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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4~7(321) 날마다 기뻐하는 삶 2022.11.6
얼마 전에 ‘기쁨’에 대해 적었던 짧은 글 하나를 읽다가 좋은 내용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합니다. 글을 적은 분은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느끼고 있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깃발과 같다. 성에 깃발이 꽂혀 있다는 것은 그 성에 왕이 머물러 있다는 증거이다. 중세시대에 왕이 머무는 성에는 왕만이 가지는 기호나 표식으로 만든 깃발을 성의 가장 높은 종탑에 걸어 두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종탑에 우뚝 솟아 걸려 있는 깃발만으로도 왕이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자리를 비우고 다른 성으로 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만왕의 왕이신 살아계신 주님이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성도는 말과 행동과 그리고 얼굴에서 기쁨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라면, 얼굴에서 기쁨의 모습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짧은 이 글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드렸습니다만, 여러분들의 판단은 어떠한지요? 아마도 제가 느끼는 감정과 판단과 동일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얼굴에 웃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얼굴과 행동에서 항상 기쁨이 넘쳐 나야 합니다.
앞 뒤 옆에 있는 분들의 표정을 보면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활짝 펴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면 “보기에 참 좋습니다” 고 인사하시고,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얼굴 좀 펴시고 주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미국 목사님이 한국 목사님에게 질문 하나를 했습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습니까? 교회 오기 전까지는 바깥에서 명랑하게 얘기하고 웃다가도, 교회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왜 갑자기 어둡고 우울한 표정으로 보이는 것인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얼굴 표정이 어둡고 무거운 것이겠지요” 한국 목사님이 이렇게 답변한 것은, 마땅한 답변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둘러대는 임기응변식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미국목사님은 크게 웃으면서“주님의 고난은 생각하였지만, 고난당하신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잊어 버렸나 봅니다”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말에 한국 목사님이 굉장히 큰 충격을 받고 많은 것을 깊게 생각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밝은 미소와 웃음을 가지다가 막상 교회당 안에서는 매우 근엄한 모습으로 얼굴에 웃음과 기쁨을 없애 버리는 것이 다반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모습입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간직하고, 그리고 이 기쁨을 누리면서 삶에 적용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생활입니다.
본문 4절에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기뻐하라’는 말만 하여도 말의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는 내용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에는 다른 어떤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아주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설명해야만 이해가 되는 말이 아닙니다. ‘기뻐하세요. 기쁨을 누리세요.’라는 말만으로도 그 뜻과 내용이 다 전달되는 아주 쉬운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만 사용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라” 고 말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바울은 거듭 강조하는 의미를 담아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이 왜 이렇게 아주 쉬운 내용인 ‘기뻐하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기쁨이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이 되어야 하며, 기쁨은 성도가 생활하는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면,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11월의 모든 시간 시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들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생활하십시오. 힘들고 어렵고 짜증이 나는 시간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기쁨으로 너끈하게 극복하고 이기시는 11월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참된 기쁨은 주님 안에 거할 때 나타납니다.
남아메리카 과테말라 오지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던 지미 톨레(J. Tolle, 1949~2007)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과테말라 원주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절망과 낙담에 빠져 있을 때, 선교후원을 하던 성도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선교사님은 포도나무 가지이지, 포도나무 자체가 아니에요. 가지가 할 일은 그냥 나무에 붙어 있는 것에요.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일 때 절로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그러니 선교사님은 염려하지 말고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교의 결실을 보여 주실 거에요”
마치 자신이 매우 힘들어하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 격려 편지를 보낸 것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겉봉투를 보니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문제가 해결 된다’는 간단한 말에 톨레 선교사님은 힘을 다시금 얻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놀라운 사역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미국으로 귀국한 후, 사역보고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사역의 결과를 간절히 갈망했지만, 도무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고, 나난 그 편지를 통해서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의 사역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라고 간증하였습니다.
4절 다시 보십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는 말씀은 기쁨의 근원과 출발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즉 “주 안에서 기뻐하라” 는 것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라” 는 뜻과 동일한 말씀이 됩니다.
고로 이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누리게 되는 신앙의 기쁨입니다. 아울러 주 안에서 얻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며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준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을 누리는 결과는 같다 할지라도, 기쁨의 출발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다 누리는 기쁨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쇼핑중독증>이란 말을 들어 보셨죠. 필요도 없는 물건을 마구마구 사들입니다. 사용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하니까 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물건을 사는 것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통장에 마이너스가 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지만, 쇼핑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분은 정신 치료를 해야 합니다.
쇼핑중독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어느 사이에 만연한 마약이나 약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약이나 약물, 그리고 술 등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면, 결국은 본인 인생도 망치고 가정도 다 망가뜨리는 결과는 맛보게 됩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하다가 150여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 살기 좋은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왜 그리 좁은 이태원 골목길로 수 만명의 젊은이들이 몰린 것인가요?
쌓여진 스트레스를 풀려고 모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이런저런 특이한 분장을 하고 놀고 즐기기 위해 모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남자를 만나고, 그리고 여자를 만나는 이성교제 즐기고 엔조이하기 위해서 모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태원이라는 곳은 대한민국 안에서 가장 술과 섹스와 마약이 성행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타락의 자리에 즐거움과 희락과 엔조이를 위해 모였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20대와 30대 젊은이들 모두가 토요일 저녁 이태원 골목에서 열리는 할로윈 축제의 광란 속에 빠져든 것이 아닙니다.
더 짜릿하고, 더 흥분되는 것을 찾고자, 그리고 더 많은 즐거움과 즐기는 엔조이를 생각하였던 젊은이들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태원 골목 목마다 있는 클럽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누군가가 흥에 넘쳐서 안 그래도 미끄러운 그 골목 바닥에 술을 뿌립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에 넘쳐서 등 떠 밀려 밀려다닐 그 때에, 이런 큰 사단이 벌어지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흥을 주체하지 못한 일부의 사람들이 경사길에 몰려 있었던 무리들을 뒤에서 밀게 됨으로 이런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과 시작이 어디서부터인가요?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시작되는가요? 저는 모쪼록 바라건대, 바울의 고백처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의 기준을 세우시길 축원 드립니다. 술과 마약과 도박과 섹스, 쇼핑과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만들어지는 기쁨과 즐거움은 그 결말이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은 술 한 잔의 기쁨으로 만족하였다면, 내일은 술 두 잔의 양이 채워져야만 어제 내가 느꼈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말하는 이 절제하지 못하는 행동이 결국은 인생을 파멸시키는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11월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2년의 한 해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게 되는 11월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주안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 때문에 만들어지는 기쁨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참된 기쁨은 기도와 간구로 이어지게 됩니다.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절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가져야 되는 두 가지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는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이 조건적으로 걸려 있는 ‘아무것도’라는 말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anything)’도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는 모든 것입니다. 나와 연관되어져 있는 돈이나 물질이나, 건강이나, 가정이나, 자식이나 모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염려하지 말고 무사태평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두 손 놓고 먼 산 불구경 하듯이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책임한 부모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굶고 있는데 자식을 내팽개치고, 본인들 놀고 즐기는 것에 매달리는 아주 못된 부모들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도 본인들은 아무런 염려가 되지 않는다는 못된 심보입니다. 이런 무관심에 기인한 염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두 손을 놓고 방치하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태산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염려하지 아니할 수 있는 까닭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내 코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내 모든 염려와 걱정을 다 해소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려할 일과 상황이 발생하면, 염려할 일이 생긴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염려거리가 생겼다고 식음을 전폐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있는 염려거리는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제목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염려와 불안에 사로잡히다 보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염려로 인해 마음이 나누어지고 혼란스러워져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함으로 내 염려거리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면서 외로움으로 적적하였던 한 여인이 말상대가 필요한 차에 애완용 동물가게에서 말 잘하고 똑똑한 앵무새 한 마리를 구입하게 됩니다. 가게 주인은 ‘매우 똑똑한 앵무새라서 다양한 말도 구사하기 때문에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 말하면서 적극 추천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앵무새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게로 전화 하니 “이상하네요. 그렇다면 앵무새가 <거울>을 좋아하니 새장 안에 거울을 넣어주세요. 자기 얼굴을 보고 행복해진 앵무새가 곧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장 안에 거울을 달아주어도 계속 반응이 없습니다. “앵무새가 운동을 좋아하니까 새장 안에 <사다리나 그네>를 넣어 주세요”. 사다리에 몇 번 오르락내리락 내리고 그네를 몇 번 타던 앵무새가 그냥 죽어 버렸습니다.
너무 화가 난 부인은 어이가 없어 가게를 찾아가 크게 항의를 합니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거울과 사다리, 그네를 만들어 주었는데 말 한 마디도 안하고 죽어버렸으니 책임지라”
가게 주인은 “정말 한 마디도 안 했습니까?” 부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한마디는 했다고 합니다. 앵무새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밥 줘”라는 간단한 말이었습니다. 부인은 앵무새가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염려에 사로잡혀 가장 중요한 먹이 주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시사 하는 바가 큰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눈앞에 있는 앵무새만 보면서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앵무새의 먹이를 주는 것은 잊어 버립니다.
누구나 다 이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염려하지 말고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에게 드린 결과가 어떤 것일까요?
7절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내 모든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결론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샬롬, 평화)가 나의 모든 어지러운 마음을 잘 정리하고, 내가 가진 모든 염려와 걱정거리를 다 날려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내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