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5> 최성수의 동행
깨달음, 함께 울리는 마음의 소리
함께 울어줄 사람 없나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된 아프리카 속담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오늘날 이 말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공동의 가치에 대한 욕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함께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다.
물론 걸어가는 방향이 중요하지만,
걷는 속도와 마음의 주파수 또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걷는 사람이 부담을 느낀다.
혹여 자신과 속도를 맞추려고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여러 사람과 산행을 해보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문제다.
그래서 동행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노래를 정말 못하는 친구가 있다.
어쩌다 노래방이라도 가게 되면 친구가 꼭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최성수의 ‘동행’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음정과 박자도 맞지 않고 목소리가 좋은 편도 아닌데 묘한 울림을 준다.
아마도 이 노래가 공명(共鳴)을 일으키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의 마음과 노랫말, 이를 듣는 나의 정서적 주파수가 맞아서
기분 좋은 파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따뜻한 동행이 되어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다는 내용에 공감이 많이 된다.
이 곡을 부른 최성수는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운 것으로 유명한 가수다.
때론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가수의 매력적인 목소리에 대한 반어적 찬사다.
팬들이 붙여준 ‘버터왕자’란 별명을 가수가 싫어하지 않는 이유다.
그는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면서 1980년대 가요계를 앞에서 이끈 가수다.
그가 히트시킨 곡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풀잎사랑’과 ‘동행’, ‘해후’, ‘남남’, ‘애수’ 등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제목이 두 글자인 곡들이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행’은 1987년 발표한 2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노래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해
골든컵을 수상할 정도로 대중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이 노래를 통해 최성수는 가수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동행’은 당시 권투를 소재로 남녀 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영화
‘지옥의 링’ OST에 삽입되기도 했다.
알려진 것처럼 ‘지옥의 링’은
당시 유명 만화가였던 이현세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가요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최성수는
1995년 뜻밖의 선택을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바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베테랑 가수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개발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한 셈이다.
그의 용기 있는 선택에 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성원을 보냈다.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가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에는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프로그램인 ‘복면가왕’에 출연해
변함없는 가창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부른 곡들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가수 최성수는 아직 살아있다. 그가 부른 ‘동행’의 가사다.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날은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살아있는 날까지…”
공명(共鳴)의 소리
불교는 붓다의 깨침을 원천으로 하는 종교다.
그러니까 2,600여 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중생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 순간이 불교의 시원이 된다.
오늘에도 깨침의 날인 성도재일을 4대 명절로 기념하는 이유다.
그런데 붓다의 깨달음은 언어의 길이 끊어져있으며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한다.
그럼에도 붓다는 45년 동안 수많은 언어를 통해 깨침의 내용을 전했다.
연기의 진리와 삼법인, 사성제 등의 가르침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양의 언어를 자랑하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엄청난 말을 쏟아낸 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붓다의 깨침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종교적 체험이지만,
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중에게 전달할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체험과 표현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대중의 근기에 맞는 방법(對機說法)을 동원해 깨침의 세계를 전하고 있다.
원로 불교학자인 강건기 교수는
인간의 지성(知)과 감정(情), 의지(意) 등 세 측면을 통해 붓다의 깨침을 설명한 적이 있다.
먼저 지성적(知) 측면에서 깨침은
나와 남, 세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깨지고 ‘하나’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깨침은 나와 세계가 소통하는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인(情) 측면에서 깨침은 법열(法悅),
즉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붓다는 깨침에서 오는 법열을 몇 주간 즐겼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의지적인(意) 측면에서 깨침은 ‘자비로운 삶’이라고 하였다.
나와 세계가 ‘하나’ 되는 체험에서 자비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동체자비(同體慈悲)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과 자비는 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깨침이라는 체험에서 한없는 기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공명과 서로 통하는 것 같다.
공명이란 글자 그대로 누군가 아플 때 나도 따라서 함께(共) 운다(鳴)는 뜻이다.
이는 서로가 ‘하나’라는 인식이 있을 때, 즉 마음의 주파수가 맞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물체들 사이에서 주파수가 맞을 때 일어나는
공명현상이 마음의 영역에서도 작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아노 ‘도’ 음계를 치면서 동시에 입으로 ‘도’ 소리를 함께 내다가
손가락을 떼더라도 건반에서는 ‘도’ 음이 계속 울린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피아노 음의 주파수가 일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공명이다. 만약 입에서 ‘미’나 ‘파’ 등 다른 소리를 낸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공명현상이 마음에서도 일어나
나와 너, 나와 세계가 온통 ‘하나’ 되는 체험이 바로 깨침인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다면 가수가 노래한 것처럼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 나와 같이 따뜻한 동행이 될 사람을 굳이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연스레 모두가 동행이 되어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살아있는 날까지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와
우두커니 남아 있는 슬픔 따위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불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극락이나 정토는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