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마음속 어딘가 흐르는 서정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출처 《영랑시집》 (2004) 첫 발표 《시문학》(1930. 3)
* 빤질한: 겉면이 윤이 나고 매끄러운.
* 날빛: 햇살에 비친 빛.
*도도네: 돋우네.
* 도른도른: 도란도란 (흐르는 물의 이미지와 어울려) 몽글몽글 잇따라 물이 흐르는 모습.
김영랑 金永郞 (1903~1950)
전라남도 강진 출생.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영랑(永郞)은 아호이다.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등학교)재학 시절 1년 선배인 홍사용, 1년 후배인 정지용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 일본 유학 시절 박용철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에 그를 비롯한 몇몇과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였다. 한국 순수시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시문학>(1930), <문학>(1934) 등의 문예잡지를 통해 시와 수필, 평문 등을 발표하였고, (영랑시집》(1935)을 남겼다.
ㅣ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1989년 어느 날, TV 광고 하나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상업광고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이 광고 역시 광고에 사용된 음악이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전면적 메시지를 이루었다. 여기서 사용된 노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情)>(강원 작사·작곡)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광고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손 잡으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몸짓만 봐도 알아요 미소만으로도 좋아
돌아 생각해보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광고에서는 이 노래와 함께 특별한 대사나 설명 없이 기다림과 떠남을 보여 주는 짧은 장면이 나온 뒤, 제품의 모습과 이름이 '정(情)'이라는 글자와 함께 제시된다.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이 광고에는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끌어내는 감성적인 지점들이 잘 포착되어 있다. 소비자들은 광고의 장면과 음악이 주는 분위기를 통해 이 제품이 소중한 사람에게 진심을 전달하기 위한 간단한 선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에서 사랑과 감사와 관심을 표현하는 수단에 적합하도록 '정(情)'이라는 메시지가 제품의 이름보다 강조되는 것이나, '눈빛', '손', '몸짓'에서 연상되는 유대감이 광고음악을 매개로 상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훌륭한 소구(訴) 효과를 발휘한다.
마음과 마음이 직접적으로 이어져서 서로의 뜻이 통할 수 있다면야 이러한 방식의 광고가 불필요할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또한 그 효용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온전히 통하는 세상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언어가 주는 정확성에 의존한다. 구체적인 대상이나 정보를 특정해 주는 언어의 효용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언어란 모호한 정서나 분위기가 아닌 우리의 경험 세계를 명확하게 전달해 주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시를 읽을 때에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생각이 작동한다. 이를테면 시 안의 말, 즉 시어 하나하나가 무언가를 정확히 지칭하거나 의미할 거라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단어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짐작하기도 예측하기도 어려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시란 인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만약 저 광고음악의 가사처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시가 존재하고, 그런 시들을 쓰고 읽고 노래하고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떨까. 그리고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면?
문학에서는 이러한 시들을 순수 서정시라고 부른다. 서정을 노래한 시가 서정시라면 순수 서정시란 그 서정의 경험 내용이 순수한 내면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시적 대상이 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서정이고, 그 서정이 세계의 어떤 것에 반응해서가 아니라 마음 자체의 순수한 작용과 변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정감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는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 서정시에 속하는 작품이다.
| 순수 서정시, 마음을 노래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하는 시들에서 시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 현상과 같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시어의 의미는 이 대상에 비추어 봄으로써 판단되며 이를 통해 의미의 정확성이나 풍부성, 혹은 변화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약속들에 기대어, 이번에는 거꾸로 시어로부터 대상을 추정하고 구체화하고 명확히 한다. 시에서 '나무'라고 말하면 우리는 경험 세계의 나무를 떠올리고, '나무가 팔을 뻗고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나무에서 팔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짐작하여 그 의미를 판단한다. 만약 시에서 '별나라'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래도 그곳이 상상 가능한 곳이라고 여기고 우리가 경험한 세계로부터 그 세계를 유추해낸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서 시인이 말하는 대상은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이다. 아차! 이 대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던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이 말을 꺼낸 시인만이 알 수 있다. 해서 우리는 시에서 말하는 그곳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려 한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시어들과 그들 간의 관계에 유의하며 시를 읽어 보자.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어이쿠! 그곳이 마음 한구석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곳에 마음이 숨어 있다고 한다. 이러면 마음 안에 마음이 있고 그 마음 안에 또 마음이 있는 '마트료시카 인형'이나 무의식 속에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 속에 또 무의식이 있는 '림보'(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무의식이 포개져 있는 공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를 읽을 때 각 시어의 의미와 시어 간의 관계들을 이런 식으로 논리화하려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대개 그러하듯 시에서도 '의미'에는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가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의 의미를 이해하자면 서술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나의 마음은 황무지다'라는 시구가 있으면, '마음'을 붙들고 이리저리 궁리할 게 아니라 시인이 '황무지'에서 무것을 발견했는지를 궁금해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면 굳이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사람이 말을 하고 손과 발을 움직여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시에서도 화자가 자신을 향해 독백 투의 말을 하고 있다면 이는 시인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무언가 말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는 것은 본디 마음이 모호하고 애매한 까닭에 언어를 통해 경계를 긋고 지시하고 정의 내리고 부연하고 상세화하고자 함이다. 이 모호하고 애매한 마음의 상태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우리는 구태여 결심의 글을 쓰고 입장을 정리하는 말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시인은 무엇에 관한 마음인지도, 어떤 종류의 마음인지도, 마음의 어떤 부분인지도 모른 채, 무엇이라 분명히 밝혀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정감의 상태에 놓여 있다. 마음의 어느 한편에, 자신도 그 정체를 모르는 마음이 숨어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표현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와 “아침 날빛이 빤질한/은결을 도도네"이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이 두 발화는 공통적으로 ‘물'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물의 이미지는 시 해석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물은 연속적이고 유동적이며 서로 뭉치려 한다. 이러한 속성으로부터 무엇인가 강렬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가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음을 시는 보여 준다. 또한 ‘돋쳐 오르는’과 '빤질한 은결' 같은 시어로부터 물과 같은 시인의 내면에 비치는 밝고 빛나는 자극들이 있으며, 그리하여 물처럼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가 긍정적이고 설레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결정체 만들기, 저항하기, 깨지기 쉬운
박용철이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등을 끌어들여 발간했던 《시문학》 창간호(1930)에 실린 이 작품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작품의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시문학 》 창간을 앞두고 썼다고 가정한다면, 이른 봄날을 맞아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동백나무 잎을 보며 마음속에 이는 정감의 상태를 그려 내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빛나는 B'라는 표현에서 A는 원인이거나('솔질에 빛나는 구두') 자격이 된다('대상에 빛나는 가수). 그러나 여기서는 A와 B가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즉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은 '동백잎에는 빛나는 마음이 있다.' 또는 '동백잎처럼 마음이 빛난다.'라는 뜻이다. 이때 마음이란 시인의 마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이른 봄날 아직 날씨는 차지만 햇살을 받아 빛나는 동백잎을 보니 그 잎새에 수맥이 뛰는 듯한 느낌에 내 마음도 생동감을 얻는다' 같은 의미가 실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순수시, 또는 순수 서정시로 불린다. 그 까닭은 박용철이 이 작품이 실린 문예잡지 《시문학》을 순수시 동인지라 부른 까닭도 있지만, 《시문학》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영랑의 작품들이 대개 이 작품에서처럼 '마음'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불리게 된 사연도 순수를 지향하는 김영랑의 시적 태도를 보여 준다. 김영랑은 이후 《영랑시집》(1935)을 출간할 때 《시문학》에 투고했던 작품들을 재수록했는데,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으로 실렸던 이 시의 제목을 빼버렸다. 그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의 제목도 모두 없애고 일련번호로만 배치했다. 김영랑이 자신의 시집에서 시의 제목들을 달지 않은 것은, 따라서 시집의 목차도 없게 된 것은, 그가 추구하던 순수시(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제목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시집이라는 옷이 입혀져 출판이라는 경로로 전달되어 인상과 평판으로 인정받는 시가 되기를 거부하는 순수한 형태의 서정시. 이 시의 순수성은 겉치레 같은 형식을 배제함으로써 완결된 것이다. 심지어 시인조차 시의 주인으로 혹은 발언의 권리자로서 주장할 수 없어 온전한 존재가 된다. 거꾸로 시인은 그 시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데 소용되는 도구로서, 시의 사제이며 신녀로서 지위를 갖는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온전한 자기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순수 서성시는 현실 혹은 세속이라 불리는 세상에 대해 가장 저항적인 시이며 가상 위태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다수의 시인들이 전향하고 변절하고 친일의 목소리의 표정을 시에 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서정시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태도는 꾸밀 수 있어도 목소리는 바꾸기 어럽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순수 서정시는 스스로 입을 닫고 모습을 버림으로써 저항의 가장 극단을 보여 주었다. 김영랑은 1940년 <춘향>을 끝으로 해방이 될때까지 절필했고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했던 신석정도 비슷한 시기에 절필했다. 정인보, 이하윤 등도 일제강점기 말기에 절필을 선택했다. 《시문학) 출간을 주도했던 박용철은 1938년 결핵으로 요절했다.
| 최지현
참고문헌
김영랑(2004), <영랑 시집》, 열린책들.
김학동 편저 (1993), 《김영랑: 김영랑 전집 · 평전 · 연구자료》, 문학세계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9.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