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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②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 당시의 남천정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 후에는 경기도 이천(통설과 같다.)
∙ 경기도 광주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合水)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다.
③ 6월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순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 덕물도는 덕적도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부속섬인 소야도는 소정방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통설과 같다.)
∙ 소정방을 만나러 간 법민은 당항성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통설은 당항성을 경기도 화성으로 본다. 여기서 통설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 소정방은 당나라와 신라군사를 합하여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 덕적도는 백제의 도성 남쪽과는 거리가 멀다. 남쪽으로 태안반도를 돌아 금강으로 올라가야 한다.
백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습전이 적당하며 13만의 대군을 모두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
㉢ 또한 신라군 본대 군영이 차려진 곳도 백제의 도성과도 멀면서도,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와는 가깝다.
혹시 고구려가 내려오면 어쩌란 말인가?
고구려가 5만의 군사가 버거웠다면, 김유신에게 5만의 군사를 내준 이후에는 무열왕 김춘추를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 통설이 주장하는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와 사비는 금강유역이다. 남천정은 한강유역이다.
신라군이 자리 잡은 자리는 군수물자 이동에 도움이 전혀 안된다.
◇ 견해
㉠ 가탐도리지에 의하면 당항성(가탐도리지의 당은포)은 덕물도의 동쪽이거나, 남쪽에 해당한다. 소정방이 신라군사와 합하여 싸우려 하지 않은 이유는 당항성이 백제 도성과 반대의 방향이고, 덕물도를 빼앗길 경우 자칫 패하였을 경우 차단당할 가능성이 있으며, 신라의 당항성에서는 백제군에게 포위될 경우 식량의 공급로가 끊겨 굶어죽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당항성에 1만의 군사가 1년을 먹을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면, 당나라 군사 13만이 한달을 버틸 수 없는 식량에 불과하다.
만약 당나라군에게 식량은 충분히 확보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음용수는 따로 준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전시 국민 1인당 소비하는 생활용수의 양은 1일 25ℓ다. 그렇다면 당나라군이 하루에 소비하는 물의 양은 325만ℓ이고, 톤으로 환산하면 3,250톤이다.
음용수로 환산하더라도 1인 4ℓ인데 당나라군이 소비량은 1일 520톤이고, 20일을 지내려면 10,400톤이 필요하다. 한여름에 섬에서 20일 동안 안 씻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지는 님들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라의 당항성은 당진으로, 백제의 사비와 웅진은 황해도 옹진반도에 있었다고 본다.
즉,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개이빨처럼 물려져 있었다고 본다.
㉡ 통설에 의하면 덕적도는 백제의 도성 북쪽에 해당한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백제의 도성 남쪽에 해당한다.
소정방이 덕적도에서 북진하여 백제의 도성 남쪽으로 가려함이 자연스러우며, 신라에서도 본진의 위치에서 한강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면 소정방이 덕적도에서 북진하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이 백제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는 아니었을까?
㉢ 통설에 의하면 신라군 본대가 주둔한 곳은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와는 가깝다.
의자왕의 기사를 보면 백제가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의자왕의 신하들 중에는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신하도 없다.
백제가 고구려를 믿지 못해서라고?
백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고구려를 구원한다 하고 백제성을 점유하는 것이라면 통설에 의하면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에 의해 국경이 접하여 있지 않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아니면 고구려에 내분이 있어서라고?
연개소문이 죽은 시점이 언제인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동맹국이 망하기 직전이라면 일단 화해를 하고 동맹국을 돕는 것이 우선이다.
고구려군대가 병사를 잃지 않고 허장성세만 해줘도 신라군에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신라군과 당군의 연합계획에 차질을 주게 되더라도 충분한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5만의 군사가 버거웠다면, 김유신에게 5만의 군사를 내준 이후에는 무열왕 김춘추를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 남천정은 한강유역이다. 남천정을 본거지로 삼은 것은 신라군이 병사와 군수물자 이동에 편리함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군이 자리한 남천정의 위치를 보아서는 한강의 수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산강은 한강으로, 황산벌을 한강 하류 유역의 벌판으로, 파사이사금시기에 가야와 다투었던 황산 또한 한강의 유역으로, 경기도 여주의 파사성을 신라 파사이사금 때 축조한 것으로 본다.
④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지원(황산벌)로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 소정방과 약속한 기한을 하루 남겨두고 황산벌에 도착한 것이다. 통설에 의하면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이고, 탄현은 대전광역시 대덕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신라군이 이미 탄현을 넘어왔다고 기록하였는데, 백제본기 동성왕기에는 신라에 대비하여 탄현에 성(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탄현은 백제의 국경지역에 위치하는 성(城)인 것이다.
백제본기의 기록에 의문시되는 점은 적군이 멀리 있으면 벌판에서 싸우다가, 전황이 불리하거나 이미 적군이 가까워지면 성에 들어가 수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술인데 의자왕의 계책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황산이라는 지명은 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 적이 없고, 가야의 영토로만 보인다는 점이다.
◇ 참고 기사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 견해
좌평 흥수(興首)의 견해에 의하면 신라군을 막아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호응하게 못하게 하면 신라군이 없는 당나라군은 군량이 다하여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탄현(炭峴)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지 않은 연유는 무엇일까?
당시 신라가 이미 탄현을 넘어서 황산벌에 이른 것일까?
너른 벌판에서 싸우는 일은 숫자가 적은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자왕은 쓸데없이 병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황산벌에서 일차로 저지하고 탄현으로 들어가 이차로 저지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라나 황산벌에서 피해가 너무 커서 병력의 대부분이 탄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탄현이 뚫림으로 인하여 신라군과 당나라 군대가 호응하게 된 것이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먼저 패하고, 2차로 당나라군에게 패하였는데, 백제의 도성 남쪽에 먼저 도착한 쪽은 당나라 군대였다. 아마도 신라군은 탄현에서 백제에게 2차로 저지당하지 않았을까?
⑤ 7월 며칠인지 알 수 없다. 정황상 10일의 기사로 보인다. 소정방이 지켜야 하는 약속의 기한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날 정방이 부총관 김 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 당나라군사가 13만명이 선박으로 이동하여 왔다는 의미는 100명씩 선박에 승선한다고 가정하였을 경우 1,300천의 배가 이동해 왔다는 의미다.
현재 금강입구에 1,300천의 배가 들어올 수 있을까?
100명이 승선할 수 있는 선박의 규모를 50톤 이상으로 가정하였을 경우 길이 20m이상(조선의 판옥선23m), 너비 6m 이상으로, 좌우로 붙여 정박하고자 한다면 7.8km이상의 해안이 필요하고, 앞뒤로 이어져 강을 거슬러 왔을 때 경우 26km정도가 이어진다.
⑥ 기록이 없으나 정황상 11일의 기사로 보인다.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 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군할 것을 애걸하였다.
∙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황산벌 전쟁에 먼저 패하고, 당나라군과의 기벌포 전쟁이 늦게 패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거리상으로는 황산벌이 더 가깝다. 당나라군은 조수가 맞지 아니하면 금강을 거슬러 오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다.
⑦ 7월 12일 당과 신라 군사가 (원문 3자 결자)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로 진격하였다. 정방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진격하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달래어 신라와 당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방향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를 받지 않았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방은 이를 뿌리쳤다.
⑧ 7월 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⑨ 7월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하였다.
⑩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의자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참수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가서 대야성의 금일과 공모하여 신라의 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므로 참수한 것이다. 또한 금일을 잡아 죄를 일일이 따져가며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백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이 첫번 째 죄이다. 네가 품석의 부처를 협박하여 죽였으니, 이것이 두번 째 죄이다. 네가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번 째 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지를 찟고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적병이 남잠, 정현(원문 3자 결자)성에 웅거하였다.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 산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의 대책을 공격했으나, 적병이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소책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진을 쳤다.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로부터 당 나라로 돌아갔다. 김 인문이 사찬 유 돈, 대내마 중지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