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실 25시
최창흡
1. 엉터리 합격자 색출작전
1980년 신입생 가입교식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신입생 입학 면접시험이 끝난 79년 말 시골티가 뭉클 나는 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평가실( 당시 본인은 평가실장 )에 나타나 가까운 자기 두 친구가 육사합격증을 분실하였다고 하여 두 친구의 합격증을 재발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80년 1월 중순 본인은 생도대 기초군사훈련 담당관에게 당해년도 신입생 최종합격자의 명단과 인원 123명을 정확히 인계한 후, 일단 입학시험 업무를 종료하고 다음 행사인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假입교식 전날 생도대 기초군사훈련 담당관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 내용은 신입생 인원을 점검한 결과 평가실에서 인수받은 생도의 수가 123명이 아니라 125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도대 기초군사훈련 담당관에게 평가실에서 인계한 최종 합격자명단을 재확인 하라고 하였으나 되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125명이었습니다 !
본인은 평가실 입시담당관을 대동하고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생도대 광장으로 직행하여 가입교생을 4열종대로 집합시켜 인원점검을 하였으나 결과는 틀림없이 125명이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신입생을 20보 후퇴시킨 후 한명 한명을 확인한 결과 108번에 두 명의 학생이, 또 다른 번호에서 또 두 명의 학생이 나타났습니다. 합격증은 모두 평가실에서 발급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들 4명중 2명은 가짜 합격자임이 분명한데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워 고민하고 있는 데, 입시담당관이 저에게 귀속 말을 하였습니다. “작년 말, 합격증을 분실하였다고 평가실에 찾아온 두 학생 얼굴을 기억하시지요, 그 두 학생을 찾아냅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두 학생의 얼굴들이 문득 생각나서 4명 중 의심쩍은 두 학생에게 집에서 갖고 온 소지품을 소지시켜, 보초가 ‘軍氣스럽게’ 서 있는 헌병대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 순간 두 학생이 “잘 못 했으니 용서 해 주세요” 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평가실을 애먹인 일로 인해 괘씸하기도 했지만 어린학생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괜찮다고 부드럽게 말하고 헌병대에 들어가서 우선 마음을 진정 시키고 가짜 합격증을 만든 과정을 들었습니다. 제작과정은 매우 치밀하였습니다.
가짜 합격자 두 명은 진짜 합격자와 가까운 사이었으며, 평가실에서 재발급한 합격증에 진짜합격자의 사진을 기묘하게 떼어낸 후 자기들의 사진을 각 각 붙이고 학교관인은 합격증에 남아 있는 관인의 흔적은 남겨두고 새로 붙인 사진 위에는 손으로 그렸다고 했습니다. 두 학생이 얼마나 육사를 동경하였으면 이런 가짜합격증을 만들었을까 하는 동정심도 느껴졌습니다.
그 후 그 학생들의 소지품을 조사하였더니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 위에는 “육사합격을 축하하며” 라는 글씨가 써 있었으며, “우리마음 영원이” 라는 문구 위에 나란히 찍은 애인사진, “우리 손자 장군 되는 날을 기다리며” 라는 어느 할아버지가 준 입학 축하금 봉투도 있었습니다.
두 학생을 집으로 귀가 시키고 평가실로 돌아오는데, 신입생들이 새로운 군복에 철모를
쓰고 우렁찬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대견스러운 신입생들, 그리고 이들의 함성이 지금 귀가하는 두 학생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연민이
한데 얽히는 순간이었습니다.
2. 학적부 숨바꼭질 사건
12.12 사건이 일어난 해에도 본인은 평가실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평가실은 재학생과 졸업생의 학적부관리, 각종 증명서 발급 (재학, 졸업, 성적 등)을 운영하는 부서입니다.
12.12사간이 일어나자 평가실에는 전화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언론사나
모 기관에서 직접 또는 인맥을 통해 걸려오는 전화인데 내용의 大宗은 육사 졸업생
아무게의 재학생 시절의 성적, 인간성, 과외활동 등에 관한 문의였습니다.
평가실을 책임지고 있는 저로써는 모 졸업생의 개인정보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담당자에게 함구령을 내렸지만 마음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模擬간첩 연습도 경험해 본 저로써는 문의 대상 졸업생의 학적부만을 학적부철에서 빼내어 본인의 연구실 책장에 깊이 넣어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염려가 되어 연구실 책장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어 교내 본인의 아파트에 집사람도 모르게 모셔 놓았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여전하였습니다.
그 후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도 어느새 삭으러들고 달이 바뀌고 해도 바뀌었습니다. 얼마 후
평가실장을 면하면서 신임 실장에게 그 비밀봉투를 인계를 하고나서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제 耳順을 넘긴 나이임에도 본인의 뇌리에는 책임감의 의미와 중압감이 가끔 나태해지려는 본인을 일깨워 줍니다.
3. 전무후무한 생도 과외지도
197x 년도 1학기 때의 일입니다. 당시 본인은 전자계산실에 근무하면서 컴퓨터 언어 중 하나인 FORTRAN 과목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체격은 좀 왜소하지만 눈에는 정기가 있고 열심히 수강도 하는데 한 달 후의 성적은 반에서 거의 최하의 성적을 기록한 한 생도를 발견하였습니다.
면담 결과 이 생도는 부친이 외교관이어서 아버지를 따라 일찍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입교한 자이며, 모친은 당시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가정에서 자란 생도였습니다. 문과에는 다소 소질이 있으나 자연과학이나 논리를 추궁하는 과목에는 소질이 부족해 보였는데 잘 지도하면 훌륭한 장교가 될 인품과 심성이 보여 한 학기동안 특별지도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육사의 교육 제도 하에서는 아무리 궁리 하여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다음과 같은 시도를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생도는 영어를 잘하므로 어학 실습실에서 녹음기를 통해 언어를 실습하는 이른바 랩(lab.) 시간을 할애 받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상한대로 영어과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위의 생도의 영어 회회는 미국인과 같은 수준이며 문법이나 다른 실력도 높은 수준이니 랩 시간은 물론 영어기초과목 시간 까지도 할애할 수 있다는 영어과장의 반응이었습니다. 앞으로 만일 이러한 일이 발각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영어과장과는 일체 대외비로 하기로 하고 한 학기 동안 개인 과외지도를 한 결과 그 생도는 FORTRAN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장교가 그 후 아웅산 사건당시 그 아수라장에서 자기의 옷을 찢어 자기가 모시던 분을 끌어안고 치료한 결과 유일하게 생명을 구한 이기백(11기) 당시 국방장관의 전속부관이 었습니다.
글, 최창흡 ( 수학/평가실, 62-82,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