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오전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소파에 웅크려 오침에 빠져드는 땅꼬 곁에 잠시 머무른다. 모로 누워 사지와 머리, 꼬리를 감아 웅크린 동그란 몸. 냥모나이트라고들 일컫는... 유연한 몸을 지닌 고양이가 체온을 간직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포즈.
이렇게 웅크려 잠드는 땅꼬의 몸을 보고 있자면 늘 마음에 애잔한 파문이 일곤 했다.
동그랗게 웅크린 몸에서 번져가는 동심원. 사위로 확장되는 광활하고 적막한 공간,
그 공간으로 내리는 어둠과 추위...
홀로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조난자의 고독과 인내, 체념 같은 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가늠할 수 없는 공허와 적막과 고립의 무게에 순응하며 생명이 허락한 여린 온기만으로 던져진 생을 견뎌내는 고요하고 겸손한 인내.
생명의 동등한 슬픔.
그러고 보니 땅꼬는 한 번도 배를 보이고 잠든 적이 없었구나. 셋이 함께 침대에서 잠들 때 장군이는 내 발치에서 사지와 배를 위로 향한 채 드러누워 곯아떨어지곤 하지만 내 베게에 파고들어 머리를 맞대고 잠들 때조차 땅꼬는 배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모로 눕거나 뒷발과 앞발을 포갠 위에 머리를 괴고 잠들어 있는 땅꼬를 볼 때면 흩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땅꼬가 참 조신하다고 여기면서도 고양이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아직 땅꼬는 이 집이 불편한 것일까, 아직 긴장의 요소가 남아있는 걸까 되짚어보게 된다. ...그럴 리 없다. 초인종 소리에 전광석화처럼 낮은 포복으로 숨어버리는 장군이와 달리 의연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낯선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땅꼬. 밝아오는 아침을 주체할 수 없는 환희로 맞이하며 집안을 종횡무진하는 땅꼬에게 이 집에서의 긴장 요소라니 당치 않다.
처음부터 집냥이었던 장군이와 달리 어쩌면 땅꼬는 아직도 길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냥이로 살았던 어린 시절, 어미와 독립해서 낯선 아파트의 덤불 속에서 홀로 맞이한 밤들을 견뎌내던 습성. 그 후 나와 만나 집과 길을 오가는 8년 이상의 외출냥이의 과업을 무사히 수행해내고 있는 힘은 그 시절의 습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습성에 동반하는 고독을 견디는 겸손한 인내와 긴장 역시 잊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과 길을 오가는 삶에 동반하는 긴장. 그 긴장의 또 다른 이름은 ‘의지’가 아닐까? 웅크린 몸과 몸을 서로의 등으로, 손과 발로, 머리로 기댈수는 있을지언정 풀어버릴 수 없는... 함께 살아도 결코 내가 대신 짊어질 수 없는 땅꼬의 몫, 땅꼬만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길냥이 땅꼬는 그래서 아직도 비밀이 발하는 광휘에 휩싸인 존재다. 그 광휘의 이름은 존엄이다.
땅꼬의 웅크린 몸 위로 내 머리를 포개면 땅꼬의 몸에서 가르릉 가르릉 울림이 시작된다. 이렇게 위로를 전할 수 있을지언정 오롯이 자신의 체온에 기대는 법을 잊어서는 불가능한 생의 존엄.
머리부터 가볍게 땅꼬의 몸을 쓸어 내리면 땅꼬는 눈을 갸름하게 떠 내 기척에 응답한다. 비 내리는 늦가을 오후, 실내가 선선하다. 소파를 덮은 전기요에 전원을 넣어주면 온기에 녹아내리는 얼음덩어리처럼 천천히 사지가 풀어지면서 잠으로 깊이 빠져든다. 장군이는 내 체취 가득한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잠들어 있다. 적막으로 가라앉는 집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닫고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