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의 미륵신앙
Ⅰ. 서론
우리는 무수한 역사 속에서 미륵이라는 말을 무수히 들어왔다. 미
륵이라 하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
다. 미륵신앙은 신라·백제를 불국토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 여러 경전을 통해 전해진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
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
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1). 그러나 진실
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의 자를 갖
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
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적극적인 종교의 의지는, 끊임없는 역사의 혼란 속
에서 우리는 종교가 무엇이고, 부처와 중생이 무엇인가를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포용력과 자비심을 갖게 하고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56억 7천만년 후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던 분으로 도솔천에 계시다가 용화수 아래에서 태어나
시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으로 96억, 94억, 92억의 중생을 제
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2)
일반적으로 미륵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상생
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생신앙이다. 상생신앙은 도솔천에 계시
는 미륵보살의 회상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신앙이라면, 하생신앙은
현재 이곳을 불국토화(佛國土化) 시키는 신앙인 것이다. 이러한 미
륵신앙은 세월의 교차에 따라 흥망을 거듭해 오고 있다. 흥망이 거
듭되는 사이에 금산사라는 사찰이 있어 본고에서는 금산사를 중심
으로 금산사의 미륵신앙을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현
재로 구분하여 알아보고, 현재의 금산사 공간구조에 따른 교리적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째, 삼국시대에 이은 통일신라의 진표율사의 수행과 금산사 중건
의 의미를 살펴본다.
둘째, 진표 이후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에 의해 어떻게 변하였는지
살펴보고 금산사의 전반적인 변화를 살펴본다.
셋째,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의 전소한 금산사를 재건한 수문대사
와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금산사의 미륵신앙을 살펴보고 미륵전
보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필자의 좁은 소견에 본 논문의 주제를 충실히 접근한다는 것에 우
려를 나타내며, 적은 자료를 중심으로 하였기에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그러나 이 논문이 미륵신앙을 하는 데
있어 적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적는다.
Ⅱ. 진표율사와 금산사
1. 모악산 금산사
모악산 금산사는 사찰이 위치한 산의 이름이 사찰 이름으로 불려지
게 된 경우다. 다시 말해 금산(金山)에 있는 사찰이란 의미이
다.3)
지금의 금산사는 모악산(母嶽山)이란 이름의 산에 위치하고 있지만,
모악산에는 금광과 주변의 지역에서 사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금산(金山)이란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모악산 산명(山名)의 유래를 살펴보면 '엄뫼', '큰뫼'라 불렸다.4)
이 '엄뫼'나 '큰뫼'는 둘 다 '어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모악산은
어머니 산이라는 한자식 산명인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농업을 중
요시하던 김제평야 지대의 수원(水原)을 살펴보면 모악산의 두 곳
과 태인의 상두산(象頭山)에서 흐르는데 이 물은 벽골제로 흐르게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벽골제는 군(郡)의 남쪽 15리
에 있다. 수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 모악산 남쪽과 북쪽에
서 흐르고, 하나는 태인현의 상두산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같이 만
나 고부현 눌제수와 동진에서 합치고, 만경현의 남쪽을 돌아서 바
다로 나간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김제평야의 젖줄과도 같기에
엄뫼로 불려졌을 것이다.
사지(寺紙)5)에 의하면 금산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원년(서기
599)에 창건되었다. 법왕은 즉위하자 칙령(勅令)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 금산사에서 승(僧) 38명을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지를 보면 법왕의 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그때의 금산사는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고, 진표율사에
의한 중건(重建)을 창건으로 보고 있다.
금산사의 개산조를 진표로 보고 있는 것6)도 있다. 그러나 이것
은 삼국유사7)의 기록과는 다른 것으로, 《송고승전》이 12세에
스스로 머리 깎고 나중에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는 반면, 《삼
국유사》는 진표가 출가한 곳을 금산사라 하고 순제(順濟, 崇濟)법
사의 제자라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창건 설화는 많으나 현재의 자료로써는 창건 시기와
창건주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진표율사가 출가하기 전에 금산
사는 존재하였고, 율사에 의해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진표율사의 전기와 수행
진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4 와 《송고승전》 등이 있다
8)
《송고승전》이 서기 988년으로 가장 오래되었지만 《삼국유사》가
국내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ㄱ) 진표가 출생한 곳은 만경지방으로 속성은 정씨(井氏)로 그의
가계(家系)는 사냥을 주로 하였다. 그의 나이 12세 되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가다 밭두렁에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그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개구리를 꿰어 놓았다. 그리
고 사냥이 끝난 후에 가져가려고 강물 속에 담가 두었다가 잊고 만
다.
이듬해 어느 봄날, 진표는 다시 사냥을 가게 되고 전날의 그 장소
를 지나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물 속을 들여다보고 기절하
듯이 놀라게 된다. 지난 해 장난삼아 버드나무에 꿰어 놓은 개구리
가 아직도 살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
구리를 풀어 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진표는 출가를 결심하고
금산사의 순(崇)제 법사에게 나아가 삭발하게 된다.9)
(ㄴ) 12세에 이르러 출가하기를 희망하여 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
사에게 출가한다. 순제는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
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보살 앞으로 나아
가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해서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
하라" 하였다.
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그의 나이 27세
가 되었다. 760년 부안 변산의 부사의암으로 들어가서 미륵상 전에
계법을 부지런히 구했으나 3년이 되도록 수기를 얻지 못하였다. 이
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홀연 청의동자가 손으
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진표율사는 다시 발분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몸을 바위에 두드리며 참회하고 수행하
니, 7일 되던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丈)을 흔들고 와서 가호
(加護)하니 부러졌던 손발이 나았다. 보살은 그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니, 율사는 더욱 정진하여 21일이 되자 천안(天眼)을 얻고 도솔천
중(兜率天衆)이 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지장과 미륵보살이 나타나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칭찬하면서 지장은 계본(戒本)을 수여하고
미륵은 두 개의 목간(木簡)을 주었다. 하나는 제 9간자라고 쓰여 있
고 하나는 제 8간자라고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은 율사에게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인데 이것은 시각(始覺), 본각(本覺)의 두 각(覺)
을 이르는 것이다. 또 제 9간자는 법대로이고 제 8간자는 신훈성불
종자(新熏成佛種子)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果)와 보(報)를 알 것
이다.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의 몸을 받아 후에 도솔천에 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어 버렸다. 때는
경덕왕 2년(762) 4월 27일이었다.10)
(ㄷ) 진표는 완산주 사람으로 12세에 금산사 순제법사의 강도(講度)
밑에 가서 머리 깎고 출가하였다. 스승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당
나라에 들어가 선도 스님에게 배웠고 그 후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
수보살을 친견하고 오계를 받았다." 진표가 아뢰기를 "부지런히 수
행하면 얼마면 계를 받습니까" 순제는 "정성이 지극하면 1년이라도
된다." 진표는 법사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부안 변산의
부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수련했으며 망신참회(亡身黎悔)
로써 계를 얻었다. 그는 처음 일곱밤을 기약하며 정진하여, 온몸을
바위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은 부러지고 바위에 피를 쏟았으나, 보
살의 감응이 없자 다시 칠일을 기약하며 정진하였다. 14일이 되자
지장보살을 뵈어 정계(淨戒)를 받았다. 그 때는 바로 개원(開元) 28
년(740),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는 뜻이 미륵보살에 있었으
므로 영산사로 옮겨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미륵보살
이 나타나 《점찰경》 2권과 증과(證果)의 간자 189개를 주고 이르
기를 "그 가운데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의 이름이요, 제
9간자는 구족계를 더 얻은 것의 이름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 沈檀木)으로 만든 것으로써 모든
번뇌를 말한 것이니, 이것으로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
는 방편으로 삼으라" 하였다.11)
이 두 개의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진표는 《점찰경》에 의지하여
수행하였고 지장과 미륵보살에게서 계법과 간자를 받았다는 것이
다. 계법은 진표가 율사로 추앙되고 금산사의 방등계단이 설치되었
음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진표의 계법은 그가 소의
(所依)로 삼았던 《점찰경》을 위주로 한 참회의 계법으로 대승보
살계의 일종으로 보아야 하겠다.12) 《점찰경》은 지장보살이 미
륵부처님께서 성불할 때까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사바세계를
제도하라는 부촉을 받고13) 말법중생이 사바세계의 고통을 떠나
게 하기 위하여 목륜(木輪)을 가지고 숙세업보(宿世業報)의 차별을
점찰(占察)하는 법을 가리킨다. 《점찰경》을 위주로 한 참회의 계
법은 진표 이전에도 존재하였지만14) 진표의 점찰법은 기존의
점찰법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표는 《점찰경 소설》의 목
륜대신 미륵보살에게 받은 189간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
륜에서의 숫자를 간자화시킨 것으로 그 중에서 진표는 8간자와 9간
자를 가장 중요시하였다. 이는 8간자와 9간자가 미륵의 손가락뼈라
고 하고 나머지는 침단목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표
는 지장보살이 주관하는 점찰법 대신 미륵보살의 간자로 점찰법을
행하였는지 의문이 간다. 이 의문을 풀어보면
첫째, 당시의 불교 상황은 삼국으로 나뉘어져 있을 당시에 신라나
고구려 백제에는 다 같이 미륵신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15)
그래서 진표의 점찰법은 미륵신앙과 계율사상을 적극적으로 실현하
고자 하는 방편으로 행해졌으며 이는 금산사에 미륵장육상(彌勒長
六像)을 모시고 미륵보살이 계법을 주던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
렸다16)는 것으로 보아 미륵보살을 더 신앙하였다고 본다.
둘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진표가 태어난 지는 백제가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난 후로서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항전을 하던
시기로 통일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시기로 억압받던 백제
유민을 위하여 앞으로는 좋은 세상 즉 미륵하생의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송고승전》에서 버드나무에
꿰인 개구리를 백제 유민에 대비시켜보면 알 수 있듯이 결국 진표
의 수행법은 점찰경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의 관심 대상은 민중들을
위한 미륵신앙과 계율사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17)
진표의 점찰법은 세간의 복좌점상(卜 占相)과 다르다. 세간의 복무
(卜巫)가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간자에 의한
점찰법의 목적은 의혹이 많은 중생들에게 확신과 죄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그 죄를 참회하는 데 있으며, 두려움 대신에 평온함을 주고
자 함에 있다. 따라서 진표는 업장이 두터운 사람에게 지극한 마음
으로 참회할 것을 가르쳤으며, 대승의 일실경계(一實境界)로 나아가
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겠다 하겠다.
따라서 지장보살에게 먼저 계본을 받고, 미륵보살에게서 간자를 받
았다는 것은 미륵불의 하생을 기원(祈願)하는 진표율사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불보살의 감응이라 할 수 있다.
3. 진표율사와 금산사
진표율사가 변산의 부사의암에서 지장과 미륵에게 계법과 간자를
받은 후 금산사로 향하였다. 율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면서 중창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ㄱ) 인민남녀(人民男女)가 머리를 풀어서 진흙을 덮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방석과 담요를 펴놓고 발을 밟게 하고 화려한 자리와 아
름다운 요로 구덩이를 메우기도 하였다. 진표는 모두의 정성 인정
에 좇아서 일일이 밟고 지나갔다.18)
(ㄴ) 진표는 미륵 보살의 수기를 받자 금산사로 가서 살았다. 해마
다 단석을 열고 법시(法施)를 널리 베푸니 그 단석의 정엄(精嚴)함
이 말세에서는 아직 없었던 일이었다.19)
(ㄷ) 율사는 교법 받기를 마치자 금산사를 세우려고 산에서 내려왔
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용왕이 나와서 옥가사를 바치고 팔만
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미륵장육상을 만들어 절에
안치했다.20)
(ㄹ)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못으로
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조사(祖師)가 여러 만석의 소
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大殿)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 아래서 가느다란 간수(澗水)가
주위를 돌아나온다.21)
(ㅁ) 금산사의 사적기에 따르면 혜공왕 2년(766)에 미륵장육상을 봉
안했는데 보처보살(補處菩薩)이 없는 독존불이었다.
(ㅂ) 장육상을 봉안한 지 2년이 지난 후에 장육상 위에 금당을 짓
고 금당의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진표에게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렸다.22)
이와 같은 기록 이외에도 《신승전(神僧傳)》이나 《육학승전(六學
僧傳)》에 전하는 기록도 있으나 이것들은 《송고승전(宋高僧傳)》
의 내용을 본뜬 것으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겠다.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는 (ㄴ)과 같이 금산사에서 주석하면서 보살
계를 주고 법석을 열어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였던 것 같다.23)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가 (ㅁ), (ㅂ)과 같이 미륵장육상을 먼저 모시
고 그 다음에 금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금산사의 장육상과
금당의 건립(삼층장육전)은24) 미륵하생신앙의 불국토를 이루려
는 백제 유민의 발로(發露)라고도 할 수 있다. (ㄱ)과 같은 백제 유
민의 이러한 발로를 살펴보면,
첫째, 미륵신앙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여 설해진 부처님으로, 석
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년 후에25) 지상에 내
려와 용화삼회(龍華三會)를 열어 아직 구제받지 못한 중생을 구제
한다는 것으로 미륵신앙의 형태는 미륵상생신앙, 미륵하생신앙, 그
리고 민간신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륵상생신앙이란 아직 보
살의 신분인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죽은
후에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로, 《미륵상생경》에
의하면 도솔천에 상생하기 위해서는 시(施), 계(戒), 수(修)의 3종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미타신앙의 전래와 함께 도솔천
과 극락 중 어느 곳이 왕생하기 쉬운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26) 단순한 염불로 왕생할 수 있는 극락을 주장한 아미타신앙에
상생신앙은 흡수되는 경향이 있다.27) 하생신앙은 미륵이 성불하
여 부처의 신분으로 지상에 출현하여 용화수 밑에서 3번의 설법을
하여 중생을 성불케 한다는 신앙으로 금산사의 미륵장육상(彌勒長
六象)의 경우, 《미륵하생경》에 의거하여 미륵불이 하생할 미래세
계는 인간의 수명이 84,000세이고 키가 16척이 된다고 묘사하는 데
서 연유하였으며 미륵불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고 자비
로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상의 형식을 취하였다고 본다.28)
미륵사(彌勒寺)가 3개의 금당과 3대의 탑으로써 미륵부처님의 3회
설법장소를 가리켰다면, 금산사의 금당(삼층장육전)은 삼층으로 건
립되고 장육상이 삼층을 관통하게 만들어져 《미륵하생경》과 《미
륵하생성불경》에 나오는 미륵부처님의 하생장소와 설법도량임을
암시하게 하여 백제 유민들의 이상향을 구현하려고 하였고, 그 결
과 금산사를 중건할 때와 진표가 산에서 내려올 당시 백제 유민들
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은 것으로 (ㄱ), (ㄷ)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백제 시대의 최대 사찰인 미륵사29)는 858년 이전에 이미
신라왕권에 의해 미륵도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며,
백제 왕조의 살아있는 혼으로 상징되는 미륵사가 문을 닫게 된 배
경에는 통일신라왕권의 백제 미륵신앙의 탄압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타오르는 백제 유민의 미륵신앙 염원을 막을 길
이 없어 민심을 수습할 목적으로 백제 법왕 원년에 창건된 금산사
를 진표율사로 하여금 중창케 하여 국민통합의 상징적 의도로 보여
주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30)
(ㄹ)에서 보면 금산사를 중건할 당시 용연(龍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전통신앙을 살펴보면 용신(龍神)에 대한 믿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용신신앙(龍神信仰)은 원래 우리 고유의 토착신
앙으로 농경과 관련한 수신(水神)의 형태로 인식되었다. 용은 물과
는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용은 물을 얻음으로써 무궁(無
窮)한 조화를 부릴 수 있다고 보며,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다. 다시 말해 물과 떨어질 수 없는 관련성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당
시의 농경사회에서는 물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기에 용에 대한
믿음은 아주 컸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당시의 미륵신
앙을 살펴보면 용과 깊은 관련이 있고31)
용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이 '미리', '미르'로서 '미륵'이라는 말과는
혼용될 요인이 있고32), 불교가 들어오면서 다른 종교와 상호 연
대 내지 결합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위개념(下位槪念)인
용신신앙이 상위개념(上位槪念)인 미륵신앙으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33)
이러한 과정에서 미륵부처님을 모신 사찰에서는 연못을 만들거나
연못을 메워 조성되거나 혹은 연못을 대체할 인공물을 조성하기도
하였다.(표1 참조)
<표 1> 미륵계 사찰의 용신신앙과의 관계
=사찰명=용신신앙의 형태=근 거=소 재
=금산사=연못을 메워 대지 조성,=금산사 사적=전북 김제시
==석련지 조성
=미륵사=연못을 메워 대지 조성=삼국유사 권2 무왕편=전북 익산시
=법주사=석련지 조성=현존=충북 보은
=발연사=연못을 메워 조성=삼국유사 권4=강원도 금강산
===관동풍악발연수석기
=용화사=연못을 조성함=현존=경남 충무
이렇게 금산사는 연못을 메워 대지를 조성하고 사찰을 만든 경우
로,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은 김제평야의 젖줄과도 같은 위치에
있어 전통종교인 용신신앙이 두드러지게 융성했던 곳으로서 진표율
사가 이곳에 미륵신앙의 거점으로 만들려고 했을때는 용신신앙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많이 신앙했던 용신
신앙이 미륵신앙으로 대체되고 백제가 무너진 후 김제의 광활한 농
토에 대한 신라인들의 수탈과 백제 유민들에 대한 감시 속에서 계
율을 중요시했던 진표율사의 미륵신앙은 이곳을 원활히 통치해야
했던 신라 중앙정부와 새로운 이상향을 그리던 백제유민사이에 적
당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진표가 활동하던 당시의 신라왕은
경덕왕으로, 율사와 경덕왕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의해(義解) 진표전간(眞表傳簡)을 살펴
보면 경덕왕이 그의 왕후와 외척들과 보살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
하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재물을 바치고, 율사는 그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 불사를 하였다. 왕권강화라는 목표 아래 진표가 가
지고 있던 계율중심의 미륵신앙은 백제 유민들을 신라사회에 포용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계율주의적인 미륵
신앙을 후원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34)
이상과 같이 금산사에서는 진표율사 이후에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신행활동을 해왔으며, 특히 그중에서 《미륵하생경》에 의한
신앙이 성행하였고 미륵장육상이 진표율사에 의해 처음으로 조성된
이후 미륵전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도량임을 내세우고 있다.
한편 미륵전이 용화삼회의 《미륵하생경》을 설명한 것이라면 금산
사의 '방등계단'은 《미륵상생경》의 내용을 본뜨고 있다고 보여지
는 부분이다. 미륵전의 오른쪽 높은 지대(地代)에 고려시대의 석탑
을 대표하는 5층석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석종형의 부도가 있는
데 이곳을 '방등계단'이라 한다.
<표 2> 금산사 방등계단
==높 이=넓이(남면 서면)=직 경=비 고=
=상 층=1.00=12.58 12.45
=하 층=0.75=8.37 8.28
=석종단석=0.20=2.03 2.03==四隅獅子模刻
=연 대=0.02==1.24=臺石上面에 浮彫
=석 종=120==0.74=下臺花紋 및 太線
=구 룡=0.34==0.64=1石
==상석 0.50==0.38
=보 주=중석 0.18==0.40=
==하석 0.25==0.56=八葉仰花
<표 2>에서 보여지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고 상하층의 면석에
는 각종(各種) 상(像)이 조각되어 있고 난간 모퉁이에는 사천왕상과
많은 석상이 서 있다. 방등계단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하단의 기단
은 도솔천궁의 내원과 외원35)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의 면석의 제상(諸像)은 천인상으로 도솔천궁에 살고 있다고 하는
천인(天人)을 표현하고 있다.36)
그리고 기단을 두르고 있는 난간은 도솔천과 그 아래 세계를 구분
짓고, 사천왕상은 도솔천 아래에 있는 사천왕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의 부도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등계단은 《미륵상생경》의 내용에
따라 건립되어진 것이며, 《미륵상생경》에서는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계법을 잘 지키고 십선도37)를 닦아야 된다고 하였다.
방등계단은 인간이 계법을 수지하고 십선행을 닦는다면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설법하는 장소에 나
게된다는 《미륵상생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
표율사가 금산사를 중건하고 미륵전을 만들었던 것은 미륵하생신앙
을, 방등계단을 만든 것은 미륵상생신앙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으
로 이해할 수 있다.
Ⅲ. 진표 이후 금산사의 미륵신앙
1. 진표 이후에서 고려 혜덕왕사까지의 금산사 미륵신앙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득법(得法)의 수령(首領)은 영심·보
종·신방·체진·진선·석충 등인데 이들은 모두 산문(山門)의 조
(祖)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진표에게 법을 받은 제자가 많
았는데 그 중에서 영심이 가장 뛰어난 우두머리 제자이며 그들은
점찰교법(占察敎法)에 있어서 일가(一家)를 이루어 한 문파의 조
(祖)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표의 제자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들 즉, 득법(得法)의 영수들에 대한 기록들을 볼 수가
없으므로 그들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들 득법의
영수(領袖)중에서 영심이 진표로부터 전법의 간자(簡子)를 받고 속
리산에 살면서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3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의 대덕(大德) 영심이 대덕·융종·불타 등과 함께 진표를
찾아갔다. 그들 3인은 진표에게 계법을 구하러 왔으니 법문을 주기
바란다고 간절히 청하였으나 진표가 묵묵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
므로 세 사람은 도림(桃林)에 올라가 땅에 떨어지면서 간절히 참회
하였다. 이에 진표는 드디어 가사와 발우 및 《공양차제비법》과
《점찰경》과 189간자를 주었다. 특히 진표는 미륵의 간자인 9자와
8자를 주면서 '9자는 법이요, 8자는 신훈성불종자(新薰成佛種子)이
다. 내가 그대들에게 간자를 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
가서 길상초가 나 있는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인천
(人天)을 광도(光度)하여 후세에 유포토록 하라'고 하였다. 영심 등
은 진표의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
아 절을 짓고 이름을 길상사라 하였다. 영심은 이곳에서 점찰법회
를 설하였다.
여기서 영심 외에 융종과 불타라는 두 제자의 이름을 보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은 앞의 <진표전간>에서 보았던 득법의 영수 7명의 이
름 가운데에는 없었던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은 영심과 함께 속리
산으로 가서 교법을 같이 유포하였으므로 그 대표가 되는 영심 때
문에 득법영수 중에는 들지 못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심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 퍽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심은 진표로부터 받은 교법을 심지에게 전하였다. 《삼국유사》
의 '심지계조'39)에 의하면 심지는 신라 제41대 헌덕왕(809∼826)
의 아들이었다. 왕자인 그는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있었고 천
성이 총명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수도에 열중한 그는 팔공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영심이 진표에게서 불골간자(佛骨簡子)
를 전해 받고 속리산에서 법회를 설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곧
그 곳에 찾아갔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법회가 시작되었으므
로 함께 참례(參禮)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포기하지 않
고 마당에 서서 법당 안에서 행하는 회중(會衆)들을 따라 예참(禮
參)하였다. 그러기를 7일이 지난 날 하늘에서 많은 눈이 내려 쌓였
는데 그가 서 있는 둘레의 10척 남짓 사이에는 한송이의 눈도 내리
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신이하게 여겼으며 영심도
법당 안에 들어와서 함께 예참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
프다는 핑계로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뒷방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남
몰래 법당을 향하여 예참하였는데 얼마나 지극하게 하였던지 팔꿈
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옛날 진표가 간구참회(懇求黎悔)할 때
처럼 맹렬히 예참하였는데 지장보살이 와서 위로까지 하였다. 법회
가 끝나서 자기의 절로 돌아가는 길에 심지는 옷 가슴 속에 두 개
의 간자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곧 영심에게로 돌아가서 그 간자를
돌려주었다. 영심은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간자를 넣어 두었던
함을 살펴보니 봉해둔 것이 그대로 있어서 속을 열어보니 두 개의
간자가 들어있지 않았다. 영심은 매우 이상히 여기고 그 간자를 도
로 넣고 그 함을 겹겹으로 싸서 잘 간직해 두었다. 그런데 심지는
한참을 가다가 보니 역시 간자가 아까처럼 자기옷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영심에게로 가서 그것을 돌려주니 영
심은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간자를 봉행하라"고
하면서 심지에게 간자를 주었다.
이에 심지는 간자를 받들고 팔공산으로 돌아오니 산신이 두 신자를
거느리고 마중을 하고는 심지에게 청하여 정계(淨戒)를 받았다. 심
지는 간자를 봉안할 터를 3신과 의논하여 간자를 던져서 정하고 당
(堂)을 지어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심지는 팔공산을 중심으
로 교법을 크게 떨친 모양이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음은 안타깝다.
또 신라말에는 대덕 석충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의 가사 한벌과 간
자 189매를 바쳤다는 기록이 역시 <심지계조>에 보이지만 실상 고
려 태조의 행적에는 점찰교법이나 미륵신앙 등에 접촉하여 후원했
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견훤과
금산사의 관계라든가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던 사실 등
에서 이들 두 사람과 진표계 불교신앙과의 사이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견훤과 진표계의 미륵신앙과의 관계는 현재의 문헌상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아들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견훤이 금산사에 자주 왕래하게 되니까 그때를 노
려서 신검이 거사를 단행했음 직하다. 그렇다면 견훤이 진표계의
미륵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
한다. 뿐만 아니라 진표의 활동 영역이 속리산·금강산에 미쳐 있
었고 이 곳은 궁예의 활동 영역과도 중복되고 있었으므로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던 것도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과 무관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40)
한편 견훤은 동진대사(경포)를 후원하여 진지 남복선원에 머물게
했는데 동진대사는 "지(知)가 아니면 법(法)을 수호할 수 없고 계
(戒)가 아니면 비위(非違)를 방지(防止)할 수 없다"고 하였다.41)
말하자면 호법과 비위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와 계를 함께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견훤은 그 불교적 경향이 미륵
신앙에 접근해 있었다 할지라도 특히 계율을 중시한 진표계의 미륵
신앙을 추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진표계의 미륵
신앙과 견훤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존하는 금석문에 보이는 고려시대의 유가종 승려들을 살펴보면,
현화사의 재지국사 법경스님(∼1002, 1034∼), 혜소(慧炤)국사, 정현
(鼎顯, 972∼1054), 지광국사(984∼1067), 혜덕왕사(1038∼1096), 원
증승통덕겸(圓證僧統德謙, 1083∼1150), 증지수좌(證智首座), 관여(觀
輿, 1096∼1158), 홍진국존(弘眞國尊, 1228∼1294) 등이 계셨다. 더구
나 고려시대의 미륵신앙, 특히 진표계의 미륵신앙의 계승에 관한
자료는 아주 희귀한 편이다. 다만 금산사의 혜덕왕사(1038∼1096)의
비명42)에 약간의 자료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비명에 의하면
혜덕왕사는 11세에 해안사의 해린(海麟) 문하에 출가했으며 그 뒤
복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고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
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大德)이 되었던 사람으로 문종의
제 6왕자를 제자로 삼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법주사 주지 도생승통
이다. 한편, 혜덕왕사는 내전의 대법석에서 설주가 되기도 했다. 그
뒤 선종의 명을 받아 현화사로 이주하기도 하고 개국·자은 양사
(兩寺)의 선장(選場)에 관계도 했으며 그 강석에 있을 때에는 승속
천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는 또 선종으로부터 여러 가지 채화(彩
畵)와 어서(御書) 1통을 특사(特賜)받았고 대각국사 의천으로부터도
각별한 흠모를 받았으며 중국에서 온 화엄승(華嚴僧) 혜진과도 돈
독한 교제를 나누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이 왕실과 국내외의 수많은 승속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
았던 혜덕왕사는 그가 추구했던 미륵신앙의 형태를 비명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ㄱ) 석가여래 및 현장·규기 이사(二師)와 해동육조상43)을 그
려서 각 사(寺)에 주어 안치하게 했다.
(ㄴ) 당 문왕 때에 신라의 표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백권을 보
내와…… 점점 이 땅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미 원효법사가 앞에서
이끌었고 태현대통이 이를 이어서 후에 등등히 전해져 세세로 법사
가 흥하게 되었다.
(ㄷ) 사(師)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미래에 감과(感果)를 돕고자 한
다면 현재에 식인(植因)함만 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상생을 간절히
원하여 멀리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따르고 가까이는 자은(慈恩)의
자취를 흠모했으며 자씨존상(慈氏尊像)을 그려 매년 7월 14일에 법
을 열어 승려를 모아 예참귀의(禮黎歸依)케 했다.
(ㄹ) 사는…… 미륵여래 명호(名號)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
戒)를 문하제자에게 주는 등 탕탕연(蕩蕩然)하게 무우색중(無憂色
中)에…… 천화(遷化)하였다.
위의 사료(史料) 중에서 혜덕왕사가 설정한 해동육조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위 사료에 보이는 원효와 태현이 그 육조
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광교원을 세웠는데 혜덕왕사 당시의 금
산사의 전각구성을 보면 <표 3>과 <표 4>와 같다.
<표 3> 혜덕왕사의 금산사 중창 전각 구성 14
=地 域 = 殿 閣
=大 寺 地 域 =三層丈六殿, 大雄大光明殿, 靈山殿, 海藏殿, 大藏殿,
無說殿 -1
==藥師殿 極樂殿, 能仁殿, 文殊殿, 普賢殿, 圓通殿, 羅漢殿, -1
==十王殿, 彌勒受戒殿, 地藏受戒殿, 藥師殿, 香積殿, 禪燈殿, -1
==無形堂, 放光殿, 三層梵鍾樓, 萬歲樓, 雲累, 太陽門, 天王 -1
==門, 解脫門, 曹溪門, 東上室, 西上室, 僧堂, 禪堂, 東方丈, -1
==西方丈, 梵音寮, 侍者寮, 東雲集, 西雲集, 觀靜寮, 東板頭, -1
==西板頭, 淸心堂, 碧眼堂, 玩月堂, 海會堂, 迎賓寮, 知賓寮, -1
==蓮花堂, 滿月堂, 淸風寮, 影山堂, 仰山堂, 東隅房, 西隅房, -1
==東7 堂, 西7 堂, 東饗老房, 西饗老房, 省行堂及跡槃堂, -1
==東行廊, 西行廊, 外行廊
=奉天院地域 =大光明殿, 山呼累, 兜率殿, 禾次微殿, 七星殿, 八關堂,
-1
==三層鍾閣, 左梗累, 右梗累, 排雲累, 王師閣, 僧療, 侍者房
=廣敎院地域 =金堂普光明殿, 說法殿, 祝麓樓, p檀林, 眞表影堂, 海東
六祖 -1
==影堂, 十聖影堂, 三層鍾閣, 雲集堂, 鎭海堂, 精進堂 -4
<표 4> 금산사 전각 구성 14
=信仰體系 = 殿 閣 의 構 成 2
=彌勒信仰= 三層丈六殿, 彌勒受戒殿
=華嚴信仰= 大雄大光明殿, 文殊殿
=阿彌陀信仰= 極樂殿
=藥師信仰= 藥師殿
=法花信仰= 靈山殿, 能仁殿, 普賢殿, 羅漢殿
=地藏信仰= 地藏受戒殿
=觀音信仰= 圓通殿
=十王信仰= 十王殿
이를 통하여 살펴보면 미륵신앙, 화엄신앙, 미타신앙, 약사신앙, 관
음신앙, 지장신앙, 시왕신앙 등을 수용하는 가람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미륵신앙에 의거한 삼층장육전이 중심
이 됨을 알 수 있으며 미륵수계전, 지장수계전 등은 진표의 창건설
화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가람구성은 미륵신앙 지역
과 화엄신앙,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등을 수용한 대적광전의 2개 지
역으로 나누어져 있다.44)
광교원지역에 진표영당이 있었다는 것은 혜덕왕사의 불교신앙의 법
맥이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혜덕왕사 후의 미륵신앙에 대해서 살펴보면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
기는 하지만 그가 미륵보살을 예배했고 또 참회계법을 수지했으며
또 미륵불에도 관심을 보여주고 있음이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앞
의 진표의 경우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미륵하생경》에 의한 신
앙에서는 서원의 대상이 미륵보살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혜
덕왕사의 미륵신앙도 진표의 경우처럼 《미륵하생경》에 의한 신앙
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혜덕왕사도 진표와 같이 점찰법회를 통한 미륵신앙의 구현에
힘썼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진표
가 중창한 금산사를 중심으로 혜덕왕사가 활동했으며 오늘날까지도
혜덕왕사의 비가 금산사에 전해오는 것을 보면 그가 진표의 불교신
앙에 접근해 있었음은 추정할 수 있다. 또 고려시대 《도속원점찰
회소》와 《속리사 점찰회소》 등의 기록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고
려시대에도 미륵도량에서는 점찰법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자료의 한계상 진표계 미륵신앙의 계승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음은 퍽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2. 조선 수문대사에 의한 금산사 미륵신앙
고려불교는 여말에 이르러 국가의 과잉적 보호 아래 세속과의 밀접
한 관계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
다. 당시 성리학을 수학한 학자들 사이에 불교와 권문세력을 배척
하면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된다. 지금까지의 사회질
서나 이념체계를 멀리하고 유교이념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시
키고자 불교를 멀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의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리하여 중기 이후로는 민중의 불교가 되어 민중에 의해 신행되었
다. 이러한 때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지던 미륵신앙은 억불숭유정책
에 의한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과 불상 그리고 많은 불교문화재가
변란을 당하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어 신봉되
어진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화 되면서 나타나는 미륵불의 형태는 첫째 두
부절단불(頭部切斷佛)로서 불두가 떨어져 몸체만 남은 불상 위에
불두(佛頭)만을 조성하여 봉안한 경우로 조선사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미륵불의 새로운 형태이다.45) 둘째 판석조형불(板石造型
佛)로 새로운 미륵불에 대한 조성은 어렵고 외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음각이나 양각으로 미륵불을 조성하여 산기슭이나 구석진
곳에 모신 예이다.46)셋째 입석미륵(立石彌勒)으로 한국의 거대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입석을 미륵으로 신봉하는 경우다.47)넷째
하체매몰불(下體埋 佛)로 사원을 파괴하고 불상을 불태우는 과정
에서 석상으로 된 미륵불을 땅에 파묻은 예48)와 미륵하생신앙
과 연관되어 말법을 구제할 미래불로서 미륵하생출현을 기다리는
구백제 지역인의 염원에서 땅에 묻은 경우가 그 예이다.49) 이렇
게 나타난 미륵신앙은 양대 병란과 제도적인 모순 등에서 오는 사
회적인 혼란의 과정에서 이를 구제할 미래불로서의 미륵신앙이 민
중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금산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커다란 변화가 온다. <표
3>과 <표 4>에서 보듯이 고려시대의 혜덕왕사 이후에 산내 암자
를 포함한 86개의 전각이 있었다.50)그러나 임진왜란 때 금산사
에서 승병활동을 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이 와
서 금산사를 전소시킨 기록이 있다.51)금산사가 진표율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변모한 뒤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형 법당으로 존
재하다가, 고려 혜덕왕 이후 여러 가지 사상이 유입되어 종합불교
의 성격을 띤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수문대사에 의해 2개의 불전형(佛典形)이 바뀌었다. 대적광전을 중
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었다. 이 두 개의 불전은 방등계단을 사이에 두고 열십
자형으로 교차되게 건립되어졌다. 화엄신앙은 7세기경에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고 의상대사에 의해
전국에 보급되어진다. 화엄신앙이 가진 논리적 체계와 세계관은 고
려시대에 법상종과 함께 교종의 주도적 종파로 화엄종으로 정착되
어진다.52) 혜덕왕사는 금산사를 대규모 가람으로 변모시키면
서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대웅대광명전', `문수전'을 건립하여 화엄
신앙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아미타신앙과 약사신앙, 법화사상, 지장
신앙, 관음신앙, 마지막으로 시왕신앙도 받아들여져 많은 전각이 세
워졌다. 그러나 임란 때 일본군에 의해 전소된 후 조선 인조 때 수
문대사에 의해 35년간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삼층장육전
', `미륵수계전' 등 미륵사상은 미륵전이라는 삼층 건물로 만들어지
고 미륵전 앞에 있었던 탑은 법당으로 만들어져 현재는 미륵전 앞
쪽 `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화엄신앙은 아미타신앙, 약
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
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진다. 수문대사는 미륵전을 중수하면서 진표
율사 때부터 전해져 오는 삼층장육전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그
리고 현판을 걸게 되는데 용화삼회의 설법 장소임을 증명하고 있
다. 1층의 현판은 대자보전이다. 대자보전이란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세계는 십선행을 많이 행하는 세계이므로 모든 중생이 자비심을 가
지고 있으므로 대자보전이라 하였다. 2층은 용화지회로서 미륵부처
님께서 설법을 하시는 장소를 뜻하고 있다. 그리고 3층은 미륵전으
로 미륵부처님께서 3회의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시고 건설하신
세계를 뜻하고 있다. 이렇게 미륵하생신앙에 기초를 둔 미륵전의
건립은 진표율사 이후 미륵하생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발원이라 하
겠다.
3. 일제하 ~ 1962년의 금산사의 미륵신앙
일제하에서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을 살펴보면 미륵하생신
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하에서 미륵하생신앙은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재래 불교사찰의 전통적 미륵신앙
이고, 둘째는 한국에 처음으로 법상종을 일으켰다고 하는 진표율사
가 중건했다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증산을 미륵하생으로 보는 진산
계 미륵신앙이고, 셋째는 미륵하생신앙이 민간신앙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미륵하생의 `이미지'를 가지고 이것 저것을 습합(習合)시킨 이
른바 의사(擬似)미륵하생신앙이다.
먼저 전통 재래사찰에서의 미륵신앙이다. 사회가 안정되었을 경우
에는 미륵상생신앙이 발전하였고 불안정하면 미륵하생신앙이 발전
하게 된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면
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민중에 의한 미륵신앙은 하생신
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종교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안한 시기에도 전통사찰에서는 미륵상생신앙을 통한 기도발원(祈
禱發源)을 하였다.53)둘째, 증산을 미륵불로 모시는 증산계 미륵
하생신앙이다. 증산은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정읍군 덕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나 39세라는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
은 생은 미륵사상에 심취되어, 증산 스스로 미륵불로 자처했고 머
지않아 미륵불의 용화회상이 이 땅에 건설되리라 했다.54) 그는
자신이 바로 천제인 동시에 미륵불로 자처했으며, 자신의 출현이
바로 미륵불의 출현이라 했다. 《대순전경》에 의하면 그는 원래
천제였는데 지상의 여러 신명들이 하늘 나라로 올라와 인류와 심명
계의 큰 겁액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서천서역대법국천개탑
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에 대순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장육상에 임하여 30년을 머물러 있다가 사람으
로 화현했다는 것이다.55) 그리고 그가 임종시에 "나는 미륵불이
니,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손에
여의주를 들었으나 나는 입에 들었노라"56)이와 같이 증산은 스
스로 미륵불을 자처했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선경의 모습은 용화
회상의 모습과 흡사하다.57)증산의 이러한 가르침은 증산 사후
수없이 생긴 증산계 여러 종파에 이어져 상제나 미륵불로서의 증산
을 만들었다.
증산사상은 신도(神道)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천지공사'58)라는
이름 아래 `지방신(地方神)' 등을 만들고 증산 스스로는 상제가 되
어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증산이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풍기고 있는 방향 감각은 전래해 오는 불교의 미륵불신앙을 가지고
금산사에 집중케 하였다는 것이다.59)증산 사후 그의 제자와 자
손에 의해 증산교는 발전을 하고 있다.
(ㄱ) 김정열(1862~1932)은 그의 수제자로, 김정열이 말하기를 증산
은 미륵불로서 인세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운도를 짜놓고 금
산사에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다고 하면서 금산사 미륵불을 증산에
영체로서 신봉하였던 것이다. 그는 금산사내에 `미륵불교'라는 교파
를 세워 종교활동을 하였다. 김정열 사후 미륵불교는 2개파로 나누
어지고 그중 용화계(i華契)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본부를 둔
대한불교 법화종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ㄴ) 강무임(1903~1959)은 증산의 딸로서 그의 남편 김병철과 동심
(同心)하여 증산선불교라는 간판으로 포교를 하였다. 증산의 사상중
운도60)론을 중요시하는 교파다.61)
(ㄷ) 서백일의 용화교로 그는 전남 구례 출신으로 11세에 선암사로
출가하여 공부하다가 1931년 구례에 `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미륵불교'를 포교했다. 서백일의 신앙대상은 당래교
주 미륵불이지만 용화보전 p.18에서 "네가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
사의 후신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 자신이 미륵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서백일보다 먼저이기에 그는 증산을 미륵불로 모시
었다. 이와 같이 증산을 미륵불로 모시고 자신은 그를 내신하는 주
권자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란한 생활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
고 그의 사후에는 증산을 미륵불로 모시는 증산교적 요소는 사라지
고 완전한 불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밖에도 여러 명의 제자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증산계미
륵신앙을 위주로 신종교를 만들었다.62)
이들은 증산이 금산사에 대한 말을 많이 하자 그의 사후에 금산사
를 도득(圖得)하려는 움직임을 갖는다. 금산사내에 미륵불교를 세운
것이나,63)
서백일의 용화교가 사찰령 이후 7세주지였던 성열화상 때 금산사
미륵전을 채색하여 금산사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간 것과 그리고
안성태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이 별립한 것을 보고 이것을
통합하여 `미륵회불숭배회'를 만들었으나 금편을 갈취하여 사라졌
다.또 정혜천은 `미륵숭배회'를 조직하여 미륵신앙운동을 전개하기
도 하였다.
이러한 도득운동은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으며, 금산사 미륵
전을 중심으로 찾아드는 신앙인들은 순수한 미륵신앙과는 거리가
먼 신앙인들이었다.
셋째 의사(擬似) 미륵종교이다. 의사미륵신앙을 가진 단체들은 증산
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힘입었다거나 그의 수제자에게 계통을 대려
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나온 미륵설이다.
이들은 증산을 금산사 미륵이 화현한 것이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으
며, 교리는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교다.
이상으로 일제하에서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을 살펴보았
다. 이들은 진표율사가 중건한 금산사와 처음으로 모신 미륵불을
중심으로 미륵하생신앙에 중점을 둔 증산계 교파의 미륵신앙을 하
고 있다.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난 미륵신앙은 일제하의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기는 하였지만 순수한 미륵신앙에서 벗어난
신앙활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Ⅳ. 결론
미륵신앙에 대한 고찰을 금산사를 중심으로 해보았다. 통일신라시
대의 진표율사에 의한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전의 건립은 이 지역이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진표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
기> 및 《송고승전》의 <진표전>에 전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진
표율사의 신앙대상은 미륵신앙이었고, 이러한 계율주의적 미륵신앙
은 백제 유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
륵신앙이 발전함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를 배출하
여 금산사를 종합불교의 도량으로 탈바꿈시켰고, 조선시대에는 암
울한 시기를 맞이하여 미륵신앙이 민중신앙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임진왜란 때 전소되는 시련을 겪고 오늘에 이르렀다.
정화 후 8세가 되고 현 금산사 회주로 계시던 월주 스님이 3월 1일
자로 주지로 발령되어 왔다. 월주 스님은 미륵사상과는 거리가 먼
증산계 미륵운동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불교 본래의 자세로 되돌아
갈 필요성을 느끼고 1966년 `미륵정심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십
선행을 권장하고64)금산사에서 신도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후
용화교가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자 서백일의 미륵신행자들을 올바른
미륵신행자로 민들기 위해 노력하였다.65)그후 월주 스님의 대사
회적 운동은 미륵신앙에 중심을 둔 대승보살사상으로 나타나 현재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으로 펼쳐지고 있다. 금산사에서는 그의 수제
자 도영 스님이 주석하면서 가람 번창과 `미륵 바르게 알기 운동'
을 펼치며 가람 수호에 앞장서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금산사의 미륵전을 중심으로 증산계 신흥종교들이
정통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현실을 보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986년 12월 금산사는 대적광전이라는 법당
이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 다음날 금
산사의 전각들을 살펴보던 중 미륵전 후면의 기둥과 문살에 불을
지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현재의 미륵전 벽면을 살펴보
면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과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에 의한 훼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어, 빠른 시간내에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
다.66) 물론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일은
되풀이되겠지만 사중이나 문화재관리국의 시급한 조처가 있어야 하
겠다.
앞으로의 미륵신앙은 부처님의 자비로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
든 기쁨과 슬픔을 대신하는 적극적인 종교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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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모음
1) 예를 들어 궁예의 미륵신앙 등
2) 《彌勒下生經》 -50
3) 《金山寺誌》
4) 《金山寺誌》
5) 上揭書
6) 《宋高僧傳》 <眞表傳>
7) 《三國遺事》 卷4 <眞表傳簡>
8) 그 외, 《三國遺事》 <關東楓岳鉢淵藪石記>, 《唐高僧傳》 <神僧傳
眞表>, 《六學僧傳》 <眞表傳>
9) 《宋高僧傳》 卷14 <眞表傳>
10) 《三國遺事》 卷4 <關東楓岳山鉢淵藪石記>
11) 《三國遺事》 卷4 <眞表傳簡>
12) 《三國遺事》 卷4 <眞表傳簡>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궁중으로
그를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租 7만 7천석을 주었고 왕후와 외척들
도 모두 계품을 받고 명주 5백단과 황금 50냥을 시주했다."
13) 大正藏 13, pp.779∼780
14) 《三國遺事》 卷4 義解 圓光西學, 권5 感通 仙桃聖母 喜佛事, 권4
義解 ○福不信
15) <三國時代의 彌勒思想> 《한국미륵사상》, 김영태, 한국불교사상총
서
16) 《三國遺事》 卷4 <관동풍악발연수석기>
17) <新羅眞表의 佛敎信仰과 金山寺> 윤여정, 1988.
18) 《宋高僧傳》 卷14 <眞表傳>
19) 《三國遺事》 卷4 義解 <眞表傳簡>
20) 《三國遺事》 卷4 <關東楓岳鉢淵藪石記>
21) 《擇里志》 卜居總論 山水
22) 《三國遺事》 卷4 義解 <關東楓岳鉢淵욋石記>
23) 경덕왕이 진표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것은 《三國遺事》 卷4 <眞表
傳簡>에 나온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궁중으로 그를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조
7만 7천석을 주었고 왕후와 외척들도 모두 계품을 받고 명주 5백단
과 황금 50냥을 시주했다."
24) 임란전에는 금산사의 사역을 크게 3곳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했다.
그중 대사지역에는 62개의 전각이 있었는데 그중 삼층장육전이 있었
다.《금산사지》 《금산사사적》
25) 미륵 하생의 시기는 경전마다 차이가 있어 논란이 되어 왔다. 《장
아함경》 《증일아함경》 《구사론》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되는 84,000년 후, 《미륵상생경》에서는 56억 7천만년 후를 주장하
고 있다.
26) <원효의 미륵사상연구―미륵상생경종요를 중심으로―> ,허경구, 동
국대학교, 1988.
<신
27) <한국미륵신앙의 연구>, 김삼룡, 동화출판사, 1984, p.43.
28)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전각구성과 배치형식 연구>, 김태열, 서울대
학교, 1989.
29) 익산 미륵사 창건연기설화 《三國遺事》 卷2 武王.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
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도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서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이 상
을 만들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
다.
30) <한국 미륵신앙의 연구>, pp.151∼154.김상룡,
<백제 미륵신앙의 천년
31) 미륵부처님의 세계를 용화세계라 하고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한
다고 하며, 미륵전의 다른 명칭도 용화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용
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32) 권상로 <한국 고대신앙의 一變> pp.21∼22, 불교학보 1집
33) 윤여성 <신라 진표의 불교신앙과 금산사> 전북대학교 1988,
pp.21∼22.
34) 앞의 논문 pp.31∼32.
35) 도솔천에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이 이곳에서사바세계로 내려와 성불할 준비를 하
고 있는 곳이다. 《불교학 개관》, 1983.
36) 천인의 특징은 천인이 입고 있는 옷에서 알 수 있는데 천인의
옷은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기에 언제나 하늘로
날려서 양끈이 서로 고리를 이루게 하는 양식이다. 《불교학대사
전》 卷6 보련각 1982, p.453.이것과 방등계단에 조각된 제상의 옷
이 비슷하다.
37) 십선도:身業으로서의 殺生 偸盜 邪淫과 口業으로서의 妄語 兩舌
惡語 綺語, 意業으로서의 貪心 疑心 癡心 등의 10惡을 여의고 열
가지 善行을 닦아 行을 하는 것으로
1.不殺生:살생하는 것은 自性 가운데 慈悲佛種을 끊는다.
2.不偸盜:도둑질은 自性 가운데 福德佛種을 끊는다.
3.佛邪淫:邪淫은 自性 가운데 淸淨佛種을 끊는다.
4.不妄語:妄語는 自性 가운데 眞實佛種을 끊는다.
5.不兩舌:이간질하는 것은 화합성을 깨뜨린다
6.不妄語:남이 들어 불결하고 성낼 말은 하지 않는다.
7.不綺語: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다.
8.不”貪:남의 것을 탐내거나 헛된 욕심은 죄악의 근본이 된다.
9.不疑恨:남을 미워하고 성내고 시기 질투 원한 맺는 일을 하지 않
는다.
10.不愚癡:선지식으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닦아 성인의 도를 믿어 행
하며 삿된 말에 속거나 삿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38)《三國遺事》 卷4
39) 《三國遺事》 卷4 義解 <心地繼祖>
40) <궁예의 미륵사상 연구>
41) 玉龍寺 洞眞大師 貧雲塔 碑銘, 《朝鮮金石總攬》 上 p.90.
42) 금산사 부도전 소재
43) 해동육조를 元曉·大賢·眞表·釋仲·鼎賢·海麟으로 추정한
다.<性相融會思想 成立의 思想的 배경>, 1983, pp.114∼115.
44) 대적광전은 1986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96년 복원하였
다.
45) 전북 옥구군 성산면 창오리, 전북 고창군 대산면 대장리, 전남
곡성군 고달면 목동, 경기 김포군 월곳면 군하리, 경북 칠곡순 북삼
면 오태리 등
46) 전남 고흥군 도화면 봉룡리,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충북
제원군 송학면 장곡리, 충북 중원군 창동, 경남 밀양군 무안면 연상
리, 경남 김해군 진계면 초전리, 경남 창녕군 영산 구계리 등
47) 경기 김포군 대곳면 가현 4리, 경기 김포군 대곳면 초원 2리,
경기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경기 김포군 계양면 잠실리, 전북 고창
군 무장면 도곡리, 전북 김제군 죽산면 서포리, 전남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 전남 승주군 낙안면, 경남 남해군 남면 남가천, 경남 고성
군 하이면 내원리, 충남 아산군 송옥면 의암리등
48)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 충북 움송군 맹동면 본성리, 전남
곡성군 경면 현정리 등
49) 전북 고창군 공음면 건등리 -50
50) 《金山寺誌》
51) 《金山寺誌》
52) 최병열 <한국불교의 전개>, 《한국사상의 심층연구》 p.83
53) 《석문의범》에 의하면 조석예불을 할 때 주불로 모신 대웅전
에서부터 극락전, 팔상전, 약사전, 용화전, 대장전, 관음전, 나한전,
명부전, 신중단, 산왕단, 총왕단, 칠성단, 독성단, 현왕단 등 순으로
예불을 하라고 하였다. 그중에서 용화전은 다섯번째로 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미륵 상생신앙은 일제를 겪는 동안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았다.
54) 《大巡典經》 3~144 -50
55) 《大巡典經》 5~12
56) 《大巡典經》 13~1
57) 《大巡典經》 5~21과 《미륵경전》의 비교
58)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先天의 度數를 뜯어 고치고 後天의
無窮한 운명을 열어 仙境을 세우려 함이라. 先天에는 相剋이 인간
사물을 지배하므로 世世의 한이 생기고 맺혀 三界에 의하여 천지가
常度를 잃고 세인의 모든 慘火가 생기나니, 그러므로 내가 天地度
數를…… 무릇 만사가 巨細를 막론하고 神明으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이므로 먼저 神道를 造化하여 굳게 度數를 정하면 저절로 기틀이
열려 人事에 성공이 나타나니 이것이 天地公事라 함이라. 《甑山天
師公事記》, p.99
59) 《甑山天師公事記》, p.13 -50
60) 運道란 이 세계는 음양조화의 입법에 따라 필연적으로 운행되
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61) <母嶽山下의 宗敎> 《思想界》 p.168
62) 정인균의 미륵불교, 김규주의 태을교
63) 김형렬은 당시의 주지였던 법경(사찰령 이후 4세 주지)과 결탁
하여 금산사내에 미륵불교라는 교파를 세운다. 한때 입교자가 수천
에 이르렀으나 금산사의 미륵불이 곧 증산이요, 그들의 본존이라
주장하였기에 금산사 주지는 퇴거를 요구했다. -50
64) 신도들에게 수계를 할 때 미륵십선계를 주고 있음.
65) 《금산사지》, <미륵신앙과 십선도> 《한국 신흥 종교자료》
제2집
66) 현 미륵전 좌우 외측 벽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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