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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3~15(253) 행실이 아름다운 성도 2023. 10. 15.
삶으로 복음을 살아낸 소녀, 18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과 풍족한 생활, 보장된 미래를 모두 내려놓고 아프리카 우간다로 날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케이티 데이비스 (Katie Davis)의 삶을 담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Kisses from Katie)?’라는 책 내용입니다.
2006년 12월 어느 날 미국에서 우간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 10대 소녀와 엄마로 보이는 두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장시간 비행을 합니다. 케이티 데이비스라는 딸은 우간다에 있는 고아들의 쉼터에서 3주간 봉사를 하러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엄마는 미성년자인 딸이 봉사를 하려면 성인과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고아를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고아원에서 보모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간다로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줄로 알았는데, 난데없이 홀로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하니 가족 전체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케이티가 계속 졸라대자 3개월만 하는 조건으로 어머니가 미성년자 보호자 입장으로 따라 나섭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가 이어지던 어느 날, 다섯 살배기 스코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고아 여자 아이가 케이티가 머무는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옵니다. 쪼그만 아이는 그윽한 눈빛으로 십여 분 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케이티를 올려다 봅니다. 그리고는 겨우 들릴만 한 작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책 제목이 만들어진 배경입니다. 그렇게 해서 18살 십대 여학생이 모두 14명의 딸을 둔 엄마가 된 것입니다. 케이티라는 이름이 있었지만,‘엄마’라는 호칭은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 되게 됩니다.
그녀는 14명의 아이들을 딸로 입양하여 키우는 동시에 ‘아마지마’(우간다어-그리스도의 진리)라는 비영리단체를 세워 빈민과 아이들, 병자들을 돌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삶으로 보여 주는 것보다 강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유복하고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기에 미국에 있었으면, 좋은 집, 아버지가 사준 스포츠카에,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았을 케이티였습니다. 하지만 도적질과 강도, 살인, 강간이 남발하는 우간다 거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가르치는 일에 몰입합니다. 그러면서 미국에 살던 때보다 훨씬 더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케이티는 지인들과 후원회를 조직하여,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가난하여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을 합니다. 한 소녀의 헌신이 우간다 국민들에게 큰 소망과 도움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실천장이 됩니다.
케이티는 고백하기를, ‘우간다에서 고아들을 돌보기로 마음먹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입증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 하나하나는 영롱한 진주와 같다고 말을 합니다. 비록 로마서는 16장으로 기록된 그리 길지 않고 짧은 말씀이지만,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요긴하고 귀중한 진주구슬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진주목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서가 언제 기록되었느냐 하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이후로 보고 있으며, 그 시기는 주후 57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후 1세기 경은 로마가 가장 왕성하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그 세력을 넓히고 있던 시기입니다. 로마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말은 모라 황제의 통치와 영향력이 최고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황제는 태양신으로 숭배를 받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단순하게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태양이 인간의 몸을 빌어 입고 이 땅에 내려와 통치를 한다는 사상이 지배되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종교는 황제를 태양으로 믿고 따라가던 태양신을 숭배하던 신앙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으며 따라가는 기독교인들은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태양신인 로마 황제가 엄연히 살아 존재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하고, 커다란 박해와 압박을 가져오는 만드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정부는 태양신인 황제숭배를 응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이에 항상 기독교 박해 때마다 등장하는 하나의 불문율 공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황제를 믿고 따르면 살려주지만, 황제를 불신하고 예수님을 선택하면 죽는다’는 공식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13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두고 ‘아름답도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아름답도다 라는 단어의 원어(호스 호라이오이)인데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의미를 가진 감탄사입니다. 바울은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모진 핍박을 받았지만,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자들인가?’라는 강조의 말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행실이 거룩한 성도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 주일 설교는 본문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행실이 아름다운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행실이 아름다운 성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그리스도인울 의미할까요?
1. 주님을 부르는 성도가 행실이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의 ‘부르는 자’는 “공적으로 고백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하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호출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하게 목소리를 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공적인 모습으로 호소하고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말을 두고 로마서 강해로 유명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예수님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대상으로 예배하는 태도”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그냥 입술로만‘주여 주여’하는 것과 구별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의 이름을 합당하게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공적으로 호소하며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짐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부르는 간교한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고백할 때에는 자신의 의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심이 있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화면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을 믿고,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며, 그분만이 능히 나를 죄에서 건져주실 분임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습니다.’그러므로 간절한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실이 아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최절정에 달하던 1944년, 연합군은 유럽에서 독일군의 기세를 꺽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커다란 군사작전을 하나 계획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 세계 전쟁사에 그 획을 긋고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1944년 6월 6일에 독일의 전선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프랑스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노르망디 해안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군사작전은 너무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해변은 험한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해안가에는 철벽 방어진을 자랑하는 독일군들의 포대가 즐비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상륙 D-day로 잡은 6월 6일 전 날은 폭우와 안개로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연합군 일부 지도자들은 작전의 성공을 위하여 뒤로 미루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 때에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등은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함에도 대통령 집무실을 떠나지 않고 17시간 동안 머물면서 기도하였다는 백악관 보고서까지 있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우ㅠ럽 전체를 장작했던 독일군은 일거에 허물어지게 되는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의 기세를 몰아 베를린으로 진격한 연합군은 히틀러를 몰아내고 2차세계 대전을 종지부 찍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성도, 하나님의 이름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성도에게 하나님 구언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성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 번 더 큰 목소리로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고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장차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시는 재림주’이심을 믿는 믿음은 절대 불변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활동하고 존재하였던 모든 이단들은 이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살짝살짝 바꾸어서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세상에서 아무도 몰라주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도, 제 아무리 영웅호걸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김목사가 던지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적혀 있는 예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성도입니다.
대한제국 시대 경기도 이천 의병장 구연영(具然英 1864~190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경기도 광주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일본으로 나라가 넘어가자 의병을 일으켜 싸웁니다. 그러나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구연영은 방법을 바꾸기 위하여 경성의 상동교회로 찾아갑니다. 그리곤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례 받고 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서양선교사들의 힘을 빌어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 받으려면 교회에 나와야 하며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야 된다 고 말합니다.
이에 구연영은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성경을 팔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성경을 파는 매서인만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꾸준하게 활동도 병행하게 됩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는 구연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또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교육운동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종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단순하게 일제에 항거하면서 독립만을 외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때에 대부분의 독립선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을 세상에 모범으로 내세우는 분들이었습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모습으로 행동 속에서 실천하는 믿음을 보였던 분들입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의 일치, 즉 언행일치(言行一致)있었습니다. 이런 언행일치의 믿음의 행동이 결국은 ‘신앙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뜻을 가진 “신행일치(信行一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15절 보세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헌신하고 내가 낮아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교회 안에서 순종하면서 봉사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죄악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듯이 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들이 될 것입니다.
애플 컴퓨터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살아 생전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회사 성장이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때, 이 문제를 풀어 나갈 방도를 백방으로 구합니다. 그러다가 당시 펩시콜라 사장으로 있었던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찾아 갑니다. 스컬리는 38세에 펩시콜라의 사장이 된 사람으로, 펩시 세대를 공략하는 광고 전략으로 코카 콜라를 부동의 1위 자리에서 추락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너무나 탐이 난 인재라서 스티브 잡스는 막대한 보수를 제안하고 설득해도 존 스컬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44세로 펩시콜라 사장이었던 스컬리에게 승부수로 도전적인 말을 던집니다. 이 말은 스트잡스의 명언 중에 후대까지 두고두고 화자되는 말입니다. “당신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여생을 허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지시겠습니까?”
이 말이 그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 이후 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의 동업자가 됍니다.
그리곤 애플의 제 2대 최고경영자가 되어 애플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는 공헌을 하게 됩니다. ‘설탕물을 판면서 남은 여생을 허비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겠는가’이 말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인생의 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방식으로 그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자가 아름다운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10월의 모든 시간들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아름다운 행실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