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과 황진이, 매창에 대해서 <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난설헌은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그리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 호: 초당(草堂))이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시인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못한 규원과 친정이 역옥에 연루되는 겹친 화액에서 오는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성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시 약 213수 가운데 128수는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읊은 신선시(神仙詩)이며, 애상적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의 일부는 균이 명(明)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난설헌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발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조선 중기로서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 허씨,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초희라는 이름은 장성해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져온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 - 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봉([竹封]),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허엽은 난설헌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 - 1612)은 호가 악록(岳麓)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 - 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고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생 허균(許筠, 1569 - 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다.
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난설헌은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 중국 송(宋)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 신선, 도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옴.)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난설헌의 글재주는 허균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 자신도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나인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女娘료亂送秋千) (*다스릴 료) 란 시구가 있었다. 이를 보고 난설헌이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균이 '어떤 구가 잘못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다음과 같이 고쳐 주었다.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하면서 가버렸다.' (門前還有斷腸人, 白馬半拖黃金鞭)
난설헌의 시들은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고, 자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했다. 즉,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문장)은 우수하였다 한다.
그는 외모가 잘 생기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공부에도 그다지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89년(선조 22), 즉 난설헌이 죽던 해, 자기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佳人;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품도 어질었다(賢; 허균의 학산초담)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부인난설헌집 부경란집)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난설헌의 글재주를 아끼는 마음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특히 1582년(난설헌 20세)에는 허봉이 난설헌에게 "두율(杜律)" 시집을 보내 주면서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써주었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이 해에 허봉이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 (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황진이>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 진이의 출자(出自)가 황진사의 서녀라고 전해져 있지만, 그녀는 개성의 아전진(陳)가에서 기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기명이 명월(明月)인 것만은, 종실 벽계수(碧溪守)와의 수응에서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 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解語花)인 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한에 있어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을 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 知足禪師)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4백년 뒤, 이런 것을 많은 현대문인들이 참여해서 다시 부연해서 진이는 이제 기생으로서 전 국민의 애인이 되었다. 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문인(文人)다운 풍모, 즉 6 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漢詩)가 있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이조 문치주의(文治主義)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시조야 기방의 가요니까 진이가 손쉽게 지었다고 치더라도 한시는 평측(平仄)을 맞춰야 하니까, 당시로 해서는 일정한 교양을 쌓아야 한다. 여기에서 황진사 딸이라는 전설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당시 사람 들에게 사랑 받았을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시조, "어뎌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졔 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情(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병와가곡집>에서는 변칙적인 작법을 쓰고 있는 이 '졔구태야'의 용법 은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몇 수 안되는 시조를 가지고 국문학사상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 이를 육감적인 의미의 해어화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전설을 추체험(追體驗)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진실이 있다면, 오늘도 황진이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환락가에 있는 호스테스 중에서 누군가가 오늘의 황진이가 될 수 있 을 것이니 이는 또 역사와 전통의 진실일 것이다.
황진이(黃眞伊)의 작품 세계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靑山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妓女)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매창>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 허균의 <조관기행> 가운데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