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이 대통(大通)이다
심호섭 목사(예제교회, http://twtkr.com/servantsim)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존 그레이)’로부터 불과 두어 달 전 막 출간된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 결혼 탐구서(한병선)’에 이르기까지 남녀 사랑의 관계를 소통(疏通)의 문제로 접근하여 풀어가는 양서(良書)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청춘 남녀의 풋풋한 연애도, 부부의 농익은 애정 전선도 능숙한 소통의 부재(不在)가 심각한 갈등이나 파탄(破綻)으로 몰아가는 일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참고 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때가 구(舊)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정말 별것 아닌 일로 도장 찍고 갈라서는 신(新)시대가 되었다.
가정이 깨지는 것처럼, 교회도 깨진다. 친히 하나님에 의해 제조된 신성한 두 기관이 불경스런 인간에 의해 깨지고 있는 현실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남녀관계, 부부관계가 그러하듯 깨지는 교회들의 문제도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부재라는 점에서 더욱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면 현실을 호도하는 것일까?
얼마 전 우연찮게 전 세계인이 애용한다는 이른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대표주자격인 트위터를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트위터를 앞지르고 있다는 페이스북도 둘러보았다. 양자를 사용해 본 결과 나는 트위터가 훨씬 더 시대적 흐름과 성경적 요구에 부합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페이스북 사용자는 트위터 사용자와 그 격차를 점점 벌려가며 앞서가고 있다.
그럼 나의 트위터 예찬을 들어 보시라.
첫째, 140자(字) 이내로 메시지를 작성해야하기 때문에 말을 남발하지 않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장문(長文)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을 변경할 수 있지만 트위터의 진정한 묘미는 140자의 단문 안에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다.
둘째, 역시 메시지가 140자로 제한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였듯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에 열심을 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타임라인에 쏟아져 올라오는 다른 이들의 말을 먼저 듣는 것이 자연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셋째, 세상의 이슈들을 매스 미디어가 아닌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재해석 할 수 있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이기 때문이다.
넷째, 작은 관심과 마음만 있다면 여러 가지 캠페인이나 홍보활동 등을 통해 건전한 사회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 얼마 전 풀무원에서는 한 줄 트윗이 모일 때마다 밥을 굶고 있는 케냐 어린이들을 돕는 기부금을 공약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기업의 홍보효과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트위터리언(티위터 사용자)들은 사회 참여라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유명인, 영향력 있는 인사(人士)들의 동정이나 생각과 관심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트위터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트위터에 발을 들여 놓은 인사들은 누구라도 찾아내 접속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블로킹 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여섯째, 나와 같은 목회자에게는 다양한 정보, 특히 목회정보와 설교자료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 일곱째, 페이스북의 끼리끼리 문화와는 다르게 지인(知人)의 범위를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건전한 인맥을 넓혀갈 수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스마트폰을 만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의 도구와 방법이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사회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통합과 연합은 단순한 도구나 방법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疏通)이 곧 대통(大統)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