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는 최분도 신부님의 사회적 업적을 중심으로 그 분의 발자취를 둘러 보았습니다.
최신부님의 업적은 덕적에서는 구호복지, 선교가 중심이었다면 인천에서는 선교, 복지활동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세우고 사회정의를 위한 일에도 폭넓게 애정을 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천 화수동에 있는 동일방직회사의 여공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투표를 하려던 날..
새벽에 정체 모를 사람들이 난입하여 똥물을 뿌리자 피하는 여공들을 폭행한 일이 있었고,
화수동성당으로 피신한 여공들을 당시 송현동성당에 계셨던 최신부님께서 받아 주셨습니다.
(최신부님께서 덕적에서 인천으로 올라 오신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그 날 똥물에 튄 옷을 입은 채 울며 떨던 여공 아가씨들...
여기 저기 멍이들고 상처에 피가 엉겨 붙어 공황 상태에 빠진듯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가씨들...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그 사건이 최분도 신부님을 다르게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받은 훈장을 돌려 주더라도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미사 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직자의 사회참여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최신부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최분도 신부님의 인간적인 발자취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1959년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 사제서품자 (57명) -
이 중에서 7~8명이 최신부님과 한국에 오셔서 각지에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현재 강화 교동공소에 방인이 신부님께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첫댓글 위의 자료파일이 하나에 두 개씩 나뉘어 보시기가 매우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소제목 하나에 하나씩 자료를 수정하였으니 제목별로 클릭하여 보시면 됩니다.
최분도 신부님께서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 오실 것을 꿈꾸셨을 것입니다.
비록 생전에 이곳에 다시 오시지 못하고 육신은 미국의 뉴욕에 묻히셨지만,
우리들이 그 분을 기억한다면 그 분께서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다른 카페에서 스크랩하여 온 글은 여기에서는 직접 수정할 수가 없습니다.
부득이 위의 글을 새로 올리고 먼저 글을 삭제하였기에 댓글을 옮겼습니다.
요셉피나 자매님께서도 널리 양해하여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순(요셉피나)12.03.27. 07:09 아름다운 성가정이 훌륭한 사제를 나오게 한다는 진리가 함께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신부님사랑을 깊이새겨서 저희도 그사랑을 따를수있게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