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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후기 사람으로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지냈다. 그는 신라 대관 성저(成貯)의 후손이라고 한다. 성인보는 정월 초에 송경(松京)의 하례 모임 참석 중 병사하였다고 한다. 문하시중인 아들 성송국(成松國)이 시신을 업고 창녕으로 돌아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현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大地面) 모산리(牟山里) 맥산(麥山)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가계는 창녕의 호족으로 대대로 번성하여 창녕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물계서원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성삼문 등 창녕 성씨 조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시조 성인보의 증손 성여완은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조선 건국 후 이태조가 내린 벼슬을 거부하고 경기도 포천에 은거하였다. 성여완의 아들은 조선 전기의 재상 성석린이고, 성석린의 형제인 성석용은 사육신 성삼문 일가와 생육신 성담년, 성담수의 증조부가 된다. 성석린의 다른 형제였던 성석인은 조선 중기에 대사헌을 지낸 성세순의 고조부이며, 성수침, 성수종 형제 및 성운의 5대조, 우계 성혼의 6대조가 된다.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증손 성공필(成公弼), 성한필(成漢弼) 형제의 대에 두 계통으로 갈라졌고, 인보의 6세손 성기(成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한 13개의 파가 분파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 생육신 성담년과 성담수,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해동 18현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우계 성혼 등이 있다.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주석[편집]
바깥 고리[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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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를 소개 올리고자 한다.
(시조 고려중윤공 성 인자 보자 지묘)
나는 창녕성씨 "시조공 성인보" 할아버지의 26세손으로 경남 창녕군 대지면 에서 태어나 지금은 대구에서
거주하고 있다
평상시에도 등산과 사진으로 취미활동과 여가를 즐기면서 그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 간직 하고자 이렇게 블로그를
만들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추억거리를 담아보고 있다.
종교는 불교를 믿고 있으며. 그래서 전국의 유명사찰을 많이 탐방 하기도 한다.
시조공 묘사 지내기 전에 모습
시조공 묘사 지내는 모습
매년 음력으로 10월 초하루가 되면 전국적으로 많은 자손들이 약 400명정도 참석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진다.
많은 자손들이 묘사를 지내는 모습
그러면 지금부터 아래로 나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먼저 나의 시조 및 가문의 내력 부터 소개 올리도록 한다.
창녕성씨 (昌寧成氏) 시조 | |||||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고려때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명종때 사람으로 고종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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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정월초 인보는 송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병사하자 문하시중으로 있던 그의 아들(2世)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엎고 울며 천리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청산원(고암면 어은에 위치한 주막)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보니 지금의 묘자리 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그후 창녕성씨는 시조의 손자(3世) 공필(公弼), 한필(漢弼)대에서 크게 두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이 우왕때 정당문학으로 창녕부원근에 봉해졌으나, 1392년 충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의 왕방산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원로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왕씨의 신하이니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며 절의를 지켰다. 대제학 석용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한편 창산부원군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말에 형부총랑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영이 있는 파주 문두리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태종때 대사헌과 우정승을 거쳐 형,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의 후손으로는 그의 아들 암과 억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중 장남 염조(念祖)는 이조정랑, 도승지, 경창부윤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 우찬성, 영중추원사를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후 우의정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 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염조의 조카 준(俊)은 연산군때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영, 우의정 이극균과 함께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하니 결국 그는 갑자사화때 직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 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정랑에 이르었으나 아버지가 화를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외 선조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창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 : 찬의 아들)이 뛰어 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의 거목으로 문하에서 조헌, 이귀, 정엽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남한에 총 38,882가구 163,5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조사> 집성촌(集姓村) :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경북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 경북 상주군 모서면 삼포리, 지산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석리, 창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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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묘소 찾아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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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묘소 → 창녕 I.C 에서 내려와 첫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 하면, 500M쯤에 사거리가 나옴. 다시 좌회전 하여 500M쯤에 점멸신호등에서 한번더 좌회전. 100M지점 신호등에서 직진하여 1Km쯤 가면 대지면사무소가 나옴. 면사무소 바로 뒷산에 시조 묘소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맥산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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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중의 산소
김열부와 성효자의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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