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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28코스 역방향 제1부
신안군 관광안내소-증동리 구분포 해안-방축리 염산 해안-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검산마을
2022년 12월 14일
1-1. 구분포 분지의 아름다움과 방축해안에 퍼붓는 사랑의 그리움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신안군 관광안내소 옆에서 서해랑길 29코스를 역방향으로 마쳤다. 지도읍 감정리 점암선착장에서 새벽 4시 40분부터 어둠을 뚫고 감정리 해안과 들판을 가로질러 지도읍 읍내리 해안으로 넘어와 송도교와 사옥대교(지도대교)를 건너 새 아침을 맞았다. 아침의 흰 눈 덮인 물상들이 순결하게 빛나며 가슴에 흰 물결을 일으켰다. 흰 눈이 하얗게 덮인 지도읍 탄동리 염전과 들판을 가슴 벅차게 걸어 증도대교를 건너 29코스를 역방향으로 마치고 나니 가슴 끝이 시리다. 해안에 들이닥친 눈보라를 맞이한 환희, 어둠 속 들길을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야 했던 아쉬움, 황량하지만 하얗게 빛나는 들녘길을 걸을 때 겨울나그네가 된 방랑 감정, 이런 감각들이 뒤엉켜 가슴을 찌르는 탓일까. 텅 빔과 충만과 방황의 교차 감정일 것이다. 이제 밝은 아침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미지의 길은 오직 기쁨의 충만으로 가슴을 출렁일 것이다. 자, 출발하자.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신안군 관광안내소 옆에서 곧바로 서해랑길 28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28코스 역방향은 광암해안 북쪽으로 나가 구분포를 거쳐 돈대봉 자락길, 통사골, 염산들, 장성들, 방축해안, 신안 해저유물 발굴 해안, 만들마을, 검산마을, 오산마을, 원방축마을과 장성마을 입구, 상정봉, 증도면사무소 앞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증도 북쪽 해안을 돌아 서쪽으로 이어지는 탐방코스이다. 이 탐방길은 화려한 탐방길이 아니고 산과 바다와 섬을 조망하는 길이다.
광암해변을 돌아나가는 해안에는 갈대습지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증도대교가 섬과 섬의 관계를 다정한 이웃의 따스한 숨결로 맺어준다. 그 남쪽으로 사옥도가 북쪽으로 벋어가고, 광암해안을 돌아나가면 구분포 해안이 나온다. 구분포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아마도 방조제를 조성한 곳이 구분포라고 추정한다. 구분포에 방조제를 조성한 덕에 방조제 안쪽으로 갈대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더 안쪽으로 구분포 염전과 구분포들이 펼쳐져 있다. 구분포 해안 맞은편은 사옥도의 지도읍 당촌리 지역이며 그 뒤쪽 너머로 지도읍 점암선착장이 어림되는데 그 증거가 되는 것은 흰 주탑이 보이는 임자2대교일 것이다.
구분포 염전 서해수산을 돌아 구분포들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앞쪽에 돈대봉이 솟아 있다. 구분포들의 풍경이 멋진것은 돈대봉 산줄기가 북서쪽을 감싸안고 동쪽으로는 구분포 해안이 열려있는 분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산이 솟아 있고 들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바다가 열려 있으며, 해안은 아기자기하게 굽이돈다. 열린 바다 건너편에는 이웃 친구 사옥도 섬이 다정히 웃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 구분포 분지의 구분포들을 걷는다. 앞에 솟은 돈대봉과 굽이돌아가는 구분포 자락길이 알프스 산자락 풍경처럼 아름답다. 이 길에서 생의 한 순간이 절단되는 느낌을 받았다. 흰 눈에 함뿍 덮인 붉은 동백꽃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질식시킨다. 돈대봉 언덕에 올라서며 뒤돌아본 구분포들, 아침의 싱싱한 빛을 받는 염전과 들녘, 생의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된 듯 그 풍경은 숨을 멎게 한다.
증도면 증동리에서 돈대봉 자락길 언덕을 넘어 방축리로 넘어와 통사골을 거쳐 염산들로 내려갔다. 염산마을은, 산너메마을로 불리다가 '산수가 좋고 밭이 기름지다'는 뜻으로 청렴할 염(廉)자를 써서 염산(廉山), 이후에 마을의 동서남북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어 마치 발을 쳐 막아놓은 것 같은 형국이라 하여 발 '염(簾)'자를 써서 염산(簾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염산들과 산굽이를 돌아나간 장성들에는 두 개의 방조제가 조성되어 있다. 이들 방조제에 의해 드넓은 간척지가 염전과 농지로 조성되어 있으며 서해랑길은 방조제 안쪽 염산들과 장성들을 가로질러 해안길로 나가 해안을 굽이돈다.
증도 북쪽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인 듯 해안길은 북서쪽 증도 해저유물 발굴해역까지 굽이돌기를 자주한다. 굽이돌아가는 해안길에서 해송숲이 길게 조성된 해안이 활짝 열리는 곳에 이른다. 앞 바다에는 대섬, 호감섬, 도덕섬이 떠있고 해안 안쪽에는 마을이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증도면 방축리의 한 마을인 방축마을이다. 증도 북쪽 해안에서 가장 길게 열린 해안이 방축해안인 것 같으며, 그래서 방축마을에는 여러 펜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마을 쉼터정자에서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고 출발하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펄펄 눈이 내린다. 방축해안을 돌아 언덕에서 뒤돌아보니 눈은 더 퍼붓는다. 이 풍경 속으로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 구절이 퍼붓는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중에서) 저 눈이 그치듯이 내 사랑도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영원한 기다림의 자세로 남는다. 내 사랑은 아픈 고통의 그리움일지 모르지만 자연의 순환처럼 영원할 것이며 그 기다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방축해안의 눈발이 내 사랑의 그리움으로 퍼붓는다. 영원한 기다림의 자세, 그것이 사랑이다. 서해랑길을 그리움으로 걸어가듯 언제나 내 사랑 그대에게로 가고 있다.
1-2. 신안 보물선 '700년 전의 약속', 검생이의 달
방축해안 언덕길을 넘어 해안길을 굽이돌아 도덕섬 서쪽 언덕으로 올랐다. 맞은편에는 임자도의 대둔산이 솟아 있다. 이 해안 앞 바다가 신안 해저유물 발굴해역이라고 한다. 방축해안 이곳의 절벽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해안 절벽 풍경 같은 이국적 느낌이 들었다. 황톳빛 절벽의 리스본 해안 언덕에 자동차를 세운 인물이 증도 방축 해안 언덕에 오르고 있다는 환상에 젖는다. 이 젊은이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지만 결국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독재의 사슬 앞에 허물어졌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교사가 이상한 여인에게 홀려 그녀가 남긴 책을 돌려주기 위해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에 도착한다. 이 교사는 이 책의 주인공, 청춘의 삶을 불꽃같이 살다가 마친 그 젊은이의 삶을 만나고 되돌아온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불꽃의 삶을 만나게 하고 현재의 목적 없는 삶을 활기로 변화시킨 촉매제가 된다.
700년 전 이 절벽 해안 앞쪽 바다에서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무역선이 침몰하였고, 그로부터 700년이 지나서 증도의 한 어부가 그물에 걸려 올라온 청자화병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덕섬 앞 바다의 해저유물이 발굴되고 선체가 인양되었다. 700년 전 원나라 무역선은 그리운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무역품들과 함께 수장되었다. 무역선 사람들의 인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약속한 무역품들은 700년의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 700년 전의 제품을 볼 수 있게 하는데, 그들의 행적과 관련 사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을 추모한다. 그들의 추모비는 없다. 오직 해저유물의 중요성과 해저유물 발굴로 인한 한중일 문명교류사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을 들어, 해저유물을 발굴한 사람들의 업적을 칭송한 해저유물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서양 대항해시대를 개척한 사람들처럼, 동양 신안 앞바다를 무역선을 타고 한중일 무역업을 담당했던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비를 하나쯤 더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안군 증도면 현지인 김종훈( 2014년도 52세)씨가 신안 보물선 발굴 해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본인 소유의 소단도에 철근콘크리트 골조 2층 건물의 선박을 옛 중국 선박처럼 갈색을 칠해, 돛대 2개를 세워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이 배 이름을 신안 보물선 '700년 전의 약속'이라 하고, 1층은 쉼터와 카페, 음식점으로 꾸몄고, 2층 전시실에는 인양한 유물과 같은 크기로 만든 청자 화병과 백자 화병, 접시, 주전자 등 170점의 도자기를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들르지 못하고 그냥 통과하였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은 안방극장에도 불어닥쳤다. 1990년 KBS2TV에서 방영된 드라마 '검생이의 달'은 검생이마을(증도읍 방축리 검산마을)을 배경으로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온 청자 화병이 계기가 되어 검생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보물 소동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탐욕과 애증을 그렸다고 한다. 보물이 무엇일까? 물질적 풍요를 주는 것만이 보물이 아니다. 그 풍요를 제어하고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정신적 풍요가 진정한 보물이다. 혹 이 시대는 진정한 풍요는 안중에 없고 오직 엘도라도의 황금을 찾아 떠나는 탐욕, 해저 깊숙하게 숨어 있는 청자 보물만을 찾다가 허망하게 스러지는 탐욕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은 아닐지. 증도 서쪽 멀리 서해 바다를 떠가는 700년 전의 보물선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진다. 메멘토 모리,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2부로 이어짐.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52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42분
신안군 관광안내소 옆에 설치되어 있으며 안내도 오른쪽 기둥 위에 29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28코스 주요 지점으로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와 낙조전망대, 한반도해송숲전망대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증도로 왼쪽에 화장실, 신안군 관광안내소, 서해랑길 안내도, 중앙에 폐쇄된 증도매표소가 있다.
서해랑길 28코스 역방향은 오른쪽 증도 북쪽 구분포 방향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 26코스는 왼쪽 공암마을 방향으로 이어지고 28코스 역방향은 오른쪽 구분포 방향으로 진행한다.
지도증도로에서 북서쪽 구분포 방향으로 이어간다.
증도면 증동리 광암나루터 해안에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광안마루터 해안길을 따라구분포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 28코스는 오른쪽 끝 증도면 증동리 구분포 갈림목에서 구분포 방향 북서쪽으로 돌고 있다.
중앙 오른쪽 뒤에 태평염전, 증도대교 오른쪽 끝에 광암염전이 가늠된다.
중앙 뒤에 임자2대교 흰 주탑이 살짝 들어온다. 서해랑길은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구분포들로 이어진다.
잠시 해안 풍경을 살폈다. 멀리 맨 뒤쪽에 솟은 산봉이 있는 곳은 임자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중앙 뒤에 보이는 흰 주탑은 임자2대교 주탑일 것이라 가늠한다.
증도면 증동리 구분포 해안에 방조제에 의해 서해수산 염전과 구분포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의 돈대봉(해발 136.8m) 자락을 감아돌아 이어진다.
왼쪽 뒤에 서해수산 염전이 있다. 서해수산 뒤쪽 산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왔다. 앞에 동백꽃이 흰 눈에 덮여 있다.
왼쪽에 서해수산 염전, 중앙의 포장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올라왔다.
밀양 박씨 숙민공파 세장산碑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오른다.
앞의 섬은 지도읍 당촌리 사옥도 섬일 것이다.
신안 자전거길이라 적힌 돈대봉 자락길은 '염산2길'로 명명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고개가 증도면 증동리와 방축리의 경계가 되는 듯. 고개를 넘어 증도면 방축리 염산들로 내려간다.
건너편 섬은 지도읍 당촌리 사옥도일 것이다.
증도면 방축리로 넘어왔다. 아래에 염산들이 펼쳐져 있고 방조제 오른쪽 숲이 있는 곳을 통사골이라 이르는 듯.
오른쪽 통사골을 돌아 염산들로 내려가 왼쪽에 보이는 포장도로를 따라 염산들을 가로질러 건너편 방조제 끝으로 간다.
바로 앞 왼쪽의 산은 부남섬, 오른쪽 뒤 산봉은 임자도의 대둔산이라고 가늠한다.
간척농지 포장도로 염산2길을 따라 맞은편 방조제로 나간 뒤 중앙 오른쪽 산굽이를 돌아나간다.
오른쪽 돈대봉 왼쪽 자락길 언덕을 넘어 통사골재를 거쳐 왼쪽으로 이어왔다.
중앙 뒤의 산봉은 28코스 시작점이 있는 증도면사무소 위쪽 상정봉이고 바로 앞에 염산저수지가 있다.
"염산마을은 예전에 마을이 산 너머에 있다 하여 산너메라 부르다가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염산(廉山, 산수가 좋고 밭이 기름지다는 뜻)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마을의 동서남북 사방이 마치 발을 쳐 놓은 것처럼 산으로 막혀 있어 발을 쳐 막아놓은 것 같은 형국이라 하여 발 염(簾)자를 써서 염산(簾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증도면소재지 왕래를 위해 산을 넘어다녔던 산 너머에 위치한 염산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아침 해가 늦게 떠오르고, 오후에 빨리 지는 산중 같은 느낌의 슬로시티 증도 체험형 마을로 증도대교 개통 전 상정봉 아래 골짜기에 상수원을 조성하면서 긴 도로가 포장되어 한층 편리해졌으며, 친환경 간척지 쌀 재배지로 여름철 염산마을을 방문하면 왜가리와 백로 떼를 볼 수 있고, 민어, 농어, 병어, 꽃게, 실장어(시라시) 등 어선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으며, 다큐멘터리 "증도인생"에 출연하셨던 할머니 등 뻘낙지도 잘 잡는 마을입니다.
염산마을은 1638년(인조16)에 경주 최씨 최만석이 지도 대소에서 살다가 보다 좋은 터전을 찾아다니던 중 이 마을에 정착하여, 순흥 안씨를 맞아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 증도펜션&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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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방조제와 갈대습지 왼편의 포장도로 염산2길을 따라 건너편 방조제 끝으로 건너가 해안길을 이어간다.
오른쪽 뒤 돈대봉 아래 자락길을 걸어 왼쪽 뒤 통사골을 거쳐 염산방조제 오른쪽 아래 염산들 포장도로를 따라왔다.
중앙 뒤에 수도와 임자도를 잇는 임자1대교, 그 왼쪽 앞에 임자도의 안산, 중앙 오른쪽 앞 등대는 사옥도라고 가늠한다.
중앙 뒤에 임자1대교, 그 왼쪽 앞에 임자도의 안산, 중앙 오른쪽 등대는 지도읍 당촌리 사옥도일 것이라 가늠한다.
이 풍경을 조망하고 산굽이를 돌아 장성들 방조제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방조제를 따라가지 않고 방조제 안쪽 장성들을 돌아서 방조제와 재회한다.
장성들방조제 안쪽 장성들은 염전이었으나 이제는 왕새우양식장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 길을 따라 곧바로 고개를 넘어가면 장성마을에 이를 것이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장성들을 가로지른다.
신안 자전거길은 장성들을 빙 돌아서 방조제로 되돌아오지만 서해랑길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간척지가 염전으로 이용되었으나 이제는 왕새우양식장으로 바뀌고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끝 방조제로 나간다.
왼쪽 끝 산굽이를 돌아 장성들방조제로 나온 뒤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오른쪽 제방 뒤쪽으로 걸어왔다.
장성들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장성들을 빙 돌아서 다시 장성들방조제 왼쪽 끝으로 이어간다.
왼쪽 산굽이를 돌아나와 방조제를 따라오면 바로 이곳에 이르는데 서해랑길은 장성들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이곳에 왔다.
중앙 뒤에 임자1대교가 숨어 있다. 중앙 오른쪽에 흰 등대가 있는 곳은 지도읍 당촌리 사옥도일 것이다.
멀리 중앙 뒤 고개를 넘으면 장성마을과 상정봉 등산로 입구에 이를 것이다.
장성들방조제에서 서해랑길은 해안길을 굽이돌아 이어간다.
북쪽에 임자1대교 흰 주탑이 흐릿하게 조망된다.
방파제 공사일까? 아니면 선착장을 조성하는 공사일까? 맞은편에 임자도가 보인다.
증도 북쪽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굽이도는 해안 오른쪽 끝 뒤에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가 있다.
바다의 섬들은 오른쪽 앞부터 대섬, 호감섬, 도덕섬이며, 도덕섬 앞 해역에서 신안 해저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덕섬 왼쪽 증도 서북쪽 해안 언덕에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와 낙조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증도면 방축리 방축마을 해안에 해송숲이 조성되어 있고 쉼터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왼쪽에 해송숲이 길게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 언덕 위에 푸른솔 펜션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부터 도덕섬, 호감섬, 대섬이며, 도덕섬 왼쪽 해역에서 신안 해저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고 출발한다.
"방축마을은 마을에 큰 방죽이 있어 방죽끼미라 부르다가 이후에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섬이 많다고 하여 방축(防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증도면 5개 법정리의 하나인 방축리는 방축마을, 오산마을, 장성동, 검산, 염산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축리의 서·북쪽 바다는 역사적으로 임자도와 증도(나룻구지)를 이어주는 뱃길(30리)의 관문이었고, 정기 여객선이 드나들던 교통의 요충지로, 약 300~500여 척의 고깃배가 출입하고 정박하는 바다를 접해 목넹기(항월포) 파시가 활발하게 서던 곳으로 오늘날까지도 옛 흔적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지주식 김, 어장(고기잡이), 실장어(시라시), 낙지 등 해산물도 풍부한 마을입니다.
특히 해질 녘 이 마을을 통과해서 모실길 1코스인 해양관광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하트해변, 바다호수, 광활한 서해 수평선에 펼쳐지는 수많은 다도해와 아름다운 황금빛 낙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방축마을은 1698년(숙종24) 금성박씨 박태수가 충남 부여에서 살다가 가운이 기울자 집을 떠나 살 곳을 찾아다니던 중, 이곳에 정착하여 의령남씨의 딸을 맞아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 증도 펜션&민박
방축마을 쉼터정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때는 날이 좋았는데 출발하니 눈이 펄펄 내린다.
이곳에서 바로 앞 푸른솔 펜션 앞을 지나 구불구불 해안길을 돌아나간다.
해안길 언덕을 올라와서 푸른솔 펜션을 지나서 뒤돌아 보았다.
맞은편 산봉은 임자도의 대둔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앞 해역이 신안 해저유물 매장해역이다.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이 소단도에 재현되어 있고, 그 뒤에 대단도, 오른쪽 끝에 내갈도, 외갈도는 소나무에 가려있다.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 배가 소단도에 조성되어 있고, 그 뒤에 대단도, 오른쪽 끝에 외갈도, 그 왼쪽에 내갈도가 있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와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 입구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안 해저유물은 1975년 신안 섬마을 어부의 우연한 도자기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한국 최초의 수중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약 700년 전인 1323년 고려의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선박1척(약34m)과 무역품 2만 7천여 점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침몰선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무역선으로 지금은 '신안선'이라 불리고 있다. 이 같은 연유로 '700년 전의 약속'이라 명명하고 이곳에 인양된 선체 사진과 실려있던 도자기 재현품을 다수 전시하였다.
"신안군 증도면 현지인 김종훈(52세: 2014년도) 씨가 지난 2006년부터 신안 보물선 발굴 해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본인 소유의 섬(소단도: 900여 평의 무인도) 위에 선박 총 길이 34m, 너비 11m, 높이 8.4m, 무게 234t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골조 2층 건물의 외벽에는 나무를 붙이고, 배의 외부 색상은 옛 중국 선박처럼 갈색을 칠해, 돛대 2개를 세워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선박 건조에서부터 실내장식, 유물을 만드는데 들인 돈은 8억 5천여만 원이며, 또 주변 경관 사업으로 100년 이상 자란 울릉도 향나무와 대형 배롱나무, 누운 향나무, 돈나무 등 150점의 정원수를 심고, 연못 2곳을 조성하여 지난 2009년 7월 23일 개장한 트레져아일랜드(700년 전의 약속)는 바위섬 위 선상에서 해 질 녘 환상적인 낙조와 함께 차와 여유를 즐길 수 있다.
해변도로 보물섬전망대(해풍이 불어 시원한 곳) 아래서 소단도 보물선까지 이어주는 이색적인 길이 80m의 데크 교량 비용으로 1억 5천여 만원이 추가로 소요되었으며, 증도 현지인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고 외부 관람객들에게는 1인당 1,000원씩을 받는데 1층 음식점에서 차를 마시거나, 자연산 병어·민어·농어·광어 등 회·정식 이용 고객은 나가실 때 입장료를 되돌려 받는다."
-증도 펜션&민박
신안 해저유물 발굴해역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가 걸려 올라오면서 신안 해저유물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고, 증도라는 섬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11차에 걸친 발굴조사 및 인양 작업이 실시되어 도자기류 등 유물과 침몰한 선체가 인양되었으며, 발굴 해역은 1981년 6월 16일 사적 274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걸려 나온 도자기를 통해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중국 원나라 무역선의 실체가 알려졌다. 중국의 고급 도자기와 금속공예품 등이 무더기로 인양됐기 때문이다. 이듬해부터 198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벌여 도자기, 금속제품, 석제품, 약품, 잡화 등의 유물 2만 2000여 점과 동전 약 8만 개(28t)을 찾아냈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효시가 된 '보물선 신안선'의 발굴이었다.
침몰된 선박은 최대 길이 34m, 너비 11m의 초대형 무역선이었다. 중국 항저우를 출발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 연대는 도자기 양식, 동전, 나무 조각에 적은 문서인 목간(木簡) 등으로 보아 1331~1350년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신안 해저유물은 14세기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의 도자기 연구를 비롯해 당시 한·중·일 3국의 교역사 및 선박 연구에 새로운 자료가 됐다.
이곳에서 서북방 2750m 지점(동경 126도 5분 6초, 북위 35도 1분 15초) 바다 밑에서 중국 원나라 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굴인양되었다. 이 해저발굴은 1976년 1월 어부가 그물에 걸려나온 도자기를 신고함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발굴단을 조직하여 해군의 심해잠수사가 유물을 인양하였다. 발굴 기간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개 년간 계속되었다.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류 28톤 18kg, 자단목 1017개, 기타 574점과 침몰한 선체였다. 이 발굴은 세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여 한국, 중국, 일봉에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성과는 중국 도자사의 펴년을 재정리하게 하고 한국, 중국, 일본의 교역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고대 무역선의 실체를 알게 되어 이는 동양문화사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으로 남았다. 수백 년 해저에 잠든 문화사의 보고를 알려준 어부의 갸륵한 마음과 파도와 해풍에 시달리면서 발굴에 참여한 조사 요원들과 23m가 넘는 캄캄한 심해의 급한 해류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유물 인양에 참여한 해군 심해잠수사들의 그 정성과 노고를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세계 해저발굴사에 빛는 신안 해저의 그 자리를 길이 잊지 않기 위하여 빗돌에 새겨 그날의 일을 오래도록 전하게 한다.
섬과 섬을 다니는 호핑투어, 그중 증도 호핑투어 관광지와 스탬프 찍는 곳을 소개했다.
1975년 8월에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의 그물에 걸려 수점의 중국 도자기가 인양된 것이 계기가 되어, 700여 년 전 중국의 무역선이 발견되어,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 동안 도자기 20,661점, 주화 28톤 등을 인양, 국가사적 274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1975년 8월 증도 해역에서 어부의 그물에 청자화병 등 6점이 올라온 것을 시초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22,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장소로서 이를 알리기 위해 청자화병 모양의 해상 부표를 설치하여 발굴기념비와 함께 역사의 현장을 기념하는 장소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치했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 해역임을 알리는 청자화병 해상부표가 떠있다. 건너편에 솟은 산봉은 임자도의 대둔산일 것이다.
오른쪽의 산은 임자도의 대둔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전망대에서 서북쪽 중국 상해 방향을 왼쪽으로 조망한다. 중앙의 재원도, 맨 왼쪽에 갈도 등 여러섬이 조망된다.
오른쪽 끝부터 외갈도, 내갈도, 대단도가 확인된다.
신안 보물선 '700年前 전의 약속'이 있는 소단도, 그 뒤에 대단도, 오른쪽에 내갈도, 그 오른쪽에 외갈도가 살짝 보인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와 전망대에서 발굴해역을 살피고 입구로 되돌아왔다.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이 있는 소단도, 그 뒤에 대단도, 오른쪽에 내갈도와 외갈도가 모두 보인다.
"1층은 쉼터와 카페, 음식점으로 고급스럽게 꾸며, 증도 산 친환경 특산물을 메뉴로 하여 만들 앞바다(고기떼가 가득 찬 곳)에서 계절별로 잡히는 다양한 생선회를 맛볼 수 있고, 2층 전시실에는 강진 청자 도예가에게 의뢰하여 주변 바다에서 인양한 유물과 같은 크기로 정교하게 만든 청자 화병과 백자 화병, 접시, 주전자 등 170점의 도자기를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증도 사람들은 이곳 만들 앞바다의 광활한 서해 수평선에 걸쳐 떨어지는 환상적인 낙조를 바라보면서 바깥세상을 동경하게 되고 어려서부터 큰 꿈을 품고 자라게 된다. 특히 소단도에 설치된 트레져아일랜드(보물선) 2층 배 앞 갑판에 서서 온몸으로 체감하는 서해 특유의 바닷바람은 건강에도 좋고 수평선 섬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와 노을이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명소이다.
주변 자연 경관으로 썰물 때 드러나는 신비의 바닷길(대단도와 소단도 사이), 독살, 갯바위, 수평선, 섬, 낙조 등이 아름다운 곳이며, 서북 방향에는 신안군 임자도가 인접해 있고, 도자기를 건져 올렸던 해역은 1981년 6월 6일 국가 사적 제274호로 지정된 이후 1990년도에는 김성환·하희라 주연의 KBS TV 미니시리즈 검생이의 달이 방송되면서 외부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 발견 당시 신안선 선박 제원 : 길이 28.4m, 너비(폭) 11m, 깊이 3.6m
※ 신비의 바닷길 : 소단도와 대단도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썰물 때 갯벌 위를 통과(배를 타기 위해서 배가 있는 바다까지 또는 섬과 섬 그리고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노두와는 다른 형태의 길로 거친 파도에 의해서 섬 뒤로 크고 작은 돌이 떠밀려와 쌓여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다.
※ 해할현상 :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바다에서 돌멩이가 떠밀려와서 섬 뒤로 쌓이게 되며, 조석간만의 차에 의해 썰물 때는 주위보다 높은 간석지가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있는데 이때 높고 길게 형성된 해저지형이 노두(돌 징검다리)와 같이 물 위로 나타나면서 마치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해할현상이라 하며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한다."
-증도 펜션&민박
예전에 이 앞 바다에 고기떼가 가득찼다 해서 이곳을 '만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만들 앞 보물섬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검산항과 검산마을이 나온다. 오른쪽 섬은 명덕섬이며 그 왼쪽에 검산항이 있다.
바닷가 마을집 마당에서 생선을 말리고 있다. 무슨 생선일까? 명덕섬과 그 뒤쪽에 우전해변과 엘도라도 리조트가 가늠된다.
이 지역에서는 말린 생선을 '건정'이라 이른다. 이지역의 특산품인 민어 건정을 말리고 있다.
여러 생선을 줄에 걸어 말리는 모습이 정겹다. 뒤쪽에 대단도 섬이 보인다.
보물섬길의 안나하우스 펜션 앞을 거쳐 언덕을 넘어 검산마을로 내려간다.
소단도에 재현된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은 신안 해저유물 발굴기념비 언덕과 해상보도교로 이어져 있다.
왼쪽에 대단도, 그 오른쪽에 신안 보물선 '700年前의 약속'이 재현된 소단도가 나란히 있다.
왼쪽 섬이 명덕섬, 증도 서쪽을 거쳐 일본으로 가려던 원나라 무역선이 증도 서북쪽 도덕섬 앞에서 700년전에 침몰했다.
보물섬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검산마을로 내려간다. 오른쪽은 검산항, 건너편 오른쪽 섬은 세목섬이다.
제2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