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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03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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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여성 악보 필경사가 있었다는 상상력을 가미해서 만들었습니다. 배우 에드 해리스가 주인공 베토벤 역을 맡았지요. /미로비젼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교향곡 9번 '합창'은 헨델의 '메시아'와 함께 연말에 즐겨 연주되는 인기곡입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인류애와 화합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경건하게 한 해를 돌아보는 송구영신(送舊迎新·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의 세밑(한 해가 끝날 무렵)과도 잘 어울리지요. 하지만 올해는 한겨울이 아니라 한여름에 연주하는 '합창'도 있습니다. 경기필하모닉(지휘 김선욱)이 6월 21일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입니다. 8월 19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는 '합창'을 포함해서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9곡)을 피아노 두 대로 장장 7시간 동안 연주하는 이색 무대도 마련됩니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합창'을 연중 공연하지요. 왜 한여름의 '합창'일까요.
초연 200주년을 맞이하다
올해가 베토벤의 '합창' 초연 2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향곡은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됐지요. 초연 석 달 전에 작곡을 마친 베토벤은 손수 지휘를 맡기로 하고 성악가와 악단까지 섭외하면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청력을 잃어 사실상 지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지요.
이 때문에 초연 당일에는 후배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미하엘 움라우프(1781~1842)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움라우프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비롯해 베토벤의 많은 작품을 지휘한 인연이 있지요. 베토벤도 곁에서 악보를 보면서 중요한 대목에서는 지휘하는 동작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이 끝났을 때 베토벤은 자기가 쓴 음악은 물론이고, 청중의 갈채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이 역사적 사실에 당시 베토벤의 악보를 옮겨 적는 여성 필경사가 있었다는 상상력을 가미해서 만든 영화가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입니다. 영화 제목의 '카핑'은 악보를 옮겨 적는다는 뜻입니다. 배우 에드 해리스가 영화에서 주인공 베토벤 역을 맡았지요.
역발상 작품
오늘날에도 '합창'이 여전히 의미 있고 사랑받는 건 과감한 역발상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교향곡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기악곡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에 네 남녀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까지 사람 목소리를 대거 투입해서 기악곡과 성악곡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야말로 베토벤의 혁신입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완성자인 동시에 낭만주의의 문을 열어젖힌 개혁가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합창' 교향곡의 1~3악장에서는 이전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만 연주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4악장에서 독창과 합창이 들어갑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빛, 낙원의 딸들이여"로 시작하는 독일 시인이자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바탕으로 베토벤 자신이 쓴 가사를 덧붙여서 노랫말을 완성했지요.
'합창'의 마지막 4악장이 흥미로운 건 일종의 드라마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입부에서 오케스트라의 폭발적 굉음으로 출발한 뒤 마치 복습하는 것처럼 이전 1~3악장에서 나온 선율을 다시 차례대로 들려주지요. 하지만 이 선율을 부정하듯이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저음(低音)이 등장하면서 계속 궁금증을 자아낸 뒤 유명한 환희의 주제를 잠시 들려줍니다. 그 뒤 베이스 독창자가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대신 더욱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라고 노래합니다. 처음부터 곧바로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처럼 후반으로 미뤄서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한 셈이지요.
드디어 4악장 후반에 이르면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라는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면서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합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음악학자 루이스 록우드는 "베토벤이 만든 선율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불리게 된 것은, 넓은 세상을 껴안고 수백 만의 의식으로 들어가는 음악의 힘을 보여주는 드문 예"라고 평가했지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연주되다
이런 매력 덕분에 '합창'은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빠지지 않는 곡이 됐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에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미국·소련·영국·프랑스·독일의 연합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창'을 연주해서 화합의 의미를 강조했지요. 당시 공연에는 '환희의 송가' 대신에 '자유의 송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같은 해 체코에서 비폭력 평화 시위로 공산 독재를 무너뜨린 '벨벳 혁명' 직후에도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연주회에서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올라간 사람이 훗날 체코 대통령이 된 극작가이자 민주화 운동가 바츨라프 하벨이었지요.
코로나 사태 당시인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공연에서는 국립합창단과 안양시립합창단 등 102명이 마스크를 쓰고 '합창'을 노래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의 정을 자아냈지요. "수많은 인간이여 포옹하라! 이는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이라는 가사 역시 마스크를 쓴 채로 불러야 했습니다. 노래로는 얼마든지 입맞춤과 포옹을 표현할 수 있지만, 정작 일상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지요. 이렇듯 고전음악은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감동이라는 힘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힘을 보여주는 걸작이 바로 올해 초연 200주년을 맞은 베토벤의 '합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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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합창’ 교향곡의 실황 음반. /유니버설뮤직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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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코로나 당시에는 국내 합창단들이 마스크를 쓴 채로 ‘합창’ 교향곡을 노래하기도 했어요.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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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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