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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남자 미겔
저녁식사를 지근의 바르에서 했다.
베이컨 보카디오와 호프 1잔을 시켰을 뿐인데 동양의 영감이라 배려하는 것인가.
품위가 있고 세련미를 풍기는 중년의 여주인이 와서 도와줄 것 없느냔다.
양이 많아 반이나 남은 것을 그녀는 자진해서 포장해 주었다.
이즘에는 거의 매일 1번은 들리는 음식점인데 사소한 데서 그 집 인심이 짚어진다.
같은 값에도 질과 양의 차가 많이 나고 '페레그리노를 위한 특별메뉴'라는 그럴싸한
이름에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러 루트에서 겪었는데 순례자가 집중하는 프랑스 길이 가장 심한 것 같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잦은 나그네 생활을 통해 정에 주린 늙은이가 된 탓인가.
지극히 작은 호의에도 곧잘 감동한다.
이 밤도 그런 경우로 약간 상기(爽氣)되어 돌아온 숙소에서는 천부적 미성(美聲)의
미겔이 여전히 성가를 부르며 기다렸다는 듯 의자를 내놓았다.
그가 부르는 노래 중에는 내가 산과 길에서(이 순례길에서도) 자주 부르는 Amazing
graze how sweet the sound도 있어 더욱 친근감이 드는 그인데.
자기 연배라 생각했던 그에게 세텐타 이 시에테(77세)는 충격적인 나이 차이지만 이
밤에는 나이와 신체조건에 무관하게 초월적 희락의 삶을 사는 그가 내 스승이다.
풍진 세상과는 무관하며 천진난만한 소년같은 그가.
프랑스 길 뿐 아니라 내가 거쳐온 알베르게를 통틀어서 가장 행복한 남자 미겔!
프랑스 길에서는 워낙 많은 순례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미겔같은 이가 흔하지 않으나
다른 길에서는 다반사이며 관계는 e-mail로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과분하게도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내고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당신이 가장 특별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평화를 가져다 주었고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표현들은 각기 다르지만 속 뜻은 폰테베드라의 이사벨이 보낸 이 글과 대동소이다.
꼬레아가 어데 있는지도 모르는 먼 나라 늙은이에게 아첨할 리 있겠는가.
4월 24일(일)은 내가 걸은 2천km 순례길에서 가장 짧게 걸을 수 밖에 없는 날이다.
머물러야 할 폰페라다(Ponferrada) 까지 약 17km 남짓 되는 거리니까.
내일(월) 이 곳 대학교를 방문해야 하므로 더 많이 가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느 날 처럼 새벽같이 기상한 것은 어느 새 습관으로 정착된 탓인가.
알베르게를 나서려는데 미겔이 내 팔을 잡아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타르다호스의 고에스 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해 놓은 아침을 먹고 떠나라는 것.
그의 따사로운 정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토스트와 우유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정에 약한 나그네가.
프랑스 길의 압권
기분 좋은 출발을 만들어준 미겔이 고마운 아침.
그러나 길에 들자마자 한 특이한 물체가 이른 아침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자전거와 함께 지팡이, 모자와 표주박 등 페레그리노 상징물들로 구성된 조각품이.
1987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다가 이 곳에서 사망한 독일인 자전거순례자
하인리히 클라우세(Heinrich Krause)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란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해서 십자가 대신 자전거를 세운 듯 한데
험한 지형이 아닌 지점에서 왜 그랬을까.
더구나 그 때는 이미 사망율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현대의학의 시대인데.
카미노는 타고 내려가던 LE-142도로를 벗어나 고르지 못한 산길이 되어 리에고 데
암브로스 (Riego de Ambros) 마을을 지난다.
엘 아세보처럼 전통적인 비에르소(El Bierzo) 스타일인 목제발코니(balcony)집들이
들어서 있는 작고 조용한 산간마을이다.
마을을 벗어나 거대한 밤나무 단지를 통과하면 급격한 내리막 길이다.
레온 산군이 호락호락 순순히 보내주겠는가.
굽이굽이 돌고도는 차도(LE-142)가 꿈틀대며 보이다 말다 하고 장관인 거대한 산군
(山群)의 협곡을 빠져나가는 이 길이야 말로 프랑스 길의 압권이다.
이 구간이야 말로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의 오리진이며 진수(眞髓)다.
그러나 "성 야고보의 길에서"일 뿐이다.
백두대간을 4번 종주한 내게 감동과 감흥이 얼마나 일겠는가.
환산거리 1.000km가 넘는 산길이 싫증을 주면 4번이나 걸을 수 있겠는가.
"짜증을 느끼면서도 대간을 타는 것은 대간에 대한 모독이다."
백두대간 댓재의 오아시스 노식의 이 말은 명언인다.
야고보의 길은 신앙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대간과의 단순 비교는 의미없다.
매번 처음 걷는 길처럼 새로우며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하는 현란하고 불가사의한
길, 묵묵히 민족의 반만년 애환을 보듬고 있는 백두대간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막내딸에게 "백두대간과 9정맥, 옛 10대로를 걸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여기 카미노에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엽서를 보냈는데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화마(火魔)가 분탕질하여 옥의 티가 된 일부 숲을 지날 때 힐끗힐끗하던 몰리나세카
마을의 모습이 완연함으로서 환상적인 꿈이 깨지고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20일 동안 시각뿐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매우 굶주렸던가 보다.
황홀하리 만큼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우리의 산들에 비해 단조로운 산에서도 이처럼
심취했으니 말이다.
꿩 대신 닭인가.
일본인이 부러웠다
인구800여명, 알맞은 규모의 마을 몰리나세카(Molinaseca)에 진입하려면 메루엘로
강(rio Meruelo)을 건너야 한다.
강 이 쪽에 상투아리오 데 라 비르헨 데 라스 앙구스티아스(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가 마을의 수호신 처럼 서있다.
중세기에 놓았다는 마을의 관문인 순례자 다리(Puente de Peregrinos)의 정교함도
이베리아 반도인들의 돌다루는 솜씨가 예술에 다름 아니라는 감탄을 하게 한다.
옛 마을이면서도 현대화가 조화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마을의 거리와
큰 집에는 한 때 매우 중요한 마을이었음을 의미하는 정교한 문장들이 있다.
훗날 카스티야 이 레온과 갈리시아의 여왕이 된 도냐 우라카(Dona Urraca)가 한 때
여기 토레 거리(Calle Torre)의 교차점에 있는 큰 집에서 살았다는 것.
나의 관심은 이같은 과거가 아니고 도로와 만나는 마을 끝의 한 석비(石碑).
2009년 6월 4일에 세운 Japan - Spain Camino 友交記念碑다.
순례자 통계에 의하면 2009년 한국과 일본의 순례자는 1079명 대 526명으로 일본은
한국의 반도 되지 않았다.
84명 : 282명이었던 2006년 이후 449명 : 327명으로 대역전되었고(2007년) 2008년
에는 915명 : 412명으로 한국은 일본의 배가 넘는 수가 다녀갔다.
그랬음에도 일본은 우교관계를 수립했고 대학인순례자협회에도 소위 학위증이라는
순례증서에 매달리는 우리와 달리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1.200km 시고구 헨로 순례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사아군 알베르게에 붙은
그들의 홍보 포스터 효과 아닌가.
새 주택가에 가라오게(空オケ) 간판이 나붙어 있는 것도 우교관계의 효과일 것이다.
돈 많은 한국, 돈 잘 쓰는 한국인이라는 불쾌한 이미지가 날로 퍼져가는데도 자성은
커녕 허장성세를 부리는 한국인에게 순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베리아 반도의 야고보 길 일변도의 이 경도현상을 치유할 처방은 과연 없는가.
고백컨대, 몰리나세카에서 나는 일본인이 부러웠다.
참담하게 붓어진 폰세바돈, 만하린 등 고원지대의 마을과 달리 몰리나세카에 들어선
새 주택단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현대인의 주거지 조건은 역시 원활한 교통망이 보장된 평지라는 것.
초원을 필수로 하는 유목민 시대의 잔재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유다.
폰페라다의 외곽마을 몰리나세카의 새 주택단지는 매력적이다.
한데, 이 신선한 단지 주민들은 단지 안의 양떼 우리에 대해 왜 시위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라면 저 양떼가 멀리 쫓겨날 때까지 연판장과 시위의 끈을 놓지 않을 텐데.
천금같은 시간을 앗아간 폰페라다
우리 땅 보다 일교차가 심할 뿐 비슷한 기온에 활짝 핀 도로변의 홍매화와 난초가 집
생각을 불러오는 아침나절.
사흘간의 비 이후 이틀째 달콤하리 만큼 신선한 공기로 배불리는 오전 길이다.
얼마간 완만하게 올랐다가 내려가는 6km 폰페라다 길은 고개마루에서 둘로 나뉜다.
소위 추천루트(principal)와 대체루트(alternativo)로.
LE-142도로를 따라가는 대체루트가 짧기는 하지만 멀긴 해도 도로를 버리고 캄포를
거쳐가는 추천루트가 정석일 것이다.
현대판 야고보의 길을 걷겠다면 포장 도로를 선택하겠지만 시골에서 시골로 이어진
옛 야고보의 길은 당연히 시골이라는 뜻을 가진 캄포를 거쳐 갔을 것이니까.
개를 데리고 맞은 편에서 올라오던 중년부부도 내게 그 길을 권하며 도스(dos/2)km
남았다고 친절을 베풀었다.(실은 3km이상 남았는데)
시골길이 다시 시작되자 마자 십자가다.
오늘은 불과 3시간 사이에 두명의 사망 순례자를 만나고 있다.
<순례자 P. JOSEPH CARTY, 1927년에 태어나 2005년에 성 야고보 길에서 사망>
과유불급이건만 78세의 노구에 무리했음이 분명하다.
잠시 엄숙해지며 내게도 해당되는 경고라는 생각에 기가 움츠러드는 듯 했다.
그래서 얼른 자리를 떴는데 이번에는 나치 갈고리 십자가의 모욕 현장이다.
표지를 둘러싼 낙서는 나치 꺼져버려(NAZI FUCK OFF).
아스토르가 이후 간간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은 과연 나치의 부활을 꿈꾸는가.
나라면 이처럼 천대받는 짓을 하지 않으련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나타났다.
포도원의 연둣빛 새 순들이 어느새 많이 자랐다.
캄포(Campo)는 한 때 폰페라다의 유대인 구역이었다는 마을이다.
새로 단장한 건물에서는 정교한 문장을 볼 수 있고 아직도 구실을 하고 있다는 로마
시대의 저수지(Fuente Romano)가 지근에 있는 마을이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큰 길가로 들어서 있는 새 주택의 특이한 담장들을 보게 된다.
문장 대신 담장 기둥마다 맹수를 비롯한 동물들과 조류의 조각상이 서있다.
토테미즘(totemism)인가 동물 애호마을인가?
벨을 눌러도 안에서 반응이 없는지 머쓱해진 나이든 여호와의 증인들과 마주쳤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은 날씨에 소풍나왔다고 생각하면 좀 편한 마음이 될까.
환영받기는 커녕 문전박대 일쑤인데도 가가호호 방문중인 그들 말이다.
나치 표지를 찍고 다니는 저들과 이 분들을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냉대와 비난에도
끈기를 발휘하는 점에서는 난형난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갈고리 십자가와 여호와의 증인들을 거의 동시에 만남으로서 이런 생각
하게 되었을 뿐 그들을 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땅끝까지 천국건설을 위하여 나름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그들의 신앙적 사명감과
2천년 전 땅끝(피스테라)까지 전도여행을 한 성 야고보의 사명감이 시각에 따라서는
동일시 될 수도 있으니까.
축구장 처럼 넓은 초지 공터가 캄포 마을 지자체의 모형항공기 경기장인가.
맑고도 바람 한 점 없는 오늘은 이 지역 동호인들의 대회가 있는 날은 듯.
속속 도착하는 차에서 모형항공기가 내리고 솟아오르는가 하면 추락도 하고 환성과
탄성도 나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맘에 들어 배낭을 내려놓았다.
공중에서 묘기 부리는 항공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바로 훌륭한 목운동일 줄이야.
간밤에 테이크 아웃(take out)한 보카디오를 점심으로 먹으며 즐긴 망중한이었다.
전적으로 대학인순례자 세요(stamp) 덕이다.
천금같은 시간을 앗아가고 있는 폰페라다인데도.
궁극적으로는 선(善)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어야 바른 신앙이겠지.
보에사 강(rio Boeza)의 육중한 돌다리(Puente Mascaron)를 건너 산 니콜라스 데
플뤼에(San Nicolas de Flue) 알베르게에 도착하기는 정오를 막 지난 시각.
카르멘 교회(Iglesia del Carmen)와 함께 있는 교구의 도나티보 숙박소다.
4인 1실(2층 침대 2개)로 180명을 수용하는 초대형 숙소지만 지붕있는 외부의 너른
휴식공간이 있어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대학방문 일정때문에 일찍 접지만 구애받지 않는 이들이 이 시간대에 마친다면
하루에 얼마를 걷는다는 것인가.
나보다 먼저 도착하여 입실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계 속>
사고로 숨진 자전거 순례자 하인리히 클라우세(독일)를 기리는 기념물(위)
리에고 데 암브로스(아래/비에르조 스타일이라는 나무 발코니가 있는 집)
레온산군의 마지막 협곡을 빠져나와 몰리나세카에 이르는 이 산길이야 말로 성 야고보 프랑스 길의 압권이다(위)
몰리나세카(아래)
(일본-스페인 우교기념탑)
(마을을 벗어나 있는 알베르게/위)
(우교관계의 효과인가 일본의 가라오게가 들어섰다/위)
새 주택단지 주민들은 왜 양떼를 몰아내지 않을까?/위)
폰페라다로 가는 LE-142도로 고갯길(위)에서 왼쪽 캄포 마을로 가는 길가에 78세 노인 카티옹이
2005년에 사망한 장소임을 알리는 십자가(아래1)
아래2는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 꺼져버려(Fuck off)
마을 입구의 포도밭(위)과 캄포 마을(아래)
(여호와의 증인과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위1.2)
모형항공기 대회장(?/위1.2)을 지나 보에사 강의 돌다리(위3)를 건너면 폰페라다
아래는 폰페라다의 산 니콜라스 데 풀뤼에 알베르게
첫댓글 힘든 순례중에도 사진과 기록을 보존함이여~
75일동안에 5천번 이상 셔터 버튼을 눌렀는데 소요된 시간을 합치면 적게 잡아도 약 42시간 정도.
하루 10시간, 30km을 걷는다 해도 나흘 이상, 최소한 120km를 손해봐야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