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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산문 / 장려상
안경 속 나라 - 동화
송희란(아델라) / 정림동 성당
“도대체 몇 번째야? 너 한 번만 더 안경 깨면 그땐 다신 안 해줄 줄 알아! 으이그 속상해.”
안경점을 들어서기 전 엄마는 큰소리로 명근이에게 엄포를 놓았다. 벌써 다섯 번째 안경을 깼으니 명근이도 할말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엄마 뒤를 따라가는 명근이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안경은 엄마가 골라주셨다. 명근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쓰던 안경보다 훨씬 세련된 안경이었다. 안경알을 둘러싸고 있는 테가 없어서 깨끗한 유리 같았다. 너무 투명해서 얼핏 보면 안경을 쓰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안경알을 햇빛에 비추니 무지개 빛이 났다. 안경을 쓴 명근이를 보고 엄마는,
“우리 아들, 안경 쓰니 모범생 같네.”
하시며 꽤 만족한 얼굴로,
“내년엔 6학년이야. 너도 이젠 좀 어른스럽게 행동해. 덜렁대지 말고. 알았지?”
그날 밤 명근이는 엄마의 잔소리와 안경 때문에 너무 피곤했던지 자리에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안경 속 나라에는 이미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안경을 쓴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기가 쓴 안경모양과 같은 집으로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안경축제의 전통이었다. 안경집은 다리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누구든지 다리를 건너야 안경집으로 갈 수 있었다. 다리는 꼭 혼자서 건너야 했다. 철로 된 것도 있었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다리도 있었다. 어떤 다리는 너무 가늘어서 무너지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지만 나노기술을 이용한 플라스틱이라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명근이는 플라스틱으로 된 두 번째 다리를 건넜다. 기역자 모양으로 굽어진 다리를 지나니 네모난 문이 나타났다.
문의 가장자리가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는 문. 그 앞에 서있기만 해도 황홀한 기분이 들 정도로 화려한 문이었다. 맨 앞에 서있던 부인이 팔찌 모양의 상아빛 문고리를 살짝 잡으니 문 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보물만 보이는 안경집’
그러고 보니 문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금빛이 나는 네모난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의 온갖 보물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너무나 들떠 있었다.
“난 온 몸을 보물로 장식해서 나올 거야. 아! 행복해.”
더 이상 보물이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온 몸에 목걸이, 팔찌, 귀걸이, 머리에까지 보물 장식을 한 어떤 아줌마가 행복한 듯 비명을 질렀다.
“이봐, 학생. 이곳은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만 오는 곳이야. 다른데 가봐. 어디서 저런 안경을 쓰고 와서는….”
곧 터질 것 같은 배를 안고 서있는 뚱뚱한 아저씨가 못마땅한 듯 명근이를 보고 소리쳤다. 명근이는 길잃은 미아처럼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들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봐’
서둘러 황금빛 안경집을 빠져 나와 다른 문을 찾았다. 들어온 문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여니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 나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갔더니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작은 연못에서는 수증기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나고 있었다. 연못 중앙에 불쑥 솟아오른 바윗덩어리는 마치 사람의 코를 연상하게 하였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다 건넜을 때 명근이는 하마터면 문에 부딪칠 뻔 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문이 갑자기 나타났다. 가까이서 보니 동그랗게 생긴 투명한 유리문이었다. 동그란 문에 달린 손잡이는 반쯤 깨져 있어서 손으로 잡기에 불편했다. 손잡이는 곧 빠질 듯이 문짝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손잡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유리문 앞에는 누추한 차림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축제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노인은 문 앞 바로 앞에 앉아 있어서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곳에…’
명근이는 그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봐, 학생 어딜 가려고? 이곳은 들어갈 수가 없어. 다른 곳에 가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노인의 몸에서는 사과 썩는 냄새가 났다. 헝클어진 머리에 멍한 눈, 긴 손톱, 벌거벗은 듯한 노인의 모습은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다.
“할아버지, 언제부터 이곳에 계신 거예요?
“난 이곳 문지기야. 난 이곳을 지켜야 해.”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어느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여기는 어떤 집이에요? 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명근이는 노인의 단호한 태도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다정하게 물었다.
노인은 명근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곳은 깨끗한 영혼만이 들어가는 집이야. 반드시 투명안경을 쓰고 와야 해. 황금빛 안경을 쓰고 온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난 은빛 안경을 쓰고 들어갔다가 이렇게 목숨은 건졌지만…”
노인은 지난날을 회상이라도 하듯 먼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투명안경을 쓴 사람이 거의 없어. 모두가 황금빛 안경을 좋아하지. 지금도 황금빛 안경집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을 거야. 그렇지만 투명안경집은 볼게 없다고 아무도 오지 않아. 사실 이 집은 텅 비어 있거든.”
노인의 그 말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려 명근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텅 빈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명근이의 몸이 갑자기 공중에 붕 날아올랐다. 허우적대는 명근이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 주었다. 너무나 따뜻한 손이었다.
“안녕, 명근아, 난 네 안경 속에 사는 눈사람이야. 사람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난 네가 안경을 쓰는 순간부터 너와 함께 있었어. 자, 나랑 갈 때가 있어. 너의 도움이 필요해.”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사람은 명근이의 손을 꽉 움켜잡더니 조금 전보다 더 높이 떠올라 하늘을 날았다. 그 순간, 명근이의 안경이 무지개 빛으로 빛났다. 명근이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명근아, 지금 우리는 투명한 안경집으로 가고 있어. 난 작년 겨울에 그곳에서 태어났거든. 그곳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 네 도움이 꼭 필요해.”
눈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명근이는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하늘은 신비한 빛에 둘러싸인 듯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안개 속을 날고 있었다.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일까?’
하늘을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은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별을 딸 수 있을 것 같았고, 솜이불 같은 구름에 폭 안기고도 싶었다.
“이곳이야.”
눈사람은 잡고 있던 명근이의 손을 더 꽉 잡더니 사뿐히 내려앉았다.
투명한 안경집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공속과도 같은 곳이었다. 투명한 안경집은 사실 문이 필요 없었다. 마음으로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에 손잡이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들은 이곳에도 숨겨진 보물이 있을 거라며 손잡이를 부수고 투명한 안경집에 들어왔지만 그곳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빛에 모두가 타죽고 말았다.
투명한 안경집은 눈이 부실 정도로 흰 빛을 내는 빛의 나라였고, 일 년 내내 겨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음이 녹아 내려 동그랗던 집 모양이 타원형으로 변해버렸고,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야 할 집들이 잿빛으로 변했다. 얼음으로 된 길이 녹아서 군데군데에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다. 넓게 펼쳐진 얼음위에는 하얀 눈사람 대신 시커먼 눈사람으로 가득 했다.
“이곳은 예전에 눈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 인간들이 우리 눈사람들을 죽였어.”
눈사람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흐느끼며 말을 하였다.
“인간들이 죽였다니 무슨 말이야? 저기, 저렇게 많은데…. 그런데 왜 눈사람이 까맣지?”
눈사람은 투명한 안경집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근아, 우리 눈사람은 원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어.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순간, 우리 몸은 완전히 녹아 그 사람 안에 살게 된단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 그런데 이곳에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들이 온 후로는 우리의 그런 능력이 사라져 버렸어.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들의 영혼은 이미 죽어 있었어. 투명한 안경집에 와서야 자신들의 영혼이 죽었다는 것을 안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눈사람 몸속에 들어왔어. 죽은 영혼들이 눈사람으로 태어나려고 우리의 몸속에 들어 온 거야. 지금 저기 보이는 까만 눈사람은 모두 황금빛 안경을 쓰고 있던 사람들의 죽은 영혼이야. 그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저렇게 꽁꽁 얼어 버린 거야. 우린 세상 속으로 가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영혼에게도 우리가 가야 해. 그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살면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눈물을 흘려. 그 순간 그 사람은 깨끗한 영혼을 지니게 되지. 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의 영혼은 너무나 맑아서 우리 눈사람도 눈부셔 하지. 그런 영혼은 우리 눈사람 중에서도 가장 어린 눈사람의 영혼을 지니게 돼. 그 해 겨울 첫눈으로 만든 눈사람이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지금 저렇게 돼 버렸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방법은 있어. 까만 눈사람을 살리는 길은 영혼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쓰게 하는 것이야. 명근이 네가 쓰고 있는 투명한 안경 말이야.”
명근이는 자기도 모르게 쓰고 있던 안경을 두 손으로 잡았다.
“까만 눈사람이 살아나는 길은 네가 눈사람에게 안경을 씌워 주면 돼. 까만 눈사람이 안경을 쓰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거든. 이곳 눈사람들의 생명은 너에게 달렸어. 그래서 영혼이 깨끗한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아. 봄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하거든.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내 친구들을 구해야 한단 말이야.”
눈사람은 울먹이는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즘은 황금빛 안경을 쓴 사람이 많아져서 우리도 슬퍼. 우리가 쓰고 있는 투명한 안경과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어도 깨끗한 영혼이 아니면 우린 그 사람 안에 살 수가 없어. 얼마 전 투명한 안경을 썼는데도 우리의 영혼을 거부한 사람이 있었어. 우린 그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안쪽이 까맣게 선탠이 되어 있는 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 정말 소중한 것은 못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럴 땐 참으로 안타까워. 가끔 은빛 안경을 쓴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겪지만 언젠가는 투명안경을 쓰게 될 거야.
투명한 안경집 앞에 있던 그 노인이 은빛 안경을 썼던 사람이야. 황금 안경을 쓴 사람들에게 투명안경을 쓰라고 얘기했다가 죽지 않을 정도로 맞고 그 집을 지키고 있어. 언젠가는 투명한 안경을 쓰게 될 거야.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깨끗한 영혼을 구해야 해. 눈사람이 사람들 마음속에 녹아들 때 세상은 하얀 눈처럼 깨끗해질 거야. 명근아, 넌 우리와 똑같은 투명한 안경을 썼어. 엄마가 골라준 그 안경 속에는 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어.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그 어떤 영혼보다도 깨끗하단다.”
명근이의 몸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불에 대인 듯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엄마가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다니?’
“자, 명근아,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겠지?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몸이 녹아 없어져도 괜찮아. 그것이 우리 눈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야.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 죽은 눈사람들을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네가 투명 안경을 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야. 너에게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거든. 네가 아무리 개구쟁이였다 해도 넌 이미 네 안에 살고 있는 눈사람과 하나가 되어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어. 명근아, 너는 멋진 아이가 될 거야.”
그때 갑자기 타원형 모양의 안경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녹아내리던 기둥 옆에 서있던 명근이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하면서 넘어졌다. 깜짝 놀란 눈사람이 명근이에게 소리쳤다.
“명근아, 시간이 없어. 지금 시작해야 해. 네가 쓰고 있는 안경을 눈사람에게 한번 씩 씌워줘. 그러면 눈사람들이 살아 날거야. 어서 빨리”
명근이는 쓰고 있던 안경을 얼른 벗어 눈사람에게 씌우기 시작했다.
“명근아, 일어나야지. 얘가 안경을 쓰고 잤네.”
엄마의 차가운 손이 명근이의 얼굴에 닿는 순간 투명한 안경집의 까만 눈사람들이 깊은 어둠속에서 깨어났다. 창밖에는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이른 아침, 명근이는 엄마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엄마, 다시는 안경 깨뜨리지 않을게요.”
첫댓글 여섯번째 줄 '안경알을 햇빛에 비추니 지개 빛이 났다.' 에 '무'자가 빠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