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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寒溪嶺>
옛이름은 오색령,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가 없어졌는데 조선 중 후기에 다시 등장한다. 한계령은 조선 중기 이전에 한양 가는 길로의 기능을 잃고 단지 인제군 북면 주민들이 양양에서 소금이나 생선을 구해 올때만 넘나드는 작은 고개 길로만 이용 되었었다.
가을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이 야심한 시각에 위험을 무룹쓰고 웬 월담이란 말인가 ??
로프 설치하는 중..
<필례령>
주변의 지형이 베짜는 요정, 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
<망대암산.1236m>
조선시대 이곳 주전골에서 엽전을 위조하여 만드는 이들의 소굴이었는데 작업을 할때마다 관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망을 보는것이 유래가 되어 망대암산이라 부른다 한다.
또한 망대암산(望對巖山)은 설악산의 봉우리들과 한계령 주위에 있는 바위들을 조망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 모양인데, 한자의 뜻이 '바위산을 마주하고 바라본다'는 뜻
<점봉산,1424m >
점봉산은 검봉산이라고도 하는데 흰머리의 노인이 이 산에 들어오면 다시 머리가 검어져서 나간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한다.
점봉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작은 점봉산을 지나 곰배령으로 가늘 길이고,왼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서 내려 가면
백두대간 길이다.
(곰배령은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해 벌렁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해발 1100m 고지에 약 5만평의 평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계절별로 각종 야생화가 군락을 이뤄 만발하여 마치 고산화원을 방불케 한다.)
점봉산 오르는 길은 온통 앙상한 철쭉 나무만이 랜턴불에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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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삼거리>
지금의 성국寺 옛터 절의 후원에 다섯가지의 꽃을 피는 나무가 있어 오색리라 유래 되었다는 전설
<단목령.壇木嶺770m>
단목령(壇木嶺)의 단 자가 박달나무 단자이다.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재라고도 부르며,오색과 진동리를 잇는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이며 국내에서 원시림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한계령부터는 생태계 보존지역으로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대간하는 사람들이 대간길을 그냥 건너 뛰는 일은 없다.
때문에 야밤에 비가 와도 눈이와도 무리한 산행을 하는 것이다.<범법자의 항변...>
단목령 계곡에는 물 줄기가 시원 스럽게도 흐른다. 불과 얼마전만 했었어도 분명히 알탕을 하고 지나 갔을 텐데 하지만 이젠 시원 하다기 보다는 춥다는 느낌이다.
이곳 단목령을 08시에 통과하니 이제사 비는 그치고 우린 다음 봉우리를 넘어 국립공원을 유유히 벗어나 아침식사...
<북암령>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며 양양의 소금장수들이 들락거리던 길이었다 한다.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삼거리에서 양양군 서면 북암리로 넘어가는 재다
저수지는 도대체 이 첩첩 산중에 웬 저수지란 말인가 ?? 그것도 열개 정도의 경고 푯말이 계속된다.
이 의문은 962봉에서 본 양수 발전소 하부댐에서 풀린다.
"진동리 바람은 소도 날린다"는 말이 있다 한다. 비는 그치고 마치 태풍이 왔나 싶을 정도로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인다.
이번 산행중 처음으로 조망한 속초의 동해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뚝서 있는 조봉과 왼쪽으로 정족산 능선 언젠가 탐방 해야할 구룡령 능선
<양양 양수발전소 하부댐>
양수발전(揚水發電)이란 ‘남는 전기를 사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전력소모가 비교적 적은 밤 시간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잉여전기를 이용해 하부 댐의 물을 상부댐으로 올렸다가 전기의 사용량이 최대로 오르는 낮 시간에 발전을 하는 방식이다. 한번 발전을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원자력발전소의 잉여전기를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 양수발전소인 셈이다. 따라서 허비전력을 저장이 가능한 물리적 에너지 형태로 바꿔 두는 것이어서 일단 건설만 하면 가동비용이 아주 적게 들고 오염물질 배출이 없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양수발전소 중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발전소가 바로 이곳에 있는 양수발전소로서 전력생산이 100만kw이고, 이는 소양댐(20만kw)의 5배, 원자력 발전기 1기와 맞먹는 규모 이다.
상부댐은 인제군 진동리 곰배령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고 우리가 지나온 중에는 안개 때문인지 산에 가려 안보였는지 못 봤슴.
<鳥寢嶺,750m>
조침령은 양양의 해산물이 인제의 내린천 물길을 향하여 넘어가던 고개로 광복 무렵까지 인근의 민초들이 넘나들던 대표적인
고개라고 한다. 송흥식, 고흥, 61.
<옛 표지석> 원래는 반구덕령(혹은 반부등이라고도 부른다)이었던 것을 83년 군에서 작전도로로 개설하면서 반구덕령 남쪽에 있던 고개인 조침령이란 이름을 여기다 붙였다. 고갯길 중간에 넓은 분지가 있고 사람들이 살았던 탓에 ‘반구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는 예로부터 영서와 영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고개로 한계령(산경표에는 오색령으로 표기되어 있음)과 함께 중요한 길목으로 여겨 형제현(兄弟峴)이라 하였다. 오색령을 넘어왔던 사람들과 흘리령을 넘어 온 사람들이 만나 내림천을 따라 한양으로 넘나들이 하던 길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루트였던 것이다. 연결해서 탐방 해야 할 구룡룡 가는길(아흔아홉 고개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도착
연장(방동-서림)21km, 공사기간; 1983년 6월 10일-1984년 11월 22일까지.시공부대; 3군단 공병여단 이라 적혀 있다.
조침령은 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 소동라령(한계령,오색령)과 함께 성종24년 미시령길이 열리기 전 서울로 가던 중요역할을 하였으나 미시령이 개통되면서 오색령(所冬羅嶺寒溪嶺)과 함께 폐쇄되었다.
조침령(옛길과 현재의 조침령)은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해발750m이다)
같은 고개를 曺沈嶺-阻沈嶺-鳥寢嶺(曺沈嶺-阻沈嶺은 옛 조침령을 말하고鳥寢嶺은 군부대가 개설한 도로를 말 하나 그 아래 터널이 뜷려 鳥寢嶺도 옛길이 되고 말았다)등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깊이 있게 들어가 보면 국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뜻이 전하는 것이 같은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르다.
산경표에 “曺寢嶺”으로 표기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는 阻沈嶺으로, 현재의 이정표에는 새조(鳥)자를 써
옛조침령에는 우마차가 지날정도로 넓었던 길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산경표나 중보문헌비고에 나타나는 조침령(曺寢嶺)은 무리조(曺),잘침(寢)재령(嶺)이다. 무리지어 자고 넘는 다는 뜻이고.
2.고지도에 나타나는 조침령(阻沈嶺)은 막힐조(阻),베개침(沈)재(嶺)이다.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니 하룻 밤 유숙하여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
3.정상석에 쓰여 있는 조침령(鳥寢嶺)은 새조(鳥)잘침(寢) 재령(嶺)이다. 고개가 험하여 새(鳥)들도 자고 넘는 다는 뜻
본래 1과2는 같은곳에 위치하고 3의 위치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1과2는 쇠나드리에서 윗서림으로 넘어가던 길이었고(이 길은 현재의 조침령에서 구룡령방향1.5km지점에 위치한다)
3.은(김재규의 사단장 재직시 3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개설되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한다)현재의 조침령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지명은 "반편고개" 또는 "반부득고개((서림에서 조침령으로 넘어가는 중턱에 대략 5만여평 되는 소반처럼 넓은 평지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라 하였다.
옛 조침령은 九折羊腸 먼 길이라 서림이나 쇠나들이에서 하룻 밤 유숙하여 이른 새벽길 나서야 해질 녁 목적지에 도착했을 험하고도 먼 길이었을 것이다. 쇠나들이 살고 있는 원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쇠나들이” 에 마방이 있었고 소금을 싫은 우마차가 조침령을 넘나들었다고 하니 “쇠나들이”는 소(소를 “쇠”로 발음함)가 넘나들던 고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어떤 이는 조침령의 바람이 소도 날려 버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하여 "쇠나들이"라 한다 함
조침령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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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아서 돌아온게 다행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