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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39) 2023. 9. 13
기회주의자 시바
삼하 16:1-4
<지난 시간 요약>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급히 예루살렘 성읍을 버리고 쫓겨가던 다윗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다윗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나왔습니다. 언약궤가 다윗의 편에 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의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시 언약궤를 볼 수 있게 되리라고 고백합니다. 언약궤 자체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돌려보낸 후, 감람산을 오르던 다윗은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서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당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모사였습니다. 그러니 아히도벨의 배신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자 큰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후,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내용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해 그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것은 드디어 다윗이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에서 자신을 구해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께 의지하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했을 때, 다윗은 곧바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후새’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친구’였습니다.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히도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것보다는 압살롬에게 돌아가 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을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려달라는 것입니다. ‘후새’는 기꺼이 순종합니다.
한편, 우리는 다윗의 명령에 순종하는 두 대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과 후새의 모습을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순종은 압살롬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될 경우 살해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갔다가 돌아왔다는 정보가 압살롬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압살롬이라고 정보망이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제사장과 후새가 이를 순종한 것은 그만큼 그가 다윗 왕을 존경했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결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때로 모험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생명을 건 모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함입니다. 이런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비상 연락망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후새 –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 그들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 – 다윗의 순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뜻밖의 사람을 만나다 – 시바>
다윗이 감람산 마루턱을 조금 지났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1절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바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시바’가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합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에,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보호해 준 사람이었습니다(신분의 차이, 나이 차이를 넘어 친구로).
그 당시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을 차기 왕으로 세우실 줄을 알고, 다윗에게 한 가지 언약을 맺자고 합니다. 훗날, “네가 왕이 된 후에 나와 내 집에 대해 손을 대지 말라”(삼상20:14~16)는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그리하겠다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 사울 왕과 요나단을 비롯한 왕자들은 모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다윗은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약 20여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불러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은 사울의 후손들이 있는지를 수소문하였습니다. 마침 사울의 집 종,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시바’였습니다. 그를 불러들여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할까 봐, 다윗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삼하9:3)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시바를 통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두려워하는 므비보셋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7)고 말하고는, 할아버지 사울 왕이 가지고 있던 밭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물질의 회복). 그리고 다윗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라(명예의 회복)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섬기고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를 세워줍니다. 다윗 왕은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서 이제부터 너와 네 가족은 므비보셋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시바에게는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바는 단순한 종이 아니라 힘 있는 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므비보셋은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9:8)고 감격해 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므비보셋’을 섬기는 시바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2절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다윗은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시바를 바라보는 다윗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다윗에게 시바는 ‘사울 왕가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많은 음식과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두 나귀에 가득 싣고 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며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시바는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고 가져 왔다”고 답합니다. 지금 시바는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가 준비해 온 음식물들을 보면 시바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바가 가져온 선물들은 피난민에게 딱 알맞은 음식들입니다.
‘떡’을 이백 개 가져왔는데, 이동 중에 먹기 좋은 음식입니다.
‘건포도’ 백 송이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말린 포도로 떡과 마찬가지로 피난길에 영양을 보충하기 딱 좋은 과일입니다.
또, ‘여름 과일’ 백 개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야자수 열매로 추정됩니다. 갈증을 해소하기에 아주 적합한 과일입니다.
또한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왔는데, 포도주는 당시 쇠약해진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강장제’(영양을 돕거나 체력을 증진시켜 몸을 튼튼하게 하는 약제 – 박하스)였습니다.
이 선물들은 나귀 두 마리에 싣기에 과중할 만큼 많은 양입니다(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거기다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나귀들은 ‘안장’을 차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처음부터 준비되어왔다는 뜻입니다. 2절에 보면, 시바가 그 용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어떤 생각(감정)이 드시겠습니까?
참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려울 때에 누군가가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누구나 감동하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생각지도(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도움을 준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윗도 이 순간 시바에게 닫혔던 마음을 열었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시바가 이 시점에 나선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시바는 성품이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감각 역시 뛰어난 사람입니다. 혼란한 시점을 이용해(다윗 왕의 판단력이 혼미할 때),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기회임을 직감적으로 안 것입니다. 다윗이 아직 왕위에 있을 때, 그를 속여 자신에게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압살롬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시바에게는 더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명령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친절함 뒤에 숨겨진 불순한 의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바는 순수하게 다윗을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환심을 산 후, 자신의 주인을 무고한 말로 모함하고 그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단과 악한 자들이 각각 광명의 천사와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고후11:14~15(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과 속이는 일꾼이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하와를 속인 뱀도 마치 하와를 위하는 것같이 말했습니다(창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매우 호의적인 모습으로 가가옵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도 이런 호의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모든 필요를 채워줄 것처럼 굽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이려 듭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까운 동료나 친구, 심지어는 교회 안의 성도나 가족들까지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눈앞의 것들보다, 그 중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는 다윗>
다윗은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습니다.
3절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은 시바에게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시바를 자신의 신하가 아닌 사울의 신하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시바는 더욱 다윗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질문에 시바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므비보셋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사울 왕)를 자신에게 돌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다윗과 같이 도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위증, 곧 거짓 증언입니다. 그 증거가 삼하 19장에 나옵니다.
삼하 19장에 보면, 다윗이 훗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까지 므비보셋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므비보셋은 왕권 찬탈을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마치 자기의 일처럼 슬퍼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은 자신이 다윗 일행과 함께 가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삼하19:26-27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이고, 자신만 짐을 꾸려 다윗에게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기 주인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가증한 사람이 아니고, 거짓말로 자신의 주인을 모함한 시바가 가증한 사람입니다. 그는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고자 하는 간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자신의 주인인 므비보셋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요?
시바의 이런 행동은 전형적인 사단의 전략 전술과 닮았습니다.
사단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바는 바로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이간질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셨을 때 사단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와 선악과를 금하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써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의 노예로 만들지 않았습니까(창3:1~5).
사단은 오늘날도 이러한 거짓말로 이간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곳곳에 파고들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영화, 허구적이고 자극적인 소설 등).
또한, 사단은 감히 하나님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각종 이단 사설 등).
그리고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 침투하여, 목회자와 성도들을 이간질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신천지의 교회 점령 방법과 비슷).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간질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별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성급한 다윗의 결정>
시바의 이간질하는 말을 들은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절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더 알아볼 생각을 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처지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시바가 가져온 음식(1~2절)에 감동하여 시바의 말을 분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뇌물에 마음을 뺏겨 공정성을 잃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뇌물과 선물의 차이 - 선물은 조건 없이 주는 것, 대가를 바라고 주면 뇌물).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보지 않은 채, 이처럼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그의 일생에 또 한 번의 오점을 남기는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1:19)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입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성급히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잠18:17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한편, 시바는 다윗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왕의 신하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는 이제 더 이상 사울의 신하가 아니라, 다윗의 신하로 받아달라는 의미입니다. 시바는 이전부터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칭하며 다윗의 신하가 되고 싶어 했지만, 므비보셋이 등장함으로 다윗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울의 집 신하로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국에서 사울 집의 신하로 지내는 것은 더는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세를 원한 시바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이 나설 기회가 생기자 재빨리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세에 있어 참으로 귀한 교훈을 줍니다. 예나 지금이나 앞에서는 사랑의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돌아서서 무고한 험담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시바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있습니다. 앞에서는 목회자를 돕고, 성도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비방하고 이간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바와 같은 자들이 우리 신앙공동체를 들어오지 않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시바와 같은 이간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시바와 같은 자가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런 시바를 잘 걸러내고 판단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지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 사도교회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늘 한결같이 신실한 성도로 인정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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