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2-20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자유함, 그러나 오·남용 중지(12-13절)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시작된 것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동남쪽으로는 에게해(Aegean Sea)에 접해 있었고, 서북쪽으로는 아드리아해(Adriatic Sea)가 접해 있어서, 도시 양쪽에 항구도시가 발달했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인천과 부산이 동쪽과 서쪽에 나란히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동서양 문물 수출입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굉장히 번성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탄광업이 호황일 때, 그곳에 있는 도시와 조선업이 호황일 때, 그곳에 있는 도시를 표현하는 말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입니다. 고대에 고린도가 경제적으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가 다양한 외국 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문물이 들어와 굉장히 호황을 누리는 도시였지만, 그에 비례하여 윤리적으로 굉장히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각 도시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이 있었는데, 고린도의 수호신이 미의 여신이라 불리는 아프로디테(로마의 비너스)였습니다.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1,000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들이 밤이 되면 ‘매춘_거룩한 매춘(?)’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밤에 누가 가장 많은 돈을 벌었는지가 대화의 관심이었고, 그렇게 돈을 번 사람은 그것이 자랑이었습니다. 당시 문화가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제의 일을 여염(閭閻)집 여인들이 돌아가면서 봉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지만,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신앙적인 답변을 주기 위해서 고린도전서가 보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1-9는 인사와 감사이고, 1:10-6:20까지는 글로에(Chloe)의 집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책망과 권면입니다. 1:10-4:21은 고린도 교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던 분쟁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고, 5:1-6:20은 음행과 성도 간의 소송 문제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도들 사이의 대립으로 법정 소송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성령님을 따라서 살지 않고, 육체의 소욕, 세속적 가치관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이 가하다’에서 ‘가하다’는 ‘합법적이다’, ‘용납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또 합법적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하다’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없는 것은 그 가한 그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가한 것 중에는 유익한 것도 있지만, 유익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것 중에서도, 그것이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익하다’의 문자적인 뜻은 ‘함께 견디다’, ‘함께 지탱하다’입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다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의 삶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사는 것, 자연스러운 것을 따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 위의 가치관, 절제할 것을 절제하며 영원한 가치관을 따르며 사는 것이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얽매이다’의 뜻은 ‘영향을 받다’, ‘지배를 받다’입니다. 우리는 가한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하여 행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우리가 선택하고, 행한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해 쾌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힘을 가하지 않았고,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그 쾌락의 결과가 자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또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은 한도 내에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습니다. 가합니다. 그러나 카드를 긁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카드값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것이 과도해지면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내 자유를 버리면 더 큰 자유를 얻고, “내 자유, 내 자유!”하고 자유만 추구하면, 내가 선택한 것의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13a)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내가 무엇을 먹든지 그것은 뱃속으로 들어가서 소화되어 없어집니다. 음식이 소화되어 없어지듯이, 하나님께서 이 육체도 없어지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음식이 없어지듯이 육체도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식욕, 성욕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이 모두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3b)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배’는 성경에서 ‘육체(사르크스’라고 말합니다. ‘육체’를 다른 말로 ‘고깃덩어리(사르크스, flesh)’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몸(소마, body)’은 ‘전인적인 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육체(사르크스)의 사람’일 뿐이라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고, 욕망을 추구해도 괜찮지만, 우리는 ‘몸(소마)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도 ‘육체의 사람_사르크스’를 위하시지 아니하시고, ‘몸의 사람-소마’를 위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르크스의 사람’이 되면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이지만, ‘소마의 사람’이 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주님과 연합됨, 음행 중지(14-17절)
그래서 바울은 몸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라는 것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이, 영이 아니라 몸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라는 것도 우리의 몸이, 시공을 초월하는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단순히 욕망을 추구하는 고깃덩어리인 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고 선물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15-16)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녀’는 당시 그런 직업을 가졌던 여인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도구로만 여기고, 하나님의 없는 삶,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았던 시대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이 사사시대를 표현하는 말씀인데 이러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욕망에 이끌리게 하면, 그의 인생은 사사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몸이 육이 전부라면, 마음대로 살면 됩니다. 죽으면 끝인데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죽음 이후에 심판(상급)이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육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17절이 이러합니다.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우리가 ‘육체(욕망)의 사람’ 되면 주님과 연합할 수 없고, ‘몸의 사람’이 되어야 주님과 연합할 수 있고, 주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의 사람은 자신의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전됨, 몸으로 영광 돌림(18-20절)
그래서 몸의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마트에서 값을 치르지 않고 몰래 과자를 한 통 갖고 나오면, 그 장물은 내 몸 밖에 있습니다. 또 몰래 금은방에서 금반지를 하나 들고나와서 다른 곳에 팔아 버리면, 죄의 증거가 되는 장물은 내 몸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음행은 죄의 증거가 되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 자체가 장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음행뿐만 아니라 폭식, 자해, 자살 등도 다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음행만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이 죄에 심각하게 빠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하다’는 ‘도망하여 안전한 곳으로 가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도 못했으면서도 피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여 도망간 가장 바른 예는 ‘요셉’입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유혹할 때, 요셉은 도망을 갔습니다. 어떤 죄든지 그 죄가 있는 상황, 환경에서 피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거기에 있으면 넘어집니다. 그때는 넘어지지 않더라도, 다음번에는 넘어집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성숙하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받지 않고, ‘욕망의 소굴’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과 같은, 어쩌면 세상보다 못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산속에는 자연인이 손수 지은 집만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부분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에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연인의 집 중에서 태양광 등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주변은 캄캄한데, 오직 그 집에만 불이 들어옵니다. 그 장면을 높은 언덕에서 보면 참 아름다울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수용하며 사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워도 자신의 몸이 성전인 줄 아는 사람은 성령님의 빛이 있어서,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사람입니다.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를 지불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지불했습니다.
우리가 가방을 열 개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데 그중에 아홉 개는 만 원, 또는 이만 원을 주고 샀지만, 하나는 백만 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러면 그 백 만 원짜리 가방을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겠습니까? 또한 가방으로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은 자기 주인이 다른 가방보다 오십 배, 백배를 더 주고 자기를 사주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의 아들을 대가로 지불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 원짜리’나 ‘이만 원짜리’도 아니고, ‘백만 원짜리’도 아니며, ‘영원한 생명짜리’, ‘예수님짜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사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육체를 따라 욕망을 따라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성전의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삶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서 가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몸으로 또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지만, 세속적인 가치관도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주신 몸을 육체로 사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르면 우리의 삶이 고린도 교회와 같이 됨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인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가한지 아닌지를 살피기보다 그것이 유익한지를 살피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한 것을 하는 자연스러움보다 더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절제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영과 진리를 따라 살아가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믿음 생활에서 가한 일이지만 더 큰 유익을 위해서 절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성령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은 무엇입니까? 또 성령님께서 근심하실만한 일은 무엇입니까?
3.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입니다. 당신의 몸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돌리시겠습니까?
4.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삶을 살며, 세속적 가치관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관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