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운문과 산문
1. 운문과 산문의 차이
2. 운문
3. 산문
1. 운문과 산문의 차이
문자는 눈으로 보기만 하는 부호가 아니라 입으로 읽을 수 있는 소리를 가졌다. 악기처럼 소리가 나는 것을 이용하면 뜻, 사상뿐 아니라 기분, 정서를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은 대체로 소리를 주로 하는 것과 뜻을 주로 하는 것으로 갈리게 된다. 소리를 주로 하는 글은 ‘운문(韻文)’ 또는 ‘율문(律文)’이라 하고 뜻을 주로 하는 글은 ‘산문(散文)’이라 일러오는데, 이 운문과 산문이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름을 의식하지 않고, 반(半)운문, 반(半)산문인 글, 혹은 비(非)운문, 비(非)산문인 글을 써 표현효과를 철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잠깐 운문과 산문이 다름을 간략히나마 밝히려 한다.
2. 운문
창 안에 혓는 촉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촉불 날과 같하여 속 타는 줄 모르더라.
-이개의 시조
이 글은 운문이다. 문장에 뜻만 읽힐 뿐 아니라 운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3 4 4 4
창안에 혓는촉불 눌과이별 하였관대
에는 음절수에 벌써 계획적인 데가 있다. ‘창 안에 켠 촛불은 누구와 이별을 해서’란 뜻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3·4, 4·4조의 율격(律格)이 나온다. 즉 뜻뿐 아니라 음악적인 일면까지 가지고 있다. 이 음악적 일면이 나타나지 않게
창 안에 켠 촛불은 누구와 이별을 해서 겉으로 눈물을 흘리며 속이 타는 줄은 모르는 것일까. 저 촛불은 나처럼 속이 타는 줄을 모르고 있다.
해보라. 이 글의 맛은 반 이상 없어지고 만다. 그러면 이 글의 맛 반 이상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음악적인 일면, 리듬에 있다. 운문은 리듬이 주요 뜻이 종(從)이다. 먼저 즐겁거나 슬픈 기분을 주고 사상은 나중에 준다. 알랭은 그의 「산문론」에서 산문은 도보(徒步)요 운문은 무도(舞蹈)라 했다. 우리는 볼일이 있어야 걷는다. 도보는 실용적인 행동이다. 춤은 볼일이 있어 하는 행동은 아니다. 흥에 겨워야 절로 추어지는 것이다. 흥이 먼저 있고서야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이다.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의 시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나,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같은 리듬은 산새소리와 강물소리에 자라난, 소박하면서도 처량한 향토 정조의 가곡조가 썩 잘 풍긴다.
이렇게 뜻이 아니라 모두 정서가 주가 되었고 정서는 설명으로가 아니라 음조를 맞추어 직접 음악적으로 드러내었다.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뜻으로 알릴 것인지 정(情)으로 알릴 것인지를 먼저 가려서, 만일 뜻인 것보다 정인 것이면 철저히 운문에 입각해 표현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운문은,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먼저 있는 곡조에 가사를 지어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래처럼 부를 것은 아니라도 읊을 수는 있어야 할 것이니, 먼저 멜로디를 정하고 다음에 거기 맞는 말과 글자를 골라서 맞추는 것이 운문의 탄생과정일 것이다.
3. 산문
산문은 쉽게 말하면 줄글이다. 줄글이란 마디의 길고 짧음에 관심을 둘 필요 없이 뜻만을 내려쓰는 글이다. 세상의 문장 대부분, 과학, 논문, 사기(史記), 신문기사, 소설, 수필, 평론 모두가 산문이다. 이 강화(講話) 역시 산문을 본위로 하는 것이며, 지금 이 강화를 쓰는 이 문장도 산문이다. 내가 알리고 싶은 뜻을, 생각을, 사상을, 감정을 실상답게 써나갈 뿐이다. 운문이 노래하듯 쓰는 것이라면 산문은 말하듯 쓰는 편이다.
‘윗가지 꽃봉오리 아랫가지 낙화로다.’
하면 이것은 노래하듯 쓴 것이요,
‘윗가지는 아직도 봉오리인 채로 있는데, 아랫가지는 벌써 피었다 떨어진다.’
하면, 이것은 말하듯 쓴 글, 즉 산문이다. 표현하려는 뜻에 충실할 뿐, 결코 음조에 관심 둘 필요가 없다. 관심 둘 필요가 없다는 것보다,
‘산문이란 오직 뜻에 충실한다.’
는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어느 틈엔지 음조에 관심이 가고 만다. 글을 쓸 때는 누구나 속으로 중얼거려 읽으며 쓴다. 읽으며 쓰다가는 읽기 좋도록 음조를 다듬게 된다. 음조를 다듬다가는 그만 ‘뜻에만 충실’을 지키지 못하기가 쉽다.
춘향이 집 당도하니, 월색은 방농(方濃)하고 송죽(松竹)은 은은한데 취병튼 난간(欄干) 하에 백두루미 당거위요, 거울 같은 연못 속에 대절 같은 금붕어와 들쭉, 측백, 잣나무요 포도, 다래, 으름덩굴 휘휘친친 얼그러져 청풍(淸風)이 불 때마다 흔들흔들 춤을 춘다. 화계상(花階上) 올라보니, 동백, 춘백, 영산홍, 모란, 작약, 월계화, 난초, 지초, 파초, 치자, 동매, 춘매, 홍국, 백국, 유자, 감자, 능금, 복숭아, 사과, 황실, 청실, 앵두, 온갖 화초 갖은 과목, 층층이 심었는데……
-『춘향전』 ‘옥중화(獄中花)’에서
뜻에 충실하기를 잊고 음조에 맹종되고 말았다. 운문을 읽는 것처럼 일종 홍취는 나되, 뜻은 거짓이 많다.
3 4 3 4 3 4
원색은 방농하고 송죽은 은은한데 취병튼 난간하에
4 4 4 4 4 4
거울같은 연못속에 대접같은 금붕어와 들쭉측백 잣나무요
4 4 4 4
포도다래 으름덩굴 휘휘친친 얼크러져……
3.4조, 혹은 4·4조가 글의 대부분이다. 이런 문장은 산문이라기보다, 또 운문이기보다, 낭독문체라고 할까, 낭독하기 위해 다듬어진, 의식적인 일종의 율문(律文)이다. 한 사람이 목청을 돋우어 멋지게 군소리를 넣어가며 읽으면, 여러 사람이 듣고 즐긴다. 독자가 아니라 연자(演者)요 청중이다. 독서와는 거리가 먼 낭독 연기를 위해 씌어진 대본이다.
산문이 아니라 가사(歌詞) 그대로다. 그런데 이런 글,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보면 손으로 베낀 것이나 인쇄한 것이나 모두 줄글로 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중 산문이거니, 산문을 이렇게 써도 좋거니, 그보다. 무슨 글이든 이렇게 우선 낭독하기 좋아야 좋은 글이거니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의 산문발달을 더디게 한 큰 병폐의 하나였다.
커다란 체경 앞에 서니까 노인의 발가벗은 몸뚱이는 그냥 앙상하다. 아주 늙은 편은 아니건만 무섭게 말랐다. 곳곳이 삐가 드러났다. 가슴패기는 똑 자라배때기처럼 늑골(肋骨)이 나와 금이 생겨서 임금 왕(王) 자를 두어 개나 그렸고, 양편 어깨는 움푹하니 앞으로 오므라졌으며 엉덩이에서부터 아래는 격만이 기다랗게 말라깽이일 뿐이다.
-안회남의 「노인」에서
기준이 놈이 입원한 삼등병실에는 도합 환자 여섯 명이 들어 있었다. 태풍자(문둥이)같이 얼굴을 싸맨 사나이, 연주창이 났는지 턱을 잔뜩 싸매고 목도 잘 놀리지 못하는 젊은 사나이, 다맂매디가 곪아 터져서 다리를 찍어야 한다고 잉잉 울고 있는 사나이, 얼굴이 팅팅 부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주먹만 한 어린애, 치질이 나서 노상 엉뎅이를 움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년 사나이, 거게 기준이까지 들어가서 만원이 되었다.
-한설야의 「술집」에서
뜻을 전하는 것 외에 어디 무엇이 있는가? 오직 뜻에만 충실한 글들이다. 뜻의 세계가 환하게 보인다. 이 환하게 보이는 뜻, 그것을 가리며 나설 다른 것(음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증(實證), 이것은 산문의 육험(肉)이요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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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講話) 강의하듯이 쉽게 풀어서 이야기함. 또는 그런 이야기.
방농(方濃) 바야흐로 짙어감.
취병(翠屛) 꽃나무의 가지를 이리저리 틀어서 문이나 병풍 모양으로 만든 물건,
화계(花階) 꽃을 심기 위해 흙을 한층 높게 해 꾸며놓은 꽃밭,
맹종(盲從)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름.
체경(體鏡) 몸 전체를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거울.
연주창(連珠瘡) 림프 샘의 결핵성 부종인 갑상선종(甲狀腺腫)이 헐어서 터진 부스럼.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