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 문학 운동가였다.
그는 아동을 어린이 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1922년 5월1일
처음으로 어린이날 을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를 위한 활동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그가 과로에 쓰러져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토록
어린이 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해외 망명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독립 투사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우리 민족의 미래 희망인 어린이를 보호하는 일에 스스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방정환응 우리 어린이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고마운 분으로서 그의 뜨거운
민족 의식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린이의 영원힌 친구 방정환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을 담뿍 안겨 준 방정환 선생이 전기를 읽고 나서
새삼 어린이날이 고맙게 느껴진다.
일제시대에 학대받고 짓눌렸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심어 준 방정환 선생은
지금의 서울 당주동 부근인 야주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얼마 후 집안이 기울어져
그후부터는 평생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불만이나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고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을 때엔 웃음이 나왔다.
그는 구수한 애기로 친구들을 웃기고 울리는 재주꾼 소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과 열 살 때 소년 입지회 라는 단테를 만들어 왜? 라는 궁금증을 풀어 나가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는 주변의 사소한 일로부터 우리 나라의 상황 문제까지 토론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소년 회원들의 가슴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틀 수 있었다.
큰 포부를 지닌 소년 문학가
그러나 가난은 선생님의 꿈을 산산이 부쉬놓았다.
어려운 집안을 헤져 나가기 위해서 방향이 전혀 다른 상업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가정 형편으로 2년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선 총독부의 토지 조사국에 취직하였다.
이 무렵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셋째 딸과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방정환 선생의 뜻은 더욱 확고해졌다.
뜻이 맞는 동지들과 색동회 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애국 소년들을 모아 청년 구락부를 만들고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 란 말을 만들어 썼다.
그리고 어린이 잡지를 만들어 어린이 존중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1922년에는 세계의 유명한 동화를 모은 사랑의 선물을 번역하여 내놓기도 하였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이날 을 정하신 분도 바로 방정환 선생이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어인들을 모아 재미있는 애기를 들려 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어
설날 같은 기분을 어린이들에게 안겨 주신 방정환 선생님
칼을 찬 일본 경찰들도 선생님이 구연 동화를 듣고 눈물을 흘렷다 하니
그 인품과 말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이 간다.
아 그런데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돌아 가시다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하신 선생님의 유언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눈을 감기 전까지 어린이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뒤를 부탁하신 선생님의 고마운 뜻을
우리는 어린이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방정환 선생님의 전기를 읽으며 정말로 많은 감동을 느꼈다.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이며 희망이라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몸바쳐 일한
선생님의 큰 뜻을 깊이 헤아리고 나도 이제 성숙한 어린이로 거듭날 것을 다짐해 본다.
그리고 이번 돌아오는 어린이날에는 이러한 다짐을 몸소 실천할 생각이다
곤궁하다~매우 가난하고 어렵다
개망초
사위질빵
백선 백선피 봉삼 봉황삼 이라고도 부름
꿀풀~꽃말 추억
꿀풀 하지초라고도 함
달개비~꽃말은 외로운 추억, 짧은 즐거움
쥐오줌풀~꽃말 허풍쟁이,정열
방울고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