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수필 ‘대한민국 최고의 부사관(副士官) 양하윤 상사’
이원우(’77 <새교실> 수필 3회 천료/ ’79 김승우 발행 <수필 문학> 초회 추천/ ’84 <한국 수필 2회 천료/ ’97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 지은 책 16권/ KNN 부산 방송 문화 대상, 허균 문학상 본상/ 육군 일반 하사 제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보병 제 26사단 사령부 부관 참모부. 거기서 군대 생활을 26 개월 정도 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상벌계에서 일을 했는데, 내가 모시고 있던 선임하사 최종학 상사는 내게 작은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식견이 높아서 부관 참모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업무 처리를 너무나 매끄럽게 하는 바람에, 조수(助手) 권 일병과 나는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분이 평양 사범 대학교 미술 교육학과 중퇴의 학력을 가진 것을 뒤늦게 알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학 상사야말로 제대로 된 군인이었다. 40대 중반? 그 정도로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 장교에게 깍듯이 대했다. 그 예 하나. 보충 중대 바로 아래에 부관 참모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신임 소위들의 행동거지를 목격할 때가 많았다. 그들은 경례를 않고 지나치기 일쑤인, 나이 든 하사관들에게 기합(?)을 넣고 있었다. 귀관(貴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손바닥으로 하사관들의 어깨를 치곤 하는 걸 보면서 우린 얼마나 웃었던가? 우리 선임하사는 어찌 보면 아들 나이 되는 그들 중 소위에게 그런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내 나이 그 때 20대 초반인데도, ‘하대’를 삼갔다. 언제나 말 ‘게’로 맺고 보니 내가 오히려 송구스러울 수밖에. 한번은 내가 영창에 가도 좋을 만한 일을 짓을 했는데도-사병으로서는 제법 큰 부정(不正)을 저질렀다-그걸 감싸 주었다. 그 때 선임하사가 내게 매섭게 몰아친 말의 끝이 ‘록’이었다. 이 병장,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제대를 앞 둔 몇 달 동안, 워낙 많은 표창장을 주는 사단장(문중섭 장군/시인)이라 비상 대기를 해야 할 형편이라 선임하사와 나(일반 하사로 진급해 있었다), 그리고 권 병장은 아예 책걸상을 부관 참모실로 옮겨 놓고 근무를 했다. 자연히 우리 사무실에 대위에서 중령까지의 중견 장교들이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들은 우리 선임하사에겐 대개 존댓말을 썼다.
그런 덕목을 갖춘 선임하사를 모시고 군 생활을 하면서 하사관으로서의 역할이 군에서 얼마나 중차대한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지냈다. 그러면서도 좁은 소견에도 왜 하사관인가 싶어 안타깝게 여겨 왔다. 제대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사관? 하인, 하층민, 하교(下敎), 하급, 하등동물, 하부(상부에 반대되는 개념), 하수인, 하옥, 하위, 하치(같은 종류의 물건 중 가장 질 낮은 것), 하품(下品) 등의 단어가 줄줄이 신음 소리에 섞여 나왔다.
제대를 한 게 67년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공군 제 5672부대(현3875뷰대)의 양하윤 하사관이었다. 정훈관실에 근무하는 하사였는데, 그가 국군의 날 부대 행사에 어린이들을 초청하는 심부름을 하러 우리 학교를 방문했다가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몇 달도 안 되어서였다. 그는 내가 운을 떼기 무섭게 노인 학교에 나와 봉사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토요일 오후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아니 오히려 막무가내 그가 간청을 했다는 게 옳겠다. 그는 몇 번이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로부터 장장 15년, 그가 하사에서 중사를 거쳐 상사로 진급할 때까지 토요일 오후엔 거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노인 학생들이 두 번씩이나 계급장을 바꿔 달아 주던 그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어느 초등 학교 교장이 10년 동안 노인들이 써왔던 교실을 못 빌려 주겠다며 엄동설한에 노인들을 바깥으로 내몰려 할 때에 그는 차라리 투사로 보일 정도로 맞섰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현역 공군 준장이 노인 학교를 두 번 방문하는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났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민과 군의 유대 강화에 한 획을 그은 간부 군인이라는 표현이 썩 어울린다 하겠다. 군인의 신분으로 자랑스런 북구 구민상을 받은 것은 당연한 보상이되, 전무후무한 하나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교직에서 퇴임한 이후에 우리 노인 학교는 어느 대학 교수가 운영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나보다 더 자주 거기 들렀다. 물론 우린 거기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고.
설을 며칠 앞두고 나는 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2010년 공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겸손의 정신으로 그러는 듯 자세한 내용을 일러주지 않았는데, 나중에야 인터넷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수상자 일곱 명의 계급(신분)을 보고 나는 놀랐다. 준장 1, 대령 2, 중령 2명에 상사 1명, 민간인 1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양하윤 상사의 공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으니 그와 더불어 일한 나로서도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덕성 토요 노인 학교에서 토요일 오후마다 몸을 던진 15년 세월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장애인 시설과 양로원에서의 희생 봉사, 문학 활동도 마찬가지다.
나는 까마득한 옛날의 최종학 상사와 내가 사진으로 보고 있는 양하윤 상사야말로 최고의 군인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만 2001년 3월 27일자로 ‘하사관’이 그 ‘부사관(副士官)으로 바뀌었으니, 그 이전의 하사와 중사, 상사, 그리고 원사(元士)들의 불명예(?)를 보상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내가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지 못했을 따름이지, 창군 이래 부사관들이 전투력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부사관들이 엮어낸 신화 같은 다큐멘터리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가까이는 연평 해전이며 천안함 사건에서 조국에 목숨을 바치는-제2연평 해전 3명, 천안함 사건 4명 부사관 산화-부사관의 군인 정신을 똑똑히 보았지 않은가? 이제 초급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 중 상사들로 하여금 소대장에 보임되도록 할 계획도 있다니, 대한 민국의 부사관들이 얼마나 가슴이 설레랴. 그들에게 더욱 신뢰가 간다. 부사관 만세!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 부사관(하사관)중에서도 그 옛날엔 최종학 상사를 만났고, 지금도 양하윤 상사와는 상시로 얼굴을 대할 수 있으니 행복감에 빠진다. 나는 비록 예비역 ‘일반 하사’-내가 군에 복무할 무렵 하사로 더러 제대한 경우가 있었다-이긴 하지만 부사관은 부사관이라 큰소리칠 만하다 하겠다. 제 눈에 안경일까?
오늘 밤엔 양하윤 상사에게 전화나 건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를 한 소절씩 바꿔 부른다면 최고의 부사관에 대한 예우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야 돌아왔네……
김추자 노래였지, 아마.
17장/ 2011년 2월 7일 오후 9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