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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옥 상무대
증언자 : 하용만(남)
생년월일 : 1947. 1. 20(당시 나이 33세)
직 업 : 건축업(현재 막노동)
조사일시 : 88. 12
개 요
하용만 씨는 1980년 당시 건축업자였는데, 5월 18일 일꾼들 월급을 주려고 현대극장과 한일은행 사거리에 있던 사무실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그 후 상무대로 연행되었다가, 5월 21일 석방되지만 구타당한 후유증으로 건강도 상실하고 사업도 망해 현재까지 어렵게 살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담양 고서마을에서 1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세 분을 낳은 후 아버님 연세 쉰셋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나를 낳은 지 채 50일도 지나지 않아 어머님께서 세상을 뜨셨고, 어린 핏덩이를 아버님께서 동냥젖으로 키우셨다고 한다.
시골에서 논 14마지, 밭 3마지기를 자작으로 지었으므로 생활은 그런대로 여유 있는 편이었다. 아버님께서 머슴 하나 두지 않고 손수 모든 일을 하셨기 때문에 다음해 가을까지 창고에 나락이 쌓여 있곤 했다. 아버님은 워낙 욕심이 많은 양반인지라 머슴 대신 딸 셋을 모두 데릴사위로 들여 살았다. 일찍 데릴사위로 데려와 일을 돕게 한 후 결혼할 때 한살림 차려주고, 또 둘째 사위를 데려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식들이나 넉넉하게 살도록 해주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아버님께서 학교는 못 다니게 하고 서당에만 다니도록 우기셨다. 학교는 신발 닳고 옷 닳고 돈도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한참 자유롭게 뛰어놀 어린 나이에 서당에서 무릎을 꿇려놓고 회초리로 가르치는 것이 무섭고, 한문 공부 자체가 너무나 어려워 배우기 힘들었다. '하늘천 따지'를 아무리 여러 번 외워도 뒤돌아서면 금방 잊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아버님은 한사코 서당엘 다니게 했고, 나는 학교에 다니려고 우기다가 결국 학교라는 곳은 문턱도 못 넘어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글은 뒤에 자연스럽게 익혔다. 우리 마을에서는 아버님 성질이 워낙 급하고 엄해 '하호랭이, 하호랭이' 하며 무서워했다. 어머님도 안 계신 데다 엄한 아버님의 성격 때문에 어린 나는 잔뜩 주눅만 들어 살았다. 그러다가 열여섯 되던 1962년해에 나는 그만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집 나온 후에는 분가해서 살고 있는 곡성의 둘째 누나 집에서 면사무소 급사 일을 보며 지냈다. 집에는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나를 결혼시킬 작정으로 집에서 함께 살던 셋째 누나와 매형에게 자꾸 "용만이 찾아오라"며 재촉을 하신 모양이다. 나를 집에 붙잡아둘 겸 자부도 보고 손자도 보겠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같은 분이라 거역을 못 하고 자꾸 미루고만 있던 차에 셋째 누나가 작은누나 집을 들렀다가 나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님이 위독하시다. 자꾸 너를 찾으시니 함께 가자. 아들 하나 있는 것이 이럴 때 곁에 없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거짓말인 줄 안다. 나를 잡아두려는 것이니 나는 여기에 있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누나가 어찌나 간곡히 부탁하던지 집에 잠깐 다니러 갔다가 아버님에게 덜컥 붙잡히고 말았다.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아무리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당신 뜻만 고집하시며 옷이랑 신발까지 다 감춰버렸다. 외출도 않고 나만 지키고 계시는 아버님과 함께 방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열일곱이었다. 생각에도 없는 억지 결혼을 하고 보니 색시한테도 영 맘이 가지 않아 결혼 3일 만에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그때부터는 또 붙들릴까봐 친척집에도 가지 않고 광주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아다녔다. 노가대도 하고 공업사에도 들어가 한 달쯤 일하다가 맘 내키면 또 자리를 옮기는 식이었다.
필요하면 용돈은 누나들에게 타서 쓸 수 있었고 또 집도 여유가 있었으므로 돈버는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편히 근 10년을 그렇게 떠돌며 생활했다. 생각나면 가끔 주소는 밝히지 않고 집에 편지를 보냈다. 아버님의 건강과 집안사정 등을 묻는 안부편지였다. 그런데 객지생활이라는 것이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명절 때 모두들 고향 찾아 선물들고 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쓸쓸해져 집 생각이 더 간절하곤 했다. 그러다가 한두 번 집을 다니러 가면 며칠씩 지내다 오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하나둘 생겼다. 집에 갈 때마다 아버님은 또 붙잡았지만 나는 여지없이 몰래 도망쳐 다시 떠돌이 생활을 했다.
광주에서의 생활
스물다섯 살 때에는 광주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공업사에서 일했다. 일년 가까이 경험을 쌓은 후 주인이 공장을 정리한다기에 사업을 해보고 싶어 그것을 인수했다. 늙은 아버지와 가족들도 시골의 농사를 모두 처분하고 광주로 이사오도록 했다.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철물점, 양품점지기, 아궁이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처음에는 운영이 잘되다가 고물상에서 장애물이 생겨 망해 버렸다. 장애물이란 고물상에 도둑 물건이 들어오는 경우 가 자주 있는데 도둑 물건인 줄 모르고 싸게 샀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그것이 장물죄로 된다. 처외숙이 서광주경찰서에 계셨으므로 장애물이 두번째까지는 잘 처리되었는데 그분이 목포로 옮겨가는 바람에 처리가 안 되어 걸린 것이었다. 원칙으로 하자면 쇠고랑을 차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공업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때 돈으로 6백70만 원을 날려버린 셈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또 떠돌아다니다가 집에서 한 3년 쉬었다. 시골의 친척들이 조금씩 보내주는 양식으로 사글세를 전전하며 살았다. 사업이 잘될 때는 그 많던 술친구들도 내가 그렇게 전락하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날려버린 돈만 눈에 선해 아무것도 하기 싫어 놀고 지냈다. 그런데 애들은 점점 커가고 또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고 결심을 하고 노가대를 나가기 시작했다. 벌어먹기 제일 쉬운 것이 노가대여서 막노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아는 사람들 만날까봐 창피해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일당 1천3백 원, 1천 4백원 받아 사는데 온 가족이 그 돈만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었다. 미장일을 배우고 싶었으나 가르쳐주질 않아 40여 일 일한 돈을 미장들에게 불고기집이며 어디며 데리고 다니면서 돈을 써주고야 미장일을 배울 수 있었다. 미장일을 배운 후 바로 오야(총감독)를 했다. 오야를 하자 돈이 좀 벌었다. 일꾼들만 잘 잡아 성실하게 일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아 용기가 생겼다. 돈을 좀 모아 전세도 얻고 2층 독채도 얻어 생활이 점차로 나아질 무렵에 1980년 5·18을 만난 것이다.
부 상
1980년 5월에는 충장로 5가에서 상가짓는 일을 마무리하고 금남로 4가에서 송월여관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일꾼이 48명이나 되었으므로 17일 새벽까지 일꾼들 급료 봉투를 만들었다. 18일 성산개발에서 돈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충장로 5가의 상가공사가 성산개발 일이었다. 바빠서 조금 후에 가겠다고 했으나 오후 2시쯤 다시 사람을 보냈기에 3시쯤 출발했다. 성산개발은 현대극장과 한일은행 사이 사거리에 있는 삼층 건물이었다. 가는 도중 시민과 학생들이 이러저리 쫓기는 것을 보았으나 우리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태연히 걸어왔다. 그때는 건축일이 바빠서 시내에서 난리가 났다는 말들을 들었을 때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성산개발에서 밖을 내다보니 공수대원이 학생 3명을 팬티만 입힌 채 오리걸음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사열이 나고 사지가 벌벌 떨릴 만큼 무서웠다. 모두들 난리가 났다며 걱정했다. 그런데 마침 사장이 도청 쪽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시위현장에 갇혀 지금 오기 힘드니 5시까지 기다려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그때 시각이 3시 30분 정도였으므로 5시까지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함바로 가서 술이나 한잔씩 하자며 다른 업자들 과 함께 나섰다.
내가 선두에 서서 건물을 나와보니 게엄군들이 현대극장, 누문동 파출소, 한일은행, 충장로 파출소 쪽에서 일시에 몰려오고 있었다. 사무실로 다시 올라가려고 뒤돌아서 봤더니 이미 셔터가 내려진 후였다. 순식간에 70명 정도의 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마침 근처 5층 건물의 비상구가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들 그 건물로 뛰어올라가는데 내가 뒤쪽에 있었던지 곤봉으로 발뒤꿈치를 맞았다. 그러나 신발이 벗어지는지 옷이 벗어지는지 아랑곳않고 앞사람만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까지 계엄군이 쫓아오지 않는 걸 보면 시민들이 모두 올라오고 난 후 셔터를 내린 것 같다. 마침 옥상의 난간이 비스듬하게 생겨서 시민들이 모두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헬기가 오더니 "폭도들이 무슨 건물 옥상에 많이 있는데 무엇들 하느냐"는 방송을 해댔다. 방송이 나기가 무섭게 자동차 소리가 나고 계엄군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총 끝에 대검을 꽂은 채 곤봉을 휘두르며 워커발로 짓이기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난간 안에서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가운데에 몰려 있고 계엄군은 빙 둘러서서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는 '여기 있다가는 맞아죽겠구나' 싶어 튀어나갔다. 내려가려고 보니 놈들이 벽에 기대고 서서 노리고 있었다. 안 되겠기에 다시 주저앉았는데 어떤 놈이 다가와 워커로 뒤통수를 차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너무나 겁을 먹고 있어서 몸이 아프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여기서 죽으나 내려가서 죽으나 매한가지다'는 생각이 들어 한 손으로는 계단의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벽 쪽에서 놈들이 후려쳤으므로) 뛰어내려갔다. 건물 입구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게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주저 앉아버렸는데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실신해 버렸다. 온몸을 수도 없이 맞았겠지만 악이 나 있어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일은행 앞 도로에 눕혀져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으니 7시가 넘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몸을 뒤집어보려고 갓난애처럼 이쪽저쪽으로 뒤척여봤지만 온몸이 퉁퉁 부어 있어서 옴짝달싹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몸을 뒤집어 고개를 쳐들자 머리를 후려쳤다. 나이가 꽤 든 소대장이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학생도 아닌데 이젠 보내주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지난 뒤 해가 지고 캄캄해지자 군용 트럭 몇 대가 와서 멈췄다.
모두 트럭에 태워졌다. 부상이 심해 못 올라가면 놈들이 둘이서 붙잡아 차에 던져버렸다. 차 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내가 탄 트럭은 바닥에 인조석이 깔려 있었다. 5월이라 입고 있는 옷이 얇아 날카로운 인조석이 무릎과 이마에 박혔다. 놈들은 우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양쪽에서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차를 타고 30분 가량 달린 후 도착한 곳은 광주경찰서였다. 한일은행에서 광주경찰서까지는 기껏해야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시위군중을 피하느라 그랬는지 30분은 족히 차를 타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보호실이 없어 경찰들 자전거 두는 곳에 수용되었다.
새벽 2시 30분쯤 전경버스를 경찰서 앞에 댔다. 그러고는 우리들을 10명씩 한 조로 만들어 조기 엮듯 엮었다. 앞사람의 혁띠를 잡고 고개를 엉덩이에 처박는 식이었다. 차에 실렸을 때에도 역시 2인승 의자에 세 명이 좁혀 앉아 고개를 시트 밑으로 처박고 있었다. 양쪽 의자에 세명씩 해서 여섯 명이 앉고 복도에 네 명이 겹쳐 앉으면 의자 한 칸마다 10명씩 엮어진 한 조가 앉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창쪽에 앉아 있었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 슬쩍 밖을 내다보니 계림육교가 보였다. '31사단으로 가나보다' 생각했더니 아니나다를까 31사단에 도착했다.
31사단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왔기 때문인지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3시 30분쯤 되자 상무대 계엄사로 다시 끌고 갔다.
인간 지옥 상무대
상무대 연병장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왔다. 상무대에도 보호실이 없어서 우리를 연병장에 세워둔 채 커다란 막사를 순식간에 짓고 우리를 그 안에 수용하였다. 광주경찰서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전등불이 대낮처럼 밝게 비치고, 문이라고는 출입문 하나밖에 없는 곳이었다.
우리를 세 명의 조사관이 일렬횡대로 세워놓고는 소지품을 모두 꺼내라고 했다. 나는 현금을 얼마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소지품과 함께 돈도 꺼내놨다. 그러자 "이 새끼야! 누가 돈까지 내놓으라고 했어!!" 하며 워커 신은 발로 걷어찼다. 혼자서 일어서지 못하고 꾸물거리자 제 놈들이 세워주더니 악을 썼다.
"돈 집어넣어, 이 새끼야!"
"소지품 내놓으라니까 내놓은 것 아니오."
"이 새끼가 어디서 이유를 달아"
하면서 조인트를 먹였다. 소지품 조사를 끝낸 후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뒷짐 지고 무릎 꿇고 머리는 처박은 상태로 계속 있어야 했다. 사람 몸이 뜨겁다는 것을 그때 정말 절실히 느꼈다. 앞쪽은 그래도 머리가 있으니 괜찮지만 양옆과 뒤에서 서로 몸이 닿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열이 전해져 왔다. 공기 구멍 하나 없이 찜통 같은 막사에 맞아서 열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붙여놨으니...
그곳에 수용된 후부터는 시간관념이 없어져버렸다. 화장실 갈 때에나 물이 필요할 때는 손을 들어 의사표시를 했다. 그 외에는 고개조차 쳐들 수가 없어서 3일간이나 수용되어 있었지만 함께 갇힌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손을 들고 용무를 말하면 물은 놈들이 컵에 따라다 손에 쥐어주면 고개 숙인 채 받아 마셔야 하고 화장실엔 안대를 하고 끌려가 일을 봐야 했다. 화장실에서는 좌로 몇 발, 우로 몇 발, 원위치 하고 말해주는 대로 움직여 일을 보는데 이때 3분의 시간을 초과하면 요령 피운다고 수 없이 두들겨맞았다. 용변도 시간에 맞춰서 보고, 보고 난 후에는 신호를 보내 되돌아왔다. 그때 내 옆에 쉰여 섯 살 된 노인이 있었는데, 시내에서 팔이 부러져 사과궤짝으로 시민들이 응급치료만 해준 상태로 잡혀왔다고 했다. 그분은 열과 통증을 못 이겨 실신해서 밖으로 데려갔는데 치료나 제대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19일 오후부터 한 명씩 불러내어 집에 편지를 쓰도록 했다. 친구집에 갇혀 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내용으로 집주소를 정확히 기재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이나 사상자를 색출하기 위한 신원조회였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내가 그곳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느냐고 확인해 봤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그날 밤부터 사람들을 몇 명씩 빼내가는 일이 생겼다. 발소리가 들린 다음 부스럭거리고, 그런 다음에는 자리가 점차로 넓어졌다. 내 옆에서도 한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심장이 방망이질 하듯 뛰고 머리 끝이 쭈삣쭈삣 섰다. 만약 그때 불려나가 그들이 위협하면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식사도 못 하고 땀도 많이 흘렸지만, 더욱이 온몸의 진이 다 빠져 머리카락이 엉겨붙을 정도였다. 하나둘 사람을 빼내간 후 틈이 생기면 대열 정비를 다시 하고 또 다그치곤 했다.
21일 오후 3시 우리를 연병장에 모아놓고 "전남 광주를 위해서 데모하지 말라"는 강연을 하고 시인서를 쓰게 한 후 석방시켰다. 몇백 명을 기갑학교 후문에다 풀어놨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해서 집에 오는데 차도 택시도 없어서 한 오십 번은 쉬어서 온 것 같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새까맣게 열을 지어 도로를 따라오는데 무등경기장 부근에 오니 가정집 앞에 물동이들이 놓여 있었다. 물을 한바가지나 뒤집어썼다.
어렵게 걸어서 집 근처에 도착하자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에 와보니 방안 마당까지 친지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식구들은 내가 죽어버린 줄 알고 도청으로, 상무관으로, 광주역 부근으로 시체만 찾아다녔다고 한다.
치 료
3일이 지난 후 정신 차리고 일꾼들 간주(월급 계산)를 해줬다. 그러면 일꾼들은 만 원, 오천 원, 닭 세 마리, 지네 등을 약 하라고 갖다주곤 했다. 기침이 쉬지 않고 나오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특히 심했으며 온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이튿날부터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남에게 업히다시피 기대어 서방의 '임종오외과'에 다녔다. 나이먹은 사람이 속없이 데모하다 다쳤다고 생각할까 봐 건축현장에서 다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15일이 지나도록 낫지를 않자 나중에는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어느 날 친구가 사주(뱀술)가 좋다며 구해다 주었다. 친구가 아는 분의 장모께서 몸보신 하라고 준 3년 묵은 것이었다. 잠자기 전 취하도록 마시라기에 국그릇으로 하나 가득 따라 마셨다. 아침까지도 취기가 남아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번을 먹고 나자 부기가 빠지고 기침이 좀 가라앉았다.
3일째 되는 날엔 부기도 다 빠지고 기침도 완전히 멎었다. 손등을 잡아보면 거죽이 잡힐 정도까지 야위어 있었다. 그 후로도 병문안 오신 분들께 사주를 구해 달라고 부탁해 두병을 더 먹었다. 몸이 좀 나아지자 처음 사주를 주신 분께 술을 사며 사례를 했다. 지금도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그 전에는 약국이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별의별 약을 다 먹어보았다. 몸에 좋다기에 똥물도 받아먹고 개똥도 삶아먹고 지네도 먹었지만, 지금도 어혈이 안 풀렸다. 날이 궂으면 옴몸이, 특히 어깨의 통증이 심하며 2, 3일 간이나 심한 피로를 느껴 전혀 활동을 못 한다. 잠잘 때도 오른쪽 어깨가 심히 아파 구부리고 잘 정도이다. 그리고 전에는 전화번호를 3백개 정도까지 외고 다닐 만큼 기억력이 좋았지만 지금은 건망증이 들어 잘 잊는다. 또한 우산도 들고 나가기만 하면 잊고 오기 일쑤다.
1980년 후
5월 18일 연행되어 나흘 만에 석방은 되었지만 그 후 일처리를 전혀 못 하는 바람에 성산개발에서 1백80만 원, 송월여관에서 1백50만 원을 못 받고 날려버렸다. 그 후 약 2년을 놀다가 곡성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도 4백만 원 정도를 손해보고, 1984년에도 1천6백만 원을 손해봤다. 업주들이 자기들 돈은 다 챙겨넣고 인건비 안 주려고 일부러 부도를 내버리는 것이다. 내가 '두환이 정권'을 더럽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일이 없어 곤란했지만 지금은 일을 해도 불량한 업주들이 부도를 내버린다. 그리고 부도가 나더라도 인건비는 처리를 해주도록 정부에서 조처를 취해 줘야 하는데, 노동부가 있어도 소용이 없으니 서민들만 더 피해보는 사회가 돼버렸다.
지금은 자본도 없고 시작해 봐야 돈만 꼬나박는 식이 되어 큰 공사는 하지 못 한다. 작은 일들만 찾아다니며 조금씩 도와주는 정도로 하다 보니 거의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가 막노동판에 나가면서 생활을 꾸려간다. 큰애만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둘째, 셋째는 중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만큼 형편이 궁색해져 버렸다. 밑의 아들 두 놈은 꼭 가르쳐야 될 텐데.
나는 처음엔 부상자 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다. 죽은 사람, 병신이 다 된 사람도 있는데 나 정도야 살아온 것만도 고맙고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자네 같은 사람이 신고를 해야 진상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 광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쳤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 아니냐?" 고 어찌나 질책을 해대든지 신고를 했다. '임종오외과'로 진단서를 떼러 갔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아 인우보증을 했다. 동네사람들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보증을 해주겠다며 협조해 주었다.
지금도 상무대에서의 일만 생각하면 그런 인간 지옥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살인자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안대를 채워 질질 끌고 다니고 조금만 행동이 느리거나 거슬리면 조인트 까고 또 곤봉으로 후려치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당시 폭도라며 더 심하게 취급했지만 선량한 시민과 학생이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겠는가!
(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