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건너편 산밑으로 기차가 두 번 지나간 뒤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은 금방 내려앉을 것처럼 무거운 먹구름이 덮여 있었다. 샛노랗게 벼가 익은 들판에 서서히 어둠이 들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논 가운데 앉으려는 참새를 손을 휘저으며 쫓을 때마다 양은 도시락에 간식으로 담아온 찐 감자 몇 알이 이리저리 굴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새들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멀리서 지나갔지만 어둑어둑 비가 오는 논둑 길을 걸어서는 무서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들에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논 가운데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리고 살아서 나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큰 소리를 내어 목이 아프도록 울었다. 새를 쫓아야 쌀밥을 먹을 수 있다면서 할아버지는 새를 보러 가지 않으려는 나를 무섭게 호통쳐서 내쫓다시피 하였다. 밥상 위에서는 밥알 하나도 흘리지 못하게 하던 할아버지다. 나는 논에 가지 않으려고 할아버지 몰래 정옥이네 집에 숨어서 놀았지만 할아버지는 거기까지 나를 찾아와 내 손목을 끌고 갔다. 다른 집의 논은 어른이 된 오빠나 언니가 와서 새를 지키지만 초등학교 삼 학년인 내 또래의 아이가 새를 보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논둑 길을 가로질러 네 기둥을 세우고 작은 원두막처럼 높이 내가 혼자 앉거나 누울 만한 새 볼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겨우 발을 디딜 만한 좁은 사다리를 세 번 딛고 올라가서 앉으면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산과 들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작은 원두막에 혼자 앉아서 '우여 우이여' 하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새를 쫓아도 새들은 어린 나를 깔보는 듯 얼른 달아나지 않았다.
나는 그 때마다 찬휘 생각이 났다. 언제 보아도 말쑥한 양복 차림과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향내가 나던 찬휘 아빠가 서울에서 돌아가셨다고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찬휘는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찻길을 건너 유치원에 다니던 그 때의 유일한 남자 친구였다.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찬휘는 나를 보아도 별로 말이 없었다. 찬휘는 엄마와 두 식구가 되었다. 유치원 졸업을 하고 얼마 후 찬휘네는 서울 외삼촌 집으로 이사간다 하였다. 이사가던 날 이른 아침 우리 집 문간을 기웃거리며 나를 찾던 찬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가버렸던 것이 나와 마지막 작별 인사였던가 싶다. 새를 쫓다 감자를 벗겨 먹을 때에도, 이솝 우화가 실린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에도 찬휘가 보고 싶었다. 동네의 개를 만나 내가 무서워하면 발을 굴러 쫓아주던 찬휘,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아빠가 사온 과자를 내 손에 듬뿍 쥐어주던 착한 찬휘. 나 혼자 논에 새를 보러 간다면 따라와 줄 동무였다.
깊은 하늘에 뭉게구름 한 점이 떠 있을 때면 그 구름 위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나는 그 때처럼 하늘을 많이 바라본 적이 없다. 아기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 같던 구름은 어느새 꽃송이도 되었다가 커다란 백곰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찬휘도 서울에서 중학생이 된 모습을 가끔씩 그려보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삼 학년의 가을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들러 나오는 복도에서 자장면 철가방을 무겁게 들고 들어서는 키 작은 소년을 내가 먼저 보게 되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 그것은 유치원 친구 찬휘임에 틀림없었다. 복도 창쪽으로 얼른 몸을 피하고 찬휘가 나를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돌렸다. 나를 스치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찬휘의 뒷모습을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찬휘네는 서울로 이사간 게 아닌가 보더라고 하던 할머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날 나는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을 수가 없어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은 더 멀고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
내 유년의 가을은 심란하고 두려움뿐인 계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빈 깡통을 모아 작은 돌멩이들을 그 안에 넣고, 낡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챙겨 허수아비의 옷을 마련할 때면 내가 또 새를 보아야 할 걱정에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 우리 논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십 리나 되는 듯 멀었다. 할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식구들의 일손이 모자라 어린 손녀를 새 보러 보내는 할아버지의 마음도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헌 고무신과 유리병을 모아두었다가 엿장수가 지나가면 엿을 바꾸어 할아버지는 나에게만 주었다.
지금의 논 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면서 나는 쓸쓸하게 웃는다. 허수아비는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요즈음에도 어쩌다가 가을 들녘에 나가보노라면 그 시절의 시린 외로움이 찬바람처럼 파고든다. 만국기처럼 줄에 매달린 깡통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면서 강하고 여리게 하모니를 이루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가냘프게 핀 억새가 유연하게 몸짓을 하던 언덕빼기를 지나 집 앞이 가까워오면 어머니가 무청 시래기를 삶는 냄새가 은은하던 내 고향집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