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첩지의 하나이면서 6만 여명이 순국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성내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다./조선 DB. |
기민하게 전개된 對간첩작전
임진년 12월, 西厓는 다시 軍政에 복귀하여 평안도 都체찰사가 되었다. 해가 바뀌어 1593년 1월, 제독 李如松이 지휘한 明의 원군과 조선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한다. 이때 이여송 軍이 보유한 득의의 병기는 유효 사거리가 5∼6리에 달하는 대포였다. 평양성의 고니시 軍은 병참선이 늘어진 데다 조선군의 堅壁淸野(견벽청야) 작전과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에 의해 굶주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明軍의 공격을 받은 고니시는 평양성을 포기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성전투 앞서 기민하게 전개된 류성룡의 對간첩작전의 공적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11월, 군사기밀이 새나가는 것에 주목한 西厓는 왜적의 첩자로 암약하던 金順良을 검거한 데 이어 그의 자백에 의해 요소요소에 침투해 있던 왜의 첩자 40여 명을 일망타진하여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이에 따라 고니시는 이여송 軍 4만3000명이 그해 12월 평안도에 당도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기습당했던 것이다.
평안도 都체찰사 류성룡은 고니시 軍의 패배를 내다보고 미리 황해도 방어사 李時言·金敬老 등에게 왜군의 퇴로상에 매복해 있다가 뒤를 치도록 일렀다. 과연 고니시는 굶주린 敗兵을 이끌고 밤을 새워 도주했다. 왜병은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부르터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황해도 軍은 왜병을 겁내 일부로 접전을 회피했다. 징비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만약 고니시를 비롯하여 宗義智(對馬島主의 아들), 玄蘇(學僧으로서 고니시의 참모), 柳川調信(고니시의 副將) 등을 지키라는 길목에서 사로잡았더라면 왜적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가토(당시 함경도 주둔)는 퇴로가 막히고 사기도 떨어져 해안을 따라 달아난다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 남아 왜군을 총지휘한 자는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지만, 그는 나이 불과 18세의 名族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고니시나 가토의 부재중에 우키다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만 잡았더라면 서울과 한강 남쪽에 있던 적군도 차례로 무너져 전란의 종결이 의외로 빨라질 수도 있었다.
決戰 회피한 明의 구원군
西厓는 특히 접전을 노골적으로 회피한 김경로의 목을 벨 것을 주청했다. 이때 西厓는 평안도 都체찰사여서 황해도 軍에 대해 지휘계통상에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明의 제독 이여송이 끼어들어 김경로에게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이유로 白衣從軍을 시키도록 했다.
西厓는 추격전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여송은 추격전의 묘리를 몰랐다. 이여송은 進軍路上에 군량과 馬草가 없다는 핑계로 추격을 늦추었다.
서울로 후퇴한 고니시는 경기도·황해도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왜군을 집결시켜 결전을 위한 재정비를 마친다. 이여송은 뒤늦게 親兵 5000騎를 거느리고 개성-파주를 거쳐 서울 외곽의 碧蹄驛(벽제역)으로 남하했다. 벽제의 혜음령을 넘던 이여송 軍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한 倭의 복병에 걸려들었다. 다음은 징비록에 기록된 벽제역전투의 상황이다.
< 제독(이여송)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북방(요동)의 기병이었으므로 별다른 병기가 없었고, 다만 짧은 칼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에 비해 賊은 보병들로서 모두 3∼4척이나 되는 길고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있었다. 맞부딪치자 적병은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치면서 공격했다. 明軍은 사람과 말이 함께 쓰러져 견딜 수 없었다>
이여송 軍은 後軍(후군)이 오기도 전에 절반이 꺾이는 타격을 입었다. 이날 죽을 뻔한 이여송은 이후 왜군과의 결전을 회피한다. 明軍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후퇴했다.
南溟 문하 출신 義兵들이 잘 싸운 까닭
급격히 떨어진 朝·明 연합군의 사기를 일거에 회복시킨 것은 전라도 순찰사 權慄(권율)에 의한 幸州山城(행주산성) 전투의 대승이었다. 권율도 이순신의 경우처럼 임란 1년2개월 전에 西厓가 將材로 천거한 인물이었다.
왜군도 곤경에 빠졌다. 이때 서울 주둔 왜군의 소모율은 37%에 달했다. 더욱이 전국 각지의 의병들은 우리나라 縱深(종심) 깊숙히 들어온 왜군에 대해 게릴라전·매복전 등을 전개했다. 북상하던 왜군은 50리마다 진지를 설치하고 소수의 군사를 주둔시켰지만, 의병들 때문에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의병들 가운데 전공을 가장 많이 세운 것은 경상우도의 의병이었다. 郭再祐(곽재우), 金沔(김면), 鄭仁弘, 趙宗道, 李大期 등은 모두 南溟 曹湜(남명 조직)의 제자로서 兵法을 중시했던 스승의 영향으로 용병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남명의 손녀사위인 곽재우는 전국에서 최초로 궐기한 의병장으로서 鼎津(정진) 나루를 굳게 지켜 왜군이 경상우도의 요충지로 진입할 수 없도록 했다.
경상도 의병장들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金誠一의 공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당시 기세를 올리던 의병장들과 도망만 다닌 경상도 순찰사 김수의 반목이 심각했는데, 이를 절충한 사람이 경상우도 초유사 金誠一이었다. 이보다 앞서 곽재우는 김수를 「비겁자」로 지목하여 목을 베려 했고, 김수는 곽재우를 「도적」과 「역적」으로 몰아 토벌할 것을 상소했었다.
김성일은 壬亂 1년 전에 일본을 다녀와서 왜군의 침략 징후가 없다고 보고했던 인물이다. 왜란의 징후가 짙어진 1592년 봄, 김성일은 문신이면서도 경상우도 兵使(병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러 남하하던 도중에 왜란이 발발했다.
격노한 宣祖는 禁府에 김성일을 붙들어 오도록 명했다. 그럴 무렵, 선조는 宰臣들에게 『김성일의 狀啓(장계)에 「一死報國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가 과연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西厓는 退溪 李滉(퇴계 이황) 문하 수학 시절 이래 30년 知己였던 김성일의 구명을 위해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 성일의 소견은 미흡한 바가 있겠습니다만, 충성은 남음이 있으므로 그가 한 말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臣이 이것을 책임지겠습니다>
이때 세자(光海君)도 힘써 구하니 선조의 노기가 그제야 풀렸다. 稷山까지 붙들려오던 김성일은 경상우도 招諭使(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선으로 다시 남하했다.
김성일은 그 후 의병을 모집하고 관군을 통솔하여 晉州 등의 요해지를 지키는 데 진력했다. 그 결과 1592년 10월의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성장 金時敏(김시민)과 의병장 곽재우가 진주성 안팎에서 협력하여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김성일의 一死報國 정신은 그의 종사관 李魯가 저술한 「龍蛇日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砲樓 설치하지 않아 함락된 晉州城
1593년 4월19일, 守勢에 몰린 왜군이 물러난 다음날 서울이 수복되었다. 西厓는 이여송에게 추격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여송에게는 戰意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조정의 어깨 너머로 明의 說客(세객)으로서 유격장이란 직함을 지닌 沈惟敬(심유경)과 고니시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경상도로 남하한 왜군은 울산 西生浦로부터 동래-김해-웅천(마산)-거제에 이르기까지 16개소에 성을 쌓거나 참호를 파는 등 장기전에 대비했다. 明軍은 왜군을 원격포위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심유경을 왜군 진영에 수차례 파견하여 빨리 철병할 것을 권유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은 8개월 전의 진주성 싸움의 대패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10만8000의 병력을 진주성 공격에 투입하여 함락시켰다. 1593년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6만 명의 軍民을 학살했다. 西厓는 「亂後雜錄」에서 그 패전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김성일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왜적은 지난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많은 군사를 끌고 올 것이니 守城이 전날 같지는 않을 것이다. 마땅히 砲樓(포루)를 세워 대비하여야 걱정을 덜 것이다』라고 썼다>
김성일은 진주성의 지형에 따라 여덟 군데에 포루를 설치하려고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성일이 제2차 진주성 싸움이 벌어지기 두 달 전에 별세하고 말았다. 그러자 『전에는 포루가 없어도 적을 잘 막아냈는데, 지금 왜 이렇게 사람을 들볶느냐』는 여론 때문에 포루 공사도 중지되고 평지인 南門 쪽으로 성안을 넓혀 守城만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病死 당시 김성일의 나이 56세. 西厓는 使臣으로서 과오가 있었던 김성일에게 「선비관료로서 죽을 자리」를 마련해 준 셈이다.
중강진 開市로 戰時경제 운영
이후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전투의 소강상태가 이어진다. 선조는 1593년 10월1일 서울로 돌아왔고, 西厓는 다시 영의정을 맡았다. 그때 백성들의 삶은 처참했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기사이다.
< 서울이고 지방이고 할 것 없이 먹을 것이 없어 백성들이 배를 곯아야 했고, 군량을 수송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는데다가, 늙은이와 아이들은 굶고 병들어 쓰러지고 젊은 장정들은 하나같이 도둑이 아닌 자가 없었다. 게다가 전염병까지 번져 집집이 초상을 치르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 서로 뜯어먹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西厓는 민생안정을 위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우선, 官穀(관곡)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으며, 식량부족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송화가루 등과 쌀을 섞어 죽을 끓여 먹도록 지도했다. 또한 식생활의 필수품인 소금의 생산형태를 私鹽(사염)에서 公鹽(공염) 체제로 전환시켜 증산케 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했다. 또 소금의 증산에 따른 판로 개척을 위해 국경무역을 시작했다.
< 이때 흉년이 들어 날로 굶어 죽은 송장이 들판에 가득하였으나 민간에 저축된 곡식이 바닥 나 구휼하려 해도 별다른 계책이 없었다. 내가 遼東(요동)에 咨文(자문)을 보내어 中江鎭(중강진)에 시장을 열어 무역을 하도록 요청하니,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에 흉년이 심한 것을 알고서, 황제에게 아뢰어 이를 허락했다. 그제야 요동 지방의 쌀이 우리나라에 많이 나오게 되었으므로, 평안도의 백성이 먼저 그 이익을 얻게 되고, 서울의 백성들도 또한 뱃길이 서로 통하여 곡식을 운반하였으므로 몇 해 동안에 중강진 開市에 힘입어 전 가족이 살아난 사람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 조선의 소금·면포와 중국의 곡식은 바터貿易 형태로 거래되었다. 다시 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 대개 그때 우리나라의 면포 1필의 값이 皮穀(피곡)으로는 한 말에 지나지 않았는데, 중강진에서는 그 값이 쌀 20여 말이나 되었다. 그것도 은·구리·무쇠로 무역한 사람은 그보다 10배의 이익을 얻게 되니, 비로소 옛사람이 외국과의 무역으로써 荒政(황정: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행정)의 중요한 일로 삼은 것이 진실로 이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西厓는 정통 性理學을 수학했지만, 治國의 학문인 「體用學」을 터득하여 정치에 적용함으로써 학문과 治國, 즉 體用을 겸한 經世家가 될 수 있었다. 그는 巨大談論(거대담론)보다는 實用主義(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또한 高官이 庶政(서정)에 능숙한 것을 오히려 폄하했던 당시의 풍토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行政의 達人」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당시 관료들 중 독보적이었다. 특히 西厓는 업무처리가 대단히 신속했다. 예컨대 국내외로 공문을 보내야 할 때 그가 말로 하는 것을 書記가 받아써도 한 자의 착오가 없을 만큼 문장을 이루었다. 국가위기 관리가 절실했던 시기의 재상으로서 西厓는 退溪의 인물평 그대로 「참으로 하늘이 내려 보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