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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국제상 (최우수 본상)
내 친 구
권태종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다. 말의 어원이나 그 본질이 갖는 뜻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한 말이다. 보통 한 세대를 삼십 년으로 볼 때 생물학적으로 부모보다 자식이 삼십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경제논리를 적용한 계산으로, 부모보다 친구와 더불어 살아야 할 시간 삼십년을 감안할 때 부모를 팔아 친구 산다는 실리를 우선한 계산이 아닐까. 황당한 혼자 계산법으로 셈 해본다.
친구를 동기. 우정. 벗 등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나 그럴 수 있는 사이 정도로 막역한 사람들의 통칭으로 나름대로 재해석 해 본다. 우선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푸근하다. 뭔가 평소 복잡한 일상에서 가졌던 긴장의 끈을 쉬 놓고 무장 해제되는 기분이 먼저 든다.
나 역시 친구가 여럿 있기는 하지만, 어느 선각자의 말을 빌자면 “진정한 친구가 셋은 되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았노라 예기 할 수 있다.”고 들어왔다. “그럼, 넌 몇이냐?”고 다그친다면, 손가락 관절이 멀쩡하지만 한 둘 조차 손가락이 쉬 굽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내 성격에서 오는 문제일 수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올해 여름 어느 날, 문학에 대한 오랜 갈망을 현실로 이뤄볼 수 있을까 하여「안산 평생교육원」을 찾아갔다. 물론 이러저러한 경로를 거쳐 찾아가긴 했지만, 쉬이 수업도 받고 기존 문우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보니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곳 문우들의 존칭은 ‘선생님’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문우’라는 친구의 개념으로 대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요즘 통상명칭이 보통명사처럼 선생으로 통칭되는 추세이지만, 내 생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도산서원 “계상서당”은 퇴계선생이 지천명의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술 및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당대 실력자인 율곡이 스물셋의 나이로 찾아오자 퇴계가 학문적 친구라는 명목으로 삼일동안 도학을 전수 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30년이란 시간의 괴(乖)를 초월한 문우라는 이름으로 퇴계선생이 율곡을 맞아 나눈 싯귀가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이미 나에겐 문우라는 새로운 친구가 여럿 생겨난 셈이다.
문제는 이들과 얼마나 오랫동안 정을 다지고 잘 지낼 수 있느냐? 가 관건이긴 하지만, 새로운 친구들과 공통의 관심사인 수필을 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이쯤에서 사회에서 만난 친구 하나를 놓고 현실의 친구를 기억하고 자신의 과거를 추억해 본다.
신혼 초 경주역 앞 성동동에서 세를 살다가 형편상 ‘천북면 물천리’ 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육척 거구에 이백 근은 족히 나갈만한 이웃 친구 하나가 생겼다. 서로 부부간에 동갑으로 만나자 마자 친구로 지내기로 성급히 통성명을 했다.
이년 이란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서로가 친절과 배려로 잘 지내다 내가 경주를 떠나 김해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날짜가 다가오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물론 둘 다 술을 좋아하는 처지라 술판이 벌어지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거구의 친구가 갑자기 “꺼이꺼이” 목청껏 울어대기 시작 했다. 나를 보내기가 서운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다.
“야. 친구야 안 가마 안 되나, 꼭 가야 되겠나 나하고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돼?” 하며 내 팔을 끌어당기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친구의 행동에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한 자리가 되었다.
“식아 내가 가면 아주 가냐. 자주 오면 되잖아 경주 김해가 얼마 된다고, 내 자주 올끼다 고마 해라.” 하고 육척거구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 달래듯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서니 내 눈에도 이년간의 추억에서 베어나는 뭔가 끈적 한 게 눈으로 고여 나왔다.
다음 날 이삿짐차를 따라 친구는 김해까지 와서 정성껏 짐을 정리해 주고 자주 보도록 하자고 다짐하고 돌아갔다. 겨우 이태를 사귀었지만 정이 많은 친구였다. 주말이면 두 가족은 어디든 의기투합하여 함께 다녔었다. 영원히 잊지 못 할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없었던 듯 했었다.
김해에 자리를 잡고 보니 경주보다 두 배는 바빴다. 경주에서 여러 해 함께 지냈던 몇몇 친구와 지인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은 터라 그곳 역시 새로운 이웃이 생기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얽히고, 설키고 나니 경주의 친구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만 이년. 광풍처럼 일어난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직의 정점에 있던 나로선 김해 신어 산에서의 생활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서로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
들불처럼 일어났던 노조 바람도 만 달포간의 파업으로 종말을 고하고 나는 자영업자의 신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말았다. 일백 육십 오 명의 전 직원들이 하나처럼 움직이는가 싶더니 진정 사랑도 우정도 돈(金錢) 이라는 허상 아래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물론 친구로써의 진정성이 의심되는이도 있었지만, 노조간부를 맡은 몇몇 친구도 분명 끝없는 소모전에 함께 대치하고 있었었다.
나 자신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었다.
자영업자로 산다는 건 모든게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움직여야 했다. 생활고로 악전고투 할 무렵 때마침 경주에서 연락이 왔다.
여러 해 동안 휴식기를 갖던 경주의 친구가 토목공사 외에 여러 분야에 걸쳐 사업을 한다며 나를 불렀다.
토목공사를 하면서 조경분야가 있어 전문분야인 나에게 일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포항~익산 간 고속도로 영천 휴게소 조경공사」였다. 영천시 임고면 금대리 일원의 공사 구간은 대부분 암 절취구간으로 기초지질이 형편없는 곳 이었다. 게다가 식생토층을 만들어 준다고 가져다준 흙 이라는 것이 어른머리 통 크기의 돌들이 빼곡하게 널린 현장여건은 이익창출과는 거리가 멀었고, 하청에 재하청을 맡은 나로선 결국 마이너스 재정만 떠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여러 차례 친구와의 조우는 있었지만, 의를 등진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 일 이후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소식을 끊고 지내왔다.
갑자기 친구라는 단어에 대한 깊은 고뇌가 일어난다. 인간사에서 과연 친구란 무엇이며 어느 경지까지 배려와 이해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깊은 성찰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날이 하루 더 늘어날 것 같다.
결국 친구와 돈은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나에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기본적 삶이 의식주라는 3대 요인이 기본적ㅇ로 필수 불가결 하다고 한다. 이를 무시한 우정이 쉬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
내 일천한 상식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가장 애매한 보통명사가 바로 「친구」가 되어버렸다.
어느 친구가 보낸 글귀가 가끔 내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고 수시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만남은 인연 이지만, 관계는 노력 입니다.” 라는 구절이 어쩐지 알송달송 한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역사의 한 자락 속에서 읽은 구절이 의미심장한 하루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작금의 현대사에 흔히 나타나는 일상 인듯 하다.
황금국제상 (우수상)
내 친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 전대원
너울대며 춤추는 바닷물
멀리 손 흔드는
창가에 앉아
지금은 기억 속에
깊이 잠들어 버린
네 얼굴 그린다.
철썩 철썩 성난 파도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오늘도 울부짖으며
머리속에 새겨 지려던
안타까운 기억마저
망각의 언덕 너머로
데려가 버린다.
언제나 짭짤한 소금기
입에 문채 달려오는
푸른 바다를 보면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시간 속에서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절절한 아픔 하나가
살그머니 나타나
가슴 아프게 흔든다.
잡히지 않는 시간 속에
빛바랜 추억 하나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난 시간 속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많은 시간 지난 오늘도
이 세상 무엇보다
우정 소중히 여긴
네 모습 때문에
때로 잠 못 이루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쓸 때가 있다.
비바람 몹시 불던
늦가을 어느 날
안녕이란 인사 남기고
달려가 버린
슬픈 뒷모습 떠올리며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마저 지우지 못한
늦가을 달력 한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황금국제상 (우수상)
한국의 특징
인터내셔널 마닐라 학교(ISM) 11학년 홍혜민
나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는 11학년 학생이다. 서양의 식민지를 오래 겪었던 역사 탓인지 동양의 스페인이라 불릴 만큼 이곳은 다양한 인종들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지금처럼 그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생활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3년 전 금발과 파란 눈의 외국 친구들이 우글거리는 학교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나는 혹성에 착륙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은 서양 아이들과 함께 점심시간을 맞이했을 때 어찌나 서먹서먹한지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나는 속으로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내야할지 말지 속으로 한참 고민했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나 교내 식당에서 사온 피자를 꺼내 놓고 먹기 시작하자 나도 용기를 내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땐 어려서 그랬는지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에 관해 외국 친구들의 반응이 두려웠던 것 같다. 원래 패스트푸드 같은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식성이라 엄마가 챙겨주신 음식을 싸오긴 했지만 막상 낯선 외국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려니 뚜껑을 열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차라리 햄버거나 사먹을 걸 그랬다 싶어서 거추장스럽게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엄마는 첫 날이라고 평소보다 정성스럽게 김밥을 싸주셨는데 망설이던 끝에 도시락 뚜껑을 열고 깻잎과 참치와 야채가 들어간 김밥을 꺼내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외국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도시락으로 몰렸다. 아이들은 먹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내게 “나 한 입만!” 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김밥을 하나씩 나눠주며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조금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매일 엄마가 싸주신 한국 음식을 점심으로 싸가지고 갔고 그렇게 하루하루 한국 음식을 나눠 먹다 보니 쉽게 외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엄마 역시 나의 도시락을 향한 친구들의 쟁탈전 얘기를 들으실 때마다 기뻐하시며 불고기와 잡채, 김치전 등을 넉넉히 싸주셨다. 알고 보니 외국 아이들 중에는 이미 한국여행을 다녀온 후 한국 음식 애호가가 된 경우도 있었고 이곳 현지의 한국음식점을 찾아 주말마다 한국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필리핀은 따뜻한 동남아 기후답게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소금과 식초가 들어간 짜고 시큼한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불고기나 삼겹살, 잡채, 김밥 등이 무척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엄마는 영어를 배우며 알게 된 일본과 말레이시아, 브라질 국적의 아줌마들과 한 달에 한 번씩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친분을 쌓아가셨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음식 앞에서는 서로 경계심을 내려놓고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에는 각 나라의 대표 동아리가 있었는데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한국 문화 동아리인 KCC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처음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영어 공부를 따라가느라 바빠서 한국 친구를 깊이 사귀지 못했다. 따라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후배와 한국인끼리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전파하는 이 동아리의 활동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한국 문화 동아리를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국 음식을 만들어 점심시간에 파는 베이크 세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우리는 교내 식당 옆에 부스를 열고 각자 집에서 대표적인 한국 음식을 만들어 와서 외국 친구들에게 팔기로 했고 이렇게 모인 수익금은 동아리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역할을 분담하고 음식의 품목을 정했다. 마침내 베이크 세일 당일 날, 교내 식당 복도에 설치할 테이블을 빌리고 집에서 공수해온 음식들을 진열했다. 동아리 회원 어머니들이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음식을 꺼내놓았다. 나는 볶은 김치와 참치를 넣어 만든 주먹밥과 불고기를 넣은 주먹밥을 가져왔고 다른 친구들은 잡채와 김밥 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교내 식당에서 파는 한국 음식도 있긴 하지만 외국인 조리사의 손을 거친 음식이라 한국 음식 특유의 맛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했는데 과연 집에서 가져온 이 음식들을 외국 아이들이 좋아할까라는 우려는 음식을 내놓기 무섭게 팔려나가면서 한순간 사라졌다. 갑자기 부스 앞에 우르르 몰려온 외국 아이들은 서로 주먹밥과 잡채를 사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한 번 사가지고 간 아이들이 다시 와서 두 번 세 번 사먹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교직원들과 외국 선생님들까지 줄을 서서 음식을 사가는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짧은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났고 우리 회원들은 점심도 쫄쫄 굶어가며 음식의 재료와 이름을 한국발음으로 가르쳐주느라 정작 우리 입속에는 김밥 하나도 넣지 못했다.
우리가 싸온 음식은 삽시간에 불티나게 팔렸고 뒤늦게 찾아와서 아쉬워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 음식에 대한 인기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를 조금이나마 알렸다는 자부심에 솔직히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잡채, 불고기, 김밥, 김치전, 주먹밥 등의 인기도 좋았지만 한국 과자와 컵라면 역시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학교에 와서 이날처럼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얼핏 교내 식당 안을 들여다보니 학생들 대부분이 우리가 만든 음식을 펼쳐놓고 먹고 있었고 햄버거나 피자 코너는 평소와 다르게 텅텅 비어있었다. 테이블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외국 아이들이 계속 몰려와서 “노 모어 잡채 (No more Japchae)?”라고 묻고 갈 정도로 우리의 베이크 세일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솔직히 이 행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한국음식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에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역시 필리핀처럼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며 암울한 역사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인 특유의 독창적인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고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선진국민으로서의 대우를 받고 있다. 사실 필리핀만 해도 자국의 문화와 대표적인 음식을 손에 꼽기 어려운 실정인데 한국은 고유의 음식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더운 나라에서는 즉석에서 튀기고 볶는 요리가 대부분인데 한국 음식은 오랜 시간 숙성된 깊은 손맛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한국 음식의 우수성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음식이야말로 글로벌한 세계문화의 첨병이자 이웃과 정겹게 음식을 나누어먹는 한국인의 따스한 정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의 벽을 허무는 도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한 나라의 음식문화는 곧 그 나라의 국력임을 함께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체험의 시간이었다.
황금국제상 (우수상)
내 친구
어항 속 작은 물고기
북경청년정치학원 부속초등학교 3학년
나는 작은 어항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입니다. 나는 혼자 사는 영어선생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영어선생님이 한국에 가셔서 나는 논술선생님 집에 온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걸 싫어합니다. 논술학원에는 아이들이 많아서 싫지만 아이들은 심한 장난은 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심한 장난을 치셨습니다. 바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밥 주는 척’이었습니다. 나는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미 손을 빼고 나한테 “어우, 지느러미 예쁘네”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예쁜 황금물고기 한 마리를 데려와 어항 안에 넣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보다 황금물고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황금 물고기는 잘난 척도 안 하고 내가 더 부럽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은 어느 때보다 제일 좋은 시간입니다. 밥을 저번보다 훨씬 많이 줬습니다. 황금물고기가 먼저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건 훨씬 많았습니다. 황금물고기는 나머지 밥을 다 나한테 주었습니다. 나는 황금물고기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너무 잡아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황금물고기가 여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같이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황금물고기와 나는 다른 종류라서 결혼을 못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황금물고기와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한 번 시도를 해봤습니다. 황금물고기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황금물고기는 기쁘게 동의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우리에게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궁금했습니다. 과연 내 종류일까, 아니면 황금물고기 종류일까 궁금했습니다. 나는 아기, 아니 우리 딸 아니면 아들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바로 황금물고기였습니다. 이제는 딸인가 아들인가만 관찰하면 됩니다. 바로 나를 닮은 아들이었습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나는 이렇게 아빠가 되었습니다.
황금국제상 (해외특별상)
내친구
가을을 닮은 노신사
캐나다 김종섭
만추의 시간은 늘 부풀어 오른 풍선의 모양처럼 들뜬 마음으로 느껴가는가을을 담아가기에 분주해진다. 하루를 열어가는 마음에는 이미 커지는 계절의 정취를 동경하고 나선다. 단풍이 빠르게 물들어갈 때쯤 시선은 하늘과 나뭇잎 사이에 맞닿은 곳에 걸터앉아 가을을 느껴가곤 했다. 마음의 공허함은 형용할 수 없는가을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채우고 담고 가려는 마음의 동요가 움직일 때쯤에도 가슴은낙엽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낙엽 너머로 시선을 움직여 세상 밖 번민의 시간을 덮고 세상 속 삶에 지친 찌꺼기를 가슴으로부터 씻어 내리려 하지만 늘 생각만 늘어가고 가을을 느끼기도 전에 나의 가을은 아쉬움만을 남겨 놓고훌쩍 떠나버린 늦가을은 공허의 파문의 흔적만이 고독의 열병을 앓아가고 있었다
하늘이 높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의식 없이 손을 내밀어 불어오는 늦가을 차가운 공기와의 마주침으로 하루의 만남에 위로를 대신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호사스러운 눈은 단순한 바깥세상을 동경하고 나선다. 설익으므로 아직 채 깨어나지 않은 몸을 무의식적으로 일으켜 세워 생각의 이유도 묻지 않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길을 나섰다
주인을 잃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골프장 세움 간판이 한층 더 가을의 공허감을 휘감고주차장에는 크고 작은 차가 떨어져 뒹구는 낙엽의 터전을 밟고 지루한 표정으로 주인을 기다리며 한낮을 지켜나가고 있었다.오늘도 휴일의 하루는 특별히 약속된 시간이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이전의 휴일이 그랬듯이 별반 다르지 않은 반복의 연속을 가진 또 하나의 휴일 속 일상의 시간을 담아가게 된다.골프장에 도착하는 순간 포근히 다가와 시야에 내려 앉은 초록의 풍경을 바라보는 하나만으로도 눈의 포만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소박한 바람 한점이 코끝에 가을 향기를 전해온다.바람의 존재감도 사치일 정도로호흡을 아껴 내 뱉고 움츠렸던 마음의 동요를 주저 없이 그린 위에 덩그러니 내 던졌다. 그린은 늘 사계의 시간과타협하지 아니하고 초록은 일 년 내내 변함없이 홀로 서기의 생을 준비해 나간다. 늦가을의 정취는 낙엽의 힘겨운 몸부림의 움직임이 보였다. 비바람에 옮겨간 낙엽은 주인을 잃고 그린 위에서 마지막 삶의 진념을 불태워간다
하늘이 유혹의 장막을 편다. 원형의 작은 골프공을 힘껏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본다. 하늘을 맞닿을 듯 솟아오르기를 반복해 나가고 마음의 발걸음마저 빨라지다 보면 어느새또 다른 그린앞에멈추어 서게 된다. 먼저 앞서갈 이의 행동을 지루한 기다림의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때 팔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신사가 조심스럽게 뒤돌아와 발길을 멈추어섰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날입니다."라는 말로 청량제 같은 인사를 건네어온다. "괜찮으시면 같이 운동할까요?"얼떨결에 주저 없이 "네 좋습니다." 말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캐네디언으로 보이는 노년의 신사는 한국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다고 하셨다. 잠시 이어가던 말을 멈추고 무엇인가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회상이나 하듯 하늘을 슬그머니 주시하는듯싶더니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거침없이 흥분된 어조로 말문을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 어제 같았던 세월이 벌써 66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네요.시간이 참으로 빠르기만 합니다. 지난 66년전의 흔적이 노년의 나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망한 세월의 흐름을 새삼 더 느껴가는듯싶습니다". “그 당시 나는 젊은 나이에 한국에 있었습니다. 6.25라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었지요". 그 말을 듣는 나도 모르게 순간 노신사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표정을 흘끔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깊게 파고들어 간 주름살 앞에 시선이 멈추었다. "고마우신 분" 소리 없는 혼자의 말은 가슴의 전율을 타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노신사의연로한 모습에서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느껴졌다.그 이유는 젊은 날의 뒤 이야기가 숱한 세월을 보낸 지금에서야 야속함으로 비집고 들어와 빛바랜 노년의 이름으로 불러져야 하는 비정함이 어쩌면 이유의 까닭은 아니었을까
그가 쳐올린 작은 원형의 흰색 공이 하늘을 향해 힘겹게 날았다. 우리는 날고 있는 공의 중심을 쫓아 시선을 마주했다. "나이스 플레이". 서로의 호흡은 칭찬과 환호를 아낌없이 주고 받아가면서 공통의 의식이 있는 친숙함의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짧아진 늦가을 오후는 빠르게 석양의 노을이 나뭇가지 위로 옮겨 놓기에 분주했다.
서둘러 운동을 끝내고 노신사는 그린을 벗어나기 위해 골프커트를 힘겹게 주차장 쪽을 향해 옮겨가기 시작했다. “친구!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네요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또한 함께 운동을 즐겨간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자! 기회가 되면 오늘처럼 이곳에서 다시 만날수 있길 희망합니다". 아쉬움의 작별의 뜨거운 인사를 함께 나누고 난후 노신사는 아쉬움의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차가 골프장 정문을 지나 시야에서 멀어져 갈때까지 희미해진 차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인연의 중심에는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친교를 해나간다.그 많은 인연중에도 특별한 관계를 가져가기 위해 서로는마음을모아 관심과 공감이 이루어가기 시작하고 친구라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가을에 붉게 타오르던 낙엽을 잃었다.하지만 낙엽의 마음 대신 이 가을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가선 노신사를얻었다. 내게 담은 가을의 시간은관대하다. 아직 떠나지 않은 가을녘 앞에 소박한 소망하나를 얹어본다.그가 오늘 쏘아올린 공처럼하늘을 향해 가볍게 날수 있는 건강의 깃털과 가을을 닮은 노신사를 만나게 해준 가을날의 추억을 꼭 기억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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