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17:1~15
* 나의 사도행전 #27
목사님 작년에 환갑을 맞을 때 '내 인생 여정 뒤에 무엇이 남을까?'라는 질문이 저절로 들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사도, 그리고 지난 주 특별새벽기도를 통해 은혜를 나누었던 '스쿠루테이프의 편지'의 저자 C/S 루이스, 세계적 건축가인 스페인의 가우디 등의 말년은 화려하지 못했고 오히려 초라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재평가 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도들의 삶과 글은 성경이 되었고 C/S 루이스는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고 그의 저서는 스테디 셀러이다. 건축가 가우드의 파밀리아 성당은 매일 수 천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어 있다. 초라한 말년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자연스럽게 소박하고 평범하며, 심지어는 초라해 보이는 삶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소박한 삶에서 눈부신 열매가 나온다. 예수님의 삶의 끝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것처럼.
바울과 실라가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 선교를 마치고 데살로니가로 가게 된다. 바울은 회당장의 부탁으로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강론'을 하게 된다. 강론은 일방적 설교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형식이다. 강론을 통해 바울은 구약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로 풀어낸다. 그런데 그것은 구약을 신봉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어색한 것일 뿐만 아니라 충격적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을 주장하거나 교육, 강의 등을 할 때 대상자의 마음에 들게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만 그보다 진리와 진실을 제대로 전하려는 마음의 동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과정에 집중할 수 있기도 하지만, 즐겁고 궁극적 열매도 좋다. 물론 대상자가 최대한 잘 듣게 하려는 노력을 병행하면서 말이다. 바울이 그렇게 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강론은 유대교 신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어떤 풀리지 않는 족쇄를 풀어주는 작용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된 세상은 복음의 확장을 가만 두지 않는다. 강론에 대한 반대세력, 당시 기득권자의 폭력행사로 바울은 종적을 감춘다. 당시 기득권자들은 복음을 따르지 않는 종교인들이다. '복음과 종교' 같은 것 같지만 너무 다르다. 종교는 '하나님이 옳은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종교는 '하나님이 옳다고 내가 판단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복음과 종교가 충돌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매번 세상적 힘을 가진 종교가 이긴다. 폭력을 통해서 압제한다. 그들이 압제하는 이유는 복음이 그들이 가진 세속적 추구를 혼란, 방해하기 때문이다. 진짜는 가짜를 불안케 하는 법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초라하고 힘 없는 복음 추구의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열과 성의, 목숨을 다해 복음을 전하던 곳에서 초라한 결말로 쫓겨난다 해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탄자니아의 마라톤 선수 아쿠와리라는 선수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참가했다. 입상 가능성이 높은 우수한 선수였지만 경기 도중 부상으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승부에 관계 없이 끝까지 뛰어서 가장 마지막으로 결승점에 도착했다. 계속 달리겠다는 의지가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가 저를 5천 마일 떨어진 이곳까지 보낸준 것은 출발선에 서라는 것이 아닌,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끝까지 가보자!' 바울과 실라는는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나 베뢰아로 간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은 탄압도 없었고 사람들이 매우 관대했다(more noble). 팀켈러 목사님의 저서 중에 'Making sense of God'라는 것이 있다. 이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하나님을 통해서 인생과 세상, 우주를 이해하는 것. 하나님의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떤 논리보다 그것들을 잘 이해하게 해 준다. 성령님은 사람의 경험과 성찰, 인격, 기질, 생각, 고민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신다. '성령님과 사람의 신비한 협력'이다. '나'와 '세상'은 답이 없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베뢰아에서 충분히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바울의 복음 전파도 매우 효과가 있었고 순탄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곳에서 지속해서 복음을 전했더라면 역사에 남을 신학자 다수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데살로니가 원정 핍박단에 의해 다시 아테네로 떠나게 된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더 좋은 길을 하나님께서는 계획, 이행하고 계신다.
바울의 복음전파 여정은 떠나는 여정의 반복이다. 바울과 우리에게 사도행전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가고 떠나기를 반복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쫓겨나기를 거듭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나간 그 자리에는 교회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28장 30~31절)에서는 구금 상태에서 2년 동안 집에 찾아온 사람들만으로 '거리낌도 없이, 방해도 없이' 함께 말씀을 나눈다. 끝까지 공동체와 함께하는 모습니다. 예전에 지능지수와 감성지수, 영적지수 등의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공존지수가 중요시 된다. 혼자서는 좋은 듯, 잘 되는 듯 보여도 점점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되기 쉽다. '상황을 바꾸는 기적보다, 기적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존재의 변화가 중요하다.' 기적, 감성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사람들끼리 '경험, 성찰, 인격, 기질, 생각, 고민'의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실 때 역사가 이루어진다.
세상에서는 초라한 모습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가 지나간 곳에 교회가 남는 삶, 특히 기적 등으로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진리를 나눌 수 있는 곳에서 서로 용기 있는 조언이 가능한 곳, 이것이 교회를 이뤄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