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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저명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스벤헤딘은 20세기 마지막 오지 탐험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오지탐방과 전인미답의 땅을 탐험하는데 남다른 열정을 보여줬다.(위 사진은 아미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 본 산맥이다)
스벤헤딘의 탐험 활동은 20세기초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으며 주로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아시아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고원, 티벳고원, 인도 북동부와 드넓은 러시아 남부지역에 걸친 방대한 지역이 활동무대였다. 그가 기를 써고 찾아다녔던 건 19세기 가장 왕성했던 지리적 발견에서 조차 유럽인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곳이었으며 목숨을 걸고 오지를 찾아 다닌 목적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발행된 각종 지도에 그려지지 않았던 지역과 지형을 답사한 뒤 지도를 작성하고 기록으로 또는 그림(스케치)으로 남기는 것이다. 스벤헤딘은 자서전에서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군분투했으며 수천년 모래폭풍으로 깊은 땅 속에 잠자고 있던 고대도시(누란)의 흔적을 발견, 영국왕립지리학회에 보고하고 세계지도에도 정식으로 등재시키는 성과를 거뒀다고 기록했다.
수차례에 걸친 중앙아시아 탐험으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자 청조 말기 티벳에서 베이징까지 수천킬로미터 여행길에 올라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온갖 체험을 했다. 그가 밝힌 루트 상으로 보면 티벳에서 아마도 중국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촉나라의 수도 청두(成都)를 거쳐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 루트를 알 길은 없다. 청조말이었던 스벤헤딘의 중국 관통길은 아마도 고난의 길이었을 것이다. 주로 중국인이나 중앙아시아 현지 가이드 겸 통역을 고용해 탐험길에 올랐지만 오늘날과 같은 대중교통은 꿈도 꿀 수 없는 험난한 여정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기에 어려운 악조건과 언어장벽, 방대한 영토도 미지의 땅에 대한 그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의 탐험시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에서 땅덩이가 3번째로 넓은 중국이지만 워낙 교통수단이 좋아지고 자본주의 국가 이상으로 자본주의화 된 상태라 여행자들이 느끼는 장벽은 아무 것도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 넓은 중국 땅의 어디로 가든 막힐 것이 없다. 하지만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는 한국인들에게도 퍽이나 친숙한 이름으로 다가오고 또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쓰촨지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서울에서 쓰촨에 대한 서적이나 기록들을 상상밖으로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데 많이 놀랐다. 한국 인천 ~ 쓰촨 사이에는 아시아나 등 국적항공기의 직항노선이 뚫려 있고 국내에선 쓰촨의 마파두부나 훠궈 같은 매운 요리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가깝게는 수년전 주자이거우(九寨沟) 쪽에서 발생한 쓰촨 대지진으로도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곳이 쓰촨이고 청두다.
주로 포털사이트나 서점에서 청두 관련 책을 통해 정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흔한 '저스트고' 같은 여행잡지에서도 청두는 찾기 어려웠고 대표적 포털 네이버나 다음에서도 쓸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운 좋게 아마추어 여행작가가 쓴 단행본 '청두'를 접하고서야 그나마 청두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국내에 그만큼 청두에 대한 정보 수요가 적다는 걸 반증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청두 여행을 준비할 무렵 스벤헤딘이 탐험 후 사실을 중심으로 마치 보는 듯이 선명하게 서술해내는 '탐험기' 같은게 있으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스벤헤딘은 당시만해도 이미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청두에 대해 세세한 서술을 남기지 않았다. 지리적 발견에 온통 관심이 집중돼 있었던 만큼 청두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 지 모르겠다.
중국 서부 내륙행은(2019년 5월말 방문) 이번이 처음이라 내친 김에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유적 가운데 1,2위를 다투는 진시황 '병마용갱'까지 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전체 일정이 5일에 불과해 아쉬움을 품은 채 시안을 가보겠다는 생각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곳은 청두시의 남쪽에 위치한 아미산(蛾眉山)과 청두시를 제대로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사진설명=아미산 꼭대기에 봉안된 대규모 금불상)
중국의 대도시들이 다 그렇듯이 청두 역시 규모면에서 서울 만큼 넓고 메트로폴리스 인구는 1500만명에 이를 정도로 한국의 대도시들을 압도한다. 주변에 충칭과 시안, 쿤밍, 티벳자치주, 주자이거우 등의 주요 도시들과 관광명소들이 많고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중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대륙의 주도권을 다퉈온 촉나라의 근거지이자 중국 내륙 서남부지역의 중심지다.
3~4천년 역사를 간직한 만큼 도시는 짜임새있게 자리잡혀 있었고 중심지 답게 교통은 잘 발달돼 있다. 도심 도로는 1~4환까지 환루(瑍路)체계가 정비돼 있고 청두남역 등 시내의 두개 허브 역(站)은 주변 도시들과 거미줄 처럼 연결돼 그야말로 사통팔달이었다. 한국 처럼 대중교통체계도 잘 갖춰져 버스나 지하철로 시내를 이동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고 서비스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특히 지하철 요금은 너무 저렴해 부담스럽지 않았다.
요즘은 한국의 카카오택시 같은 호출택시 서비스가 급속히 퍼져 현지인들은 이동수단으로 이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기본요금이 한국 돈으로 약 1500원에 거리에 따라 요금이 추가되는 식이어서 이용하기에도 택시보다 싸다는 것이 현지인의 설명이다.
첫 방문기간 동안 체류했던 곳은 청두 지하철 2호선 뉴스커우(牛市口)역에서 도보로 10분거리에 있는 청두 롯데아파트.
춘시루까지 3개 정거장, 베이징시의 텐안먼 광장과 같은 텐푸광장(天府廣場)까지는 4개역에 불과한 준 도심권으로 접근성이 뛰어난 곳이어서 주로 도심에 위치한 관광포인트를 찾아가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여행 중에 중국이 자신의 국익에 반하는 국가나 단체, 기업에 얼마나 집요하게 보복을 일삼는 지 이곳에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숙박지로 사용했던 롯데아파트는 단순히 한국식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단지를 둘러싼 거대상가를 함께 지은 주상복합단지로 롯데몰이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경북 성주골프장을 사드기지 건설용으로 내줬다 미운털이 박히는 바람에 중국내 사업이 전반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몰을 오픈하기도 전에 단지를 팔아 버린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 기반을 둔 롯데는 한미동맹에 조력하지 않을 수 없어 중국에 엄청나게 벌려놓은 사업이 마음에 걸려도 어쩔 수 없이 골프장을 사드부지로 내줬지만 그 보복의 파장이 이렇게도 길고 오래지속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청두, 하얼빈 등 웬만한 중국 대도시에는 다 진출해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짓고 놀이시설을 짓고 아파트까지 건축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처분하고 중국사업에서 거의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는 중국 당국의 뒤끝이 작렬하고 있고 규제가 언제 풀릴 지 가늠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 현재 롯데를 포함한 대 한국 여행규제는 '크루즈와 롯데그룹, 단체관광' 등의 규제가 유지되고 있다.
얼마전까지 언론사의 산업부에서 롯데그룹을 마크하던 기자로 활동한 나로서는 롯데가 청두의 아파트단지를 처분하고 떠났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만은 않았다.
국익에 반하면 누구든 가차없이 보복하고 마는 중국의 속좁음에 야유를 보내야 할 지, 수천년 간 이어져온 중국의 지역패권이란 것이 고작 이런 옹졸함에서 비롯된 것인 지, 뾰족한 대응책 없이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한국은 그렇게 참고만 살아가야 하는 건 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살아가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결국 결론은 없다. 언제나 힘있는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하찮은 진리 외에는...
주목한 청두 관광지는 대략 5군데, 역사가 깊어 시내에는 가볼만한 곳들이 적지 않았지만 다 추려내고 청두를 잘 보여줄 뿐아니라 문화도 조금은 맛볼 수 있는 곳들을 중심으로 반드시 방문해야할 곳들을 가려냈다.
1.천부광장과 콴자이샹즈, 2.청두 북부의 펜더기지, 3.청두시내 두군데에서만 공연하는 천극, 4.삼국지 영웅들의 혼이 서려 있는 상징적 관광지 무후샤와 진리(錦里)거리, 5.다운타운 춘시루와 다쯔쓰 그리고 란콰이펑(蘭桂坊) 등이다.
여기에 한 곳을 덧붙인다면 두보초당이 있다. 이 곳은 중국의 시성 두보를 기려 만든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보의 흉상과 각종 시비, 두보의 거주지였던 초가, 작업실 등이 보존돼 있어 천재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당대의 최고 시인이었던 두보는 759년에 난을 피해 이곳으로 찾아들었고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는 여기에 4년간 머물면서 240편 이상의 한시를 지었다.
두보초당은 전체가 짙은 녹음으로 뒤덮여 초당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고 쓰촨의 상징인 대나무와 아열대 활엽수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며 두보초당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연못이 숲과 어우러져 멋드러진 시닉 뷰를 만들어 낸다. 중국 전통 정원의 백미인 수저우의 '졸정원'과 비교하면 규모면에서 왜소한 편이지만 연못과 정원, 나무숲과 탑, 건물의 조화는 막상막하였다.
경관이 좋아서인 지 두보의 유명세 때문인 지 두보초당에 입장하는 데는 위안화로 50원, 한화로는 8600원으로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청두에서 비교적 가까우면서 뛰어난 관광포인트로는 여산시의 여산대불과 아미산을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곳 모두 불교와 관련된 유명 유적지다. 청두시의 정남쪽에 위치한 아미산은 중국내에서 '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만불정, 금정, 보국사 등 불교사찰과 암자, 불상들이 산속에 거득히 찼다고 할 만큼 즐비하다.
아미산의 산기슭에 자리잡은 보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사찰의 구조가 아름답고 뒤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식 건물배치, 전각이 4중으로 배치돼 중국 사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여산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대불이 볼거리여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아미산시와 여산시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두 곳을 패키지로 둘러보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이글 첫 부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청두가 있는 쓰촨성은 티벳에서 아주 가까운, 대륙에서 티벳으로 가는 통로인데 티벳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1차 관문이다. 알려진 것 처럼 티벳은 인도와 접해 있어 불교가 가장 빨리 포교된 지역이다.
티벳 자치정부가 있지만 대승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라마'가 국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사실상 정교일치국가의 전통을 이어오며 중국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눈밖에 난 달라이라마는 인도에 망명정부를 차려두고 전세계를 전전하고 있다.
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이 군사적 패권을 기초로 티벳을 복속시켰지만 그들의 종교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오히려 티벳을 통해 불교적 생활방식이나 내세관을 받아들임으로써 동화된 것이 중국 불교의 역사다.
중국은 대륙은 물론 변방의 모든 소수민족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친 공자의 사상 유교가 있었지만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현생의 삶을 규율하는 삶의 기준 즉, 인의예지신을 강조하고 철학적 근거를 제시할 뿐 내세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내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추구해 온 인류는 문화권을 막론하고 종교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한 형태로 영향을 미친 종교는 단연 불교였다. 불교문화권의 중심부에서 가까운 티벳, 그 티벳에서 가까운 청두에 불교가 왕성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국을 통해 불교를 전수받은 한국 역시 불교가 널리 퍼져 있고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불교에 귀의해 복도 구하고 마음의 평안도 얻는다는 점에서 중국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사찰문화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 한 가지는 바로 '향'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제사나 기도에서 향을 피우는 건 기도를 받아들이는 절대자나 신이 '흠향한다'고 믿기 때문인데 이런 점에서 향은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가교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찰에 가면 예외없이 칭시앙추(请香處)라는 향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신도들은 이곳에 들러 향을 사서는 법당이나 불당 앞에 마련된 향을 태우는 곳으로 가서 향에 불을 붙여 태우면서 복도 빌고 안녕과 건강도 기원한다.
향도 한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가느다란 것에서 부터 막대기 만큼 굵은 것 까지 다양하다. 국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는데다 향을 태우는 기도문화가 있어 가는 사찰마다 향내음이 진동을 한다. 보국사란 사찰에 들렀을 땐 마치 화재가 발생한 것 처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불이라도 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참선과 기도 등 선불교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발달한 한국 불교와 대비되는 특성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보국사 법당벽면에 그려진 불화. 인물과 탑은 부조로 묘사됐다)
일정이 짧았던 데 비하면 알차게 청두를 보고 체험했지만 2가지 점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여백쯤으로 생각해 두고 싶다.
중국의 내륙이지만 관광을 하던 중 우리가 쉬기 위해 가장 처음으로 찾아 들어간 곳은 중국식 찻집이 아니라 스타벅스였다. 텐푸광장 부근의 박물관을 둘러본 뒤 들렀던 광장 지하 1층의 스타벅스는 실내 인테리어나 커피맛이나 서울의 여느 스타벅스와 다를게 하나도 없었다.
부근에 찻집이 없기도 했지만 굳이 스벅으로 발길이 움직인 건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글로벌 프랜차이즈의 힘일 것이다. 평소 커피를 무척 즐기는 나는 스타벅스를 발견하자 마자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청두의 전통거리 가운데 쌍벽을 이루는 콴자이썅즈에서는 멋드러진 중국식 기와집에 들어선 스타벅스가 한국인들에겐 반드시 가봐야할 필수 관광템으로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고 자그만 시골도시에 불과한 아미산시(市)에도 스타벅스가 진출해 있는 걸 보고 새삼 스타벅스를 생각해보게 됐다.
청두 도심에서도 그렇고 아미산시에서도 그렇고 맛있기로 유명한 쓰촨차(茶) 맛을 보려고 무던히도 찻집을 찾아 기웃거렸지만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아미산 아래에는 포장된 차를 판매하는 집은 많았지만 들어가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집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예기치 않게 청두 다운타운 춘시루 한복판에 위치한 절(大慈寺)에서 찻집 한 개를 발견했다.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가는 길에 들러 갔다고 해서 유명한 절 다쯔쓰엔 커다란 찻집이 있었다. 실내와 노천카페를 포함해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족히 100평은 될 정도로 넓었다.
중국돈 18원(1인기준)을 주면 포장된 차 1봉지와 뜨거운 물이 채워진 커다란 보온병과 다기를 준다. 4인기준으로 한화 12000여원을 내고 소원하던 차를 실컷 마셔볼 수 있었다. 처음 우려낸 차맛이 은은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것이 여행의 피로를 녹여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여유, '타국땅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사찰 속 찻집'이란 분위기가 가져다 주는 평화로움, 다가오는 여행 일정이 주는 설레임이 겹쳐서 자그만 행복을 맛보았다.
(다쯔쓰 경내 찻집. 의자가 대나무로 만들어져 운치가 있다)
청두의 마지막날인 6월1일은 중국의 어린이날이었다. 마지막 관광포인트 역시 청두 다운타운 춘시루, 주말과 어린이날이 겹쳐 시내는 인산인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청두 시민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워낙 중심가 도보거리가 넓게 길게 조성돼 무엇이든 큼직큼직한 대륙의 규모가 실감났을 뿐아니라 그 넓은 거리마저 꽉꽉 채워진 느낌에 중국이 역시 인구대국이란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청두 메트로폴리스의 인구 1500만도 많지만 청두가 서부내륙의 중심지다 보니 주변의 중소도시에서 이곳을 찾는 유동인구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춘시루에서 진장(錦江)쪽으로 3블록 정도 이동하면 '란콰이펑 청두'가 나온다. 진장 좌우로 들어선 건물의 경관조명이 일제히 밝혀지고 강물에 비친 조명은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 낸다. 강을 따라 널찍한 산책로가 있고 그 안쪽으로 강에 접한 좁은 산책로가 이중으로 나 있어 야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강 폭은 서울의 안양천과 비슷한 규모지만 주변의 무넘이땅(고수부지)은 거의 없어 서울의 청계천과 비슷했다. 청두에서의 마지막날 춘시루에서 천천히 걸어서 30여분 진강에 도착했을 때 여러 척의 자그만 배들이 상류쪽으로 거슬러 나아가고 있었다. 배위로 구명조끼를 착용한 사람들이 앉아 있어 관광용 유람선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란콰이펑 청두)
진장의 현란한 밤풍경은 아름다웠다. 이곳이 청두판 란콰이펑, 레스토랑과 클럽들이 몰려 있는 '젊음의 거리'로 춘시루 쪽에서 오는 듯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있었다. 부근의 카페나 찻집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지만 준비된 정보가 없었고 다음날이 출국이라 시간적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란콰이펑이 첫 청두 여행의 마지막 포인트였다.
청두의 일정을 마감하면서 든 생각은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오게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었다.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청두시민들과 맘 편하게 소통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도착하는 첫날부터 그 곳 현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고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늘 바쁜 내게 모처럼 주어진 여유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 깊숙한 곳의 본능을 깨운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호텔 식당에 전시된 향신료와 조미료.
쓰촨음식은 중국의 4대 요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곳의 습한 날씨 때문에 매운맛이 강한
조미료를 많이 쓴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심상 하나가 바로 청두시민들이 외부인에게 친절하고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하고 소통에 적극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체류하는 기간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북경이나 한국에서 보게되는 미세먼지도 없었고 거리는 전체적으로 잘 정돈되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청두시민들은 베이징이나 상하이 시민들 만큼이나 세련된 외모와 메너를 가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이고 좋은 면만 봤기 때문에 첫인상이 좋았다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보는 것 만큼 알고 믿게 되기에 첫인상에서 비롯된 심상이 적어도 내겐 진실 처럼 다가온다. 두번째 청두행이 언제쯤 일 지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