퇴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우는….』
여기에서 바크샤의 표정은 갑자기 굳어졌다. 그 순간은 누구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고 있었다.
『…에, 그래서 이번에 내가 이곳으로 보충돼 온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의 선임하사다. 보다시피….』
다시 바크샤의 음성은 굳어졌다.
『…나는 무식하고 배운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낙동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백전 불굴의 용사이시다.』
호기있게 외치고 나서 땀을 씻는 바크샤의 얼굴은 득의에 차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할 것 없나?』
그리고 바크샤는 좌중을 훑어나갔다.
『저….』
주책이란 닉・네임을 가진 三분대장 박상병이 손을 들까말까 망서렸다.
『음! 말하라.』
바크샤의 멀뚱한 두 눈이 박상병한테 가서 멎었다.
『저…그런데 여태 하사 밖에 못되셨으니….』
순간 소대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키들거렸다.
『하하하! 내가 기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에, 그것은 내가 곧대로 올라갔다면 적어도 영관급은 됐을거다.
그런데 좀 잡쉈다가 배탈이 나셨다. 그래서….』
『강등이 되셨군요.』
『임마! 솔직두 분수가 있어야지. 하하하!』
<뱃장이 저만이나 하니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는듯 껄껄 웃어버리고마는 바크샤가 석호는 신기스럽게까지 보였다.
『…에, 그러면 늦게 온 너희 두 놈의 관상 좀 보자.』
바크샤가 뒤룩거리며 닥아왔다.
『키다리! 네 이름이 뭐냐?』
『김 명숩니다.』
『어느 학교 다니다 왔지?』
『S대학교 농과대학….』
『임마! 그 따위로 키만 커가지구 어디 농사지어 먹겠니?』
명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크샤가 이기죽거렸다.
『다음 넌?』
『뭣 말씀입니까?』
석호는 이 어처구니없는 바크샤의 수작에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임마! 이름도 몰라.』
『음 석홉니다.』
『음 석호라니…? 성이 음가란 말이냐?』
『네.』
『음가란 성도 있어?』
바크샤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바싹 다가들었다.
『너 참 잘 만났구나.』
『네?』
『나는 양가다.』
『네….』
『임마! 대학까지 다니다 왔다며 그렇게 센스가 둔해! 음양이 서로 만났 으니 천생연분이 아냐.』
『…….』
『음! 그만하면 마누라감으론 됐구나.』
석호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바크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몇 살이니?』
『스물둘입니다.』
『좋아! 오늘 저녁부터 내 수청을 들어라.』
석호는 이 무의미한 언어의 장벽을 뚫고 나가려는 내부의 소음을 진드시 억누르고 있었다.
이윽고 바크샤가 밖으로 나가자 명수가 다가왔다.
<개의하지 말자.>
명수의 두 눈은 무언의 위로를 보내고 있었다.
<좋아!>
석호는 평온을 되찾으며 파말을 빼어 물었다.
불을 붙여문 둘이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히 개이고 따가운 오후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야자수와 관목들이 싱싱하게 잎을 펼치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 그들은 강가로 나갔다.
메콩강의 지류라는 그곳은 꽤 물이 맑고 깊어서 수영에 알맞았다. 둘이는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히야! 니 깜둥이가 다 됐다이.』
명수의 허풍스런 외침이 아니래도 사실 석호는 어지간히 새까맣게 그을어 있었다.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
석호는 발헤엄을 치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지독히 햇볕에 타 있던 것이다.
『하하하! 지금쯤 정말 고국엘 돌아가면 깜둥이가 왔다고 할끼라….』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마치 뚝섬에나 온듯한 기분으로 수영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거의 한시간이나 돼서야 막사로 돌아왔다.
『흥! 너희들 여전히 붙어다니는구나?』
또 무슨 일이 있는지 소대원을 모아놓고 있던 바크샤가 눈을 흘기며 돌아보았다.
『….』
『어서 뒤에 가 서, 임마!』
『넷!』
둘이는 웬일로 싱글거리는 소대원들 뒤에 가서 차려를 하고 섰다.
『에, 저 사고뭉치들 때문에 다시 한번 말한다. 오늘의 외출은 오후 ××시 까지니까 그리 알고….』
<아-! 그 때문에 모두들 좋아하고 있었구나.>
『…여하한 일이 있더래도 시간을 지켜주기 바란다.
에, 이곳에 베트콩이 출몰한다는 것은 어저께 전투에서 똑똑히 보았으니 알겠지만
너희들 뒤에는 항시 베트콩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언제 어디서 놈들의 피습을 당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알겠나?』
『넷!』
『그러면 재미들 많이 보고 오라! 이상!』
경례를 받고 난 바크샤는 유독 석호의 앞으로 다가와서 한마디 건네었다.
『에, 오늘은 특별히 마누라의 외출을 허락한다.』
『하하핫….』
소대원들은 활기찬 웃음을 뿌리며 밖으로 흩어져 나갔다.
『나가자!』
저만큼 막사 밖으로 사라지는 바크샤를 흘겨보고 나서 명수가 석호에게 건네왔다.
『잠깐만…!』
석호는 관물대에서 새 런닝샤쓰를 꺼냈다.
『자슥! 애인도 없는 것이…』
사실 석호를 빼어놓고 거의가 홍등가엘 드나들고 있었다.
부대가 있는 곳이면 후조처럼 몰려다니는 현상은 한국과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남국의 아가씨가 정열적이라는 선입견은 진작부터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전쟁보다 이것이 더 화젯거리였다.
『뭐냐! 너희들은 왜 나가지 않니?』
옷을 벗고 난 석호가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소대장과 함께 들어선 바크샤가 물었다.
『넷!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읍니다.』
그러나 명수의 이 대꾸엔 아랑곳하지 않고 바크샤는 석호의 마후라 사이로 조금 내뵈는 런닝샤쓰를 끄집어냈다.
『음! 너도 애인이 있구나?』
『없읍니다, 걔는….』
『그래?』
바크샤는 확실히 놀라운 표정이었다.
『헷헷! 완전한 숫총각이죠.』
명수가 싱글거리며 대답을 가로맡자
『임마! 노세, 노세, 젊어 노세, 프레이, 프레이, 영거 프레이, 노래두 있어.
한번만 맛보면 사죽을 못쓸 것이 도도한 체는….』
아니꼽다는듯이 석호를 째려보고 나서
『안그렇습니까? 소대장님! 하하하!』
바크샤는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하하! 양하사 말이 옳다. 그럼 네가 견습 시키렴.』
소대장도 따라 웃으며 명수에게 농담쪼로 건네왔다.
『넷! 알겠읍니더.』
『알았으면 빨리 꺼져!』
바크샤의 호통에 소대장은 여전히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명수, 입심좋던데….』
시내로 통하는 국도에 다달았을 때 석호는 야자수가 줄지어 선 가로수 밑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핫핫! 그게 바로 요령인기라….』
『요령이라구…?』
『그렇찮구…. 니도 이젠 그만 좀 척해라. 이런 데서 혼자 그래봐야 소용없다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명수는 말끝을 흐리고 이마의 땀을 씻었다.
『나 역시 누구처럼 내일 이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주의는 아니다.』
『그런데…?』
『모른다, 너는 나를…. 알 필요두 없는 일이고….』
『후우! 너와 나 사이에 알아서 안될 일이락 하문 마 묻지 않겠다.』
『미안하다, 명수….』
석호는 오늘도 P읍에서 그를 생각하고 있을 헤렌누나를 생각했다.
『무슨 소리가…?』
명수는 엉뚱하게 진전된 사태에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부르릉-.』
이때 U.S.Army버스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지나쳐갔다.
『헤이!』
멀어지는 버스 창밖으로 바크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흥! 수완 좋은데….』
『그게 요령인기라….』
시내에 당도한 그들은 시장에서 몇 가지 잡화를 사고 노점빠에 들렸다.
『어서 오십쇼!』
보이가 서투른 한국어로 말해서 둘이는 마주보고 웃었다.
장사에 약삭빠른 이들은 어느새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았을 때는 영어와 몸짓으로 통했다.
『무슨 술을 원하십니까?』
흡사 중국인처럼 비대한 주인이 정중히 물었다.
『막걸리는 없을기고….』
『여기가 명동 뒷골목인 줄 아나?』
『제기랄! 이 많은 술집 가운데 대폿집 하나 없고마.』
『빨리 청하기나 해! 기다리고 있어.』
『맥주로!』
둘이는 다섯병씩 마시고 빠를 나왔다.
제법 취해와서 서로 팔을 끼고 걸었다.
중심부에 들어섰을 때 명수가 약간 혀꼬부라진 소리로 건네왔다.
『니 오늘은 개봉시키야겠다.』
『무슨 소리야?』
석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소대장님의 명령이다. 니는 내한테 견습받아야 한다.』
그러나 명수는 사뭇 정색이다.
『하하하! 네가 취했구나?』
『뭐라꼬? 정말이다.』
그러면서 명수는 억세게 석호를 잡아끌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응?』
석호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명수가 하는대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보레이! 벌써 선착객이 온거….』
정말 골목에는 여러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마치 서울의 뒷골목처럼 짙은 화장의 아가씨들이 우굴거리고 있었다.
『헬로! 놀다 가세요.』
뺨 한쪽에 챠밍한 볼우물이 패이는 아가씨가 석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오! 한국어를 하는구나! 캔 유 스피크 코리언?』
명수가 놀랍다는듯 경이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히야! 보통이 아니고마. 이자슥, 복도 많데이.』
석호의 어깨를 툭치며 명수가 허풍스럽게 떠들었다.
『캄온! 플리스!』
『아! 나는 애인이 따로 있어. 이 친구나 잘 부탁해요.』
희극배우와 같은 제스츄어와 억양으로 명수가 말하자 그녀는 짙은 아이샤도우의 눈을 사뭇 깜빡이며
『네! 그러세요?』
『이자슥아! 와 멍청하노? 어서 들어가레이!』
『야! 너 정말 누굴 어쩔 셈이냐?』
석호는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처했다.
『훗훗! 니 몰라서 묻나?』
명수는 다짜고짜로 두 사람을 문안으로 밀어넣고는 잽싼 걸음으로 사라지며 크게 소리쳤다.
『숫총각이니까 알아서 해요!…야! 석호야! 니는 내가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레이.』
『호호호!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녀는 석호의 당황한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말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던 날 알게 된 친구요.』
『네에….』
그녀는 또어를 열고 석호가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석호는 맥이 탁 풀리는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세요.』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어항과 꽃병이 놓여있고 따블벳드 옆엔 선풍기가 사르르 맴돌고 있었다.
핑크색 벽지에 붙은 각국의 배우사진과 나체화는 문득 석호로 하여금 헤렌누나를 연상시켰다.
석호는 천천히 파말을 빼어 물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대 앞으로 가더니 간단히 머리 매무시와 화장을 고쳤다.
스미즈만 걸치고 벗어버린 그녀는 부풀은 젖가슴을 반쯤 노출시키고 있었다.
석호는 거울안으로 비치는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미안해요.』
이윽고 그녀는 석호 앞으로 닥아와서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시위했다.
석호는 눈을 감았다. 또 다시 헤렌누나가 머리속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헤렌누나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녔다.
아니 대학 뿐이 아니라 六・二五사변때 그의 홀어머니를 잃은 후 순전히 그녀의 힘으로 살아왔다.
석호는 줄곧 서울에서 하숙을 했지만 헤렌누나는 부대를 따라 떠돌아다녀야 했다.
『네가 없음 나는 벌써 죽어버렸을거다. 너는 나의 전부야.』
헤렌누나는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석호는 해서 늘 울분을 삼키고 살아왔다.
『어머! 정말 이런데 처음이신가봐?』
강한 액센트의 영어로 그녀가 종알거렸다.
『….』
『호호호!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리죠.』
『….』
『자… 옷 벗으세요.』
<이 여자는 어떻게도 나의 누나와 같은 말을 할까?>
석호는 헤렌누나로 해서 너무나도 그녀들의 생태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과 얘기가 하고 싶은데….』
석호는 어쩔 수 없이 파동치는 욕정을 억누르듯 파말을 비벼껐다.
『그럼….』
좋지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망서렸다.
『괜찮소. 이름은…?』
『저… 쑤내라고 불러주세요.』
『쑤내…?』
『네! 따이한식 이름이예요.』
『아! 그렇소? 그런데 한국에선 쑤내란 이름이 없는데….』
『어머! 그렇지 않을텐데요. 쑤내란 어떤 노래에 나온다구….』
『음! 이제야 짐작이가오. 그건 쑤내가 아니라 순애일꺼요.』
『맞았어요. 순애예요. 발음이 어려워서….』
『하하하! 순애보다 나에겐 쑤내가 더 이국적이니까….』
『그럼 쑤내로 할까요? 호호호.』
쑤내는 명랑하게 웃었다. 남국적인 도툼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곱게 드러났다.
『쑤내. 왜 이런 곳에 들어왔지?』
석호는 무심코 이렇게 건네다가 아차 했다. 얼마나 무의미한 질문인가?
『아이! 그런 것 물으심 싫어요.』
가볍게 받아넘기면서 쑤내는 가슴이 뜨끔했다.
<나의 행동이 저 따이한군에겐 수상하게 보이는 것일까?>
그러나 석호는 쑤내의 이러한 대꾸가 다행스러웠다.
『베트남은 너무 덮소. 하긴 열대지방이지만….』
그리하여 말머리를 슬쩍 딴 데로 돌렸다.
『네, 그래요? 따이한은 어떤데요?』
『일년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철로 나뉘어있고 최고 더워야 섭씨 三O도를 넘지 않소.』
『어쩜….』
『봄엔 꽃이 피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엔 열매가 익고, 겨울엔 눈이….』
『아주 이상적인 기후를 가진 나라군요.』
『허지만 나의 조국도 당신 나라와 같이 남북으로 갈려 있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파병됐다는 사실도….』
『단지 그런 이유만일까?』
석호는 공허하면서도 가슴이 뿌듯하게 벅찼다.
어쩌면 이곳에 징용와 전사했을 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글쎄요. 그뿐은 아니겠죠.』
순간 쑤내의 얼굴엔 야릇한 웃음기가 번져갔다.
『…역사상 따이한군이 외국에 파병된 것은 세번째죠? 원나라때 일본에 원정군을 보낸 것하고….』
<아니 그런걸….>
석호는 이 여자가 세련된 품과 같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가까이는 일본제국주의 통치때….』
『어떻게 아오?』
『호호호! 동양사에서 배웠어요.』
『학교를 다녔군요.』
『네. 중학까지 졸업했어요. 당신은…?』
『난…대학 二년생….』
『어머! 그러세요?』
쑤내는 길쑴한 인조 속눈썹을 반짝 치켜뜨며 놀랐다. 그리고 어쩐지 이지적이던 첫 인상을 재확인했다.
<이만한 상대라면….>
오빠가 기대하는 기밀을 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차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쑤내! 당신은….』
석호는 이 총명한 여자가 어째서 이런 시궁창으로 전락했는지 풀을 길이 없었다.
『…이곳으로부터 벗어나야겠오.』
『호호호! 그건 될 수 없는 일예요.』
쑤내는 그러나 가볍게 받아넘겼다.
『야! 석호야!』
이때 문밖에서 명수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제 왔나? 나간다.』
석호는 일어서서 작업모를 썼다.
『즐거운 시간이었오. 자! 적지나 않을른지….』
호주머니에서 집히는대로 몇 장의 피아스터를 꺼내주었다.
『노우! 댓가는 저 역시 당신과 같은 것으로 보상돼요. 이건….』
쑤내는 앞일을 위하여 도로 반환했다.
『이러면 다음에 또 못와요.』
석호는 억지로다시피 그녀에게 피아스터를 건네주고 또어를 열고 나왔다.
『그럼 꼭 놀러 오셔야 해요.』
쑤내는 마지못해 돈을 받았다. 그리고 문밖까지 따라나왔다.
『굳빠이!』
작별인사를 하는 쑤내는 <놀다 가세요>하던 때와는 석호에게 정반대로 보였다.
『이자슥 보통 솜씨가 아니고마!』
명수가 의외라는듯 석호를 다시 보았다.
『…어떻게 테크닉을 보였기에 쫓아 나오노?』
『그건 속단이야.』
『뭐라꼬?』
『얘기만 했어.』
『사내자슥이 솔직하레이!』
『솔직이 곡해되고 있을 뿐이야.』
『이자슥, 그럼….』
『허지만 본전이 아깝지않은 시간을 보냈다.』
『에이! 바보 자슥! 그리구두 무슨 본전이 아깝잖아?』
『넌 대체 어쨌는데….』
『임마! 내는 곱배기로 조졌다.』
『하하하…!』
『그래도 이 가시나가 또 잡고 늘어져서 아주 혼났잖나?』
그들이 막사로 돌아오자 바크샤는 소대원들로부터 외출보고를 받고 있었다.
멀뚱한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면서 문초하듯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래, 이 병신아! 딴 놈이 새치기 한 걸 목격하고도 버려두었어?』
주책인 삼분대장에게 구사리를 주던 바크샤는 그들을 힐끗 돌아보고 말을 계속 했다.
『…주월 한국군의 일대 수치다, 임마!』
『헷헷헷! 그대신 공짜로 먹은걸요.』
『하하하…!』
소대원들은 배꼽을 틀어쥐었다.
『에이! 얌체머리없는 자식…!』
바크샤는 그러나 웃지도 않고 석호와 명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자식들은 왜 멍청히 서 있기만 해?』
『그럼 어쩝니꺼?』
명수가 시침을 떼고 대꾸했다.
『임마! 나갔다 왔으면 보고를 해야할 것 아냐.』
『네, 헤헤헤!』
싱겁게 웃는 명수에게 바크샤가 빈정거렸다.
『재미 단단히 봤구나? 저절로 아가리가 벌어지는걸 보니….』
『그러믄요. 곱배기로 한걸요.』
하도 천연스럽게 대꾸해서 소대원들은 또 한번 폭소를 터뜨렸다.
『넌 뭘로 했니?』
『걘 갔다가 거냥 왔심더.』
『임마! 너는 저리 비켜! 네가 이자식 스피카냐?』
대답을 가로 맡고 나서는 명수에게 바크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맛이 어떻더니? 재리더냐? 시더냐?』
바크샤가 석호의 앞으로 바싹 다가들며 다구쳤다.
『숫총각이라 애전에 싸버리고 말았니?』
소대원들은 키들거리며 더러는 매트레스에 뒹굴었다.
『얘기만 하고 와서 그런건 모릅니다.』
석호는 점점 높아지는 자신의 맥박소리를 귀로 헤아리며 이를 억누르기에 안간힘을 썼다.
『너, 그말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옳지! 네가 나를 위해서 수절을 했구나? 그 충정 갸륵히 여겨 오늘밤에 내 개봉 시켜주마.』
『하하하!』
막사가 밀려날듯한 폭소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탕탕탕…!』
그때 초소쪽에서 콩을 볶는듯한 총성이 울려왔다.
순간 소대원들은 웃음을 지우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또 베트콩놈들이 기습해 온게 아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대장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숨이 차서 외쳤다.
『비상! O・五초내 완전무장하고 연병장에 집합하라!』
석호는 바크샤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들은 곧 VC수색작전에 투입되었다.
행상으로 가장한 삼인조 지뢰매설자가 보초에게 발각되어 두 명은 사살되고
한명은 총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는 것이다.
석호는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 VC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들은 부대에서 二㎞쯤 떨어진──도주한 VC가 잠입한 것으로 추측되는──정글을 뒤지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고무나무만의 정글이던 것이 깊숙히 진입했을 때는 수많은 관목과 덩굴손
그리고 독충과 뱀들이 우글거리는 습지였다.
『조심하레이!』
뒤따라 오던 명수가 주의를 했다.
『걱정마라.』
하다가 석호는 몽툭한 독사가 대가리를 곤두세우는 바람에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냐?』
명수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것….』
석호가 혀를 날름해 보이자
『히야!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놈이고마!』
명수는 잽싸게 돌멩이를 집어 풀섶에 던졌다. 그러나 독사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악!』
다음 순간 바로 앞의 관목속에서 혀를 깨무는 듯한 여자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응?』
둘이는 홧짝 놀라 똑같이 총을 겨누었다.
『쏘지 말아요!』
여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관목밑에서 가까스로 기어나왔다.
『아니…?』
석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쑤내예요. 한 시간 전에 당신과 만난….』
독사에 물린 상처를 움켜쥐고 쑤내는 괴로운듯 중얼거렸다.
석호는 무엇에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다만 멍할 따름이었다.
『너는 베트콩이었구나?』
명수가 총을 겨눈 채 외쳤다.
『이제 아셨으면 저를 쏘세요!』
체념과 고통으로 이즈러진 쑤내는 눈을 감고서, 그러나 똑똑한 액센트로 건네왔다.
『우짤꼬?』
의향을 물어오는 명수에게 석호는 조용히 대답했다.
『죽이는건 급하지 않아.』
『나에겐 아무런 정보도 없어요. 단지 오빠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요.』
눈을 감고있던 쑤내가 반짝 치켜뜨면서 석호의 말을 중동무이하고 끼어들었다.
『그 때문이 아니오.』
석호는 순수한 호의가 배반당한 모욕감을 느꼈다.
『…죽이고 살리는 건 법이 할 일이요. 그보다도….』
『제가 어떻게 그리 빨리 지뢰를 매설할 수 있었느냔 말이죠?
그건 당신이 나가자 곧 오빠로부터 무전연락이 와 택시로 당신을 앞질렀던 거예요. 이제 아시겠죠?』
의식적으로 빗나가는 쑤내에게서 석호는 엄청난 저항을 보았다.
『석호야! 니 뭣하노? 빨리 대원들에게 알리자!』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명수가 재촉했다.
『알리는 것은 급하지 않아! 가만히 있어줘.』
석호의 대꾸에 명수는 어처구니 없는듯 힐난해 왔다.
『니 우짤라고 그러노?』
『자아를 상실한 한 인간을 구출하는 거다.』
『뭐라꼬?』
『쑤내를 귀순시킨단 말이다.』
『값싼 휴메니티는 집어치라이. 이 여자는 어차피 죽는다. 관통상에 뱀까지 물렸잖나?』
『허지만 치료를 잘 하면 생명을 건질 수 있을 거다.』
그러면서 석호는 쑤내에게 등을 들이댔다.
『…빨리 업히시오. 당신의 생명은 위험하오.』
『나를 살려놓아도 정보는 없다니까요!』
쑤내는 완강히 뿌리쳤다.
『그 때문이 아니오!』
『그럼 저를 생포함으로써 훈장을 타기 위한…?』
『에잇…!』
쑤내의 뺨을 힘껏 갈기며 석호는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생명에의 본능까지 감추는 잔인한 여자…!』
그때 저만큼에서 바크샤가 덩굴손을 헤치고 나타나며 환성을 질렀다.
『잡았구나!』
『넷! 저….』
명수가 먼저 대답하며 석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이건 여자가 아니냐?』
『그렇십니더.』
『음! 누가 먼저 발견했니?』
바크샤는 훗딱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다급스레 물어왔다.
『똑같이 발견했지만 석호의 공이 큽니더.』
명수의 대꾸에 바크샤의 입은 크게 벌어졌다.
『역시 내 마누라가 최고다!』
그리고 석호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석호는 송충이라도 피하듯 움찔 물러섰다.
『…그런데 내 너희들에게 해 둘 말이 있다.』
바크샤가 갑자기 정색이 되며 위압적인 어조로 건네왔다.
『뭡니꺼?』
명수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는 너희들의 선임하사다. 그러니까 오늘의 전공은 우리 세 사람이 분배하는거다.』
석호는 심장이 터질듯한 분노를 안으로 삭이며 비꼬듯 대꾸했다.
『김칫국 먼저 마셔야 소용 없습니다. 이 여자는 귀순을 해왔으니까요.』
『뭐야?』
순간 바크샤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졌다.
『…정말인가?』
『그렇십니더.』
명수가 얼른 대답을 가로 맡고 나섰다.
『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베트콩년을 죽일 수밖에….』
『넷! 뭐라고요?』
석호는 바크샤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외쳤다.
『이 바보자식아! 그래야 우리가 일계급씩 특진되고….』
『그건 안됩니다!』
석호는 바크샤 M一六을 잡고 쓰러졌다.
『이새끼가 미쳤나?』
그러나 바크샤는 무자비하게 석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찧었다.
『으윽!』
석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찝찔한 핏물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임마! 너도 베트콩놈들처럼 장거리에서 총살을 당해야 알겠니?』
극도로 약이 오른 바크샤가 침을 칵 뱉으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쑤내에게 M一六을 겨누어댔다.
『안됩니다! 선임하사님…!』
외치기와 동시에 석호는 쑤내를 덮쳐버렸다.
『탕탕!』
『석호야!』
고막을 찢는 엄청난 금속성과 명수의 외침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었다.
『쑤내! 당신은 살아야 하오.』
석호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부르짖었다. 허나 이미 눈에 빛을 잃은 쑤내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진 쑤내의 모습에서 석호는 갑자기 헤렌누나를 느꼈다.
『헤렌누나…!』
석호는 그녀의 얼굴에 뺨을 댄 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은 몸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환각과 함께 어디선가 소란한 음향이 아득히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