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오게 된 이유는 남편으로 인한 것 같다. 남편은 알콜 중독자였다. 결혼 전 남편은 서울에 있는 공대를 다니다 그만 두고 연평도 해군에 자원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 재수를 해서 치대에 들어갔다. 시험 치기 전 날 위스키 한 병을 다 먹고 시험을 치러 가 도저히 손이 떨려 수학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치대에 후보로 합격하지만 후보로 들어가기는 싫다며 다시 삼수를 해 차석으로 장학금을 받고 치대에 합격했다. 본 과 1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그에 대한 충격과 어머님의 일그러진 양육방식에 대한 불만으로 남편은 원양어선을 1년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남편은 본 과 2학년 때 34세의 나이에 나와 선을 보러 나왔다. 난 석사를 마치고 서울에서 3년 일을 하다 대구로 돌아와 엄마의 권유로 선을 봤다. 남편 쪽에서의 강한 서두름과 딸의 29세의 나이가 부담스러운 엄마와 나쁜 것 같지 않은 남편의 인상으로 인해 남편의 학생신분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남편과 시가를 알아가는 단계를 거쳤다. 남편은 자식에게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 무서운 교육자이신 아버님과 어머니의 편향된 양육방식, 그리고 남편에겐 조카인 자식을 데리고 부모님 집에 얹혀 혼자 살고 있는 누나로 인해 남편은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20세부터 술과 담배로 대화를 하고 평상시엔 말문을 닫고 살아가는 내성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버님과 이혼하고 돌아가신 첫 번째 부인소생이신 누나와 형이 남편에게 있었다. 이 큰 누나는 아버님이 못마땅해서 그런지 항상 동생인 남편에게 싸늘한 시선과 독설을 퍼부었다. 형(아주버님) 되시는 분은 힘든 과정 속에서도 서울에서 선생님이 되셔서 한 이십 년 교직생활을 하시다 갑자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셔서 개척교회목사님이 되셨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아주버님은 정신적인 고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걸어가셨고 남편은 본의 아닌 이런 원죄 때문에 입을 닫아버리고 술과 담배를 친구삼아 자신을 학대하며 살았다. 가끔씩 아주버님은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오신다. “사랑하는 내 동생 상규보아라...... 항상 너와 너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라는 말씀을 보내신다. 난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학생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생활을 보냈다. 첫째까지 임신을 한 상태로 대학교 강의와 과외를 10개씩 했다. 어머님와 시누는 경제생활을 해본 적이 없고 시누 딸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제왕절개를 해 첫째를 낳고 나서도 2주 있다가 애들을 가르치러 나가야지만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시어머님은 저희와 같이 사시면서 몸이 안 좋아서 애는 못 본다고 하시길래 우리 첫째는 친정엄마가 키워주시고 계셨다.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개업을 한 이후로는 시어머님은 아들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았다. 빚을 몇 억씩 내었건만 빨리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와는 달리 시어머님은 아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저녁을 다 해 놓고 수업 가고나면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 씩 전화도 없이 남편은 시어머님과 시누와 조카를 불러내어서 고가의 회를 사드렸다. 그런 돈이 매달 수백이 넘어갔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몰래 받은 돈으로 시누 딸 대학등록금과 시누 생활비를 대시느라 바쁘셨다. 빚을 갚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빚이 더 생기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시어머님은 아들을 아들이라기보다는 무슨 애인 대하듯이 하셨다. 어머님은 좀 심하셨고 시누와 시누 딸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오년 뒤에 어머님은 온몸에 암이 퍼져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남편은 어머님께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시어머님은 아들에게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셨다. 남편은 세 달 동안 1인실에서 시어머닐 살려보겠다고 매일 면역주사 100만원짜리를 맞게 해 드렸다. 또한 어머님이 원하셔서 ‘하이퍼나이퍼’라는 2000만원짜리도 하시러 갔지만 결국 돌아가셨다. 난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 있다 정신적인 공황장애가 왔다. 나 나름대로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정신과 몸의 반작용 같은 것이었다. 박사논문을 끝내고 미국특파원을 하는 친구 집에 갔다. 디트로이트에서 환승을 하는 비행기를 타고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느꼈다. ‘이러다가 숨을 못 쉬어서 사람이 죽는구나’ 싶어 이륙 십 분 전에 비행기에서 내려 근처 호텔에서 삼 일 있다가 한국의 의사선생님과 전화통화 후 약을 구해서 가까스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은 하루도 쉬지 않는 술과 담배로 구안와사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다. 술의 여파로 오전 진료를 자주 쉬게 되고 구안와사 치료로 한두 달 치과를 거의 쉬다시피 하니 치과경영까지 어려워졌다. 지금 생각하니 ‘참 힘든 터널을 지나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난 가끔씩 찾아오는 공황장애로 인해 삶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 같고 삶의 끈을 놓아버리면 이 정신적인 상태가 끝이 나 버릴 것 같은 환영에 사로잡혔다. 항상 바쁘게 살아오고 무슨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달려왔지만 나의 이 정신력으론 견디어낼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나는 죽음본능을 느꼈다. 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없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남편과 딸들을 생각하니 치료를 받든지 아님 어떤 무한한 힘에 의지를 하든지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난 날 똑바로 세워줄 수 있으면 그 상대자가 누구든지 영혼이라도 팔아서 살아내고 싶었다. 정신과 병원을 알아보고 있는 중에 경기도에서 오신 우리 치과 간호사 한 분이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우리 교회에 한번 가보실래요?” 하시길래 단번에 부정하지 않고 ‘아 하나님이 날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 혹시 남편의 정신적인 외로움까지 아시고 계실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며 ‘내가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주에 그냥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나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정말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려 내렸다. 정말 하나님은 나를, 우리가족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13년 9월 말에 교회에 나가고 한 달 정도 있다 11월 10일부터 남편은 30년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던 술을 지금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지낸다.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며 냄새도 맡기 싫다고 한다. 난 점점 정신과 생활이 밝아졌으며 결혼하고 16년 만에 맑은 정신을 가진 남편과 보통가정처럼 저녁을 보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이렇게 저녁시간이 긴지 몰랐다고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목장 안의 가족들 다른 여럿 가정들과 가족이 되었다. 사랑하는 아스타나 목장의 목자님과 목녀님 그리고 목장가족들 내가 생의 한 가운데에 삶의 즐거움과 안정감을 맛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정을 평범한 가정으로 돌려주셔서 감사드리며 남편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풍성함이 생겨나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지닐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기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글이 좀 긴데, 극구 자르지 말고 다 올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무삭제로 다 올립니다... 아마도 남편도 교회 전도하기 위한...
경기도 계시다가 직장 땜에 우리 교회 오셔서 우리 목장에 계시다가
파송되어 목녀가 되신 위숙희 집사님이 전도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