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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출전-<사슴>(193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울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 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학풍>(1948) -
* 삿-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 쥔을 붙이었다- '주인을 붙이다'. 주인 집에 세를 얻어 기거하게
되었다. 세를 들었다.
* 딜옹배기-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 북덕불- 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슬픔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회한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가짐.
*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슬픔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시적자아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며, 이 순간 시적자아의 내적 갈등은 그 정점에 달하게 됨.
* 이때-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
* 이것들 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내부에 갇혀 있던 의식을 외부로 향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됨. 절대적 존재자를 떠올릴 만큼 겸허해진 상태에서 한 운명적 개체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음.
* 나줏손 - 저녁 무렵
* 갈매나무 : 갈매나무과의 작은 낙엽활엽수. 골짜기 개울가에 나는데 높이 2m, 가시가 돋고 늦봄에 꽃이 핌. ( 현실극복을 위한 의지의 표상 )
*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눈을 맞으며 깨끗하고
단단하게 서 있는 갈매나무의 이미지가 시적자아로 하여금 삶의 고달픔과 외로움, 그로 인한 내면적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함.
*남신의주시 유동 박시봉방 : " 남신의주시 유동 마을에 사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방(房) "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주소를 나타내는 말로, '박시봉'은 아마도 시적자아가 세들어 있는 집 주인인 목수의 이름일 것이다.
석양(夕陽)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족제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 돋보기다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 대며
쇠리 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짐승 같이들 사라졌다
*안장코- 콧잔등이 잘룩하게 생긴 코
*학실- 다리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안경
*돌체- 석영 유리
*대모체- 바다거북이 껍데기로 만든
*로이도- 둥글고 굵은 셀룰로이드 테
*쇠리한- 눈부시다, 눈이 시다
여승(女僧)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산에 나는 취나물의 일종
*금점판- 금광의 일터
*섶벌- 재래종 벌의 한 종류, -민족의 유랑의 현실
여우난 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시구풀이
1)여우난 곬족: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2)진할머니 진할아버지: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3)포족족하니:빛깔이 고르지 못하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4)매감탕: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 진한 갈색.
5)토방돌: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6)오리치: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7)반디젓:밴댕이젓.
8)저녁술:저녁 숟가락. 저녁밥.
9)숨굴막질:숨바꼭질
10)아르간:아랫간. 아랫방
11)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12)화디: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13)사기방등:사기로 된 방에 켜는 등
14)홍게닭:새벽닭
15)텅납새:처마의 안쪽 지붕.
16)무이징게국: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백석(白石 ; 1912∼?)
시인. 본명은 기행.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 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1936년 시집 <사슴>을 출판하였다. 1947년을 전후하여 '적막 강산' 등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석의 시는 평북 지방의 방언을 통해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세계에 잠겨 있는 만큼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신과 모순되어 있는 상태를 심화시킨다.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고향'은 타관에서 떠도는 자의 절절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백석의
향수는 단지 고향의 풍물이나 인정 세태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소재들은 보다 깊고도 지속적인 고향의 삶의 역사와 관련을 맺으려 할 때에만 선택된다. 풍속이나 이야기로서의 설화가
시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풍속과 이야기야말로 유랑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에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랑자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워지는 대상은 가족공동체인데, 백석은 유랑의 여로 속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고
있다. <신범순, '백석의 공동체적 신화와 유랑의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