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정(聞巖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5호)은 임란 때 창녕 영산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문암(聞巖) 신초(辛礎,1549~1617)선생이 만년을 보내며
심은 배롱나무와 비각(경상남도기념물 제149호)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백일동안 피는 꽃이라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노거수들이 많이 있으나 심은 이가
분명한 것은 그리 흔치 않은데 이 곳은 수식자(手植者)가 분명한 나무이자
거목으로 자라 꽃이 필 때에는 장관을 이룬다.
문암 선생은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으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하는
영산 신씨(辛氏)다. 현감을 지낸 희수(希壽)의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1583년(선조 16)함경도지역에서 여진족의
우두머리인 이탕개(尼蕩介)가 경원 고을을 함락시키는 등 난을 일으켰다.
이때 이웃 고을 온성부사이든 신립이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 패퇴시켜 난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무과에 합격하여 김해부에 속한 천성도의 만호(萬戶)가 되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성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함락
되었으므로 합천으로 가서 박진영, 이숙 등과 의병을 모집해
망우당 곽재우 부대와 합류 했다.
이 때 공위겸이라는 자가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지역에 웅거하면서
스스로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망우당이 매우 언짢아했다.
그는 단신으로 그들의 진영에 잠입하여 그를 사로잡고 이어 벌어진
영산전투에서 공을 세워 현풍현감에 천거되어 무과 출신이면서도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화왕산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 부대에
다시 합류 조전장(助戰將)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난이 끝난 후
보성군수로 영전하였으며 선정을 펼쳐 청백비가 세워졌다.
1617년(광해군 9) 68세로 돌아가시자 나라에서 병조판서로 추증하였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 <문암집>이 있으며 도천서원에 제향 되었다.
[출처]의병장 신초의 문암정과 배롱나무| 작성자우리농원
여기 문암정에서 4키로쯤 화왕산(관룡사) 쪽으로 가면 창녕읍 옥천리인데,
옥천저수지 바로 뒤 고두방지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내 안태고향이다.
용선대-부처님 눈이 바라보는 곳 저기--!
2009년 대보름날 참사를 낳은 화왕산
화왕산 소나무와 억새
고암면 신기마을 당산나무