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낮과 밤)
여행은 새로움이다.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 새로운 흥미 꺼리다. 파릇파릇 느껴지는 싱싱함과 호기심으로 가기 전부터 으레
들뜨기 마련이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준비가 여행의 반쯤 되지 싶다. 부담 없이 끌리는 호기심은 삶의 긍정적 희망이고 또 다른 삶의 동기임에
틀림이 없다. 구태의연한 삶이 나풀거리는 여행으로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미 들어 많이 알고도 있지만 직접 보고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 또 여행의 한 몫이다.
적도 바로 아래 위치한 상하(常夏)의 나라 싱가포르. 인도양과 남지나해를 잇는 말라카해협 남단에 있는 서울시만한 도시국가. 위치가
적도쯤이라니 그 나란 과학적인 근거대로라면 일 년 열두 달 변함없이 7시에 해 뜨고 7시에 해지는 세상이다. 과연 그럴까. Fine(벌금)의
나라라 하는 그곳. 그 덕을 제대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 그런 그곳은 정말 길거리에 담배 꽁초하나 없으며 국민에게 해롭다하여 술, 담배, 껌과
정분이 없게 하였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 말이 제법 긴장하게 한다.
3백만이 채 안 되는 인구이지만 뉴욕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하였다. 말도 여러 말이 섞이고 종교 또한 험상궂은 괴수상이 있는
힌두사원, 둥근 돔이 있는 이슬람 사원 및 불교와 도교사원을 만날 수 있고, 이외에도 교회, 성당 등 종교관련 건축물들이 시내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했다. 자원이 거의 없으면서도 무역·관광·금융 같은 서비스 산업의 특화정책으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국민소득이 높다는 곳이다.
가보기도 전 그 나라에 대해 알기도 많이 알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아니면 동양인이 많아 유럽처럼 왜소하단 생각이 안 들어 서일까. 처음 가보는 곳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거리로 나섰다.
가로수에 꽂혀진 야자수와 레인나무가 도시의 간격을 스스로 재고 있다. 무단 횡단자도 없고 쓰레기도 보이지 않는 알림 표지판만 무성한 길 위를
걷는 것이 어째 삭막하기도 하여 마치 완제품이 되어 공장 콘베어에 올라 탄 기분도 들고 필시 나란 존재를 누군가가 CCTV로 지켜보는 것만
같다. 시스템이란 말이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모르겠다. 공부를 잘하면 국가가 알아서 교육도 시켜주고 유학도 보내주는 시스템이 잘
구비된 나라, 갑자기 시스템 완전정복이란 단어를 그 나라 이름 앞에 붙여주고 싶어진다.
새 공원, 나비 공원, 해양박물관, 수목원, 사파리, 보이는 모든 곳이 시스템 적으로 진행되고 잘 갖추어져 있다. 남부지역 금융가에
높이 솟아오른 고층 빌딩숲은 가히 예술적이다.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치는 래플즈 호텔이 1887년 건립된 것이라 하니 꽤 짧은 시간
남양의 하늘을 뒤덮은 빌딩들이다. 조형의 미가 하늘로 뻗어 후덥지근한 날을 대신하여 시원스럽다.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지었다는 세계 최고층 호텔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73층 규모의 웨스턴 스템포드 호텔 또한 더불어 창연히 빛나고 있다. 땅도 공공이고 하늘의 스카이라인 역시 각본화된 조형의
미다.
한때 ‘공공의 적’이란 영화가 흥행하였었다. 우리나라에선 ‘공공의 적’ 하나 잡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며 난리가 나지만 이곳에선
‘공공의 적’으로 살기도 어렵고 남아 있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죄를 지은 자에게 태형을 하는 나라다. 태형 한 대면 엉덩이가 바로 터져버린다고
한다. 부유하며 깨끗하고 청렴하며 공공의 적과도 같은 존재가 살 수 없어 마냥 화평 할 것 같은 이곳이 그런데 나는 왜 두렵고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아마 공공으로 따지자면 적합하지 않은 잔 때가 하도 많아 겁도 날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생각의 근저는 나의 자유분방한 제 멋에 산다는 신조에서 기인할 것이다. 너무도 맑아 유기물이 살지 않는 물에선 고기가
뛰놀 수 없음을 상기하고 만다. 성질머리가 뒤틀려 때론 흥청거리며 술주정을 한다거나 안 보이는 곳에선 침도 뱉고 오줌도 갈긴다던지 때론 술값을
떼어 먹거나 몰래 무임승차를 하고서는 이를 자랑삼아 떠드는 나 같은 허튼 위인은 아마도 오금이 저려서라도 머물기 힘들지 싶다. 자신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인데 어찌 보면 주어진 삶이 재미도 적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지킬 것 다 지키고 참을 것 참으며 살아야하는 인생이라 한다면 그만 맥이 탁 풀릴 것만 같다. 지킬 것은 지키고 참아주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인데 거부감이 생기니 참으로 묘하다. 아마 나 같은 놈은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삶의 재미는 참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에서도
존재한다. 오히려 더 묘한 재미와 스릴은 참지 않고 지키지 않고서도 용케 빠져나온 아슬아슬한 삶의 경로에 있다. 만지지 말라고 표시해 놓은 것엔
때가 더 묻어있는 것을 보면 그런 스릴이나 작은 모험은 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지 싶다. 빈틈이 없는 곳에선 마음의 빈자리 또한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삶의 빈틈 속에는 여유도 있으며 그러기에 배려도 있고 에누리가 있고 예외가 자리 할 수 있다. 꽉 짜여 봐줄 구석도 눈 감아 줄
예외가 없다면 얼마나 인간의 삶이 단조롭고 허망하고 퍽퍽 할까. 나는 이곳에서 작년 연말에 벌어진 어느 사형집행을 기억하고 있다. 헤로인 소지
혐의로 싱가포르에서 구속된 베트남계 호주인 응웬 투옹 반은 2002년 12월, 캄보디아에서 호주로 들어오다 경유지인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서
헤로인 396g을 지닌 혐의로 체포됐었다. 멜버른의 세일즈맨이었던 그는 쌍둥이 형제인 코아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 마약을 운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을 전달해 주는 조건으로 시드니 밀매 브로커로부터 3만 호주 달러(2400만원)를 받기로 했었다. 10대 때부터 폭력 등으로 각종
전과기록을 갖게 된 동생 코아는 급기야 도박에 손을 댔다가 큰 빚을 진 상태였다. 코아와는 대조적으로 전과도 없이 착실한 삶을 살아온 응웬은 늘
코아의 뒤치다꺼리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쌍둥이 형제는 지난 1980년 단신으로 베트남을 탈출한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이른바 보트
피플의 후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응우옌의 고향인 호주 멜버른의 세인트 이그나시우스 성당은 응우옌의 나이만큼 25회
타종(打鐘)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으며 또 성당 앞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들은 절규하며 기도를 했다. 하워드 총리는 싱가포르 리셴룽(李顯龍)
총리에게 다섯 차례 전화를 걸어 응우옌의 구명을 요청했었다. 호주의 강경주의자들은 관용을 호소했는데도 형 집행이 이뤄졌다며, 싱가포르와의
군사적·경제적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흥분하기도 했으며 국제 앰네스티는 사형을 “야만적”이라고 질타하였었다.
엄격한 법의 집행으로 유명한 나라다. 그로 인해 부조리도 없고 사회기강도 여전하며 단기간내 부자나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사회주의적
통치이념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수긍은 하지만 인권적 차원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이다. 선한 것만이 존재한다하여 잘 될 세상도 아니고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라 하여도 선은 존재한다. 법은 최소한의 것이라야 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공공의 적도 같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삶의 진터가 아니겠는가 싶다. 회개하고 자성하여 새로움을 만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 죄와 벌은 또 다른 기회이다. 그러한 삶의 공백이 인간사에 존재함이 실로 고마운 것이 아니겠는가. 죄 많은 인간에게
어쩌면 빈 칸은 늘 같이 존재하여야 할 물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런 싱가포르는 왠지 낯과 밤이 똑 같은 시간의 길이이듯 막연한 느낌이지만 실제 이곳 삶의 낯과 밤 또한 똑같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라는 대로 해서 손해 날 것 없으며 지켜서 해로울 것이 없는 그야말로 쾌적하고 윤택한 삶이련만 가지런한 모습들이 정하여진 대로 사는 스스로
우리 안에 갇힌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각본으로 꾸민 연극이 자연스럽고 실제 상황이 어색한 것 마냥 그곳은 그렇게 철저히 꾸며져 이루어진 단지 모양새 좋은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곳은 곳곳에 느껴지는 것이 한류열풍이다. 가는 곳마다 한국식당엔 대장금의 사진이 붙어있다. 처음엔 무심코
바라 본 사진인데 행여 그들이 꾸민 그들의 조형의 미처럼 한국을 그 각본 그 드라마 같은 느낌이 전부인 양 오해라도 할까봐 은근히 걱정도 되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에 생태적으로 숨길 것 없는 자연 그 자체의 것들이 삐뚤빼뚤 생김대로 서있어 다소 시원찮고 흉하다 하여도 그것이 진실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모토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여행은 알고 보면 새로움 만 한 진실의 사생화이며,
있는 그대로를 세심히 그리는 정물화 같은 것이며, 사실적으로 주어진 모습을 가볍게 스치고 마는 스케치와도 같다.
하지만 듣고 보는 모든 것이 사실적인 것이기에 애써 본 것들을 버려두기도 쉽지가 않다. 그런 나는 싱가포르로서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고마움을 마음속에 깊게 남겨 두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기에 나의 조국은 영원히 무궁하리라 생각도 해보며 상하의 곳 공항에서 겨울 외투
옷을 다시 꺼내 입으며 감사히 떠날 수 있었다. 구태의연한 삶조차도 달라지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 여행엔 담겨있음이 틀림없다. 상하의
그곳은 정하여져 늘 조용하며 후덥지근 할 것이지만 나의 조국은 매사 시끄럽지만 여행의 산뜻한 느낌처럼 늘 새롭다는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시덥지 않은 정치 이야기까지도..
apa kabar? (안녕하세요?) [아빠 까바르]. 가이드가 일러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하였다. 최소한의 말은 배워야 할 것 같기도
하여 혀를 구르고 오므려가며 인도네시아 인사말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웃으며 말 하날 더 끄집어낸다.‘ 이브자리 까르’ 들어보니
말이 맹랑하다. 따라하라 하니 하긴 하는데 영 느낌은 그것이 아니다. 가이드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그 뜻을 설명한다. 최고다. 기분 좋다.
뭐 그런 뜻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지구촌이 사는 풍습은 제쳐놓고라도 각양각색 말 때문 생기는 사연도 많지 싶다. 재작년 이탈리아 여행 때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다. 90년대 중 반 삐삐라는 호출기가 유행하던 때 이탈리아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여 식사를 같이 하던 중에 마침 삐삐가 왔다고 한다. 옆
사람이 ‘삐삐 왔어요.’ 하고 알려주자 이탈리아 친구는 경악을 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삐삐란 이탈리아 말로 오줌이라는 뜻이다.
어느 할머니가 이탈리아에 사는 딸집에 가서 아이를 돌보게 되었단다. 아이가 울자 급한 할머니는 과자를 꺼내 ‘까까’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그 쪽 나라말로 까까는 똥이라는 뜻이다. 똥 하니 한 마디 더하면 영어로는 묘하게도 덩(DUNG)이라 하여
비슷한 발음이다. 덩도 그렇고 피시스(feces)도 그렇고 싯(shit)이란 말도 모두 배설을 할 때 나는 소릴 나타내다가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느낌에선 사람 사는 것이 어디고 간에 비슷한 것 같아 친근감이 든다.
실제론 그런 말 때문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못 알아들으니 서로 답답할 노릇이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돼서 헤매는 할머니들을 외국공항에서 종종 보았다. 비극적인 한 예가 있다. 일본인 친구가 미국 친척집을 찾다가 그만 깜깜한 밤이 되고
말았다. 한 밤중 모를 동양인이 다가오자 집 주인은 서라 하는 말로 후리즈(FREEZE)하였다. 그런 말을 그 일본인은 프리즈(please)로
잘못 알아들어 가까이 다가서다가 그만 총에 맞고 말았다. 그 일로 일본과 미국이 한 때 긴장을 하던 때가 있다. 총을 쏜 친구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어감의 차이로 큰 일이 생겨난 한 예이다. 그러기에 외국에선 최소 인사말이라도 걸치고 다니다 갸우뚱 대는 상황이다 싶으면
냅다 웃는 얼굴로 인사말이라도 해볼 것이다. 이번 여행 중 인도네시아의 바탐 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다. 주인이 인도네시아 인이라 하여
음식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생선튀김에 오리요리 까지 나와 입맛에 맞는다 싶었다. 그러자 무더운 대낮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남자종업원들이 자리를 나누어 시중을 들기에 그 중 한 친구를 불러 세웠다.
맥주 한 잔에 3달러라고 하였다. 비싸다 싶었지만 그 맛의 유혹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이윽고 얼음 잔까지 준비하여 맥주를 가지고
나왔다. 나갈 때 추가 계산을 생각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달라기에 3 달러를 바로 건네었다. 값 지불을 다하였는데도 그 친구는 옆 자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얼음 물 값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1달라 팁 값을 더 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자리에 튀김이 빈
것을 알아차리고는 한 접시를 얼른 들고 나왔다. 감사의 뜻일게다.
그런 그 친구는 3달러 중 1달러를 떼어 옆에 지배인처럼 보이는 친구에게 바로 건네었다.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안쪽에
앉아 있던 일행 여자 한 분이 종업원을 불러 세우더니 주문을 하였다. ‘코카콜라 서비스 오케이. 서비스.’손가락 까지 쭉 펴 보이며 서비스
FIVE 하였다. 그러자 알아들었다는 듯 종업원 한 사람이 재빨리 문 쪽을 향하였다.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쟁반에 빨대까지 꽃아 가지고 온 그 친구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돈을 달라하니 서비스인데 왜 돈을 주느냐 하는 식으로 의아해 하는 여자 분이다. 그여자분은 아마도 내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만을
보았지 돈을 챙겨주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난처난 노릇이다.옆 자리에 일행 몇이 세 잔을 사주었다. 뚜껑을 딴 이상 물릴
수도 없는 처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종업원이다. 한 푼의 팁을 벌겠다하다가 낭패를 보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서비스 하면 덤으로 얹혀주는 무료제공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외국에선 오히려 특별 주문임으로 더한 돈을 지불해야 한다. 큰
눈을 굴리며 이리저리 살피는 종업원이 안쓰럽다. 옆에 종업원들까지 어쩔 줄 몰라한다. 그 순간 큰 아들이 갑자기 콜라를 잡아들었다.
어라! 돈도 없는 녀석이.. 그리 말하였지만 순간 내 마음은 환해졌다. 말도 잘 안통하는 상황, 당황해하는 그 친구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란 것이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니었다. 야박함도 배워야할 일이라고 마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삶이 꼭 풍요하다 하여 온정이
스미고 베푸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누고자하는 마음이 우선이면 못 살아도 삶은 그것으로 따스함이고 평온이려니 애매하게 양면의
느낌을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같이 간 아이들이 나오면서 장난삼아 아빠 까바르 한다.
고마움을 느꼈는지 그가 문 밖까지 쫓아 나왔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힘차게 말을 한다. 아빠 까바르. 아빠 까바르. 그런 그의 손은
가슴에 모아져 있었다. 우리도 그에게 배운 대로 인사를 따라 하였다. 아빠 까바르. 돈도 돈이지만 마음은 서로 주고받도록 열려져 있다는 것을
자연 느낄 것도 같았다. 말은 서로 몰라도 느낌이 진정이라면 그 마음은 다 통하리라. 안녕하세요 라고 한 후 가슴에 손을 얹는 그들의 풍습을
이해 할 것도 같았다.
남양하면 환상의 섬을 떠올리곤 한다. 꿈같은 낭만이 깃들인 지상 최후의 낙원인 곳엔 백색의 산호바다, 끝도 없이 곱게 펼쳐진 백사장, 긴 숨을 연실 몰아쉬듯 밀려드는 파도의 곁엔 길게 늘어선 야자수가 마냥 말간 쪽 빛 하늘아래서 하늘대며 부드러운 춤을 추고 있을 터 검게 그을린 피부에 하얀 이를 한껏 드러낸 아이들은 향긋한 야자열매를 베어 물고는 바다를 향해 뜀박질이라도 할 것이었다.
이국적인 정취가 흠뻑 자리한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한 대자연속에선 누구든 절로 로맨티스트가 되고 말 것이기에 환상 속에서 사는 아이들 또한 희망을 쪽 빛 하늘가에 물든 황혼에 곱게 남겨 두고 잠들 것이라 믿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후줄근한 일련의 삶의 절차들이 단순해지고 보송보송해질 것 같은 그곳에서의 그늘과 어둠은 차라리 일상의 삶 그 쉼터일 것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한 배가 50분을 달려 인도네시아 섬 바탐에 닿았다. 뜻밖에도 주변은 흡사 우리의 60년대를 연상하기에 충분 하였다. 후줄근하고 너저분한 것들이 아무렇게 길가에 쓰레기더미처럼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다.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차는 원주민 촌을 향한다고 하였다. 뭍으로 들어갈수록 환상은 접혀지고 오그라드는 노릇이었다. 그간 살면서 버린 냉장고와 가구 같은 일상의 것들이 그곳에 다시 모아져 버젓이 버티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중엔 마음속으로만 기억해두자는 심산으로 차라리 차창을 바라보지 않게도 되었다.
차가 닿기도 전 바깥소리가 요란하다. 월드컵 때 들었던 대한민국 구호가 힘차게 들려왔다. 창밖엔 바나나를 양 손에 든 아이들이 맨발인 채로 우리의 표정을 살피며 일제히 큰소리를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한 아이가 나와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다고 느꼈는지 더욱 활기찬 목소리다. 아이들은 아저씨와 아줌마란 말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한국말로 연실‘아저씨! 천 원’한다. 차에서 내리자 눈으로 익혀두었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까만 눈에 깡마른 한 아이가 마구잡이로 달려든다.
그 아인 이미 내 눈빛 속에서 애처로움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 녀석은 일종의 마음속을 후비는 동정심을 일으키는 기교를 터득하고 있기도 한 셈이다. 졸졸 쫓으며 처량 맞게 또 말을 한다. 삶의 애절함을 붉은 포스터처럼 강하게 마음 속에 그려대는 녀석들. 삶은 만신창이의 허울과도 같은 처절함이라고 말하는 듯한 녀석에게 순진함이란 어쩔 수 없는 저 산 너머 환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돌리기도 안 돌리기도 뭣한 그런 어정쩡한 상황 속에서 ‘나중에’ 란 말을 겨우 하였다.
가까스로 녀석을 물리치고 원주민이 춤추는 곳을 향하였다. 박수를 유도하고 춤도 같이 출 것을 권하였지만 영 내키지 않는다. 가난한 춤은 구성진 느낌의 가락보다 더 서글프다는 생각이 앞설 뿐이다. 나중에 라고 말하여 비켜 세웠던 마을입구에 아이들이 다시 떠오른다. 녀석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온당한 처사인가. 그 시절 못 살아 피죽을 끓여먹어도 구걸일랑은 생각하지도 말라는 곧 잘 듣던 말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렇게 까지 하랴 하는 말로 위안을 삼아둘까.
그런 녀석은 내게로 다시 다가와 말을 한다. ‘아저씨! 나중에 천원. 나중에. 나중에 .’ 녀석들은 이미 ‘나중에’ 란 뜻도 알고 있다. 녀석을 이쯤 놓아주는 것이 온당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로 돌아섰다. 그러자 이제는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내게 몰려들었다. 숫자를 헤아렸다. 바나나를 모두 챙길 수는 없으니 천 원 씩 그냥 나누어주고 말 것이란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녀석에 대한 최소한의 것마저도 마저 앗아가 바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으로 들어 왔다. 아직도 천원을 벌지 못한 아이들이 소리를 높인다. 언뜻 보아 내성적일 것 같은 여자아이 하나가 수줍음 반 머뭇거림 반으로 얼굴 너머로 바나나를 추켜세운다. 거의 울상이 된 모습이다. 차가 떠날 채비를 하자 아이들 목소린 더욱 커졌다. 아이들은 여전히 사줄 것 같은 눈빛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차가 출발하면 그 눈빛의 마주침으로 울면서 쫓아올 기세다. 차를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아이 몇의 바나나를 마저 건네받았다. 울상이었던 아이가 금세 환한 모습으로 차창 넘어 내 자리 쪽으로 뛰어 왔다. 때꼽재기 가득한 가냘픈 손을 높이 들어 하늘하늘 한다.
아이에게 지금 주어진 것이라곤 고단한 삶의 얼룩일 뿐이다. 그런 녀석이 자칫하여 놓치거나 잃어버릴 것 같은 것이 자존의 가치이고 순박함이 아닐까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아쉽고 아득해지는 삶의 순박함이다. 순박함은 마음속에서 소담하게 피는 풀꽃 같은 것이 아니던가. 돌이켜 보면 삶의 척박함은 어릴 적 마음속에 간직한 풀꽃의 애틋한 꿈 덕분에 살포시 미소 짓는 삶이 되어왔었다. 비록 가녀린 삶이라지만 그 나이에 맞는 소박하고 갸륵한 마음이 들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이고 또한 기쁨이다. 다시금 떠오르는 자존을 말하였던 윗어른의 말이다.
절대빈곤은 자존을 넘어서는 더한 고통이고 아픔일 것이다. 그리 생각해두고 싶은 심정이다. 우린 그러고보면 참으로 행복하다. 그들을 보니 잊고 살고 있는 것이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리 걱정 할 남양의 아이들도 아니지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눈물 속에서 피는 꽃의 마음을 절절히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드니 말이다. 아이들은 고마움의 웃음을 보여주려 멀어질 때까지 무척 애썼었다. 그 아인 적어도 그 날 만은 필경 나를 기억하여 땅거미 지는 하늘 아래 내 얼굴을 곱게 걸어 놓았으리라. 뽀오얀 먼지 뒤에 고물고물 서있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을 뒤로하며 환상의 섬에 대한 기대는 훗날의 것으로 그대로 남겨두기로 하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환상 속에서 꽃을 피우는 아이들, 이보다 더한 희망의 말은 이 세상에 없지 싶다. 아마도 훗날은 그리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