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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18일 교현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이 일대의 행정 구역명이 1992년 3월 1일부로 역전동에서 문화동으로 변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경덕수 레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교구에서는 교현동 본당을 분리하여 새 본당을 역전동 지역에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1986년 5월 3일 교현동 본당에서 모금된 성당 건립 기금으로 임시 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1986년 8월 3일 조립식 임시 성당이 완공되었다.
1996년 6월 29일에는 관할하고 있던 봉방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96년 11월 29일 공사 시작 1년 6개월만에 성당, 교리실, 수녀원, 식당, 사제관을 갖춘 성당 신축을 완공하였다.
문화동 성당 주보 성인(야고보)에 대하여
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예수님의 사촌형
가톨릭 대사전에 실린 야고보 (Jacobus)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열두 사도의 하나이며 알패오의 아들, St.James the Less. 성 차 야고보. 축일 : 5월 3일 고대(古代) 전승(傳承)은 작은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보는데‘작은’이란 신장이나 나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위 예수님의 3대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일컫는데 이 때의 야고보를 큰(大) 야고보로 작은 야고보와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차(次)야고보라 불러왔다.
전승은 나아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글레오파는 동일 인물을 가리키는 두 개의 이름이며, 더구나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이므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뻘인 야고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최근의 다수 학자들은 신약성서 중에서도 사도행전 1장 13-14절과 또 야고보와 바울사도에게 주 예수님께서 친히 보이셨다고 코린도 전서 15장 7-8절에서 고백하면서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이 구별되어 있는 점을 강조한다.
“성 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행전 1:13-14)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코린도 전서 15:7-8)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뒤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거기서 야고보를 만났다고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바울사도가 만난 예루살렘의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와 같으며,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바울이‘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열거할 때 말한 야고보 또한 요한의 형제 소위 ‘큰(大)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사촌형인 이 ‘작은(小) 야고보’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의 편지는 주님의 사촌형이자 제자인 사도 야고보가 쓴 것이다. 예루살렘의 야고보는 62년 혹은 66년경에 순교하였다.
마르코 복음 3장 16절-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는 얘기가 나온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제베대(Zebedee)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로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 포함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르코 복음 3:18)이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야고보에게 따로 나타나셨다(코린도 전서 15:7)는 사실과, 야고보 사도가 후에 신약성서의 정경이 된 서간(야고보 서간) 하나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2. 돌에 맞아 죽은 순교자
아버지는 알패오라 하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와 자매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도 예수와 사촌 간이라는 혈통의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예수님의 사촌 형제이면서도 야고보는 의로운 생활로 모든 유대인들로 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덕망 있는 인물이었다.
복음서에는 그에게 대해서 다만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만 기록되었을 뿐이지만 전승에 의하여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사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도들보다는 비교적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생활을 해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머리털이나 수염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맨발로 걸으며 긴 겉옷과 망토만 걸칠 뿐이었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기도에 몰두했으나, 유대인처럼 서서 하지 않고 자신의 무릎이 낙타의 것처럼 되기까지 열심으로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의 낙타무릎은 행함을 등에 얹고 살아간 생활신앙 그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44)는 주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야고보사도는 자신이 야고보서에서 쓴 주제 그대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행함의 사람’이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서의 정신에 철저했던 그는 신전의 예식이나 그 외의 유대인의 선량한 습관을 몹시 존중하며 또한 극히 경건했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의인 혹은 민중의 편을 드는 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그는 주 예수보다 두세 살 위였으나, 시초에 그의 제자가 된 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신임이 두터웠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친히 예루살렘의 전교를 위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예루살렘 최초의 감독이 되어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주 예수의 말씀을 자기 스스로도 알뜰히 지키며 남에게도 올바르게 가르쳐 왔으나, 구약의 율법에 제정된 것도 동시에 준수할 필요를 느끼던 논자(論者)로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 그러나 50년 경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의 공의회가 열리자 그 회의에 참석하여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것이 필요 없다는 단정을 선언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에 복종했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 이교도들 사이에 생활하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사람들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성서에 야고보서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안에는 주로 선덕의 필요와 병자성사의 제정에 관해 역설되어 있다.
성스러운 생활을 보낸 야고보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사이들은 야고보의 명망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했다. 그러나 이전에 주 예수를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은 또한 그를 미워하여 그 충실한 제자인 야고보에게도 박해를 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 당시의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한나는 그를 돌로 쳐죽일 것을 선언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62년경에 순교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처형에 앞서 부활 대축일에 그는 우선 성전의 꼭대기에 끌려 나와 감언이설로써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야고보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전 흉벽 위에 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분이시라고 강력하게 증거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의 증거를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자 실망한 서기관과 바리사이들은 그를 높은 성벽에서 밀어뜨려 땅에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게 하였다.
그렇게 몸이 부스러지는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야고보를 향하여 둘러선 사람들을 선동하여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게 하였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돌보지 아니하고 무지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야고보를 피륙을 두드릴 때 사용하는 연장으로 야고보의 머리를 친 축융업자와 군중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 그 원수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하는 야고보의 죽음을 맞는 순간은 공회에 잡혀 온 스테파노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향해 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 집사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사도행전7:59-60).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야고보를 그린 성화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것은 그가 몽둥이로 맞아 순교했기 때문이며 몽둥이는 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그를 사형에 처한 한나는 곧 시장직에서 파면되고 그의 피로 젖어진 예루살렘은 그로부터 2,3년 후 로마의 군대에게 점령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