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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은 폐하의 날들을 바라보았느니
구원해주실 만큼 강력한 왕이시고 경건함의 총체이시며
십자가 숭배의 독이시고
공명정대함과 온후함의 기사인 살라흐 앗 딘이시여
이슬람과 무슬림의 군주이시고
기독교도들로부터 신의 교단을 구하시며
성지들을 자매로 만드시는 승리에 빛나는
샤디의 친족 아이유브의 아들이신 유수프시여
그의 무덤에 신은 은정의 소나기를 내려주고
한없는 자비심으로 절개에 대한 보답을 해주시는도다
-역사가 바하 앗 딘-
탄생과 성장
샤디는 쇠퇴해가는 자신의 고향 다윈을 떠나 일족을 이끌고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그에게는 비흐루즈라는 셀주크 술탄의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아보고 있는 옛 친구가 있었는데 샤디는 일가를 데리고 바그다드로 찾아가 그에게 의탁하고자 했다. 비흐루즈는 자신을 찾아온 옛 친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막강한 배경을 이용해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를 티크리트 성의 지휘관에 천거했고 그의 일족은 이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132년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마흐무드가 스물 여섯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셀주크 왕족과 총독들은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렸다. 모술의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는 걸출한 야심가였다.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그는 이 계승전쟁에 뛰어들어 티크리트 근처에서 경쟁자 무스타르시드와 전투를 벌였지만 크게 패하여 그 자신도 적들에게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한 사내의 도움으로 그는 목숨을 건질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샤디의 아들 아이유브였다.
그는 장기를 무스타르시드에게 넘겨 그의 은덕을 입을 수도 있었지만 친절하게 배까지 내주어서 장기가 강을 건너 탈출 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기는 이 젊은이의 기사다운 행동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문에 아이유브 일가는 비흐루즈와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비흐루즈는 장기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후에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아이유브의 동생 시르쿠가 그 급하고 의협적인 성격으로 어떤 여자의 부정을 복수해 준답시고 마을 건달을 죽인 것이다. 이들 가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갖고있던 비흐루즈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이들에게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명령했고 아이유브 일가는 탄탄하게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티크리트를 떠나야만 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티크리트를 떠나는 그날 아기가 한명 태어났다. 형제들은 하필이면 이런 날 아기가 태어났다며 아이유브의 득남을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해석치고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해석이었다. 이 아기가 바로 훗날 이슬람과 서양 모두에서 추앙받게 되는 이슬람의 영예이며 고결한 정복자인 살라 앗딘 이븐 유수프 아이유브(1138~1193)이다.
티크리트에서 쫓겨난 이들 가문은 과거 그들이 은혜를 베풀었던 장기에게 몸을 의탁한다. 탄탄한 기반을 잡아가며 이슬람의 명망있는 지도자로 떠오르던 장기는 옛날 아이유브가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장기는 아이유브 일가에게 그가 최근에 새로이 점령한 발벡을 내주고 이곳의 지배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아이유브의 형제들은 이후 장기의 군대에 들어가 그 밑에서 전쟁터를 돌아다니게 된다. 이때 어린 살라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추측하기로 그저 보통의 무슬림이 받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 뿐이다.
기독교도들에 대항하여 이슬람의 반격을 이끌던 장기는 마침내 1144년 기독교도들이 점령하고 있던 에데사를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에데사 탈환은 전 이슬람인들을 흥분시키며 지하드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슬람의 영웅으로 떠오르던 장기는 2년 후인 1146년 자신의 환관의 손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여 그 뜻을 마저 피우지 못했다. 사소한 잘못으로 처벌 받을것을 두려워한 환관 야란카슈가 잠든 장기를 살해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온 진지는 혼란으로 들끓었다. 왕국은 당장 내분으로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유독 평정을 유지하며 야심을 키워가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누르 앗딘 장기(누레딘). 바로 이마드 앗딘 장기의 둘째 아들이다. 장기의 왕국은 그의 아들들과 지방 총독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아이유브는 적극적으로 외부의 움직임에 뛰어들지 않고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누르 앗딘에게 항복했다.
새로운 군주인 누르 앗딘을 만난 아이유브 일족은 그의 정복전쟁을 도우며 승승장구 하게된다. 특히 1154년 누르 앗딘의 다마스쿠스 점령은 아이유브-시르쿠 형제의 활약 없이는 불가능 했다. 이제 누르 앗딘은 시리아를 통일하였으며 전 이슬람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고 아이유브 일가는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 2차 십자군 전쟁과 장기왕조의 저항
장기와 누르 앗딘 부자는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의 반격을 이끈 대표적 인물들이다. 십자군은 1096년 부터 약 200년 동안 모두 8차례의 원정을 벌였다. 십자군 원정의 명분은 셀주크 투르크의 성지순례 방해 였다. 1071년 유목민인 셀주크 투르크가 제국의 중심부인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대승을 거두고 비잔틴 황제를 포로로 잡자 전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압박을 당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의 박해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여 성지회복을 위한 성전을 호소하였다.
일단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종교적 열광에 빠진채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며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교도들을 격퇴하기 위해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란을 겪고있는 독일지역을 제외하고 서유럽 각지에서 기사와 병력들이 모여들었다.
예루살렘은 638년 3대 칼리프 우마르가 정복한 이래 이슬람의 세력권에 있는 도시였으며 메카,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제3의 성지였다. 또 동시에 기독교와 유태교의 성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세 종교간 충돌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있는 동안에도 기독교인들의 순례는 보호되었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날 정도로 평화가 유지되었다. 기독교 순례자가 박해받았다는 호소는 다분희 정략적인 발상이었다.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추진한 데에는 그만의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동로마교회)를 로마교회(서로마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지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교황 최대의 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 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 가야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반 민중과 상인들 역시 십자군에 크게 호응하였다. 서유럽은 100년이상 인구가 급팽창했으나 그에 반해 농업생산은 제자리 걸음이었고 특히 1094년의 흉년이후 기근 현상은 심각해졌다. 농부들은 굶주림과 농노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군에 들어갔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나 십자군 원정을 돈벌이의 호기로 여겼던 것이다.
마침내 1097년 봄 3만명의 십자군 전사들은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 이슬람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1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이슬람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기괴한 모습을 한 서유럽인들의 갑작스런 침략에 당황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보급문제로 고생했지만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1098년 난공불락의 요새인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시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099년 7월 15일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약 2주일간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후 몇 십 년 간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작령 등의 기독교 국가를 세웠으며 그곳에 유럽인 통치자들을 두었다. 그들은 해안과 내륙의 변경을 따라 성을 세웠다. 전쟁에 승리한 십자군은 성지와 점령지를 방어할 군사들만 남겨 놓고 대부분의 원정군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130년대에 이르자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지하드(성전)의 이념이 확산되었다. 1128년 등장한 장기는 열세였던 이슬람의 위치를 역전시켰다.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해서 오론테스강의 동쪽에 있는 이슬람 도시들과 성채들을 모두 점령하고 1144년에는 에데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장기는1146년 암살 당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누르 앗딘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저항을 이어나갔다.
에데사 함락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이에 자극 받은 유럽은 교황 유게니우스 3세를 중심으로 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2차 십자군의 주요 사령관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는 템플 기사수도회, 성요한 기사수도회와 예루살렘 왕국 제후군을 연합하여 약 5만명의 병력을 만들어냈다. 1148년 봄 십자군은 이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을 공격했으나 누르 앗딘이 이끄는 농성군에 패하였으며 안티오키아 방어에 유리한 상황을 가져오지도 못하고 오히려 장기왕조의 세력 확대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차 십자군 전쟁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했고 누르 앗딘은 선친의 유업을 완수하여 시리아를 통일했다.
살라딘의 이집트 원정과 이슬람 통일
살라딘의 어린시절 부터 청년기 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기록이 없다. 그의 이런 긴 잠복기는 26세까지 계속 된다.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164년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여하면서 부터이다.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는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정권을 잡은 이들이 천수를 누리는 일이 없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었으며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아말리크 1세)는 이집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162년 와지르(재상) 샤와르는 권력을 잡지만 9개월도 채 가지 못하여 다른 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다마스쿠스로 도망쳐왔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는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누르 앗딘에게 자신에게 군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 누르 앗딘은 그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곧 태도를 바꿀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대로 둔다면 이집트는 곧 아모리의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것은 누르 앗딘에게 결코 이롭지 않았다.
1164년 이집트 원정대가 요란하게 출발했다. 시르쿠와 샤와르는 속전 속결로 이집트를 점령했다. 파티마 왕조의 어린 칼리프 알 아디드는 샤와르를 재상으로 임명했고 샤와르는 다시 권력을 쥘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쥐자마자 샤와르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시르쿠에게 이집트를 떠날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아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응했다. 아모리와 시르쿠는 몇차례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서로 동시에 이집트를 떠나기로 타협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샤와르였다. 자기 손은 거의 쓰지 않고 이집트를 손에 넣은 것이다.
절치부심한 시르쿠는 1167년 두번째 이집트 원정을 단행했다. 침략을 예상하고 있던 샤와르는 재빨리 아모리를 다시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시르쿠에 대항했다. 시르쿠는 이집트의 가장 큰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곧 샤와르-아모리 동맹군에게 포위당해 양측은 소모적인 전투를 치렀다. 결국 3년 전의 모습이 재현되었다. 시르쿠와 아모리는 휴전을 맺고 동시에 각자의 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휴전은 오래 가지 못하고 바로 다음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라센(당시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을 지칭하던 말)을 박살내고 싶어하는' 기사들이 최근 동방에 대거 도착한 점에 고무된 아모리가 이집트를 공격한 것이다.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을 저질렀다. 이슬람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기독교도들까지 대거 죽임을 당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집트 파티미 왕조의 칼리프 알 아디드는 누르 앗딘에게 도움을 청했다.
1169년 시르쿠는 세번째 이집트 원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집트 원정때 당한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던 살라딘은 이번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누르 앗딘의 명에 의해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르쿠에게 배후를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모리는 싸우지도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샤와르는 살라딘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번에 걸친 원정 끝에 시르쿠는 이집트를 손에 넣었고 알 아디드는 그를 와지르로 임명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시르쿠가 두 달 뒤에 과식으로 갑작스럽게 죽어 버렸다. 알 아디드는 시르쿠의 조카 살라딘을 신임 와지르로 임명하였다.
아직 30살 정도 밖에 안 되었던 살라딘의 입지는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주어진 기회를 그저 흘려버리지는 않았다. 일단 살라딘은 불만이 쌓인 부장들을 달래고 군대에서의 그의 입지를 다지는데 온 힘을 다한다. 그와 동시에 누르 앗딘과의 미묘한 관계를 유지시키면서 이집트 내에서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자신의 독자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노력했다. 1169년이 끝날 무렵에 살라딘은 이미 의심할바 없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누르 앗딘은 살라딘에게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릴 것을 요구하며 살라딘을 압박하였지만 살라딘은 자신을 신임해준 알 아디드와의 우정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 그는 누르 앗딘의 신하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1171년에 칼리프 알 아디드가 죽자 살라딘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에 자신의 수니파 정권을 창출하여 사실상 독립하였다. 누르 앗딘과 살라딘이 결별한 것이다.
살라딘이 이슬람을 통일할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능력에 힘입은 것도 있겠지만 상당한 행운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곧 누르 앗딘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의 아모리도 세상을 떠났다. 아모리는 14세의 보두앵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는 나병 환자였다. 이제 동방에서 살라딘을 저지할 세력은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뿐이었지만 그의 군대는 미리오케팔론에서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 참패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엘도 세상을 떠났다.
살라딘은 시리아로 귀환하여 이슬람 세계를 통합해 나가며 동시에 프랑크족(당시 아랍인들이 기독교도들을 지창하던 말)들과 전투를 벌였다. 700명의 기병대로 다마스쿠스를 무혈 점령한 살라딘은 파죽지세로 시리아를 점령해 나갔다. 그는 누르 앗딘의 아들인 알 살리흐가 있는 알레포까지 포위 했지만 누르 앗딘의 아들과 검을 맞대고 싶지 않았던 살라딘은 결국 포위를 풀고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스스로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왕'으로 선포하고 어떤 군주의 지배도 받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했다.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는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기독교계 예루살렘의 7대왕이다. 예루살렘은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의 영도하에 상당한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두앵 4세 역시 신체적 결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러한 결점을 극복할수 있을만큼 현명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군주였다.
그는 1177년 11월 25일 몽지사르 계곡에서 기세등등하게 공격해오는 살라딘의 부대에게 약 1000명의 기사와 함께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기습은 매우 완벽했고 살라딘은 근위대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살라딘의 호위병은 대부분 사망했고 그도 포로로 잡힐 뻔했다. 살라딘은 낙타를 타고 겨우 이집트로 귀환했다. 살라딘으로서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패배였다. 이때 보두앵은 겨우 16세의 나이였다. 병들고 나약한 몸으로도 직접 전선에 나서 승리를 거둔 보두앵의 용기는 기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앞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은 살라딘은 와신상담하고 1179년 6월 10일 마자윤에서 다시 보두앵과 전투를 벌였다. 초전은 예루살렘 왕국에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보두앵의 기병과 보병들은 무더운 태양에 지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 때 몽지사르에서 활약했던 성전기사단장 오도가 무모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살라딘의 계략에 넘어간 오도는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군은 전멸당하여 보두앵 4세는 겨우 도망쳤다.
1179년 예루살렘의 북부에 있는 보두앵 4세의 성을 점령한 살라딘은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의 교전은 피하면서 이슬람권 내부의 경쟁자들을 응징해 나가며 이슬람의 통합을 계속해 나갔다.
1181년 누르 앗딘의 아들 알 살리흐는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독살 당했다. 그리고 2년후 마침내 살라딘은 알레포에 성대하게 입성했고 시리아와 이집트는 아이유브의 치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하고 필요시에는 기민하고 결단력 있게 군사력을 사용하여 과업을 완수했다. 허례와 방탕과 잔인성은 찾아볼 수 없고 아량 있고 도덕적이면서도 확고한 통치자로서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다. 그때까지 이슬람교도들이 상호간의 심각한 불화와 격심한 경쟁 때문에 십자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살라딘의 일관된 목적의식 아래 이슬람교도들은 재무장되었다.
이슬람의 반격
살라딘이 이슬람을 통합한 이때 프랑크인들은 오히려 분열을 거듭하며 두 무리로 갈라져 있었다. 한 무리는 살라딘과의 화평을 주장하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이끄는 온건파, 한 무리는 살라딘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케락 성주 르노 드 샤티용(브린스 아르나트)이 이끄는 극단적 강경파였다. 그는 과거 시리아 북부를 약탈하고 다니다가 포로로 잡혀 알레포에서 14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탓에 이슬람에 대한 병적인 증오를 갖고 있었고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수차례 고의적인 도발을 감행 한다.
1180년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나 협정이 맺어지고 얼마 뒤 이슬람 상인 일행이 르노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게 항의했지만 왕은 르노를 제지하지 못했다. 1182년에는 더욱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르노 드 샤티용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정벌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예언자인 마호메트를 '저주받은 낙타몰이꾼'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유해를 묘에서 파내고 메카의 카바신전도 파괴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에 의해 겨우 저지되었다. 살라딘은 분노하며 직접 이슬람 인들의 공적인 르노의 영지인 케락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공격을 개시하려던 찰나 성 안에서 르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살라딘은 공격을 그만두었다. 이슬람의 공적에게 관대한 아량을 베푼 것이다.
1185년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보두앵 4세는 지병인 나병으로 결국 숨을 거두고 그의 조카인 어린 보두앵 5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당장 성전을 벌이자는 강경파와 전쟁을 말리는 온건파의 갈등으로 분열했지만 일단은 온건파가 우세하여 다시 살라딘과 4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인 1186년 어린 보두앵 5세 마저 세상을 떠났다.
왕권은 보두앵 5세의 어머니인 시빌라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이무렵 서유럽에서 건너온지 얼마 안된 기 드 뤼지냥이라는 기사에게 반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이 죽자마자 기 드 뤼지냥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기는 외모는 반반했으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어떤 능력도 없었던 그는 강경파인 르노 드 샤티용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다.
평화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해인 1186년 르노 드 샤티용은 다시 협정을 무시하며 이슬람 대상행렬을 공격하였다. 대상행렬에는 메카로 순례를 가고있던 살라딘의 누이동생도 지타도있었다. 상인들이 항의하자 레이날드는 "무함마드에게 구해달라고 하라."라고 조롱하며 지타를 납치하고 호위병과 대상일행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살라딘은 격분하며 기 왕에게 항의했지만 힘 없는 기 왕은 발뺌하기 바빴다. 마침내 전쟁을 결심한 살라딘은 지하드를 선포하고 군사들을 소집했다. 전 이슬람에서 기병들과 보병들이 다마스쿠스로 모여들고 있었고 다마스쿠스는 깃발들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하틴전투
아랍 세계에서 군사들이 동원되고 있는 동안 프랑크인들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기 왕은 이슬람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있던 온건파 레몽을 제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군대는 레몽의 아내가 갖고있던 갈릴리 지방의 소도시 티베리아스를 공격하려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레몽은 평소 친분이 있던 살라딘에게 동맹을 청했다. 살라딘은 이를 받아들여 티베리아스로 군사를 보냈고 결국 예루살렘 군대는 물러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살라딘 측에서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는 자신의 정찰병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을 정찰하는 것을 허락해 줄것을 부탁했다.
살라딘으로부터 이미 도움을 받은 레몽은 거절하지 못하고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레몽과 살라딘의 동맹 소식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은 성전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고위 지도자들이 살라딘의 군사들을 공격한 것이다. 이들에게 사라센과의 동맹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살라딘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 몇분간의 전투로 기사단은 몰살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단 한명만이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이에 경악한 많은 기사들과 사제, 수도사, 주교들은 모두 레몽을 비난했고 총대주교는 그를 파문하였다. 레몽은 왈칵 겁이났다. 그는 무조건 용서를 빌었고 자신의 처사를 회개했다. 그러자 그들은 레몽을 용서했고 이슬람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제 레몽은 어쩔수 없이 살라딘과 싸워야 할 입장이 되었다.
살라딘은 병력을 투입해 티베리아스를 포위, 7월 2일 시가를 장악했고 과실수들이 즐비한 비옥한 평야위에 진을 쳤다. 그 뒤로는 티베리아스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7월 3일 기와 르노, 레몽과 발리앙이 이끄는 2만여 병력은 티베리아스를 구원하기 위한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기세높게 진군하지만 한여름에 이 팔레스타인 땅은 펄펄 끓는 용광로였고 이들은 무더위와 갈증에 지쳐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살라딘은 척후 기병들을 행군로 주변에 배치하여 대열 측면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갈증에 지친 프랑크군은 날이 저물기 전에 근처의 지형을 전부 조망할 수 있는 높다란 갑에 도달했다. 그런데 호숫가에 펼쳐진 푸른 평원을 보니 이미 그곳에는 살라딘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물을 마시려면 술탄의 허락을 구해야할 판이었다.
1187년 7월 4일 프랑크인들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동이 트기 바쁘게 필사적을 호숫가에 닿으려고 시도했지만 갈증과 행군에 지친 그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마구 뒤섞여서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 쪽으로 후퇴했지만 이번에는 살라딘의 기병들과 마주쳤다. 어떠한 방어선도 뚫을수 없었던 이들은 절망적인 전투를 벌여야했다. 레몽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파를 시도했고 살라딘의 부관들은 레몽을 알아보고 그를 도망가게 놔두었다. 그는 트리폴리까지 곧장 말을 달렸다.
살라딘의 군사들은 마른 풀밭에 불을 놓았고 바람에 날리는 연기는 프랑크 군사들의 눈을 찔렀다. 뙤약볕과 갈증, 불에 연기까지 가세하니 프랑크인들은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살라딘은 전장 곳곳을 직접 누비며 병사들에게 화살을 나눠주는 등 열심히 그들을 독려했다. 결국 고립되어 포위당한 프랑크인들은 살라딘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틴 전투이다.
예루살렘을 탈환한 고결한 정복자
레몽과 발리앙은 이미 전투에서 도주하였고 기와 르노는 포로로 잡혔다. 살라딘은 포로들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에게 직접 물을 따라주며 안심시켰다. 아랍 전통에 따르면 포로에게 마실것을 주는 것은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는 물을 마시고 옆에 있는 르노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본 살라딘은 "난 저자에게 물을 주지 않았소."라고 말하며 손수 칼을 빼들어 르노의 팔을 잘랐고 옆에 있던 병사들이 끌어내 그 목을 벴다. 왕과 포로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했다. 다만 성전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르노와 운명을 함께했다. 살라딘은 이슬람을 향해 다시는 칼을 들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기를 풀어줬지만 그는 언제 약속했냐는듯 다음해 아크레를 공격한다.
하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살라딘은 프랑크인들이 부당하게 점령하고 있는 이슬람의 땅을 되찾기 위해 공세를 이어 나갔다. 곧장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레몽의 아내를 포함한 방어자들이 재산을 가지고 떠날수 있게 보장했다. 그리고 곧바고 아크레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이윽고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프랑크인들의 요새들이 차례차례 항복해왔다. 그나마 야파만이 저항다운 저항을 해왔다.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저항의 대가로 도시를 함락시키자마자 주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었다.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던 살라딘은 77년간 프랑크인들이 점령해왔던 사이다로부터 항복을 얻어냈고 베이루트와 주바일, 아스칼론과 가자도 모두 항복해왔다. 살라딘은 아스칼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전령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과거 칼리프 우마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피를 보지 않고 예루살렘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루살렘에서 온 귀족대표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상황은 생각지 않고 너무도 거만하게 살라딘의 제안을 거절했다. 살라딘은 이제 검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수비 책임자는 발리앙 이블린이었다. 그는 하틴에서 패배 직전에 탈출하여 티레로 왔다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아내를 찾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단 하루만 머물며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대항군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발리앙은 거부하고 떠나려 했으나 대주교가 "곤경에 빠진 예루살렘을 두고 떠나는 것은 영원한 수치가 될 것이오."라고 경고하자 발리앙은 결국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살라딘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살라딘은 관대하게도 그 입장을 이해한다고 전하며 그를 약속에서 풀어 주었다. 게다가 발리앙 방어 준비에 몰두하느라 아내를 대피시킬수 없게되자 호위병까지 붙여 발리앙의 아내를 안전한 티레로 보내주었다.
살라딘은 1187년 9월 예루살렘 공격을 시작했고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이미 패배가 기정사실화 된 예루살렘을 위해서 발리앙은 살라딘의 천막으로 가서 협상을 요청했지만 살라딘은 "이미 점령한 도시와 협상하는 사람도 있소?"라고 말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궁지에 몰린 발리앙은 "맹세코 우리는 처자식들을 살육하고 재물과 재산을 모두 불태워 약탈할 만한 동전 한 잎, 노예로 삼을 인간 하나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위의 돔과 아크사 사원을 비롯한 성소들도 모조리 파괴할 것이고 우리 수중에 있는 무슬림 노예들 역시 살육할 것이며 가축과 말도 죄다 도살해버릴 것입니다."라고 발악했다. 살라딘도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성지 예루살렘이 비극적인 살육으로 물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라딘의 신하들은 주군의 대책없는 너그러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대신 금전적인 보상이라도 받아야 겠다고 못박았다. 사실 기나긴 원정으로 국고가 바닥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남자는 10디나르, 여자는 5디나르, 아이는 1디나르씩 받고 풀어주겠다고 했지만 발리앙은 그만한 돈이 없다며 3만디나르를 7천디나르로 깎아 달라고 호소했다. 신하들은 맹렬히 거절했지만 살라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은 성스런 도시로 입성했고 어떠한 약탈이나 살인도 벌어지지 않았다. 과거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저지른 학살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40일동안 수 많은 주민들이 돈을 지불하고 성을 빠져나갔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극빈자 수천명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한푼이라도 구걸하려고 성문으로 모여들었다. 살라딘 못지 않게 정이 많던 알 아딜은 살라딘에게 몸값을 받지 않고 그들을 보내주자고 청했고 살라딘은 허락했다. 이어서 살라딘은 한 가정의 가장과 과부, 고아들의 몸값을 모두 탕감해주고 선물까지 주어서 보냈다. 그렇게 풀려난 주민들은 '성 나라로의 문'을 통해 예루살렘을 떠났고 그들의 행렬은 동틀녘에 시작되어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금은보화가 탐나서도 아니며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 자신의 신앙과 의무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살라딘이 거둔 승리의 의의는 성도를 침략자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파괴와 증오없이 행해졌다는데 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당시에는 이슬람 성지가 완전히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바위사원에 있는 승천바위는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다른 사원에 있는 기도소는 마굿간으로, 또 다른 사원에 있던 메카로 향하게 해서 만든 양탄자는 오줌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살라딘은 이 모든 것들을 수리하고 사원에 있던 황금 십자가를 모두 헐어버렸다. 이후 발리앙은 만년에도 중근동 정세에 관여했고 1192년 수세에 몰린 3차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살라딘 사이의 휴전 협상을 이끌어내는 등 아랍인들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했다.
3차 십자군 전쟁과 사자심왕 리처드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살라딘은 계속하여 프랑크인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이제 프랑크인들에게는 티레와 트리폴리, 안티오키아와 세군데의 고립된 요새만이 남아있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다시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하며 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연합한 3차 십자군은 그때까지의 십자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1189년 5월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린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가 가장 먼저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당시 영국와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놓고 다투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인솔한 십자군들은 코니아(이코니움)에서 투르크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살레프강을 건너다가 1190년 물에 빠져 익사하자 지휘자를 잃은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1191년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항구적인 기지가 구축될 키프로스를 점령한 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연합해 아크레를 공격했다. 이미 아크레는 2년 전인 1189년부터 기 드 뤼지냥에 의해 포위공격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길고 함난한 아크레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사기 충천한 십자군은 아크레 전투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아크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살라딘은 전쟁 구호를 외치면서 몸소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어떨 때는 자신의 병사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돌격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이슬람 전사들의 영웅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적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결국 아크레는 함락당하고 말았다. 길고 긴 포위공격이 시작된지 2년이 지난 1191년 7월 11일 마침내 십자가 깃발들이 아크레의 성벽 위에 나부꼈다. 살라딘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리처드는 이 전투에서 잡은 이슬람 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대함으로써 살라딘이 보여준 관대함과는 많은 대조를 보였다. 리처드는 기독교도 포로들의 석방이나 교환에 이용될 만한 소수의 귀족 인질들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을 베어버리라고 명령했다. 2700명의 포로들은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져 참수되었다. 하지만 아크레를 함락시킨 직후 필리프와 리처드는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십자군을 단독으로 지휘하게 된 리처드는 학살을 끝내기가 무섭게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병사들은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아크레에서의 오랜 전투에 지치기도 했고 술과 여자들이 넘쳐나는 그 도시를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살라딘의 병력은 아크레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력이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살라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런 가운데 리처드는 사절을 통해 살라딘에게 강화를 제의해오기도 했지만 살라딘은 거절했고 십자군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행군을 계속했다.
리처드와 살라딘의 전면전은 1191년 9월 야파 북쪽의 아르수프 평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리처드의 군대는 살라딘 군대의 무자비한 기습공격에 패배의 조짐이 보였으나 리처드가 친히 나서 싸운 끝에 사기를 얻어 단 한 차례 공격으로 이슬람 군대를 와해시켰다. 다시 패배한 살라딘군은 일단 퇴각하여 군대를 재정비 하였으며 중무장 기사와 궁수대의 협동작전에 늘 고전하였지만 전략적으로 리처드 군의 움직임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20km 앞 둔 곳까지 밀고들어 갔다. 성도 탈환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겪어 보지 못했던 지독한 폭우였다. 십자군은 발이 묶여 힘든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슬람군의 완강한 저항과 오랜 전쟁에 지친 리처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는 건강도 많이 해친데다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많은 기사들에게서 비난을 사고 있었고 지휘관들은 내분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리처드는 결국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있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는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회군한 것이다. 그는 8개월전 점령한 해안도시 아크레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다음 십자군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리처드는 해안 도시들을 모두 병합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이를 두고보지 않았다. 그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1192년 8월 야파를 공격했다. 리처드의 휘하에는 5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보병밖에 없었던 반면 이슬람군은 모술과 이집트 그리고 북부 시리아 등지에서 지원군이 합류함에 따라 상당히 강화되어 있었다. 십자군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결전이었다. 기사들도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 들었으며 리처드 역시 적진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이다가 낙마하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본 살라딘은 "고귀한 사람은 그렇게 땅에서 싸우면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동생인 알 아딜을 시켜 말 두 필을 선물로 보내는 여유까지 보였다. 야파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는 7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했고 십자군은 간신히 야파를 지킬 수 있었다.
당초 목적인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도 못하고 세력이 약해진 리처드는 병까지 걸렸다.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어진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이제 강화를 맺는것 뿐이었다. 그는 발리앙의 주선으로 살라딘과의 휴전 협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고열에 시달리는 리처드에게 과일과 약, 얼음을 보내주는 기사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1192년 9월 2일 양측은 마침내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크레에서 야파까지 영국 왕이 정복한 해안가 도시들은 그에게 돌아가고 아스칼론에 새운 프랑크족 요새는 파괴시킨다. 둘째,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은 양측 영토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3년간 자유롭게 성지순례를 할수 있다.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3년간의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가 보장된 것이다. 살라딘은 리처드를 예루살렘으로 초대했지만 리처드는 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승리하여 입성해야할 그곳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가고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리처드는 그간의 많은 세월을 뒤로 한 채 배에 올랐고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프랑크인과의 고통스러웠던 대결은 결국 살라딘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프랑크인들도 몇몇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얻어서 거의 백년에 이르는 유예기간을 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는 물론 식민지도 건설하지 못한다.
리처드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한 특이한 왕이었지만 영국인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인기를 누렸던 왕이다. 정치적으로는 절대 무능했으나 인간적인 매력과 절륜한 무용으로 십자군의 지도자로 명성을 드높였고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귀국길에는 오스트리아왕에게 포로로 잡혀 영국인들에게 거액의 몸값을 부담하게 했다. 몸값을 낸 리처드는 1194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자리를 찬탈 했던 동생 존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위대한 영웅의 죽음
전쟁이 끝나자 살라딘 자신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전쟁터에서의 생활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그는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 그간 프랑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수차례 말라리에가 재발해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말년의 살라딘은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 다마스쿠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1193년, 55세의 나이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성전 내내 자신이 들고 다닌 검과 함께 다마스쿠스 요새 안의 정자에 매장되었다. 살라딘의 친척들이 벌써 그의 제국의 토막들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동안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통치자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돈마저도 충분히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친구와 가족들은 그의 묘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그가 죽고 났을 때 금고 안에는 티루스 디나르 한 잎과 은화 47디나르밖에 없었다. 그는 생전에 늘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고 부와 화려함을 지독히 경멸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작고 가냘픈 몸에 단정하게 수염을 길렀으며 약간 사색적이고 침울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항상 밝았고 손님들에게는 친절하고 모든 예의를 갖추었으며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을 용납치 못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성문 밖에 운집해 있던 군중은 모두 거리로 나와 진심으로 그를 애도했다. 살라딘은 백성들의 진정한 애도 속에 죽어간 유일한 왕이었고 그들의 보호자로서 그처럼 강력하고 공정하며 인자한 군주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간절히 원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유혈에 익숙해지거나 아직 무슬림과 이교도 간의 차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치 않는다."라며 아이들에게 유혈 장면을 보이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살라딘은 군인이자 왕이기 이전에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에게서 종교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는 중병으로 누워 있을 때조차 간신히 서서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다. 그는 코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흐를 때까지 듣곤 했다. 그런 그에게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성전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라딘의 죽음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십자군의 행보는 탈선과 광기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는가 하면 광신과 무지의 합작품인 소년십자군의 비극을 일으켰으며 서구 각국의 왕들의 야심에 의한 독자적 십자군 출병은 무익한 피만 흘리게했을 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후 1250년에는 아이유브 왕조가 몰락하고 맘루크 왕조가 성립된다. 맘루크 왕조는 시리아로 대군을 파견하여 안티오키아 제후국은 1268년에, 트리폴리 제후국은 1289년에, 잔존한 최후의 기독교도의 거점 아크레 또한 1291년에 탈환함으로써 서유럽의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세계에서 완전히 축출시킨다.
[출처] 십자군을 격퇴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작성자 현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